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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왕조
한때 번영하던 이집트 중왕국은 힉소스인들의 침략으로 멸망했고, 힉소스인들이 나일 하류의 하이집트를 차지하고 제15왕조를 세우면서 제2중간기가 열렸다. 그러나 결국 이집트 원주민들이 세운 제17왕조의 왕통을 이은 아흐모세 1세가 힉소스인들을 몰아내고 이집트 신왕국을 세우면서 제2중간기의 혼란을 잠재웠다. 신왕국의 첫 왕조인 제18왕조의 초대 파라오 아흐모세 1세는 약 25년 4개월 동안 재위하며 힉소스인들이 휩쓸고 간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흐모세 1세는 힉소스를 깨부순 다음 시시건건 남쪽에서 이집트를 괴롭히던 누비아인들마저 물리치며 국경을 안정시켰다. 외치가 안정되자 오랜 기간 동안 관심 밖에 있었던 예술과 문화에도 관심을 돌렸다. 하이집트 일대의 대신전들을 복구함과 동시에 제2중간기 이전에 삽을 떴으나 전쟁 때문에 중지된 사업들 역시 재개했다. 태양신 아문에게 바치는 신전, 지식의 신 프타에게 바치는 신전들을 지어 전통적인 신들의 권위를 높였고 테베를 수도로 삼아 전국을 평정하는 등 신왕국이 번영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아놓는 업적을 남겼다. 기원전 1524년에 아흐모세 1세가 사망하자 아들 아멘호테프 1세가 새로운 파라오가 되었다.
아멘호테프 1세의 20여 년에 걸친 재위기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으나 확실한 것은 아멘호테프 1세 시대에도 아흐모세 1세가 시작한 복구 사업은 계속되었다는 것. 아멘호테프 1세는 누비아, 레반트 일대에 대한 이집트의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하는 한편 강력한 군대를 이끌며 군사적으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문학적으로도 상당한 성취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대표적으로 이집트의 사후세계를 위한 지침서에 해당하는 '사자(死者)의 서'가 이때 최종적으로 정리되어 완성되었고 이집트의 전통 의학서인 에베르스 파피루스가 등장하는 등 수많은 서책들이 발간되었다. 심지어는 세계 최초의 물시계가 이때 처음 등장하였다는 말도 있을 정도.[7] 아멘호테프 1세는 카르나크에 위치한 대신전을 복구할 것을 명하며 양 옆에 높이가 20큐빗(약 10.5 m)에 달하는 거대한 탑문과 오벨리스크들을 세웠고, 전란 통에 파괴된 신전들을 복원하면서 제18왕조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아멘호테프 1세는 기원전 1504년에 사망했고, 그의 뒤를 이어 투트모세 1세가 즉위했다. 투트모세 1세는 13년 정도 재위하며 누비아에서 일어난 반란들을 수 차례 진압했고, 카르나크 대신전을 대대적으로 개축,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거대한 신전으로 변모시키는 업적을 남겼다.[8]
투트모세 1세 사후 왕위에 오른 투트모세 2세에 대해서는 약 13년 정도 재위한 것을 제외하면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그나마 알려진 것이라면 왕이 교체될 때마다 이벤트처럼 일어나던 누비아인들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다는 것 정도가 있다. 투트모세 2세가 유명을 달리하자 그의 아내이자 투트모세 1세의 딸이었던[10] 하트셉수트가 여왕으로 즉위했다.[11] 하트셉수트는 처음에는 정통 후계자 투트모세 3세의 섭정 자격으로 왕권을 거머쥐었으나 나중에는 살아있는 유일한 투트모세 1세의 자손이라는 정통성을 내세워 공동 파라오에 즉위하며 완벽히 왕위를 장악했다. 하트셉수트는 여성이라는 선천적인 정치적 약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정치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다. 21년이라는 상당히 긴 재위 기간 동안 하트셉수트는 제2중간기 시절 끊어졌던 교역로들을 복구하고 아프리카의 뿔 일대, 푼트와 교류하는 등 여러 업적을 남겼다. 또한 현대까지도 유명한 유적들 중 하나인 '하트셉수트의 장제전' 등을 포함해 수 백개가 넘는 건물들을 지어댔는데, 하트셉수트 시대에 지어진 건물들이 유난히 아름다웠기에 후대의 파라오들이 일부러 건물에 새겨진 이름만 지우고 마치 자신이 지은 것처럼 조작하려 시도할 정도였다.[12]
섭정으로 활약하던 하트셉수트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 때문에 21년 동안 빛을 못보고 있던 투트모세 3세가 본격적인 통치를 펼치기 시작한다. 투트모세 3세는 '정복자'라는 칭호가 붙을 정도로 활발한 정벌 활동을 나선 정복군주였다고 알려져 있다. 투트모세 3세는 54년에 걸친 재위 기간 동안 재위했는데, 한창 혈기왕성할 때에는 20년 동안 16번이나 전쟁을 치렀다고 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전쟁을 많이 벌였는지 알 수 있다. 투트모세 3세는 팔레스타인 일대로 진출하여 1차 원정에서 메기도를 포함한 도시 성읍들을 정복하는 전과를 올렸다. 특히 메기도를 함락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메기도 공성전은 8개월 동안 이어졌다. 투트모세 3세는 일생 동안 정복전쟁을 총 17번 하였는데, 그중 최대 규모일 정도로 굉장히 잔혹한 싸움이었다고 전한다.
5차, 6차, 7차 원정에서는 카데시를 중심으로 한 시리아 일대를 쓸어버리고 수많은 왕국들을 복속시켰다. 시리아를 정복한 이후에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당대 최강국들 중 하나였던 미탄니를 쳤다. 먼 이집트의 파라오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침략할 줄은 꿈에도 생각치 못한 미탄니는 당연히 투트모세 3세에 대한 대비가 하나도 되어있지 않았고, 덕분에 투트모세 3세는 유유히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부유한 도시들을 약탈하며 막대한 전리품들을 쓸어담을 수 있었다.[13] 투트모세 3세는 이후에도 꾸준하게 소아시아, 레반트 일대를 약탈하며 소소하게 전쟁을 계속했고, 그러던 중 기원전 1425년에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투트모세 3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아멘호테프 2세의 시대는 미탄니와의 적대적인 공존으로 특징지어진다. 아멘호테프 2세는 기원전 1427년부터 기원전 1401년까지 대략 26년 정도 이집트를 통치했다. 아멘호테프 2세는 아버지처럼 군대를 이끌고 곳곳을 누비고 다녔고, 총 3차에 걸친 원정을 떠났다. 재위 3년차부터 정복 활동을 시작했는데, 시리아의 오론토스 강 일대에서 미탄니 군대를 물리치고 카데시에서 시리아 장군 7명을 단신으로 처리하는 등 성공적으로 1차 원정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원정을 승리로 이끈 아멘호테프 2세는 전투 도중 죽인 시리아 장군 7명의 시체를 배의 앞머리에 매단 채로 그대로 나일 강을 따라 테베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당연히 이집트인들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온 파라오를 열렬히 환영했고, 이에 크게 만족한 아멘호테프 2세는 세를 몰아 누비아 일대까지 군사를 몰아 또다시 공적을 세웠다. 재위 7년 차에 시리아의 봉신 도시들이 미탄니의 사주를 받아 반란을 일으키자 2차 원정을 떠났다. 2차 원정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것이 없다. 이집트 측의 기록에서는 승리했다고 적혀있으나, 특기할만한 사항이 없는 걸로 보아 별다른 공적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온 것일 가능성이 크다. 재위 9년 차에 벌어진 제3차 원정에서 아멘호테프 2세는 갈릴리 호수 이남까지 진출하여 10만 명에 달하는 포로들을 잡아왔다고 전한다.
아멘호테프 2세가 사망하자 아들 투트모세 4세가 새 파라오가 되었다. 투트모세 4세는 상대적으로 제18왕조의 파라오들에 비하여 알려진 바가 적지만, 특기할 만한 점으로는 모래에 파묻혀 있던 기자의 대스핑크스를 다시 복구한 것이 있다. 한 왕자가 밖에서 잠을 자던 중, 왕자 바로 아래의 모래 속에 묻혀 있던 스핑크스가 만약 자신을 꺼내준다면 왕위를 주겠다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왕자는 이를 받아들였고, 그가 바로 투트모세 4세라는 이야기이다. 고고학자들은 이 설화를 통해 투트모세 4세가 원래부터 정통성이 있던 왕위계승자가 아니라 얼떨결에 파라오에 올랐다는 가설에 힘을 싣고 있다. 투트모세 4세는 대략 10년 정도 타 파라오들에 비하여 짧은 기간 동안 재위했다. 투트모세 4세가 즉위 10년 만에 사망하자 아들 아멘호테프 3세가 왕위에 올랐는데, 아멘호테프 3세의 재위기에 이집트 신왕국은 유례없는 문화의 발전과 황금기를 구가하였다.
아멘호테프 3세는 약 39년 정도 왕좌를 지키면서 워낙에 많은 업적을 남겼기에 이집트에서는 '아멘호테프 대제' 혹은 '아멘호테프 대왕'이라고 칭송해 부르기도 할 정도의 위대한 명군이었다. 아멘호테흐 3세는 10살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았기에 재위 초반부에는 섭정들이 대신 국정을 맡아 처리했다. 그러나 재위 10년째부터 100마리가 넘는 사자를 죽였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로 점차 혈기왕성한 청년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더니[14] 친정을 시작한 이후부터는 제대로 된 명군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아멘호테프 3세는 강력한 일신의 무력으로 칭송받았으나 전임자들과는 달리 딱히 정복 활동에 나서거나 전쟁을 대대적으로 벌이지는 않은, 비교적 평화를 추구했던 파라오였다. 대신 그는 말카타에 당대 이집트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의 왕궁을 신축하거나 세드 축제[15]를 성대하게 여는 등 내치에 신경쓰며 이집트의 부를 막대한 수준으로 불려나갔다. 나일 강 유역의 수많은 장소들에 새로운 사원과 신전들이 신축되었으며, 왕실 작업장에서는 화려한 장신구와 보물들이 쏟아져나왔다. 아멘호테프 3세는 바빌론을 포함한 메소포타미아의 도시, 지중해의 도시들과 교역하며 이집트 경제를 폭발적으로 성장시켰고, 덕분에 신왕국 제18왕조는 그의 재위기 내내 평화기를 누렸다.
투탕카멘
제19왕조[편집]
람세스 1세는 고귀한 귀족 출신이었던 것은 맞았지만 본디 왕실 혈통이 아니었기에 파라오에 오를 것을 예측하고 있지 못한 인물이었다. 아버지는 군 장교였으며 삼촌은 쿠시 총독의 딸과 결혼하는 등 파라오 즉위 이전에도 매우 유력한 귀족 가문이었는데, 군대 출신인 호렘헤브가 왕위에 오르며 군에 복무하던 자신의 측근들을 대거 궁정으로 끌어가면서 군직에 있던 람세스 1세도 바로 최고위 관직에 올랐다. 람세스 1세는 호렘헤브의 재위 동안 세트의 대신관직을 맡으며 아텐 신앙을 밀어내고 다시 이집트의 전통적인 종교관을 부활시키는 데에 앞장서기도 했다. 선대 파라오 호렘헤브는 아케나텐 시절의 혼란을 회복하고 강력한 왕권과 군사력을 이미 만들어 놓았기에 덜컥 왕위에 오른 람세스 1세는 예상 외로 평화로운 통치를 할 수 있었다. 람세스 1세의 즉위명은 '멘페티레', 즉 '라의 힘이 세운 자'였으며 출생명은 '라에 의해 태어났다'라는 의미의 '람세스'였다.[33]
람세스 1세는 왕위에 오른 후 약 16개월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워낙 재위 기간이 짧았기에 그에 관련된 대규모 문화유적도 없다. 람세스 1세가 죽자 아들 세티 1세가 새로운 파라오로 등극했다. 당시 세티 1세에게 주어진 최대의 과업은 서아시아 지역에서 한창 힘을 키우고 있던 히타이트를 견제하는 것이었다. 아케나텐 이후 이집트에서는 워낙 아텐 신앙을 폐지하고 옛 종교로 회귀하는 일이 더 급했기에 국경 밖의 히타이트를 신경 쓸 틈이 없었고, 때문에 히타이트는 세티 1세가 즉위할 즈음에는 이미 이집트와 맞먹을 만한 대단한 강대국이 되어 있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세티 1세는 과감하게 히타이트와 전쟁을 벌이기로 결심했고, 재위 10년 째 되는 해부터 여러 차례 히타이트와 전투를 치렀다. 세티 1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며 아케나텐 이후 이집트가 잃어버렸던 영토 상당수를 되찾았다. 세티 1세가 남긴 최고의 외교적 유산은 시리아 지방의 고대 도시 카데시를 함락시켰던 것. 이는 호렘헤브나 람세스 1세도 해내지 못한 위업이었다.[34] 카르나크 신전이나 타 신전들에 새겨진 비문을 보면 세티 1세는 몸을 가리지 않고 친히 전장에서 칼을 휘둘렀다고 전해지며, 히타이트 뿐만 아니라 누비아, 리비아의 유목민들[35]과도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군사적으로 이집트의 옛 강역을 회복한 세티 1세는 동시대 이집트인들에게 크나큰 존경을 받았고, 현대의 고고학자들 역시 세티 1세가 후계자 람세스 2세가 마음껏 기량을 펼칠 수 있는 기반을 닦아 주었다고 평가한다. 람세스2세 람세스2세
제20왕조
제19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투스레트를 쫒아내고 세트나크테가 새로운 파라오로 즉위했지만 오래 살지 못했다. 엘레판틴 비석에 의하면 세트나크테는 대략 2년 11개월 정도 재위했는데, 세트나크테는 상대적으로 매우 짧은 재위기간에도 불구하고 카르나크 대신전을 복구하고 각지에 할거하던 반란군들을 진압하는 등 왕조 교체기로 혼란스러운 이집트를 어느 정도 안정화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 덕분에 세트나크테가 세상을 떠나자 '이집트 최후의 위대한 파라오'라고 불리는 람세스 3세가 등장하며 신왕국은 마지막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람세스 3세는 대략 32년 정도로 꽤나 긴 시간 동안 왕위를 지켰다. 그는 이집트 전역에 막강한 통제력을 행사했던 마지막 파라오였으며, 여러 군사 활동을 펼치며 많은 군공을 세웠으나 점차 무너져가는 이집트를 완전히 이전으로 되돌려놓지는 못했던 군주였다. 당시 지중해 세계와 서남아시아, 에게 해 지방에서는 후기 청동기 시대의 붕괴가 진행되던 중이었다. 미케네 문명, 시리아의 히타이트 제국 등 한때 지역을 주름잡던 위대한 문명권들이 정체불명의 집단인 바다 민족의 침략으로 연쇄적으로 무너지며 세력 구도가 붕괴되고 있던 시점이었는데, 개중 가장 강력했던 이집트 역시 이 시대의 흐름을 피해가지 못했던 것.
후기 청동기 시대의 붕괴를 불러온 것은 아직도 정확한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강력한 무력 집단인 바다 민족이었다. 이들은 동지중해의 해상권을 휘어잡고 해적 함대를 꾸려 각국의 연안을 약탈하고 수많은 도시들을 불태우며 문명 시대를 암흑으로 돌려놓았는데, 당대 가장 풍요로운 경제력을 자랑하던 이집트는 이들에게 대단히 탐스러운 먹잇감이었다. 바다 민족은 나일 강과 지중해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이집트의 항구 도시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람세스 3세는 이들을 해전에서 꺾고 이들의 야욕을 분쇄해버렸고, 일부 포로로 잡은 자들은 따로 척박한 지방을 경작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람세스 3세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쇠퇴의 흐름은 막을 수가 없었다. 일단 바다 민족들의 끊임없는 침입에 대응하느라 막대한 군비가 소요되며 경제력이 크게 부실해졌고, 자연재해가 겹치며 민심은 흉흉해지고 왕에 대한 불신은 강해졌다. 가장 대표적으로 람세스 3세 재위 29년 차에 장례신전을 짓는 인부들에게 지급할 예정인 봉급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역사상 최초의 파업이 일어났는데, 이는 당시 이집트 사회가 꽤나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45] 게다가 지중해 쪽에서 대화산이 폭발, 화산재가 분출하여 햇빛을 가려 몇 십년 가까이 농작에 치명타를 입혔다. 곡물 가격은 수직상승했고 이집트의 생산력은 반대로 추락했다.
람세스 3세가 남긴 건축물들에 새겨진 기록들을 보면 람세스 3세는 이집트가 쇠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위대한 파라오였던 람세스 2세의 예를 본받아 거대한 건축물들을 건립하고 대대적인 행사와 축제를 치르며 신에게 기도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건물 축조 따위는 이집트의 경제 상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점차 이집트의 사원과 신전들, 그리고 도시들을 감싸는 거대한 성벽과 요새들이 연달아 지어졌다. 평화로워 적의 침략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람세스 2세 시대와 그 이전에는 한 번도 없었던 일로, 람세스 3세의 시대에 이미 이집트는 그 몰락을 예감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와중에 람세스 3세는 살해 시도로 인한 치명타를 입고 사망했다. 당시 왕비였던 티예가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람세스 3세를 죽여버리고자 했던 것이다. 음모는 실패로 돌아갔으나 람세스 3세는 목 부위에 매우 깊은 상처를 입었고, 결국 이 상처로 인해 사망했다.[46] 그나마 뛰어난 군사 지휘 능력과 내치 능력으로 신왕국의 명줄을 붙들고 있던 람세스 3세가 세상을 떠나자 이집트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1] 파라오 아케나텐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제17왕조, 제18왕조의 파라오들이 사용하던 수도.[2] 아케나텐이 종교 개혁과 동시에 천도해 세운 계획도시이자 새로운 수도. 기존 기득권층의 반발이 심해 아케나텐 사후 바로 버려졌다.[3]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가 세운 새로운 수도.[4] 람세스 2세 이후의 제19왕조와 제20왕조의 파라오들이 사용하던 수도.[5] 아케나텐 시절 한정.[6] 정체불명의 해적 집단인 바다 민족들이 지중해의 미케네 문명, 서아시아의 히타이트 등 위대한 제국들을 연달아 벼랑 끝으로 내몰은 사건. 이로 인해 문명 세계가 무너지고 일시적으로 암흑기가 도래한다.[7] 당시 이집트의 시간구분은 정확하지 않았다. 보통 밤의 길이를 12분의 1로 나누어 시간을 쟀는데, 때문에 밤낮의 길이가 달라짐에 따라 시간을 구분하는 기준도 늘어났다 줄어들었다를 반복했다. 그래서 물시계를 쓸 때에 밤의 길이에 맞추어 물의 양을 조절했다고 한다.[8] 투트모세 1세는 처음으로 왕가의 계곡에 안장된 파라오이기도 했다.[9] 타 파라오들의 석상보다 약간 더 여성적인 모습인 것을 볼 수 있다.[10] 고대 이집트 왕가에서는 왕실의 신성을 보존한다는 이유로 근친혼이 유행했다.[11] 보통 하트셉수트를 이집트의 첫 여왕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이 아니다. 이집트의 첫 확인된 여왕은 중왕국 시절 제12왕조의 소베크네페루였다.[12] 하트셉수트는 가짜 수염 등을 포함해 남성 파라오와 완전히 똑같은 차림을 한 것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당시 이집트에서는 상대적으로 여성들의 지위가 높았기에 가능했던 일. 그녀는 자신을 벽화에 남성으로 새기게 하거나 '마아트카레'라고 파라오식 이름을 따로 짓는 등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많은 수단을 활용했다고 알려져 있다.[13] 이 당시 이집트 인들은 나일 강만 보고 살았기에, 나일 강과 반대로 흐르는 메소포타미아 강을 신기하게 여겼다. 그 때문에 투트모세의 칭호 중에는 '역류를 건넌 자' 라는 호칭이 있다.[14] 물론 과장된 숫자일 것이다. 아니면 철제 우리나 사육장 등 철저하게 관리된 환경에서 사자 100마리를 '샤냥'했을 가능성도 있다.[15] 파라오의 통치를 축복하고 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축제. 이집트 고왕국 시대까지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유서가 깊은 행사였다.[16] 아케나텐의 재위기를 따로 '아마르나 시대'라고 부른다. 아마르나 시대의 조각상들은 이전 시기의 것들보다 굉장히 특색이 강한데, 이 석상만 보아도 인체의 모습이 대단히 길쭉길쭉하며 허리가 마치 여성의 것처럼 잘록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사람의 몸을 굉장히 여성스럽고 자연스러운 구도로 표현하면서 후대의 예술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17] 왼쪽의 인물은 아케나텐, 오른쪽의 인물은 아내 네페르티티. 아케나텐이 안고 있는 아이가 바로 투탕카멘이다.[18] 그의 시신은 왕가의 계곡의 WV22 무덤에 안장되었다. 현재 그의 미라는 카이로의 이집트 문명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19] 태양신 아텐이 유일한 신이라고 주장하고 나머지 신들은 모두 가짜라고 여겼던 아멘호테프 4세, 즉 아케나텐의 신앙. 세계 최초의 일신교였다. [20] 아케나텐이 종교 개혁이라는 벌집을 건드린 이유는 왕권 강화의 목적도 있었다. 당시 이집트에서는 신관 계급의 힘이 굉장히 강력했는데, 아케나텐은 이를 통째로 부정하고 왕을 중심으로 한 유일신 종교를 주창하면서 왕권의 강화를 꾀했던 것이다.[21] Amarna. 뜻은 '아텐의 수평선'.[22] 이집트 종교의 총본산과 비슷했던 카르나크 대신전이 바로 테베에 있었다.[23] 투탕카멘의 미라를 안치한 관은 겹겹이 삼중으로 되어 있었다. 사진 뒤쪽에 있는 황금빛 커다란 관이 가장 바깥 관이고, 앞쪽에 있는 것은 두 번째 관이다.[24] 이름의 뜻은 '미녀가 왔다'로, 외모가 출중하였다고 전해진다. 특히 네페르티티의 흉상은 현대적인 기준에서 봐도 굉장히 세련된 아름다움으로 유명하다.[25] 아케나텐은 아마르나 인근의 왕실 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아텐 신앙이 아케나텐의 죽음과 함께 소멸되며 수도가 다시 테베로 옮겨갔고, 투탕카멘이 아케나텐의 묘를 다시 왕가의 계곡의 KV55 무덤에 이장했다. KV55 무덤은 1907년 발굴되었다.[26] 네페르티티의 다른 이름이라는 설, 혹은 아케나텐의 딸 메리타텐이라는 설이 공존한다.[27] 투탕카멘의 무덤이 몇천 년에 걸쳐 도굴되지 않았던 이유는 투탕카멘이 워낙에 존재감이 없었던 덕분이기도 했다. 다른 위대한 파라오들은 거대한 무덤을 파 도굴꾼들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던 것에 반면, 투탕카멘은 재위기간도 짧고 무덤의 규모도 작아 도굴꾼들이 발견하지 못했던 것. 어떻게 보면 당시에 너무도 존재감이 없었기에 오히려 후대에 가장 유명해진 얄궂은 케이스.[28] 참고로 투탕카멘의 즉위 당시 이름은 '투탕카텐'이었다. 그러나 신관들이 아텐 신앙을 버릴 것을 요구하며 이름을 '투탕카멘'으로 개명했다.[29] 신관들은 자신들을 무시하고 아텐이라는 듣도보도 못한 신앙을 신봉했던 아케나텐을 혐오했다. 결국 제18왕조 이후 아케나텐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기록말살형에 처해졌고, 아케나텐을 묘사한 부조나 석상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때문에 현재까지도 아케나텐과 아마르나 시대의 석상은 굉장히 희귀한 편.[30] 막 성년이 되어 친정하기 직전의 오묘한 타이밍에 죽었기에 학자들은 암살되었을 가능성을 높게 친다.[31] 아이는 아멘호테프 3세의 핏줄이 흐르는 왕족이었다.[32] 호렘헤브는 즉위 직후부터 전임자들의 흔적 지우기에 몰두했다. 특히 바로 전대 파라오였던 아이에 대한 훼손이 대단히 심각했는데, 그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 대부분이 부서졌고 무덤은 파헤쳐졌다고 전해진다.[33] 이집트어로는 정확히 '라 메스 시스'인데, 이 이름이 그리스를 거쳐 들어오며 그리스식인 '람세스'로 불리게 된 것.[34] 세티 1세가 카데시를 정복할 무렵 그의 곁에는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인 람세스 2세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람세스 2세는 이 곳에 아버지를 기리는 승전비를 세웠으나, 카데시가 워낙 히타이트의 본거지와 가까웠기에 이집트는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카데시를 히타이트에 내줄 수 밖에 없었다.[35] 리비아 지방의 유목민들은 점차 이집트에 큰 위협이 되고 있었다.[36] 람세스 2세는 포로로 잡아들인 해적들 중 능력좋은 자들을 골라 자신의 친위대로 삼았다. 심지어 카데시 전투에서도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37] 대신전의 정면에 람세스 2세의 모습을 조각한 4개의 거상이 앉아있었다.[38] 이 부분에서는 히타이트와 이집트의 기록이 엇갈린다. 히타이트에서는 자신들이 대승을 거두고 람세스 2세는 도망쳤다고 서술되어 있으나, 이집트 측에서는 갑자기 람세스 2세가 신이 되어 무쌍을 찍고 히타이트 병사들 대부분을 전멸시키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나온다.[39] 최초로 양국이 대등한 관계에서 맺은 평화조약이라는 역사적 의의 덕분에 현재 이 조약을 새긴 점토판의 복사본이 국제연합 본부에 전시되어 있다.[40] 그의 미라를 부검해 본 결과 람세스 2세는 죽을 즈음에 굉장한 충치와 관절염, 그 외 수많은 지병들에 시달리고 있었다고.[41] 그의 무덤은 왕가의 계곡에 지어졌고, 현재는 KV7 무덤으로 불린다.[42] 참고로 메르넵타의 시대에 만들어진 석비에 처음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내용은 '이스라엘은 완전히 쓸려나갔다.... 그들의 후손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정도 의미였다.[43] 3~4년 밖에 파라오직을 유지하지 못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44] 투스레트는 집권 2년 만에 쫒겨났다.[45] 이 파업은 성공했으며 노동자들은 밀린 봉급을 정상적으로 받았다.[46] 고고학자들은 목에 찔린 상처 외에도 람세스 3세 미라의 왼쪽 엄지 발가락이 도끼 등 흉기로 인해 잘려나간 것을 확인했다. 절단된 부위가 뼈 재생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죽기 직전에 만들어진 상처로, 아마 목 부위의 치명상과 동일한 시기에 입었다고 추정한다.[47] 8400명에 이르는 원정대원 도중 900여 명이 넘는 수가 고된 일에 지쳐 사망했다고 한다. 사망률은 약 10.7%였으나 기록에 남지 않은 사망자들까지 합치면 이보다 더 높을 가능성이 크다.[48] 왕가의 계곡의 KV2 무덤에 안장되었고, 그의 미라는 현재 이집트 문명 박물관에 안치되어 있다.[49] 람세스 5세는 역사상 알려진 가장 오래된 천연두 사망자다.[50] 고고학계에서는 KV9 무덤이라고 부른다. 물론 약탈당해 현재는 부서진 관과 일부 부장품의 파편들만이 남아있다.[51] 이는 결국 테베의 신관들을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나 제20왕조를 갈아치우고 제21왕조를 건국하는 단초를 제공했다.[52] 이 과정에서 투탕카멘의 무덤 입구가 흙에 묻혀 가려지면서 람세스 6세 사후 일어날 대대적인 왕릉 약탈을 피할 수 있었다.[53] 다만 이같이 파라오가 전대 파라오의 무덤을 대놓고 도굴하는 사례는 신왕국 시대까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파라오 자신도 죽어 무덤에 묻힐 텐데, 함부로 남의 무덤을 도굴하기에는 명분도 실효성도 떨어졌기 때문. 그러나 신왕국이 망하고 본격적인 혼란기인 제3중간기 시대부터는 파라오고 뭐고 신나게 무덤들이 털렸다.[54] 람세스 11세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제20왕조를 끝장내고 들어선 제21왕조의 파라오들은 그의 무덤을 파내고 선대 파라오들의 부장품들을 공급할 보물 창고로 활용했으며, 고대 이집트 시대가 끝난 이후에는 콥트 교회의 은자들이 거하는 장소로 쓰이면서 파라오는 수 천년 간 안식을 찾지 못했다
출처 https://namu.wiki/w/%EC%9D%B4%EC%A7%91%ED%8A%B8%20%EC%8B%A0%EC%99%95%EA%B5%AD#toc
기원전 1069년부터 기원전 664년까지 지속된 고대 이집트의 시대 구분. 제21왕조부터 제25왕조까지가 제3중간기에 해당한다.
고대 이집트 최고의 전성기 이집트 신왕국은 람세스 2세 이후 점차 쇠퇴했다. 파라오의 권력은 날로 줄어들었고, 반대로 아문 신관들의 힘은 갈수록 강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신왕국의 마지막 파라오 람세스 11세가 사망하자 스멘데스 1세가 왕위에 오르며 제21왕조를 개창, 이때부터를 이집트의 제3중간기라고 부른다. 제21왕조 시대의 이집트는 인근 강대국 아시리아의 성장과 함께 끝없는 약화를 반복했다. 제21왕조의 뒤를 이은 리비아 출신의 제22왕조 역시 옛 성세를 회복하기에는 무리였고, 결국 기원전 837년 오소르콘 2세 사후 하이집트와 상이집트로 분열되고야 말았다. 제22왕조는 하이집트, 제22왕조에서 갈라져나온 제23왕조는 상이집트를 각각 분할해 통치한 것이다. 그러나 제22왕조나 제23왕조 둘다 너나할것 없이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렸고, 결국 이집트는 수많은 리비아-이집트계 소왕국들과 도시들로 군웅할거하는 형세가 되어버렸다.
이같은 혼란세를 수습한 것은 쿠시 왕국의 누비아인들이 세운 흑인 왕조, 즉 제25왕조였다. 쿠시 왕국의 왕이었던 피이(피앙키)는 상이집트를 정복하고 제23왕조와 제24왕조의 세력들을 흡수했으며, 테베를 장악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이집트 일대와 제22왕조까지 마저 멸망시켰다. 이렇게 한시적으로 이집트를 재통일하는 데에 성공한 제25왕조는 잠깐동안의 전성기를 누리며 옛 신왕국 시절을 연상시킬 정도의 영광을 누렸다. 전란 도중 파괴된 카르나크 신전을 재구성했고, 나일 강을 따라 수많은 신전과 건물들을 건설하며 여러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제25왕조의 중흥은 오래가지 못했다. 중동에서 등장한 신흥강자 아시리아 제국이 동북쪽에서 밀고 내려왔고, 제25왕조는 남쪽으로 쫒겨났다.[5] 당시 파라오 타하르카는 테베로 도망쳤다가 전열을 정비해 일시적으로 멤피스를 회복했으나, 아슈르바니팔이 이끄는 아시리아 군대에게 패퇴하여 결국 이집트를 잃어버리고 누비아로 다시 도망갔다. 아슈르바니팔은 이집트를 직접적으로 다스릴 생각은 없었기에 사이스를 중심으로 봉신 국가인 제26왕조를 세웠다. 이를 외세 간섭기인 이집트 말기 왕조의 시작이라고 본다.
제21왕조
한때 고대 이집트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황금기를 이끌었던 이집트 신왕국은 람세스 2세 사후 차차 쇠락하더니 결국 제20왕조 들어서는 약소한 왕권과 국력의 저하로 신음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파라오의 권위가 약해짐과 동시에 상이집트의 테베를 중심으로 한 아문의 대신관들의 권력은 날로 강해졌고, 신왕국의 마지막 파라오 람세스 11세 시대에는 거의 한 나라 안에 두 정부가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아문 신관들의 힘이 강력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람세스 11세가 30년의 재위를 끝마치고 사망하자 죽은 파라오의 장례를 집전한 스멘데스 1세가 왕위에 올라 제21왕조를 열었다. 그러나 스멘데스 1세를 포함해 제21왕조의 역사는 내내 파라오의 왕권 약화와 지방의 할거, 그리고 외세의 침략 등 부정적인 것들로만 가득했다. 스멘데스 1세가 새로운 파라오가 되기는 했으나 그의 영향력은 오직 하이집트 일대에만 머물렀고, 이집트 중부와 상이집트는 테베의 아문 신관들이 차지한 채 명목상으로만 파라오를 받들었다. 스멘데스 1세는 무려 26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분열된 이집트를 통치했고, 결국 테베의 신관과 상이집트를 다시 파라오의 권위에 되돌려놓지 못한 채 기원전 1052년 경에 사망한다.
스멘데스 1세가 죽자 아메넴니수가 잠깐 동안 재위했다가 바로 프수센네스 1세에게 왕위가 넘어갔다. 프수센네스 1세는 46년을 통치하였으나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7] 다만 그의 재위기에 타니스 주변에 거대한 성벽을 둘러 요새화시키면서 이집트의 수도가 완전히 멤피스에서 타니스로 옮겨졌다. 프수센네스 1세가 상대적으로 테베의 아문 대신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에 프수센네스 1세 사후 즉위한 아메네모페 역시 형식상으로나마 테베의 신관들에게 전 이집트의 군주로 인정받았다. 아메네모페 이후에도 대 오소르콘, 시아멘, 프수센네스 2세 등이 연달아 파라오가 되었으나 이들에게 특기할 만한 업적이나 공로는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히려 이들의 통치기에 이집트는 날로 쇠퇴하여 궁전을 새로 짓는 데에도 새롭게 석재를 채석할 만한 행정력이 떨어져 람세스 2세가 지었던 수도 피람세스의 폐허에서 돌들을 떼오는가 하면, 군사들에게 봉급을 줄 재정도 부족하여 반란이 일어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나마 시아멘은 이스라엘 왕국의 현왕 솔로몬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낸 파라오라고 추정되고 있어 제21왕조의 다른 파라오들에 비해서는 존재감이 아주 약간 있는 편.2.2. 리비아의 통치(제22, 23, 24왕조)[편집]
제21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프수센네스 2세가 죽자 리비아 동부의 메시웨시 족[8]의 부족장 출신인 셰숑크 1세가 왕위에 올라 제22왕조를 건국했다. 셰숑크 1세는 프수센네스 2세 시절 이집트 군대의 군사령관이자 수석 고문이라는 높은 관직에 앉아있던 인물로, 그의 조상들은 신왕국 시절 이집트에 정착했던 고대 리비아인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증조부 파이후티는 리비아 대족장으로써 이집트군의 대장이었고 삼촌이 대 오소르콘이었으며 동시에 프수센네스 2세의 딸의 양아버지였을 정도로 선대 때부터 이집트에서 기반을 갖고 있어 완전히 이집트화되고 굉장히 권력이 강했던 리비아 사람이었다. 프수센네스 2세가 사망하자 가장 유력했던 그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집트 파라오의 혈통에 신왕국의 메르넵타와 람세스 3세가 그토록 모질게 물리쳤던 야만족 리비아인의 피가 흐르게 된 셈. 셰숑크 1세는 남북으로 분열되어 있던 이집트를 통합하기 위하여 애썼으며, 프수센네스 2세가 가지고 있던 '아문의 대신관' 직을 그대로 물려받는 등 테베의 신관들을 복속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셰숑크 1세는 대외적으로는 상당히 공격적인 전술을 펼쳐 이스라엘과 가나안 일대를 활발히 공격해서 다윗과 솔로몬의 재물들을 몽땅 털어갔다고 전해진다.[9] 또한 혈연과 결혼을 통해 왕좌를 물려받았던 리비아인의 후예답게 아문 신관의 딸들과 여러 차례 혼례식을 올렸고, 아문 신관을 세습직에서 임명직으로 바꾸며 신관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려 애썼다.
셰숑크 1세의 21년에 걸친 재위 후 오소르콘 1세가 그를 계승했다. 제22왕조의 두 번째 파라오였던 오소르콘 1세는 신왕국의 멸망 이래 분열되었던 이집트를 안정시키고 꽤나 평화로운 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였다. 약 35년의 재위 기간 동안 오소르콘 1세는 여러 차례 신전들을 재건축하거나 세드 축제를 여는 등 굉장히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오소르콘 1세의 시대에 특기할 만한 재앙이나 자연재해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때문에 일부 고고학자들은 그나마 오소르콘 1세를 제22왕조의 전성기로 보기도 한다. 오소르콘 1세 이후 즉위한 셰숑크 2세의 출신은 굉장히 불분명하다. 오소르콘 1세의 아들이라는 말도 있고, 아니면 셰숑크 1세의 아들이라는 말도 있고 아예 독립적인 가문의 혈통이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는 등 수많은 학설들이 난무하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셰숑크 2세는 기원전 887년에 즉위하여 2년도 채 통치하지 못하고 사망했다.[10] 셰숑크 2세가 2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오소르콘 1세의 아들 타켈로트 1세[11], 그리고 그의 아들 오소르콘 2세가 연달아 즉위했다.
오소르콘 2세가 왕이 된 직후 그의 사촌이자 테베와 서부 오아시스들을 다스리던 하르시에세 A[12]가 이에 불복하여 반란을 일으키면서 오소르콘 2세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나 하르시에세 A는 다행히도 기원전 860년에 죽어버렸고, 그를 대체할 만한 반란군 지도자가 등장하지 않으면서 오소르콘 2세는 국난을 겨우 극복할 수 있었다. 오소르콘 2세는 다시는 테베를 기점으로 반란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신념으로 자신의 아들 님로트 C를 아문의 대사제로 임명해 테베로 보냈고, 이로 인해 오소르콘 2세는 안정적으로 상이집트 일대까지 손길을 뻗치고 장악할 수 있었다. 즉위 직후 최대의 위기를 모면한 오소르콘 2세는 다행히도 재위 내내 이집트를 나름 잘 이끌어나갔고, 제22왕조는 오소르콘 2세 시대에도 평화를 지켰다. 다만 이 시대에도 외적으로 점점 거대한 위협이 성장하고 있었으니, 바로 히타이트 이후 서아시아에 등장한 패자 아시리아의 존재였다. 아시리아는 점점 세력이 팽창하면서 이집트의 전통적인 영향권이던 이스라엘과 시리아 지방까지 조금씩 밀고 들어왔다. 이집트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공격적인 방향으로 아시리아에 맞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전성기인 신왕국 시절이었다면 모를까 이미 쇠퇴기에 들어간 이집트가 한창 때이던 아시리아를 이기는 것은 무리였고, 결국 이집트는 조금씩조금씩 밀려난다.
오소르콘 2세가 기원전 837년에 사망하면서 마침내 이집트가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로 분열된다. 오소르콘 2세의 후임자 셰숑크 3세의 재위 8년 만에 테베를 중심으로 한 상이집트 일대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셰숑크 3세에게 반기를 든 것이다. 원래 셰숑크 3세는 오소르콘 2세의 손자였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그의 사촌이자 아문의 대신관이었던 타켈로트 2세가 셰숑크 3세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스스로 파라오에 올랐다. 학계에서는 이전에 오소르콘 2세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하르시에세 A를 제23왕조의 첫 파라오로, 타켈로트 2세를 제23왕조의 두 번째 파라오로 본다. 즉 제22왕조와 제23왕조는 한 왕실 내에서 벌어진 내전 때문에 생겨나 이름만 다른 사실상 같은 왕조였던 것. 타켈로트 2세는 이집트 중부와 남부를 다스렸고, 이로 인해 셰숑크 3세가 이끌던 제22왕조는 오직 나일 강 하류의 이집트 북부 일대만을 다스리게 된다. 그러나 타켈로트 2세가 장악한 상이집트에서도 전쟁은 끝날 줄을 몰랐으니, 타켈로트 2세가 파라오로 즉위한 지 11년 째 되는 해에 테베에서 페디바스테트가 반란을 일으켜 테베를 함락하고 파라오를 선언했던 것이다. 격노한 타켈로트 2세는 아들 오소르콘 3세를 보내어 테베를 재정복했으나, 4년 후 또다시 반란이 일어나 타켈로트 2세의 군대를 쫒아내면서 상이집트 내에서 또 내란이 일어났다. 이후 타켈로트 2세와 후계자 오소르콘 3세, 그리고 페디바스테트와 후계자 셰숑크 6세가 서로 테베를 두고 쟁탈전을 벌였으나, 27년 만에 결국 오소르콘 3세가 승리하면서 상이집트 유역을 다시 하나로 합쳤다.
이 시대의 이집트는 하이집트에서는 제22왕조의 셰숑크 4세가[13], 상이집트 일대는 제23왕조의 오소르콘 3세가 나누어 통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이집트만을 겨우 부여잡고 있던 제22왕조는 날로 쇠락했다. 셰숑크 4세, 파미, 셰숑크 5세가 연달아 파라오로 즉위했으나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특히 무려 37년 동안 오랜 세월 재위한 셰숑크 5세의 통치 기간 동안 수많은 부족들과 도시들이 독립을 선포, 제22왕조에서 떨어져 분리되어 나가면서 제22왕조의 영향력은 더더욱 줄어들었다. 심지어 하이집트의 최대 도시들 중 하나이자 옛 수도라는 엄청난 중요성을 가지고 있던 멤피스마저 나일 삼각주 서부 지역을 차지한 리비아 추장들의 꼬임을 받아 떨어져 나갔다. 결국 대부분의 영토를 잃어버린 제22왕조는 수도 타니스와 인근의 부바스티스 인근만을 겨우 다스리는 조그만 세력으로 전락했다. 셰숑크 5세가 기원전 730년에 사망하자 제22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오소르콘 4세가 즉위했다. 오소르콘 4세가 즉위할 시점 이미 하이집트 지방은 리비아 출신 귀족들이 다스리는 수많은 군벌 세력들과 소왕국들로 쪼개져 버렸다. 오소르콘 4세가 통치하던 영역은 나일 삼각주에서도 가장 동쪽 끝에 위치한 조그만 부분이었는데, 그는 쿠시 왕국의 왕 피이와 아시리아 제국의 침입을 동시에 받으면서 최악의 위기에 놓였다.
그나마 정통성을 지니고 있던 제22왕조가 하이집트의 통치권마저 잃어버리며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던 와중, 제22왕조에서 갈라져 나온 분계 왕조였던 제23왕조 역시 상황은 비슷했다. 페디바스테트를 꺾고 상이집트를 통일한 오소르콘 3세가 기원전 769년에 사망하자 타켈로트 3세, 루다멘이 연달아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파라오 루다멘이 죽은 이후 제23왕조는 급속도로 쪼그라들었다. 제23왕조의 수도인 테베에서는 이니가 루다멘의 후임으로 즉위하였으나,[14] 4~5년 정도 밖에 재위하지 못했고 제23왕조는 결국 기원전 728년에 자연스레 소멸했다. 이 시기 즈음에 상이집트 지방에서 리비아 출신 군벌 테프나크트가 등장, 사이스를 중심으로 단명한 제24왕조를 열었다.
리비아의 통치(제22, 23, 24왕조)
제21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프수센네스 2세가 죽자 리비아 동부의 메시웨시 족[8]의 부족장 출신인 셰숑크 1세가 왕위에 올라 제22왕조를 건국했다. 셰숑크 1세는 프수센네스 2세 시절 이집트 군대의 군사령관이자 수석 고문이라는 높은 관직에 앉아있던 인물로, 그의 조상들은 신왕국 시절 이집트에 정착했던 고대 리비아인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증조부 파이후티는 리비아 대족장으로써 이집트군의 대장이었고 삼촌이 대 오소르콘이었으며 동시에 프수센네스 2세의 딸의 양아버지였을 정도로 선대 때부터 이집트에서 기반을 갖고 있어 완전히 이집트화되고 굉장히 권력이 강했던 리비아 사람이었다. 프수센네스 2세가 사망하자 가장 유력했던 그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집트 파라오의 혈통에 신왕국의 메르넵타와 람세스 3세가 그토록 모질게 물리쳤던 야만족 리비아인의 피가 흐르게 된 셈. 셰숑크 1세는 남북으로 분열되어 있던 이집트를 통합하기 위하여 애썼으며, 프수센네스 2세가 가지고 있던 '아문의 대신관' 직을 그대로 물려받는 등 테베의 신관들을 복속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셰숑크 1세는 대외적으로는 상당히 공격적인 전술을 펼쳐 이스라엘과 가나안 일대를 활발히 공격해서 다윗과 솔로몬의 재물들을 몽땅 털어갔다고 전해진다.[9] 또한 혈연과 결혼을 통해 왕좌를 물려받았던 리비아인의 후예답게 아문 신관의 딸들과 여러 차례 혼례식을 올렸고, 아문 신관을 세습직에서 임명직으로 바꾸며 신관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려 애썼다.
셰숑크 1세의 21년에 걸친 재위 후 오소르콘 1세가 그를 계승했다. 제22왕조의 두 번째 파라오였던 오소르콘 1세는 신왕국의 멸망 이래 분열되었던 이집트를 안정시키고 꽤나 평화로운 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였다. 약 35년의 재위 기간 동안 오소르콘 1세는 여러 차례 신전들을 재건축하거나 세드 축제를 여는 등 굉장히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오소르콘 1세의 시대에 특기할 만한 재앙이나 자연재해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때문에 일부 고고학자들은 그나마 오소르콘 1세를 제22왕조의 전성기로 보기도 한다. 오소르콘 1세 이후 즉위한 셰숑크 2세의 출신은 굉장히 불분명하다. 오소르콘 1세의 아들이라는 말도 있고, 아니면 셰숑크 1세의 아들이라는 말도 있고 아예 독립적인 가문의 혈통이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는 등 수많은 학설들이 난무하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셰숑크 2세는 기원전 887년에 즉위하여 2년도 채 통치하지 못하고 사망했다.[10] 셰숑크 2세가 2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오소르콘 1세의 아들 타켈로트 1세[11], 그리고 그의 아들 오소르콘 2세가 연달아 즉위했다.
오소르콘 2세가 왕이 된 직후 그의 사촌이자 테베와 서부 오아시스들을 다스리던 하르시에세 A[12]가 이에 불복하여 반란을 일으키면서 오소르콘 2세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나 하르시에세 A는 다행히도 기원전 860년에 죽어버렸고, 그를 대체할 만한 반란군 지도자가 등장하지 않으면서 오소르콘 2세는 국난을 겨우 극복할 수 있었다. 오소르콘 2세는 다시는 테베를 기점으로 반란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신념으로 자신의 아들 님로트 C를 아문의 대사제로 임명해 테베로 보냈고, 이로 인해 오소르콘 2세는 안정적으로 상이집트 일대까지 손길을 뻗치고 장악할 수 있었다. 즉위 직후 최대의 위기를 모면한 오소르콘 2세는 다행히도 재위 내내 이집트를 나름 잘 이끌어나갔고, 제22왕조는 오소르콘 2세 시대에도 평화를 지켰다. 다만 이 시대에도 외적으로 점점 거대한 위협이 성장하고 있었으니, 바로 히타이트 이후 서아시아에 등장한 패자 아시리아의 존재였다. 아시리아는 점점 세력이 팽창하면서 이집트의 전통적인 영향권이던 이스라엘과 시리아 지방까지 조금씩 밀고 들어왔다. 이집트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공격적인 방향으로 아시리아에 맞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전성기인 신왕국 시절이었다면 모를까 이미 쇠퇴기에 들어간 이집트가 한창 때이던 아시리아를 이기는 것은 무리였고, 결국 이집트는 조금씩조금씩 밀려난다.
오소르콘 2세가 기원전 837년에 사망하면서 마침내 이집트가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로 분열된다. 오소르콘 2세의 후임자 셰숑크 3세의 재위 8년 만에 테베를 중심으로 한 상이집트 일대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셰숑크 3세에게 반기를 든 것이다. 원래 셰숑크 3세는 오소르콘 2세의 손자였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그의 사촌이자 아문의 대신관이었던 타켈로트 2세가 셰숑크 3세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스스로 파라오에 올랐다. 학계에서는 이전에 오소르콘 2세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하르시에세 A를 제23왕조의 첫 파라오로, 타켈로트 2세를 제23왕조의 두 번째 파라오로 본다. 즉 제22왕조와 제23왕조는 한 왕실 내에서 벌어진 내전 때문에 생겨나 이름만 다른 사실상 같은 왕조였던 것. 타켈로트 2세는 이집트 중부와 남부를 다스렸고, 이로 인해 셰숑크 3세가 이끌던 제22왕조는 오직 나일 강 하류의 이집트 북부 일대만을 다스리게 된다. 그러나 타켈로트 2세가 장악한 상이집트에서도 전쟁은 끝날 줄을 몰랐으니, 타켈로트 2세가 파라오로 즉위한 지 11년 째 되는 해에 테베에서 페디바스테트가 반란을 일으켜 테베를 함락하고 파라오를 선언했던 것이다. 격노한 타켈로트 2세는 아들 오소르콘 3세를 보내어 테베를 재정복했으나, 4년 후 또다시 반란이 일어나 타켈로트 2세의 군대를 쫒아내면서 상이집트 내에서 또 내란이 일어났다. 이후 타켈로트 2세와 후계자 오소르콘 3세, 그리고 페디바스테트와 후계자 셰숑크 6세가 서로 테베를 두고 쟁탈전을 벌였으나, 27년 만에 결국 오소르콘 3세가 승리하면서 상이집트 유역을 다시 하나로 합쳤다.
이 시대의 이집트는 하이집트에서는 제22왕조의 셰숑크 4세가[13], 상이집트 일대는 제23왕조의 오소르콘 3세가 나누어 통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이집트만을 겨우 부여잡고 있던 제22왕조는 날로 쇠락했다. 셰숑크 4세, 파미, 셰숑크 5세가 연달아 파라오로 즉위했으나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특히 무려 37년 동안 오랜 세월 재위한 셰숑크 5세의 통치 기간 동안 수많은 부족들과 도시들이 독립을 선포, 제22왕조에서 떨어져 분리되어 나가면서 제22왕조의 영향력은 더더욱 줄어들었다. 심지어 하이집트의 최대 도시들 중 하나이자 옛 수도라는 엄청난 중요성을 가지고 있던 멤피스마저 나일 삼각주 서부 지역을 차지한 리비아 추장들의 꼬임을 받아 떨어져 나갔다. 결국 대부분의 영토를 잃어버린 제22왕조는 수도 타니스와 인근의 부바스티스 인근만을 겨우 다스리는 조그만 세력으로 전락했다. 셰숑크 5세가 기원전 730년에 사망하자 제22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오소르콘 4세가 즉위했다. 오소르콘 4세가 즉위할 시점 이미 하이집트 지방은 리비아 출신 귀족들이 다스리는 수많은 군벌 세력들과 소왕국들로 쪼개져 버렸다. 오소르콘 4세가 통치하던 영역은 나일 삼각주에서도 가장 동쪽 끝에 위치한 조그만 부분이었는데, 그는 쿠시 왕국의 왕 피이와 아시리아 제국의 침입을 동시에 받으면서 최악의 위기에 놓였다.
그나마 정통성을 지니고 있던 제22왕조가 하이집트의 통치권마저 잃어버리며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던 와중, 제22왕조에서 갈라져 나온 분계 왕조였던 제23왕조 역시 상황은 비슷했다. 페디바스테트를 꺾고 상이집트를 통일한 오소르콘 3세가 기원전 769년에 사망하자 타켈로트 3세, 루다멘이 연달아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파라오 루다멘이 죽은 이후 제23왕조는 급속도로 쪼그라들었다. 제23왕조의 수도인 테베에서는 이니가 루다멘의 후임으로 즉위하였으나,[14] 4~5년 정도 밖에 재위하지 못했고 제23왕조는 결국 기원전 728년에 자연스레 소멸했다. 이 시기 즈음에 상이집트 지방에서 리비아 출신 군벌 테프나크트가 등장, 사이스를 중심으로 단명한 제24왕조를 열었다.
사이스를 중심으로 단명한 제24왕조를 열었다.
2.3. 누비아의 통치(제25왕조)
그러나 제24왕조가 발흥한 사이스 바로 곁에는 한창 세를 불리고 있던 누비아 쿠시 왕국의 왕 피이(피앙키)가 있었다. 완전히 이집트화된 누비아인 군주 피이는 막 혼란스러운 이집트를 통합시키겠다는 원대한 야심이 있었고, 결국 재위 20년 차에 군대를 몰아 제24왕조를 몰아내고 상이집트와 테베 일대를 제패하였다. 학계에서는 피이의 이집트 정복 이후의 쿠시 왕국을 이집트의 제25왕조로 본다. 제25왕조는 순혈 누비아인들이 세운 왕조라 에티오피아 왕조, 흑인 왕조라고도 불린다. 이집트인들에 비해서도 피부색이 짙었던 누비아인들이었기 때문. 그래서 이 시대에서 이집트 역사상 처음으로 흑인 파라오가 등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이는 제22왕조의 오소르콘 4세를 꺾고 하이집트 일대까지 정복했다. 그러나 피이는 더이상 북진하여 고향 누비아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고, 이때문에 도망친 제24왕조의 테프나크트를 잡아 죽이지 않았다. 피이가 하이집트 정복 후 누비아로 돌아가자 테프나크트는 제 하고 싶은 대로 행세할 수 있었고, 이 상황은 피이의 후계자 셰비쿠가 테프나크트의 후임 바켄레네프를 죽이고 제24왕조를 끝장내며 종결된다.
기원전 714년 피이가 죽자 셰비쿠가 제25왕조의 2대 파라오로 즉위했다. 셰비쿠는 그 아버지와 같이 아문 신앙을 받아들이며 본격적인 이집트화가 이루어졌던 인물이었다. 셰비쿠는 제24왕조를 멸망시키고 분열되어 있던 이집트를 통합했다. 또한 신왕국 시절 개건한 카르나크 신전을 방문하여 신관들의 예우를 받으면서 지역 민심을 안정시켰고, 덕분에 제25왕조는 예상 외로 별 탈 없이 이집트를 흡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하가 광대한 이집트를 한꺼번에 다스릴 수 없으니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로 나누어 따로 통치하는 것이 어떠냐고 간언하자 이제까지의 개판을 통합했던 셰비쿠는 분할통치는 오직 전쟁을 불러올 것이라고 말하며 단호히 거부하는 등 나름대로 정치적으로도 선견이 있는 군주이기도 했다. 셰비쿠의 뒤를 이은 3대 파라오 샤바카 역시 전임자와 비슷한 정책을 펼쳤다. 제25왕조는 샤바카의 재위 기간 동안 이집트 전체를 확실하게 장악했으며, 샤바카는 거대한 건설 프로젝트를 명령하거나 신전을 개축하는 등 여러 복구 작업을 펼치며 이전의 혼란 때문에 입은 피해를 복구했다. 게다가 신아시리아 제국의 끊임없는 위협에서부터 이집트를 방어하며 이집트의 독립성을 지켜내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긴 명군이었다. 제25왕조는 샤바카의 재위 기간 동안 상당히 평화로운 시대를 누렸고, 남방 야만족 누비아인들의 지배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서방의 야만인 리비아인들의 지배와 분열, 내전에 지쳐있던 이집트인들은 누비아의 지배를 거부하지 않았다.
2.4. 아시리아의 침공
제25왕조는 샤바카 다음 파라오인 타하르카 시대에 전성기를 찍었다. 타하르카의 재위 기간 동안 나일 강이 마침 딱 알맞은 수준으로 범람했다고 전해지며, 덕분에 수확량이 굉장히 풍족해지면서 사람들의 삶은 이전보다 훨씬 살기 좋아졌다. 타하르카는 완전히 이집트화가 되어버린 파라오였기에 아문의 대신전에 막대한 양의 황금을 기부하면서 신관 계급들의 호감을 샀고, 그의 시대 제25왕조는 옛 이집트 신왕국의 영화에 비견될 정도로 강력한 국력을 자랑했다. 특히 누비아와 이집트의 건축 양식을 섞어 축조한 피라미드들은 아직까지도 이집트의 대표적인 문화유적으로 남아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토록 강대한 왕국을 이끌었던 타하르카는 결국 아시리아 제국 때문에 패망하게 된다. 비옥한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정복한 아시리아가 이제 이집트에 눈독을 들이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는데, 이로 인해 아시리아가 이집트와 대대적으로 충돌하게 된 것이다. 타하르카는 아시리아와 이집트 사이에 있던 유다 왕국의 왕 히즈키야를 도와[16] 아시리아의 센나케립 왕을 견제하고자 했으나, 유다 왕국은 처참하게 대패했다.[17] 센나케립의 뒤를 이은 에사르하돈 왕은 유다 왕국을 쳐부순 후 곧바로 이집트를 노렸다. 타하르카는 에사르하돈 왕과의 전투에서 대패해 남쪽으로 밀려났고 아시리아는 하이집트 일대를 정복했다.
타하르카는 남쪽의 테베로 잠시 피난을 갔다가 쿠시 지방에 있던 증원군을 모아 결국 아시리아 군대를 밀어냈으나, 에사르하돈이 군대를 수습하고 대공세를 펼치며 다시 쫒겨났다. 에사르하돈 왕은 북부의 멤피스를 포함해 대부분의 강역을 정복했고, 심지어는 타하르카의 가족들과 궁정 신하들 대부분을 포로로 잡아 수도 니네베로 끌고 갔다. 에사르하돈은 이집트의 도시들에게 조공을 바칠 것을 강요했고, 힘이 없던 이집트는 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이를 갈던 타하르카는 전열을 정비해 기원전 669년에 멤피스를 탈환했다. 에사르하돈은 바로 이집트에 재원정을 떠났으나 원정 도중 세상을 떠났고, 그 뒤를 이어 아시리아 전성기의 정복군주 아슈르바니팔 왕이 즉위했다. 아슈르바니팔은 결국 타하르카를 꺾고 이번에는 남부의 테베까지 함락시키면서 마침내 이집트 전체를 정복했다. 그러나 당시 아슈르바니팔이 원하던 것은 이집트를 직접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부유한 이집트의 도시들에게 두고두고 공물을 뜯어내는 것이었기에 합병 대신 꼭두각시 파라오들을 앉혀놓고 돌아갔다. 아슈르바니팔은 사이스를 수도로 네카우 1세를 새로운 파라오로 앉혀놓았는데, 이를 제26왕조라고 부른다.[18] 그러나 사이스의 귀족들 일부는 이집트와는 전혀 다른 이질적 정복자 아시리아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직 살아있던 파라오 타하르카에 대한 충성심이 남아있었기에 아시리아에 대한 반란을 기획했고, 이를 눈치챈 아슈르바니팔은 바로 반란을 진압했다.
아시리아를 피해 남쪽으로 도망간 타하르카는 기원전 664년 테베에서 사망했다. 타하르카가 죽자 그가 지명한 후계자 타누테멘이 제25왕조의 마지막 파라오로 즉위했다. 타누테멘은 당연하게도 타하르카 시대의 위대했던 제25왕조를 회복하고 싶어했다. 그는 군대를 모아 북부로 진격, 아시리아 군대를 몰아내고 이집트의 독립을 꾀했다. 타누테멘은 멤피스를 포함한 이집트 상당 부분을 회복했고 그 과정에서 아시리아의 대리인이었던 네카우 1세를 죽이는 데에 성공했다. 이집트에서 일어난 반란에 놀란 아슈르바니팔은 바로 이집트로 돌아와 네카우 1세의 후계자였던 프삼티크 1세와 연합군을 꾸려 타누테멘의 군대를 공격했다. 멤피스 북쪽에서 대전투가 일어났고, 이 전투에서 결국 타누테멘의 군대가 패배하면서 이집트는 아시리아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데에 실패한다. 타누테멘은 남쪽으로 도망쳐 테베를 거쳐 결국 쿠시 지방까지 후퇴했다. 타누테멘의 뒤를 쫒은 아시리아 군대는 40여 일 만에 대도시 테베에 당도했다. 상이집트 일대를 한 번 응징해놓아야겠다 싶었던 아슈르바니팔은 상이집트의 중심지나 테베에 대해 무자비한 약탈을 자행했다. 이집트 측에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아시리아 측에 테베의 대약탈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 약탈로 인해 엄청난 양의 금은보화가 유출되었고 수많은 이집트인들이 노예로 끌려갔다. 신전들은 불타 내려앉았고 왕궁은 무너졌다.[19] 결국 테베 약탈로 인해 쿠시 왕국이 최종적으로 이집트에서 쫓겨내려가면서 누비아 제25왕조의 시대는 완전히 종결되었고 아시리아에 대항하는 세력은 완전히 끝장났으며, 이후 아시리아의 신하인 제26왕조가 아시리아 대신 전 이집트를 통치하며 외세의 간섭기이자 고대 이집트 최후의 시대인 이집트 말기 왕조가 시작된다.
[1] 제21왕조의 개창자. 제3중간기의 초대 파라오이다.[2] 피이가 다시 이집트를 통일하기 전까지 통일 이집트를 다스린 마지막 파라오.[3] 제25왕조의 초대 파라오이자 분열되어 있던 이집트를 통합한 군주.[4] 제25왕조의 실질적인 마지막 파라오이자 아시리아에 맞서 싸웠던 군주. 타하르카 이후 이집트는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전락한다.[5] 제25왕조는 유다 왕국의 히즈키야 왕을 도와 아시리아를 견제하려 했으나 처참하게 실패했다. 이 내용은 열왕기에 수록되어 있다.[6] 신왕국 시절 만들어진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보다 훨씬 완성도나 정교함이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7] 프수센네스 1세는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 중 유일하게 무덤이 도굴당하지 않은 파라오다. 심지어 투탕카멘의 무덤조차 고대에 소규모로 몇 차례 털려나갔지만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은 단 한번도 도굴당한 적이 없다. 다만 침수가 잘되는 지역에 지은 바람에 미라가 다 썩었고, 부장품도 투탕카멘의 것에 비하면 별볼일 없었던 데다가 하필이면 발견 시기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인 1939년이라 조용히 묻혔다.[8] 경우에 따라서는 그냥 '마' 부족이라고도 한다.[9] 셰숑크 1세가 이스라엘 왕국을 침입했기에 성경에도 그 이름이 등장한다. 한글 개역성경판에는 시삭이라고 쓰여있다.[10] 셰숑크 2세의 원래 무덤은 침수되기 쉬운 곳에 지어져 고대에 이미 훼손당했다. 신관들은 대충 셰숑크 2세의 관을 들어 그나마 멀쩡하던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에 안치했고, 이후 1939년에 발견되게 된다. 셰숑크 2세의 관을 열 때 이집트 왕국의 왕이던 파루크 1세가 직접 참관하기까지 했다.[11] 즉위 후 7년 정도 밖에 못 살았다. 그의 이름이 새겨진 건물들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기에 남긴 업적도 알려지지 않았다.[12] 본명은 '헤즈케페레 세테페나문 하르시에세'지만 줄여서 그냥 '하르시에세 A'라고 부른다. 학자들은 하르시에세 A를 제23왕조의 개창자로 본다.[13] 셰숑크 3세는 기원전 798년에 사망했고 왕좌는 셰숑크 4세에게 이어졌다.[14] 그 중간에 셰숑크 7세가 잠시 왕좌를 거쳐갔다는 기록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15] 구성원들이 피부색이 검은 완전한 흑인임을 볼 수 있다. 때문에 제25왕조의 파라오들을 '흑인 파라오'라고 부르기도 한다.[16] 이 내용은 성경 열왕기에 나와있다.[17]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아시리아의 진지에 전염병이 돌아 하루 만에 18만 5천 명의 병사들이 사망해 물러갔다고 나와있으나, 실제로는 아마 전염병의 실존 여부를 막론하고 유다 왕국이 아시리아에 항복하고 막대한 양의 공물과 영토를 할양한 것으로 추정된다.[18] 네카우 1세의 아들 프삼티크 1세는 에사르하돈 왕 시절 이미 니네베에서 교육을 받은 친아시리아계 인물이었다.[19] 이 내용은 아시리아의 기록에 굉장히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당대 고대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엄청난 충격과 공포의 대사건이었기에 성경의 이사야서에도 나와있을 정도.
출처 https://namu.wiki/w/%EC%9D%B4%EC%A7%91%ED%8A%B8%20%EC%A0%9C3%EC%A4%91%EA%B0%84%EA%B8%B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