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의 장계터
정유재란은 1597년에 일어났다. 1592년에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전쟁을 중단하는 협상을 벌이는 도중에 다시금 조선을 공격한 것이다. 당시 이순신은 조선 수군의 지휘관 자리에서 쫓겨나 일반 병사의 신분이 되어 있었다. 부산에 있는 일본군의 본거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순신에 이어 지휘관이 된 원균이 칠천량 전투에서 크게 패하면서 조선 수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다시 수군 총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명량은 진도와 육지 사이에 있는 좁은 바다로, 거친 물살 때문에 ‘울돌목’이라고도 부르는 곳이다.
당시 일본군은 조선 수군의 힘이 약해졌음을 알고, 그동안 조선 수군이 지키던 남해안을 거쳐 서해로 나아가 육지로 들어가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순신은 남아 있던 배 13척을 가지고 싸울 준비를 했지만, 전함 133척에 3만여 명의 군사를 앞세운 일본과 싸워 승리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지휘관이 되자마자 적의 상황을 꼼꼼하게 살펴본 이순신은 명량의 좁은 물길과 조류를 이용하면 유리할 것이라 판단하고 조선 수군의 근거지를 명량 근처로 옮겼다. 1597년 9월 16일, 마침내 일본 수군이 명량으로 들어오자 이순신은 조선의 전함을 일렬로 배치하여 좁은 물길을 지나가려는 일본 수군을 총공격했다. 일본 수군은 좁고 거친 물살에 갇힌 채 조선 수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 전함 31척이 파괴되고 8,000여 명의 군사가 죽거나 다치는 손실을 입고 물러났다. 이 싸움의 승리로 조선은 서해 바다를 지키고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다.
심화
명량 해전을 앞두고 이순신은 임금에게 역사에 길이 남을 장계(신하가 임금에게 보고하는 문서)를 올렸다. 당시 조선 조정은 어차피 수군의 전력이 약하니 바다에서의 전투를 포기하라고 권했다. 이에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함이 남아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하여 싸운다면 가능할 것(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장계에 적은 대로 일본 수군과 싸워 이겼다.
▲이순신 장군의 장계에는 조선 수군의 전함이 12척으로 쓰여 있지만, 나중에 1척이 더 발견되어 총 13척의 전함이 전투에 나섰다. 당시 조선 수군은 힘이 크게 약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은 많은 수의 적군을 막기에 유리한 명랑에서 전투를 치렀다. 실제로 일본의 수군은 거친 물살과 조선 수군의 총공격에 곤란을 겪다 결국 물러나고 말았다.
출처:(한국사 사전)
군산시( 群山市) 유인도(有人島)
서해에서 가장 많은 유인도를 가진 군산
요약 우리나라 서해에서 가장 많은 유인도를 가진 군산은 금강 하구 좌안에 있다. 금강의 하구에 자리잡은 중소도시로, 항구도시이며 대규모 공단을 보유한 공업도시이다. 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63개의 섬과 그 섬에서 살고 있는 섬사람을 시민으로 삼고 있다.
군산시(群山市)
우리나라 서해에서 가장 많은 유인도를 가진 군산은 금강 하구 좌안(左岸)에 있다. 북쪽은 금강을 사이에 두고 충청남도 서천군, 남쪽은 만경강을 경계로 김제시와 접하고, 서쪽은 황해(黃海)에 면한다. 금강 하구와 만경강 하구로 둘러싸인 옥구반도와 서해의 도서로 이루어져 있다. 군산은 금강의 하구에 자리잡은 중소도시로, 항구도시이며 대규모 공단을 보유한 공업도시이다. 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63개의 섬과 그 섬에서 살고 있는 섬사람을 시민으로 삼고 있다. 63개의 섬 중에서 개야도, 죽도, 연도, 어청도, 선유도, 무녀도, 장자도, 대장도, 관리도, 방축도, 명도, 말도, 비안도, 두리도 등 14개의 섬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이 섬들의 명칭에서는 천년의 역사와 사라져간 수많은 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진다. 이들 섬은 여러 차례 행정구역의 변천을 거치면서 이웃 충청남도와 전라남도에 속했던 적도 있었고 자치단체를 달리하는 경우도 있었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어청도, 연도, 개야도, 죽도는 현재 충남의 보령시 관할에서 옥구(군산)로 편입되었고, 전북 김제시에 속했던 선유도, 신시도, 장자도, 비안도, 대장도, 야미도, 관리도, 말도, 두리도가 옥구로 편입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섬들은 육지와의 거리가 최단 5km에서 최고 72km나 떨어진 절해고도다. 유인도 중 가장 큰 섬은 신시도로 그 면적이 4.25km2이며, 가장 작은 섬은 선유도 옆에 있는 아름다운 섬 장자도로 0.11km2이다. 유인도와 무인도를 합한 63개 섬 전체의 면적은 군산시 전체면적 376.355km2의 9.8%인 37.104km2에 그치지만, '바다는 자원의 보고'라는 말처럼 섬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헤아리면 면적은 오히려 육지보다 훨씬 넓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4개의 섬을 거느린 어머니 군산은 지금
군산시 해망동에 있는 군산 내항은 금강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군산은 그 옛날 수많은 영화를 누리던 추억의 항구도시였다. 일제가 기름진 호남평야에서 수확한 쌀을 화물선으로 실어가면서 군산은 항구도시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내항은 1899년 개항한 이래 인근 14개 도서지역을 잇는 여객선들의 출발지였다. 어선들이 연평도와 추자도 등 멀리 동지나 해상에까지 출어해 고기를 잡아오고, 배를 수리하고 그물을 고치면서 머무는 정박지였다. 이제 군산 내항은 과거의 영화와 함께 쇠락했고 그 자리를 군산외항에 내어주었지만 군산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비린내 나던 째보 선창과 내항을 그리워하면서 그때를 추억한다. 지금의 군산 내항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내항 부두에 들어서자 크고 작은 어선들로 빼곡히 들어차 있다. 대부분 배들은 녹슬었다. 출어를 한 지는 오래되었고, 모든 기능은 정지된 상태이다. 금강하굿둑을 막고 난 다음 25년 지난 지금은 금강의 물길이 막혀서 추억의 째보 선창 앞 내항은 물이 빠진 간조 시에 갯벌이 훤히 드러나 보인다. 선창가의 식당과 술집, 어판장은 그 옛날의 영화를 뒤로하고 대부분 문을 닫았다. 이제는 선박을 수리하는 철공소 수리공들의 망치 소리도 뜸해졌다. 가장 손님이 북적이던 선유도를 비롯하여 어청도, 개야도를 오가던 여객선 터미널은 외항으로 이사를 한 지 오래 되었다.
일제 때 곡창 지대인 호남의 수탈이 군산을 통해 이루어졌다. 개항 100년을 넘긴 군산은 새만금 개발 사업과 내초도, 오식도, 비응도를 연결해 육지화하여 공단을 만들고 수출항 부두를 개발했다. 세상에 모든 것은 음양의 법칙이 있기 마련이다.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가 되는 것이 세상만사 이치이다.
새만금 사업과 금강 하굿둑 건설, 군장공업단지 개발로 인하여 수많은 섬들이 희생을 했지만 지금은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내초도, 오식도, 비응도, 야미도, 신시도 등의 유인도서와 수많은 무인도서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 결과 내항이 8km 밖에 있는 외항으로 이전했고, 금강 하굿둑 건설과 새만금 사업으로 인해 물 흐름의 약화로 생태계에 커다란 변화와 혼란을 초래했다. 아마도 군산의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1990년도에 완공된 금강하굿둑 건설일 것이다. 한반도 지형은 동고서저(東高西低)의 분포로 대부분의 강들이 서해로 흘러든다. 지형의 경사가 완만하여 밀물 때가 되면 한강처럼 바닷물이 강을 따라서 거슬러 올라간다. 다시 썰물 때가 되면 물이 급히 빠지면서 쌓인 토사를 바다로 휩쓸고 내려와 해안에는 드넓은 갯벌이 골고루 잘 발달했다. 금강은 이 바닷물이 부여의 규암포, 만경강은 전주포, 동진강은 신태인까지 조수가 넘나들었다. 금강과 만경강, 동진강이 막히면서부터 하루에도 두 번씩 어김없이 일어나던 자연현상이 사라지게 되었다. 특히 금강은 갈 곳을 잃어버린 토사가 하굿둑 안쪽에 계속 쌓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토사퇴적이 금강호 전역에 누적되어 호수는 점점 얕아져 가고 있다. 이런 토사퇴적 현상은 금강호 안쪽 뿐만 아니라 하굿둑 밖에도 심각하다.
▲폐쇄된 군산 내항의 모습
하굿둑이 생긴 다음에 거센 밀물이 토사를 몰고 왔다가 다시 밀고 내려가는 썰물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토사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군산 내항과 장항항은 항구의 기능이 상실된 상태이다. 군산항과 장항의 항로상의 토사가 쌓이는 양은 연간 220만m3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준설량은 약 100만m3 정도에 그치고, 준설비용은 우리나라 준설 예산 절반 수준인 연간 130억 원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하굿둑을 만들기 이전에는 한 번 정도 준설하면 최소한 2~3년 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혈세를 쏟고도 매년 20cm 이상 토사가 계속적으로 쌓여가고 있는 실정이다.
군산항 전경
▲2004년 촬영한 군산 장항 여객선
군산은 오래 전에 개발을 시작할 때 우려했던 모습들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앞으로 어떤 변화와 재앙이 다가올지 모른다. 이제라도 더 이상의 피해가 없도록 금강의 하굿둑을 헐어버리고, 그 다음 새만금 방조제 곳곳을 신시도 배수 관문처럼 만들어서 바닷물의 흐름을 막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위대한 자연이 다시 복원되어 어느 정도는 회복이 가능할 것이다. 그래야 군산이 살고 서해바다가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것이다.
군산 명칭의 변천사
1899년 개항한 군산은 그 이전에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고려 최무선이 화약을 가지고 왜구를 크게 무찌른 곳이다. 군산의 예전 이름이 진포(鎭浦)이며 지리적으로 금강하구에 위치하여 전략적인 곳이다. 그래서 육군과 수군이 공동으로 주둔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 역할을 했다. 군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보면 다음과 같다. '고군산군도'를 옛날에는 '군산도'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나 지금은 그 명칭을 현재의 군산시에 넘겨주고 옛(古)군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고군산군도는 야미도, 신시도, 선유도, 무녀도, 장자도 등 10개의 유인도와 20개의 무인도로 구성된 섬들이다. 바다 위에 무리지어 있는 섬들이라는 고군산군도에 산이 무리 지어 있다는 뜻의 군산(群山)으로 된 것이다. 즉 군산은 '산들이 무리를 지어 있다'라는 섬들의 모습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식민지로 전락했던 아픈 역사의 군산항
군산은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근대문화 도시이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왜구가 자주 침탈했던 곳이다. 부족한 일본의 쌀을 보충하려고 자기네 나라로 실어갔던 역사적 아픔이 군산에 서려 있다. 개경과 한양으로 실어 나르는 세곡선이 호남과 충남 지방의 기름진 평야에서 나오는 식량을 금강 하구인 군산에서 출발하기도 한 곳이어서 늘 왜구의 표적이 되었다. 근대에 넘어와서 동학혁명의 좌절과 갑오개혁을 통해서 일본은 실질적인 조선의 경제권을 손아귀에 넣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이후 부산, 원산, 인천, 목포, 진남포, 마산에 이어 1899년 5월 1일에 개항된 항구도시다. 군산은 개항된 다른 항구와는 다르게 오직 쌀 수송에 매달리는 일본인들의 경제적 중심지였다.
일본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군산을 쌀 공급 수탈기지로서 개항을 하게 만든 것이다. 이렇듯 조그마한 군산항은 대륙침략의 구실로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 뱃고동소리가 쉬지 않고 울어댔다. 군산 내항에 위치한 구 군산세관 건물은 100년 전에 (1908년 6월) 독일인이 설계하고, 유럽풍으로 지어졌다.
군산항 개항의 부잔교도 수탈의 상징이다. 바닷물의 간만의 차이가 심한 이곳에 커다란 화물선들이 부두에 정박하면, 배의 높이와 맞지 않기 때문에 수위에 따라 높이가 자동으로 오르내릴 수 있는 부잔교 3기를 설치하여 3천 톤급 화물선 3척이 댈 수 있었다고 한다. '쌀의 항구'답게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한데도 불구하고 일명 '뜬다리 부두'라고 하는 부잔교는 밀물과 썰물에도 화물 작업이 가능했다. 항구 뒤에는 철도가 연결되어 화물을 수송했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철로선의 흔적만 남아 있다. 이 내항에서 1934년에 200만석의 쌀이 실려 갔다. 이런 수탈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는데 조정래의 '아리랑'과 채만식의 '탁류'의 소설을 통해 잘 묘사되었다. 그 당시 군산의 인구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비율이 6:4 정도나 될 정도로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다. 군산 내항 중심에서 조선인은 밀려나고, 좋은 자리는 대부분 일본인이 차지했다. 신작로를 따라서 3층의 백화점과 2층의 주택과 상가들이 즐비하여 자전거와 자동차가 종종 다니는 쌀의 항구였다. 이처럼 군산은 구한말 우리 역사의 아픈 상처가 얼룩진 곳이다. 이런 가운데 새만금 사업은 이제 군산의 지형을 바꾸어 놓았다. 서울 면적 3분의 2에 해당하는 거대한 땅이 새로 생겨나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국토가 확장된 것이다. 이제 군산은 새만금 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미래도시의 이미지로 변신하고 있다. 현재는 군장공업단지와 새만금 관광단지를 개발하고 군산 신외항을 건설하여 서해안 시대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특히 신시도와 선유도를 잇는 단등대교는 군산의 새로운 명물로 등장하여 눈부신 발전과 도약을 보게 될 것이다.
출처:(한국의 섬)
2024-11-06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