최해(崔瀣)는 자가 언명보(彦明父)이며 또 다른 자는 수옹(壽翁)으로, 계림(雞林) 사람이며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의 후손이다. 아버지 최백륜(崔伯倫)은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이 민부의랑(民部議郞)에 이르렀으며 원(元)에서 고려왕경유학교수(高麗王京儒學敎授)를 제수받았다.
최해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9살에 능히 시를 지었고, 장성하자 학문이 나날이 진보하여 선배들이 크게 탄복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학관(成均學官)으로 보임되었는데, 학유(學諭) 자리에 결원이 생기자 〈그 자리를 놓고〉 최해는 이수(李守)라는 자와 경쟁하게 되었다. 정승(政丞) 최유엄(崔有渰)이 이수에게 그 자리를 주려고 하자, 최백륜이 최유엄을 욕했는데, 말이 상당히 불손하여 최백륜은 고란도(孤蘭島)로 유배되었다. 최해는 예문춘추검열(藝文春秋檢閱)로 선발되었으나 어떤 일로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가 소환되어 예문춘추관주부(藝文春秋館注簿)를 제수받았다. 충숙왕(忠肅王) 8년(1321) 원에서 과거에 응시하여 제과(制科)에 급제하고 요양로개주판관(遼陽路盖州判官)에 제수되었다. 본국으로 돌아오자 예문관(藝文館), 성균관(成均館), 전교관(典校館)의 3관의 관리들이 영빈관(迎賓館)까지 나와 영접하였으며 예문응교(藝文應敎)로 자리를 옮겼다. 처음에 개주(盖州)에 부임하였을 때 〈그곳은〉 외딴 곳에다 직책은 번거로워서 5개월 만에 병을 핑계로 돌아왔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서 검교성균대사성(檢校成均大司成)에 이르렀다.
최해는 재주가 뛰어나고 뜻이 높아서 글을 읽거나 글을 지으면서 스승이나 친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초연히 스스로 습득하였다. 이단에 현혹되지 않았고 〈민간의〉 습속(習俗)에 빠지지 않았으며 옛 사람에 부합하려고 힘썼다. 〈학문의〉 같고 다름을 토론할 때에는 진실로 바른 것을 알면 비록 노성한 스승이거나 원숙한 유자(儒者)로서 당시에 으뜸이 되더라도 힐문하고 또 꺾어서 〈자신의 의견을〉 확실하게 견지하고 변하지 않았다. 연우(延祐, 1314~1320)년간에 과거가 부활되자 조칙(詔勅)을 듣고 말하기를, “가히 배운 바를 시험해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더니 얼마 있다가 과연 제과(制科)에 급제하였으며, 동년(同年)으로 장원급제한 송본(宋本)이 그 재주를 칭찬한 것이 여러 번 시에 나타났으므로 이때부터 최해의 이름이 더욱 유명해졌다.
〈최해는〉 자기와 뜻이 다른 사람을 더욱 좋아하지 않고 배척하였는데, 최해는 또한 다른 사람의 비위 맞추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함부로 행동하면서 서슴없이 말하였으므로 끝내 크게 쓰이지 못했지만 벗을 사귈 때는 반드시 곧은 사람을 사귀었으며 시를 짓고 술마시는 것으로 스스로 낙을 삼았다. 일찍이 동래현(東萊縣)을 지나다가 해운대(海雲臺)에 올라 합포만호(合浦萬戶) 장선(張瑄)이 소나무에 시를 새겨 둔 것을 보고 말하기를, “아! 이 나무는 무슨 액운을 만나 이런 나쁜 시를 새기게 되었는가?”라고 하고는 드디어 그 시를 지우고 흙으로 발라버렸다. 〈그리고 나서〉 안동(安東)에 도착하였는데 장선이 그 말을 듣고 노하여 사나운 장수 서너 명을 시켜 쫓아가게 하여 겸종(傔從) 1명을 잡아 돌아와서는 칼을 씌워 문 밖에 세워두었다. 최해는 몰래 죽령(竹嶺)을 넘어 개경으로 돌아왔으므로 크게 유림(儒林)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는데, 자신의 재주를 믿고 세상에 오만한 것이 이와 같았다.
최해는 평생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으며 스스로를 졸옹(拙翁)이라고 불렀다. 뒤에 도성의 남쪽 사자산(獅子山) 아래에 살면서 스스로 「예산은자전(猊山隱者傳)」을 지어 말하기를, “은자(隱者)의 이름은 하계(夏屆), 혹은 하체(下逮)라고도 하였으며 창괴(蒼槐)는 그 성씨인데, 대대로 용백국(龍伯國) 사람이다. 본래는 복성(覆姓)이 아니었는데 은자 때에 이르러 동이(東夷)의 발음이 느리므로 그 이름을 합하여 바꾼 것이다. 은자는 어렸을 때에 이미 천리(天理)를 아는 듯했으며 공부를 배우기 시작해서는 한 구석에 머물지 않고 겨우 대의(大義)만 알면 곧 돌아와 버려서 마침내 학업을 마치지 않았으니, 〈그의 학문은〉 넓기는 하지만 깊이 연구한 것은 아니었다. 조금 장성해서는 세상을 개탄하는 듯 공명(功名)에 뜻을 두었으나 세상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는 그의 성품이 다른 사람의 비위 맞추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고 또 술을 좋아해서 몇 잔 마신 뒤에는 다른 사람의 좋고 그른 것에 대하여 즐겨 말하였으며 귀로 들은 것을 입 안에 감추어두지 못하기 때문이었으므로,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거나 중요하게 대접받지 못하고 문득 천거를 받으면 배척을 받고 떠나버렸다. 비록 친구들이 애석하게 생각하여 그의 성품을 고치고자 하여 때로 타이르기도 하고 때로는 책망도 하였지만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중년에는 제법 스스로 뉘우쳤지만 사람들은 이미 그를 세상에 적합지 않는 사람으로 대하였으므로 은둔하는 것[牢籠]은 가하나 쓰이지는 못하였으며, 은자도 역시 다시는 속세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가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왕래했던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며 어울리지 않은 자들이 많았으므로, 많은 사람을 얻기는 진실로 어려울 따름이다. 이것은 나의 단점이지만 또한 그것이 장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만년에 사자갑(獅子岬)에 있는 절의 승려에게서 밭을 빌려 농사를 지으면서 원포(園圃)를 만들어서 취족원(取足園)이라고 하였으며 스스로 예산농은(猊山農隱)이라고 불렀는데, 좌우명을 쓰기를, ‘너의 밭과 너의 농원은 삼보(三寶)의 두터운 은혜로다. 자족한 생활이 어디에서 왔는가? 삼가 잊지 말 것이로다.’ 라고 하였다. 은자는 평소 불교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결국 절의 전호(佃戶)가 되어 버렸으니, 대저 어려서 품은 뜻이 어그러진 것을 자책하며 스스로 희롱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충혜왕 후원년(1340)에 죽으니, 나이는 54살이었다.
〈최해는〉 일찍이 본국 명현들의 시문(詩文)을 뽑아서 제목을 『동인지문(東人之文)』이라고 붙였는데 모두 25권으로 그가 지은 『졸고(拙藁)』2권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아들은 없으며 집도 매우 가난해서 장례를 치를 돈이 없었으므로 친구들이 부의(賻儀)하여 겨우 장례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