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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소리마루 원문보기 글쓴이: 송호인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 지리산 천왕봉의 비문이다.
8월 22일(월)부터 24일(수) 까지 성삼재를 출발로 노고단에서 천왕봉, 다시 백무동까지의 100리 산길을 꼬박 2박 3일간 밟았다.
각자 배낭을 메고 약속장소에 모인 시각이 이른 아침 7시, 8명이(여7, 남1) 짐을 정리하여 나누고 걱정 반 설렘 반의 지리산 종주산행이 시작된다. 사실은 인원수도 많고 거의 초보 산행이라서 걱정이 더 많다. 이러나저러나 일단 출발한 카니발 차안에서는 뒷일은 제치고 쌓인 이야기꽃이 활짝 핀다. 소풍 나온 아이들 같이 함께 웃고 떠들고.....
대진 고속도로의 덕유산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산행의 종점인 백무동으로 향한다. 산행이 끝나고 출발지로 다시 가는 것이 번거롭고 힘들 것이라는 충고와 판단 때문이다. 인터넷에 추천되고 이름이 알려진 마천의 개인택시 기사 이OO님의 상백무 펜션에 차를 주차하고 친절한 배려와 안내로 산행의 출발지인 성삼재로 간다. 택시에서 내린 성삼재에는 출발부터 걱정하던 현실대로 바람과 비가 기다리고 있다. 서둘러 판초우의를 꺼내서 걸치고 나니 우의를 뒤집어 쓴 서로의 모습을 보며 한바탕 웃는다. 꼭 독수리 오형제 같다나. ^^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행렬의 맨 뒤를 따르다 보니 정말로 군사작전 중이거나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독수리 오형제가 떠올라 혼자 웃는다. 노고단까지의 거리가 그리 멀지는 않지만 단단히 먹은 맘에 비하면 벌써부터 숨이 턱턱 막혀 오는 것이 진작 평소에 운동 좀 해둘걸 후회막급이다. 모두 같은 상황인지 어느새 웃고 떠드는 말들이 쏙 들어가고 거친 숨소리가 들려온다.
물 길 따라 흘러내려오는 물로 목을 축이고 한숨 돌리며 올라서니 노고단 대피소(산장)가 보인다. 지나는 길에 화엄사로 내려가는 등산로 이정표 앞 갈림길에 서 보니 십여년 전에 화엄사에서부터 야간산행으로 올라오던 생각이 났다. 간혹 길을 잃어 되돌아서기도 하면서 칠흑 같은 어둠의 숲길을 헤매다 하늘이 열리길래 다 왔구나 싶어 지칠 대로 지친 몸에 텐트를 덮고 그냥 쓰러진 곳이었다. 초죽음 상태에서 새벽에 지나는 사람들 소리에 부스스 눈을 떴던 곳이 이 길이구나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다. 갈 길이 멀어 약간은 선 밥과 준비해온 밑반찬 그리고 냉동건조 씨래기 된장국(의외로 맛은 괜찮았음)으로 허기를 달래고 각오를 단단히 한 다음 본격적으로 지리산의 산자락을 타기 시작했다.
노고단(1507m)에서 출발한 걸음은 주 능선을 타고 수없이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며 오늘의 목적지인 연하천 대피소를 향한다. 비가 계속 내려서 숲길은 어두컴컴하고 습하며 순간순간 바위나 흙에 미끄러지기 쉽다. 일단 지리산의 주 삼봉 중의 하나인 노고단에서 출발한 관계로 어쩌다 하늘이라도 열리면 지친 발걸음에 생기가 돌면서 시원한 바람과 발아래 경치를 보며 땀을 씻어 내린다. 비가 와서 우리가 구름 속에 있는 터라 경치가 잘 보이지는 않지만 강한 골바람이 구름을 살짝 걷어내면서 그 사이로 펼쳐지는 경치는 아주 흔한 지리산의 기본임에도 불구하고 탄성을 지르고야 만다. 아, 이래서 지리산을 찾는가 보다! 라고 이구동성이다. 시작에서 너무 감동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앞으로 펼쳐질 장관을 기대하며 힘든 발걸음을 재촉한다. 임걸령을 넘어 역시 주 삼봉중의 하나인 반야봉(1733.5m)의 허리를 돌아 전라남.북도, 경상남도가 만나는 삼도봉에 이르러 사진에는 뿌연 배경만 나오겠지만 벼랑 끝 바위에 서서 저마다의 포즈로 기념사진을 남기며 잠시 휴식한다. 지나는 길옆에 있던 선비 샘의 물 한바가지는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며 뼈 속가지 그 시원함을 전하며 갈증을 풀어 준다. 그러나 맛은 아무 맛도 나지 않는다. 그런데 모두 물맛 좋~다고 한다. 사람의 맛에 길들여 진 입이 자연의 맛을 느낀 것일까? 아니면 기분일까? 어쨌거나 구름을 밟고 선 이 높은 산위에서 샘물이 솟아나는 것도 신기하거니와 금방이라도 주저앉아서 일어나지도 못할 것 같은 몸을 벌떡 일으키는 것을 보니 실로 물의 힘이 대단하다.
토끼봉을 넘어 설 즈음에는 용기백배, 사기충천의 의지는 점점 외로운 자신과의 싸움으로 바뀌면서 오직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깡(?)이 거친 숨소리와 신음소리에 묻어난다. 아마도 오만가지 생각이 다 스쳤을 터이다. 숨을 몰아쉬며 산길을 걷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출구 없는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들게 된다.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펼쳐지던 선택된 세상의 모습은 어디가고 나무뿌리, 돌 하나 마저도 발걸음을 붙잡는다. 오르면 내리겠지 라는 작은 희망은 아뿔싸, 남은 힘을 쥐어 짜내어 올라선 행복도 잠시 내리는 몸의 무게는 천근이 되어 누르고 발바닥에는 불이 나기 시작한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것일까?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 이 숲 속에 가려진 나는 무엇일까? 휴, 저 봉우리와 능선 다음에는 무엇일까? 이 쯤 되면 생각을 접고 배낭을 곧추 멘 다음 나를 온전히 산에 내 맡기는 수밖에 없다. 가다보면 몸과 마음이 만나지겠지. 산이 알아서 다 주겠지 하고...
가뿐 숨소리와 어지러이 헤매던 마음을 다 잡고 보니 설상가상으로 오가던 다른 등산객들의 모습이 어느 때부터 인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지남에서 지북으로 돌아선 숲길은 가뜩이나 어두웠는데 이제는 시커먼 숲과 흐릿한 길 만 보이고 있다. 산장의 자리나 식사 준비로 먼저 질러간 선발대보다도 많이 뒤쳐진 듯 하다. 길을 잃은 것은 아닌지 걱정의 소리와 한숨이 나기 시작했지만 오히려 서로에게 힘내자고 격려하며 한 발 두 발 힘겹게 옮기다 보니 멀리 아래쪽으로 불빛이 보인다. 마침 우리의 소리를 들은 듯 선발대가 반겨 부르고 있다. 모두 환호성을 지르며 무사히 도착한 것을 함께 기뻐하였다. 시계를 볼 수는 없었지만 대략 9시경이지 않았나 싶다. 처음의 걱정이 기우라는 것을 보여주듯이 모두 대단한 의지로 장장 9시간 이상의 산행을 쉴 새 없이 마치고 첫날 숙박지인 연하천 대피소(산장)에 도착한 것이다. 우리의 지리산 등반대 진짜로 화이팅! 이다.
산장은 숙소인 조그마한 콘크리트 돌벽집 한 채와 허름한 취사장 하나가 전부였다. 비가 와서 그런지 더욱더 어둡고 칙칙하고, 그러니 어쩌겠나, 이 깊은 산중에서 그래도 우리를 맞이해 주는 고맙기만 한 곳이 아닌가! 늦은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정해진 순번대로 짐에서 쌀과 반찬을 꺼내고, 밥을 지어 불편하나마 둘러서서(앉을 자리가 없음) 수저를 드니 그 맛이야 말할 것도 없는 만찬이다. 노고단에서의 점심 식사 후 악전고투 끝에 맞이하는 허기진 저녁 식사이니 더욱 그러하다. 남달리 늦은 식사라 주변에 자리가 나면서 겨우 바닥에 마주 앉을 수 있었다. 쥐포 몇 마리 구워서 잘게 찢어 놓고 소주잔을 기울이니 그 나름의 운치가 있다. 어쨌거나 첫날 일정을 무사히 마친 것에 대해 서로를 격려하고 함께 기뻐하며 이야기꽃을 피우자니 주변의 사람들은 벌써 숙소로 들어간 듯하고, 술 한 잔의 인사로 산장지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의 화기애해한 분위기 속으로 들어앉았다. 꽁지머리에 수염을 기르고 있으니 풍기는 외양이 일단 산사람인데다 7월의 천둥번개가 심하던 어느 날 전화를 받다가 벼락을 맞아 뉴스에 나왔고 낙뢰가 지나간 자국이 이직도 몸에 남아있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지리산과 산행 이야기를 풀어내니 일행이 모두 감탄을 하며 완전히 분위기의 배턴을 넘겨주었다. (우리 일행들이 좀 감탄을 거하게 하는 편임.^^) 연하천 산장은 적십자사에서 운영하며 교대로 파견하는데 자신은 어찌하다가 70일째 산장에 머물고 있고, 곧 백두대간 종주산행을 할 것이라고 한다. 분위기가 약간의 신비감에 도인의 기운이 내렸는지 손금 이야기로 넘어서면서 어째 쫌....... 거기까지가 좋았는데... 아무튼 산사람의 우직함과 순수함을 느끼며 기울인 술잔은 몇 순배가 돌았는데도 산의 기운인지 취기는 전혀 오르지 않았다. 산장지기의 빽(?)으로 소등이 늦어졌고 산장에 든 사람들 중에 우리가 가장 늦게 잠자리에 든 듯하다. 침낭 하나에 간신히 몸을 끼울 만큼의 공간에 지친 몸을 뉘이고 깊은 산중에서의 첫 밤은 그렇게 깊어간다.
얼마나 잤을까, 귀를 자극하는 소리에 눈을 떠 보니 참말로 가관이다. 양 옆에서 갖은 종류의 코골이를 선보이며 주거니 받거니 돌림노래를 하는데다 여기저기서 엇박에 불협화음까지 총동원하고 있었다. 잠이 완전히 깨고 말았다. 그런데 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창이 훤하게 밝은 것이 순간적으로 날씨가? 시계를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날씨는 개이고 날이 밝아 온 것이라 생각한 나는 수건을 들고 자리에서 몸을 빼어 밖으로 나왔다.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곧바로 눈 위에서 휘영청 밝은 달이 솜털 구름을 깔고서 무어라 표현할 수도 없는 아름다운 스펙트럼의 커다란 달무리를 만들며 쑥 들어 왔기 때문이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달을 쫓다보니 구름을 벗어버린 순백의 온전한 달과 자꾸만 구름 속으로 숨어버리며 달무리를 만드는 달과 한동안 그러고 숨바꼭질 하며 논 듯하다. 인기척에 흠칫 돌아보니 나하고 비슷한 상황인 듯한 남자 등산객이 나오면서 나와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산에 오르면서부터 아주 자연스럽게 몸에 베어버린 인사말이 오갔다. 그러고 보니 이 또한 산이 우리에게 주는 마음의 선물인 듯 하다. 어쩌다 구면의 이웃 사람을 만나도 멋쩍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낯모르는 사람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것이다. 서로 대화를 할 분위기는 아니어서 다시금 자세를 편안하게 고쳐 앉고 하늘을 보자니 달에 가려 있던 별들이 구름 사이사이로 고개를 내밀며 수줍은 듯 빛을 내고 있다. 띄엄띄엄 하나 씩 보여서 별자리는 알 수 없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편하게(?) 별 하나에 마음을 줄 수 있었다. 대략 새벽 서너시는 된 것 같은데 아침을 기다리자니 꽤나 쌀쌀한 공기에 너무 길고 그렇다고 숙소로 다시 들어가자니... 물마시고, 세수 하며 달밤의 체조도 하며 한 동안 망설이다가 결국 비좁은 자리로 다시 돌아와 아침을 기다렸다.
깜빡 잠이 들었던지 일행 중 한명이 나를 깨우며 나갔는데 무슨 말인지 잘 못듣고 주변 정리를 하고 나가보니 어느 순간엔가 몇 분이 언덕에서 일출과 구름바다를 보고 신이 난 듯 밝은 얼굴로 돌아오고 있었다.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화창하게 개인 날씨의 아침 공기와 간밤에 있었던 나 혼자만의 정취를 떠올리며 흐뭇한 마음으로 아침을 준비한다. 나무사이의 밝은 햇살 틈으로 멀리 우뚝 서있는 천왕봉을 보면서 숨 한 번 더 크게 들이쉬고... 오늘은 장터목 산장 까지 가야하는데 어제처럼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 일정이라는 대장의 말에 다들 여유 있는 아침을 맞이한다. 산상에서 세 번째 식사를 맞이하다 보니 누구랄 것도 없이 음식을 남기지 않는 것은 기본이요, 절대로 설거지를 할 수 없는 불문율에 휴지로 닦아서 정리한 후 내가 만든 쓰레기는 반드시 내가 되가져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아주 간혹 예외의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자연과 인간이 더불어 사는 기본이 만들어져 가는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하였다. 오늘도 살아 숨쉬는 지리산의 품으로 힘차게 출발이다.
( 연하천 산장의 일출 )
삼일 내내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에도 불구하고 강행할 수밖에 없는 산행이었기에 내가 삼대에 걸쳐 덕을 쌓아 내린 축복이라는 우스개 소리도 곧이들을 정도로 정말로 날씨는 쾌청하였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과 발걸음으로 숲 길을 헤쳐 나가며 틈틈이 내려 보이는 발아래 경치에 양팔을 활짝 펴고 아래로부터 치솟아오는 바람을 맞이하며 탄성을 지른다. 도대체가 첩첩의 산자락이 몇 겹인지 세다가 잊을 정도다.사방을 둘러보아도 온통 산자락 밖에 보이지 않는다. 오늘도 어김없이 사진기는 분주하다. 형제봉일까? 가는 길에 나타난 기암괴석과 독야청청 바위 위의 구상나무, 소나무, 그리고 고사목이 펼쳐내는 풍경은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기에 충분하였다. 조상들의 산수화에서 본 듯한, 어디 기막힌 풍경 사진전에서나 본 듯한, 거짓말 조금 보태서 중국 황산의 기암절벽을 모아서 떼다 놓은 듯한 절경에 빠져서 사진기의 구도를 요리조리 잡아 가며 한동안 머무르며 감상을 한다. 기암절벽의 절경에서 발아래 펼쳐진 구름바다와 그 바다 수평선 건너 까마득히 보이는 산봉우리를 보고 있자니 참으로 인간사 새옹지마라 할 밖에...
눈앞에 펼쳐진 절경들을 만끽하고 발걸음을 재촉 할 즈음에 앞서 간 일행 한분이 기다리고 있음직 한데 계속 보이지 않아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하였고, 본대 중에서도 몸이 무거워 지면서 조금씩 뒤로 쳐지는 분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같은 길을 산행하는 다른 팀들에 비해 일정이 밀리고 있긴 하지만 우리는 보조를 맞추면서 앞으로 앞으로 힘겨운 산행 길을 이어간다. 시간이 갈수록 대형은 선두와 후미 또는 중간 그룹도 생기기는 하였지만 모두가 한마음으로 잘 견뎌가고 있다. 형제봉을 지나서 앞서간 일행은 벽소령에서 만날 수 있었다. 워낙 체력이 좋고 씩씩한 모습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큰 걱정은 아니었지만 안심이 되었다. 오히려 당신이 오래 동안 기다려도 오지 않는 우리를 걱정하고 계셨다고 한다. 평소에 가장 열심히 몸을 만들면서 준비하신 분이라 흐트러진 모습을 좀처럼 볼 수 없었다. 솔직히 단 한명의 남자인 나는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해도 억수로 힘들었는데...^^
잠시 숨을 돌리고 일정을 살펴보니 벽소령 산장에서 점심을 먹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고 그렇다고 세석 산장 까지 가려면 너무나도 늦는 애매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최대한 시간도 절약하며 합리적인 일정 운영을 위하여 내가 혼자 다음 샘까지 먼저 선발로 가서 식사 준비를 해놓기로 하였다. 배낭을 메고 등산화 끈을 고쳐 맨 다음 지금까지 일행의 맨 뒤에서 걷던 걸음과는 사뭇 다른 걸음으로 산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산행 이틀 째, 간혹 일행 없이 혼자 등산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은 무슨 사연과 고민이 그렇게 많을까? ’ 생각하며 관심어린 눈길을 주고는 했는데 이제 비록 구간이기는 하지만 내가 그런 상황으로 보이게 되었다. 조금은 색다른 경험에 약간 흥분된 기분이 들기도 하였다. 걷는 동안에 서로를 의지하고 배려하며 한마음으로 여럿이 오르는 산행도 좋지만, 혼자서 산행을 하면 오로지 산과 나 만의 대화로 같은 길을 걷고 있다하더라도 전혀 다른 길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처럼 몸에 땀이 젖어 들 즈음 목표했던 샘에 도착하였다. 말할 것도 없이 샘물은 정말로 시원하고 맛이 있다. 한바가지를 들이키고 머리에 붓고 나니 산바람과 함께 온몸과 속을 다 깨끗하게 씻어내는 상쾌한 기분이 든다. 아직도 이 느낌은 그 무엇에 비할 수 있는지 찾지 못하였다. 부랴부랴 쌀을 씻어 물을 맞추고, 돌멩이를 뚜껑에 얹은 코펠을 버너에 올리고, 찌개 끓일 물을 준비해 놓고.... 김을 쏘아내며 밥이 익을 즈음 중발대(?)와 후발대가 차례로 도착하여 찌개를 만들어서 점심 식사를 한다. 물론 음식과 쓰레기는 하나도 남김없이...
또다시 오르락 내리락 가쁜 숨과 무거운 다리로 걷고 또 걷고.... 파란 하늘이 이마의 땀을 훔쳐내는 손위로 보이면서 이내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봉우리에 올라서니 바람이 물린 구름사이로 까마득하게 멀리 길과 마을이 보이면서 겹겹의 산자락이 한눈에 들어온다. 덕평봉이다. 잠시 다리를 쉬며 시원하게 땀을 식혀주는 바람을 온 몸으로 느끼며 양떼가 움직이듯이 바람을 타고 있는 구름을 내려 보고 있으니 잠시 신선이라도 된 기분이다. 불쑥 튀어 나온 바위 위에 올라서서 세상을 발아래 굽어보며 할 수 있는 만큼의 가장 큰 호흡으로 속을 비우고는 깨끗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모두를 품어내는 산의 기를 마셔본다. 파란 하늘과 탁 트인 시야에 들어오는 경치를 놓칠세라 카메라의 셔터가 바쁘다. 바위에 붙은 몸이 떨어지려하지 않지만 억지로 일으켜 길을 재촉하자니 오늘도 역시 같은 길을 가고 있는 등산객들에게 조금씩 뒤쳐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유 있는 일정이라 생각했는데 시간 보다는 몸이 발목을 잡기 시작하며 목적한 장터목 산장까지가 걱정이 되지만 이제부터는 모두가 함께 가야할 길이기에 서로 호흡을 맞추면서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대단한 의지력으로 버텨오고는 있었지만 잠깐의 휴식과 의지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현실이 다가오고 있었다. 애써 가리고는 있지만 힘들다는 정도가 아니라 통증을 견뎌내고 있는 일행들이 있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음을 모두는 알고 있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장이 일렀던 가장 힘든 코스중의 하나가 들어있는 구간이라 더욱 긴장된다. 산자락을 돌아선 순간 눈앞에 불쑥 산이 서 있다. 고개를 치켜들어 올려보면서 모두는 “여기구나!” 하고 직감하였다. 그런데 철과 나무 구조물로 끝까지 계단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평소 같으면 그저 인간 중심의 발상에 눈살을 찌푸렸을 텐데 오늘의 우리에게는 마냥 고맙기만 하다.(역시, 어쩔 수 없는..^^) 계단을 오르면서 밧줄하나 달랑 드리워진 지른 듯한 급경사를 상상하며 한 번 더..... 얼마나 걸었을까? 또 하나의 봉우리를(영신봉) 넘어서니 지금까지와는 좀 색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볼쑥볼쑥 솟은 나무들이 줄어들면서 쑥부쟁이와 구절초, 산오리풀 등의 야생화 군이 보이고 이어서 멀리 매끄러운 선을 뽐내는 산등성이, 마치 풍경화의 구도를 잡는 듯 오솔길 같은 등산로가 초원의 언덕을 둘로 가르는 정겨운 경치를 배경으로 눈앞에는 스위스 별장 같은 이국적인 건물, 모두가 저마다의 마음에 풍경화 한 폭 씩 근사하게 그리며 가만히 서 있었다. 세석평전이다.
(김수철의 '먼길' )
첫댓글 꼭한번은 살아있어 가보고 싶은곳 지리산 자락을 거슬러 나를 만나러 가는길이 아닌가합니다.. 고생 많은셨겠군요....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