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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맹부(趙孟頫.1254∼1322)
중국 원(元) 나라 화가ㆍ서예가. 호는 자앙(子昻). 호 집현(集賢)ㆍ송설도인(松雪道人).
송(宋)이 멸망한 뒤 집에 돌아가 있었는데, 원(元)에 벼슬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다.
그림도 잘 그렸으며, 시는 청일(淸逸)한 정취(情趣)가 있었다.
중국 원(元) 나라 화가ㆍ서예가. 호는 자앙(子昻). 호 집현(集賢)ㆍ송설도인(松雪道人). 시호 문민(文敏). 저장성(浙江省) 우싱현(吳興縣) 출생. 송(宋)나라 종실 출신이며, 원(元: 1206~1368) 나라 세조(世祖)에 발탁된 뒤 역대 황제를 섬겼고, 벼슬은 한림학사승지ㆍ영록대부(榮祿大夫)에 이르렀다. 죽은 뒤에 위국공(魏國公)에 추봉되었다. 송나라 태조의 후손이면서도 원나라를 섬겨 영달하였으므로, 후세에 명분상의 비난을 면하지 못하였지만, 문인화 초기의 대가로 존경을 받아왔다. 문인화파는 자연의 현실감 있는 묘사보다 개인적인 표현을 추구했던 화파이다. 그는 송(宋: 960~1279)나라의 종실(宗室) 출신이었으나 1286년 새로 들어선 몽골족의 조정에 출사했다.
그의 그림들은 송나라와 그 화원(畵院)의 붕괴 후 옛 거장들의 주제와 양식에서 끌어낸 다양성과 관심으로 그려진 그림들 가운데 초기 작품 예에 속한다. 그는 일반적으로 당(唐: 618~907)나라의 대가 한간(韓幹)의 양식으로 말을 그렸던 화가로 기억되는데, 그밖에 다른 동물들, 산수화·대나무 등도 그렸다. 그의 주제에는 의도적으로 단순화된 색채 및 구성, 도식적이며 유치하기까지 한 형태와 규모의 변형을 통해 피상적인 미를 전반적으로 제거시킨 것이 드러나 있다. 또한 고풍적인 것과 다양한 운필의 전개를 보여준다.
그의 아내인 관도승(菅道昇)과 아들 조옹(趙雍: 1289~?) 역시 유명한 화가이나 일부 장르에 국한되었다. 그림은 오진(吳鎭)ㆍ황공망(黃公望)ㆍ왕몽(王蒙)과 더불어 원대의 4대가로 손꼽힌다.
【그림】<중강첩장도(重江疊饅圖)> <사마도권(飼馬圖卷)>
【글씨】<여중봉명본척독(與中峰明本尺牘)>
【문집】<송설재집(宋雪齋集)>
요녕(遼寧)박물관:원대 큰 서도가 조맹부(趙孟頫)해서 <심경·心經>
遼寧省博物館:中國元代大書法家 趙孟頫書《心經》冊頁裝
페이지 규격: 28.8 × 10.8 cm
조맹부(趙孟頫)의 친필(親筆):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
赵孟頫(1254—1322년), 원대의 저명한 화가 字子昂,호 송설도인
(號 松雪道人)、수정궁도인(水精宮道人), 절강성 호주인.
중국 해서(楷書)의 구양순(歐陽詢, 안진경(顔眞卿), 류공권(柳公權),
조맹부(趙孟頫) , 사대가(四大家) 중의 하나입니다
赵孟頫는 박학식광(博學識廣), 재기가 남보다 뛰어나고, 명성이 천하에
널리 알려지다. 그는 음악,문장,시가(詩歌),회화,서도, 전각,불교등
전부 정통합니다, 1위의 소질이 뛰어나고, 다예다재의 사람이다.。
그의 詩와 書道,繪畵, 후대의 사람은 “詩, 書, 그림”의
삼절(三絶)라고 칭했습니다.
趙孟頫(1254—1322),元代著名畫家,字子昂,號松雪道人、水精宮道人,
湖州(今浙江吳興)人。楷书四大家(欧阳询、颜真卿、柳公权、赵孟頫)之一。
趙孟頫博學廣識,才氣橫溢,名滿四海。他精通音樂,擅作文章,諳詩歌,
開畫風,工書法,嗜篆刻,通佛意,是一位天資超群、多才多藝的人,
他的詩連同書法、繪畫,被後人譽為“詩、書、畫”三絕。
조맹부(趙孟頫)와 송설체(松雪體)
“첫째, 제왕의 핏줄이다. 둘째, 풍모가 뛰어나다. 셋째, 박학다식하다. 넷째, 언행이 바르고 깨끗하다. 다섯째, 글솜씨가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다. 여섯째, 서예와 그림 실력이 절륜하다. 일곱째, 불교와 도교의 심오한 뜻을 깨치고 있다.” 조맹부를 무척 아꼈던 원나라 황제 인종이 조맹부의 뛰어난 점을 열거한 내용이다. 이 정도면 당대의 가장 돋보이는 존재였다고 보아도 좋으리라.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여기에는 보통 선비의 장점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유교)경전에 정통해 있다”, “바른 것과 그른 것을 가리는 데 추호도 거리낌이 없다”라는 말은 없다. 그것은 조맹부가 당나라도, 송나라도, 조선도 아닌 원나라의 선비였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선비 문화의 암흑기
1260년, 조부 칭기즈칸의 시대에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북중국을 손에 넣었던 몽골제국의 제5대 대칸이 된 쿠빌라이는 1271년에 국호를 ‘원(元)’이라 하여 금나라와 같은 중국 정복왕조의 황제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8년 뒤에는 남송을 멸망시켜, 전 중국을 지배하에 두었다. 이것은 북송과 남송대에 화려하게 꽃핀 중국 선비 문화의 암흑기를 뜻했다. 원왕조는 ‘분서갱유’와 같은 일을 벌이지는 않았으나, 유교를 국교로 인정하지 않았고 과거제도 실시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선비는 관리에서 거지에 이르는 10개 등급 중에서 제9등급으로 거지보다 조금 나은 대우를 받았으며, 남송인은 가장 늦게 대원제국에 들어왔다는 이유로 몽골인, 색목인, 한인(북중국인)에 이어 ‘남인(南人)’으로 가장 천하게 취급되었다.
이런 체제에서 선비가 관료가 되려면 왕조가 비정규적으로 특채하는 데 응해 기술관료로 종사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선비의 절개를 굽히고 나라를 멸망시킨 오랑캐를 섬기는 것이라 하여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사초는 끝까지 원왕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은거하면서 문인화의 전통을 발전시킨 사람으로 유명한데, 뿌리가 보이지 않는 난초를 즐겨 그렸다. 그 까닭은 “오랑캐가 차지한 땅에 뿌리내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또 앉거나 누울 때 원왕조의 도성이 있는 북쪽으로 절대 머리를 두지 않는 등, 소극적인 방법으로 저항정신을 이어간 선비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들과 달리 한간(漢奸)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원왕조에 봉직한 선비들도 있었는데, 조맹부는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다.
‘천명’을 찾아 ‘한간’의 길로 가다
조맹부는 송왕조 황실의 피를 이었다. 송태조 조광윤의 넷째아들 조덕방의 계통이며, 조광윤에게서는 12대손이 된다. 남송 효종이 형인 조백규, 즉 조맹부의 고조할아버지에게 호주(湖州)를 하사하여 이후 대대로 호주(오흥)에서 살아왔다. 조맹부는 다섯 살 때 글공부를 시작했으며, 이후 수십 년 동안 새벽에 일어나 몸을 씻은 다음 글씨를 쓰면서 마음을 수련하는 공부법을 하루도 빼놓지 않았다고 한다. 열한 살 때 아버지 조여은을 잃고, “고아는 어쩔 수 없다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으려면 열심히 공부하거라”는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이를 악물고 학업을 쌓았다. 그리하여 열네 살 때 처음 관계에 입문하여 송나라의 내일을 짊어질 인재의 길을 순탄히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내일은 끝내 오지 않았다. 26세가 되던 1279년에 남송이 멸망하고 원나라의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많은 선비들과 마찬가지로 조맹부도 시골에 은둔했으며, 시문과 서화를 벗 삼고 책을 읽으며 덧없는 세월을 달랬다. 그러나 1286년, “재주가 있는 남송의 선비들을 특채한다”는 원왕조의 부름에 약 20명 정도가 응했는데 조맹부도 그중에 끼었으며, 명성으로는 단연 다른 선비들보다 앞섰다. 정사초 같은 경우 송왕조의 조(趙)씨 성 중의 일부를 써서 ‘사초(思肖)’라는 이름을 지을 만큼 송왕조에 길이 충성하는 뜻을 보였는데, 정작 조씨 성을 가진 조맹부가 원나라의 녹을 먹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당연히 비난이 빗발쳤고, 그 비난은 그가 죽고 난 뒤에도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조맹부는 동진 시대 사람으로 “더러운 세상을 피해 은둔한다”는 뜻을 밝힌 [귀거래사]로 유명한 도잠을 [귀거래도]로 그리고, 그림에 이렇게 적음으로써 세상의 비난에 담담하게 대답했다.
“세상에 태어날 때 각자의 때를 갖게 되니 / 벼슬하거나 은거하거나 각자 천명이 있다.”
조맹부는 절개를 꺾는다는 오명을 무릅쓰고라도 원왕조에 벼슬하는 것이 자신의 천명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것은 나라는 망했으나 선비들이 돌보아야 할 백성은 그대로 있고, 중화의 문명이 자칫 흙바람에 스러질 위기에, 누군가 나서서 남송의 백성을 위한 정책을 주장하고 중국의 문물을 보존해야 한다는 인식에 근거했다.
황족인 조맹부가 어떻게 원나라 관리가 될 수 있느냐는 생각은 한족만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처음 대도에 가서 쿠빌라이 앞에 엎드리자, 주변에서 “송왕조의 핏줄인데 언제고 배신하지 않겠느냐”며 공공연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송왕조의 핏줄이니 더더욱 등용할 의의가 있는 것이다”는 쿠빌라이의 고집으로 병부낭중의 직책을 맡게 되었다. 이후 30여 년 동안 순탄한 관료 생활을 이었고, 한림학사에 1품관인 영록대부까지 되고 사후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아내와 고려에서 온 재사에게 위로받다
조맹부가 등용되던 시점은 칭기즈칸 대부터 봉직하던 화북 출신 한인 관료들이 대부분 죽거나 은퇴하고, 색목인 계열 관료들의 세력이 두드러지던 때였다. 쿠빌라이가 남송 출신들을 특채하기로 한 것도 그런 점을 염두에 두어 일종의 견제세력을 두려는 뜻이 있었을지 모른다. 과연 조맹부는 1287년에 재정난을 벗어난다는 명분으로 위구르(티베트라고도 한다) 출신의 재상 상가(桑哥)가 추진했던 화폐개혁을 정면으로 반대했으며, 그럼에도 추진된 개혁의 결과 한족 백성들의 자산가치가 하락한 점을 안타까워하며 계속해서 상가를 공격할 근거를 찾았다. 그리하여 결국 1290년에는 대도에 일어난 큰 지진을 계기로 “이런 천재지변은 재상된 자의 비리와 과중한 세금 때문”이라며 상가의 부정부패 혐의를 고발하여 마침내 상가의 퇴진과 세금의 감면을 이루어냈다.
이런 정쟁의 후유증으로 한때 지방관으로 돌기도 했으나 쿠빌라이 이후 역대 황제들은 모두 조맹부의 인품과 재주를 아꼈으며, 특히 몽골의 8대 대칸이자 원왕조 4대 황제인 인종은 황태자 시절부터 조맹부를 존경하고 친애했다. 인종은 즉위 후 남송 출신 선비를 우대하고 과거제까지 부활시키는 등 문치주의 정책을 폈는데 이것도 조맹부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endif]-->그래도 ‘한간’이라는 오명은 그의 등 뒤에 항상 붙어 다녔고, 언제 변덕스러운 정치의 희생이 될지 모르는 신세로서, 조맹부는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하며 절대로 사치나 비리의 혐의를 얻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 조맹부를 가까이에서 위로하며 연인이자 벗이 되어주었던 사람은 아내 관도승(管道昇)이었다. 조맹부보다 여덟 살 아래였던 그녀는 그를 만나기 전부터 서화가로 일가를 이루고 있었으며, 28세 때 조맹부를 만나보고 그 사람과 예술에 모두 반하여 결혼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관도승은 독실한 불교도이기도 해서 남편 역시 불교를 깊이 공부하도록 이끌었고, 그녀와 함께 중봉이라는 승려에게 배우던 조맹부는 “이제까지의 불교 공부가 모두 쓸데없었음을 깨달았습니다”라며 그를 스승으로 깍듯이 모셨다. 이들 부부는 한가한 때면 함께 시를 읊고 그림을 그렸으며, 호수에 배를 띄우고 함께 낚시를 즐기기도 했다. 조맹부가 한번은 최운영이라는 여인을 사랑하여 그녀를 첩으로 들이려 하자, 관도승은 직접적으로 반대하지 않으면서 “부디 살아생전 한 이불을 덮고, 죽어서 하나의 무덤에 들기를”이라는 시를 지어 읊으니 조맹부가 뜻을 접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혼인 시의 나이로 보아 아마 조맹부에게 관도승이 첫 여인은 아니었을 듯하지만(기록은 없다), 관도승이 1319년에 각기병으로 죽기까지 다른 여인은 두지 않았으며, 이후 3년을 더 홀아비로 살다가 죽는다.
관도승의 [죽석도](왼쪽), 이제현의 초상(오른쪽)
관도승이 죽었을 때 문상하러 멀리 호주까지 조맹부를 찾은 사람 중에는 고려의 이제현도 있었다. 그는 왕위를 넘기고 대도에 들어와 살면서 ‘만권당’을 짓고
지워지지 않는 괴로움
조맹부의 [작화추색도]
조맹부는 시, 서, 화 등 중국의 전통 문예를 계승하고 발전시키되, 남송의 주류였던 격식에 치우치는 화풍, 서법, 문체를 비판하고 북송 또는 그 이전 시대의 자유로움으로 복귀하자는 자세를 가졌다. 이런 자세는 원왕조가 남송 때와 달리 정해진 관행에 얽매이지 않는 분위기를 만들었던 점, 그리고 문예에 정치색이 배제되면서 개인의 보다 심층적인 정서가 반영되었던 점 등에서 비롯되기도 했다.
시문에서는 당나라의 왕유를 본받아 청아하고 오묘한 경지를 모색했고, 인종에게서 “당나라에 이백, 송나라에 소식이 있다면 우리 원나라의 문장은 단연 조맹부가 대표한다”는 격찬을 받았다. 서예에서는 안진경의 박력 있고 균형 잡힌 서체를 따르던 주류를 넘어 왕희지의 우아하고 서정적인 서체를 본받아, 자신만의 ‘조체’ 또는 송설체를 만들었다. 그림에서는 남송의 원체화 화풍을 배격하고 소식이 대표했던 북송 문인화 화풍으로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의 대표작인 [작화추색도]를 보면 선묘와 색채를 다채롭게 사용한 가운데 펼쳐진 산수가 풍부하면서도 어딘지 처연해 보인다. [이양도]는 독특한 조형으로 서양에서도 많은 흥미를 끌어 왔는데, 완벽한 묘사법을 구사해 대상의 특성을 생동감 있게 표현해 냈다고 평가된다.
조맹부의 [이양도]
그런데 조맹부의 시나 그림, 글씨는 모두 세련되었고 풍부한 감정을 진솔하게 묘사했으나, 어딘지 슬프고 허망한 느낌이 묻어난다. 호연지기가 부족하고 유약해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어느 정도는 동시대의 전선, 안휘나 다음 세대의 왕몽, 오진, 예찬 등에게서도 공통되는 특색이다. 나라를 잃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은거 생활을 해야 했던 당대 선비들의 우울함이 반영된 것일까. 그것은 원황실의 우대를 받던 조맹부에게서도 볼 수 있는 우울이었다. 청년 시절까지 유학 공부도 열심이었던 그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 [상서주해]를 썼으며 예악 이론인 [금원], [악원]도 저술했다. 그러나 그런 학문은 근본적으로 쓸모가 없었다. 과거제를 부활시키는 등 중국문화의 부흥에 힘쓴 인종조차도 조맹부와 같은 학사들을 기본적으로 예술가로 아꼈다. 물론 관리로서 정책을 논하고 사무를 처리할 수 있었지만, 송나라의 선비들처럼 자신의 학문과 사상에 근거해 이상적인 정치를 이루고자 노력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북방민족의 기질과 문화를 선호하는 군주가 집권하는 날이면 언제 어떻게 운명이 바뀔지도 모르는 신분이었다. 그런 조맹부였기에 삶에서나 시, 서, 화에서나 늘 슬픔과 체념의 그림자가 지워지지 않았고, 그런 조맹부를 보았기에 이제현은 고려에 돌아가 주자학에 근거하여 새로운 정치를 이룩하자는 신진사대부 운동의 개척자가 된 것이 아닐까.
함규진
글 함규진 / 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송설은 촉나라의 조맹부(趙孟頫, 1254~1322)의 아호로, 조맹부 특유의 서체를 말한다. 왕희지 등의 영향을 받아 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에 뛰어났는데, 특히 그의 행서는 실용적이면서도 연미(軟美)하고 정돈된 것이 특징이다. 한국에 전해진 것은 고려 때로, 등극하기 전 연경(燕京;지금의 北京)에 갔던 충선왕이 조맹부와 교유하다가 귀국할 때 이 서체를 전래하여 성행하였다. 이암(李嵒 : 1297~1364)·이제현(李齊賢 : 1287~1367) 등이 유명한데, 특히 이암은 조맹부 필법의 진수를 체득하여 귀국한 뒤 처음으로 송설체를 전한 인물이다.
조선 시대에는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안평대군(安平大君)·신숙주(申叔舟)·서거정(徐居正)·강희안(姜希顔)·김시습(金時習)·성임(成任)·성수침·이황(李滉) 등이 이 서체에 능했고, 특히 안평대군은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명필이었다. 송설체는 조정은 물론, 전국에서 유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