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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자를 그리며 한 바퀴 휘도는 산자락 끄트머리에 빙계계곡이 있다.
U자의 중앙으로 난 도로의 고갯마루는 큰한티재(445m)로, 두 개의 산줄기를 이어주는 곳.
한쪽은 높이가 의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암산(879m)이고,다른 한쪽은 북두산(598m) 능선이다.
북두산과 선암산의 주능선을 잇는 종주산행을 하는 이도 있지만 우리는 큰한티재에서 끊었다.
선암산은 부드러운 토산이 대부분이지만 북두산은 주로 암봉과 암릉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이번에 우리는 암릉과 조망이 좋은 큰한티재 북쪽 세 개 봉인 북두산,복두산,매봉산을 오르기로 했다.
산 정상부는 조망이 별로지만 너럭바위~전망바위 구간은 깎아지른 암봉과 암릉,그리고 분재 같은 소나무들이 운치를 더한다.
진행방향으로 보이는 비봉산~금성산 하늘금도 장관이고,왼쪽으로 구름속에 살짝 덮혀있는 뱀산~선암산 능선도 신비롭다.
이 구간은 송이철이면 입산이 통제되는 지역.
날머리인 빙계계곡은 의성군 군립공원으로서 입구에서부터 2km에 걸쳐 펼쳐져 있고, 크고작은 빙혈과 풍혈이 산재해 있다.
대리석으로 만든 빙혈 동굴엔 한여름에도 얼음이 얼어 있으며 평균 3~4℃의 온도를 유지한다.
빙혈 위쪽의 풍혈엔 어른 한 명이 들어갈 정도의 좁은 동굴에 에어컨 바람처럼 시원한 바람이 뿜어져 나온다.
빙혈 가까이 빙산사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만 있고,빙산사지 오층석탑(보물 제327호)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또한 이곳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이야기가 얽힌 곳이기도 하다.
춘원 이광수의 장편소설 '원효대사'에서 요석공주가 아들 설총을 데리고 무더운 여름날 지아비 원효대사를 찾아 빙계계곡에 이르렀을 때
마을 사람이 "빙산사 빙혈 속에 기도하는 스님이 있으며 그 빙혈을 지나 풍혈이 있는데 그 끝이 저승까지 닿았다고도 한다”고 일러주었다.
공주는 좁은 굴속을 더듬더듬 기어 들어가 원효대사를 부르니 굴속이 웅하고 울었다고 한다.
이처럼 먼 옛날 빙계계곡은 거대한 동굴이었으며, 대지진으로 동굴이 무너지면서 풍혈, 빙혈 구멍이 지금같이 좁아졌다고 한다.
산행코스: 큰한티재-매봉산-복두산이정표-전망바위(암봉)-복두산-전망 너럭바위-북두산-빙계온천갈림길-356봉-빙계계곡-빙혈(오층석탑)-빙계서원(4시간)
네비엔 "경북 의성군 가음면 현리리 산53"을 입력하여 큰한티재에 멈춘다.큰한티재는 의성군 가음면과 군위군 고로면의 경계.
우리 차는 북영천에서 청송방면으로 가다 의성군으로 진행하여 아미산에서 우로 방향을 틀어 큰한티재에 도착을 하였다.
고개(큰한티재)엔 젊은 부부가 차를 대고 지키고 섰다. 말은 하지 않아도 선암산 방향 송이를 지키기 위하여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듯하다.
선암산 방향으로 현수막이 가로막고 있어...
살짝 당겨보니 입산금지 현수막이다.
북두산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B팀은 빙계온천에서 하차하여 북두산을 찍고 빙계계곡으로 내려오기로 하였다.
큰한티재의 이정표 날개
큰한티재 이정표
임도수준의 진입로는...
묘지까지이고 이후 제법 된비알의 오름길을 치고 오르자 이내 매봉산에 닿는다.
치고 오른 고도는 약 150m이고,시간은 불과 20여분.
우측으로 조망이 트이기 시작한다.
가까이 구름 덮어쓴 구무산(676) 뒤로 보현지맥인 듯.
계속 A팀을 따라붙는 '백하수오'님도 한 포즈.
우측으론 계속 지맥이 달린다.
중간에 두마재 갈림길(선암지맥)을 만나 헷갈렸지만 능선을 고수하다 '복두산 2.0km' 이정표에서 거의 90도를 꺾으며 우측 내리막으로 쏟아진다.
이정표 밑엔 날개 떨어진 복두산 갈림길과 매봉산 2.7km 이정표가 기대어 있다.
한 차례 내리막을 내려서다 다시 고도를 치고 오르면 만나는 전망바위.
조망이 트이면서 지나온 매봉산과...
구무산(?)인가? 록두산(?)인가? 긴가민가한다.
기똥찬 전망바위에 퍼질고 앉았다.
한참이나 머물다 다시 진행한 암봉에서...
다시 주위를 둘러본다.
진행할 마루금이 울퉁불퉁 이어져 달리고...
좌측으로 선암산 뱀산의 마루금이 구름에 가려 일직선을 그리고 있다.
암봉을 우회하여...
복두산에 올라섰다.
우리는 복두산 정상에서 정상주를 곁들인 점심식사를 한다.
다시 출발을 하면서 시야가득 들어오는 좌측 맞은 편의 선암산라인. 구름띠는 딱 700m까지 내려 앉았나보다.
유달리 껍질이 움푹 패인 소나무. 상채기는 아닌 듯한데...
산행내내 시야가 트이는 좌측으로 선암산 구름띠가 하늘금을 긋고 있다.
선암산을 보고 '두고보자 산'이라 한다는데,그래 우리도 두고볼 일이 있을까?
비봉산이 모습을 드러내고...
다시 올라선 전망바위에선 구름띠가 선명한 선암산이...
그리고 진행할 능선 좌측 멀리 이제 막 깨어난 산맥들이 요동친다.
진행할 능선.
또 만난 전망바위.
북두산은 아직 추석단장을 못한 무덤 한 기가 후손의 손길을 기다리고...
좌우사방 조망은 꽉 막혔다.
이정표에서 온천삼거리 방향을 따른다.
그리곤 산길을 내려서다 잠깐 올라선 빙계온천 갈림길.
말뚝이 이정목 위에...
조그만 이정표가 있지만 빙계계곡 표시는 없넹.
오전에 차가 의성으로 올라올 땐 내내 비가 내렸다. 요즘 한마음의 산행은 이렇게 비가 오다가도 산 밑에만 접근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비가 그친다.
비를 두려워하는 산꾼들은 집에서 쉬리라. 푸른 하늘만 아름다운 줄 알았는데,이렇게 먹구름 잔뜩 낀 하늘도 아름답다는 걸 알았다.
먹구름 아래엔 가을이 영글어 가고 있다.
대지와 하늘을 가르고 있는 건 먹구름.
좌측 금성산과 우측 비봉산이 지척이다.
기울어진 이정표
빙계계곡 이정표
방금 멧돼지 식구들이 진흙 목욕을 하고 갔다.
여기도 멧돼지들의 목욕탕과 셀프 맛사지 기구.
이제 막 눈을 떠는 미옥씨의 '나는 자연인이다.' 이기 거시기 맞나? 모두가 쩔레쩔레다.
돌아본 좌측의 북두산과 우측 길건너 구름모자 쓴 선암산.
다시 전망대에 선다.
이정표
와~~금성산 비봉산이 지척이고,바로 아래엔 빙계계곡 서원마을이 보인다.
금성산 비봉산은 벌판위에 매우 도드라진 모습이다.
빙계계곡의 물돌이에 한반도를 닮은 모습. 북간도가 아주 발달해 있다.
좌측 다리 앞에 빙계서원인 듯하여...
살짝 당겨보았더니 빙계서원 맞다.
바위틈에 무성히 자라나는 부처손.
무지개다리를 건넌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우측으로 '빙혈'과 '빙산사 오층석탑'안내판이 있고...
바로 위에 오층석탑과 빙혈이 가까이 붙어 있다.
'빙산사지 오층석탑'은 경상북도의 8군데 아름다운 경치 가운데 하나(경북팔승지일)인 보현산 줄기 빙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빙산사지로 알려져 있지만 오층석탑만이 절이 있었다는 증거를 말하고,우리는 아주 잘 생긴 오층석탑을 돌아본다.
보물 제327호인 '의성 빙산사지 오층석탑 (義城 氷山寺址 五層石塔)'
돌을 벽돌 크기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으로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국보 제77호)을 모방한 것이다.
탑의 형태는 1층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2층 이상부터 몸돌은 그 높이가 1층에 비해 반 이상 줄었으며, 5개의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각 4단씩이다.
지붕돌의 경사진 면은 각 5단의 층으로 이루어졌고,정상의 머리장식부분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만 남아 있다.
탑의 조성시기는 통일신라 후기∼고려 전기 사이로 추정된다. 의성탑리오층석탑에 비하여 격이 떨어지나 모전석탑으로서 아름다운 작품이다.
탑의 토대가 되는 바닥돌은 16개의 돌로 이루어졌다.
기단의 가운뎃돌은 기둥과 면을 이루는 석재를 딴 돌로 하여 15개의 돌로 구성하였다.
기단의 맨윗돌은 8개의 돌로 되어 있고 그 위로 탑신을 받치기 위해 괴임을 높게 얹었다.
탑신부를 보면 1층 몸돌은 네 모서리에 딴 돌로 모서리기둥을 세우고 정면에 네모진 공간을 마련해 놓았는데 이 공간은 불상 등을 모셔두는 용도로 쓰였다.
안내문엔 나말여초(羅末麗初)의 높이 8.15m의 오층 모전석탑이라고 한다.
국보인 '탑리 오층석탑'을 모방하였다고 하는데,'하나의 전형(典型)은 유행(流行)을 낳고, 하나의 명작(名作)은 아류(亞流)를 낳는다.'고 하지 않았나?
억불정책(抑佛政策)으로 조선 왕조 500년은 불교가 탄압받던 시절. 빙산사(氷山寺)는 태종 6년(1406)에 왕명으로 폐사되었다고 한다.
스토리텔링으로 환생한 인(仁)자 바위(인암 仁巖). 인(仁)자를 닮았나?
춘원 이광수 선생의 '원효대사'에 빙혈이 묘사되고 있다.
빙혈(氷穴)에 들린다.
난해한 그림은 부적이 맞고,위에 태을영부(太乙靈符)라 적혀있다. 다시 ' 선자흥악자망(善者興惡者亡),익자생손자사(益者生損者死)'라 적혀있는데.
무슨 주술같기도 하지만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귀착된다.
太淸新殿創氷山河漢 昭回列宿環五色寶光 連下土三台華蓋擁中
間재齋心十日超宮陛祝 壽千年拜帝顔願使風 調仍雨順謁然和氣滿 人寰
(辛引 孫이 太一 殿을 創建하고 世宗 十六年 上元一에 지은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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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리 입구에 있는 풍혈은 명종 8년(1553) 지진으로 남쪽산괴 이어져 있던 빙산의 일부가 붕괴하여 앞 하천과 같이 생겨 났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하천원출 빙산이라 하였고,신인손의 시 '태일전'에 ... 그 사이에 대지진이 있었고,이와같은 지변은 지진의 결과로서만 생겨난다고...
오층석탑의 '감실불좌대(龕室佛座臺)'는 이렇게 빙혈의 입구에 세멘트에 감겨 화석(?)으로 보존되고 있다.
임란 때 왜넘들이 금불상은 훔쳐가고 대좌만 버려둔 것을 보존하고 있다고...
조선왕조실록 세종 7년(1425년) 7월 3일 세종대왕이 이조에 전지(傳旨)한 내용을 보면, "경상도 의성잠실 감고(監考) 전 부사정 장영계는 맡은 임무에
부지런하여 고치 생산량이 전보다 갑절이나 되니, 다시 복직시켜 뒷사람을 권장하도록 하라"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다 이후로 잠실로 사용하지 않았는지, 1910년 11월 25일자 조선총독부 관보에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서원동에 있는 풍혈의 구조 개수공사와 시설이
완료되어 하추잠종(夏秋蠶種)을 저장키로 하였다.
이 풍혈은 1908년 발견된 것으로 빙산(氷山) 풍혈(風穴)이라 이름 붙이고 잠종(누에씨)의 저장장소로 연구하여 왔던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기록
무지개다리를 내려서며...
'경북명승지일(慶北名勝之一)' 표석과 '빙계동(氷溪洞)'각자를 찾아본다.
좌측 계곡 바위 위에 우뚝 선 표석이 보이고,그 좌측 자연석 암반에 이끼가 끼어 형체를 알 수 없는 빙계동 각자를 더듬어 본다.
표석 좌측 암반에 희미하게 가믐되는 빙계동 각자는 임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썼다고 알려져 있다.
'경북명승지일'
그리고 희미한 각자를 더듬는다. 우측으로 부터 비스듬히 좌측 아래로 쓰여져 있다.
조금 더 당겨 보니 빙(氷)자와 동(洞)자는 그런대로 식별이 가능한데,계(溪)자는 도무지...
.각도를 반듯하게 잡아봤다.
에쿠~ 그래서 '신기루'에서 <펌>을 해 왔다.
길가 바위에도 아무개아무개 이름이 새겨져 있고,무슨무슨 친목회원일동이라 새겨져 있다.
돌아본 '경북명승지일' 비석과 '빙계동' 각자바위 그리고 무지개다리.
재현된 물레방아는 돌고 돌아...
빙계서원을 찾아간다.
빙계서원(氷溪書院)은 신원록(申元祿)이 그의 스승 주세붕(周世鵬)이 우리나라 최초로 백운동에 서원을 세워 인재를 양성할 때,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돌아와 백씨인 정은 신원복(申元福) 과 상의하여 인재교육을 위해 장천(長川) 위에다 터를 잡아 서원을 짓기 시작했다.
1566년(명종 11) 장천서원(長川書院)이 의성읍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자 7년 뒤인 1600년(선조 33) 유림에서 현재 위치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이듬해 원묘(院廟)를 준공하고 원액(院額)을 ‘빙계(氷溪)’로 고쳤다.
이 때 이언적을 김안국과 함께 제향 하였으며, 1689년(숙종 15)에는 향리의 선비들이 진소(陳疏)하여 의성과 관련이 깊은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장현광(張顯光) 등을 추향하게 되었다.
그 뒤 1814년(순조 14)에 원묘(院廟)를 중수하였다.
고종 때 훼철된 후 빈터만 남아 있다가 유교문화권 관광개발사업으로 2006년에 복원되었다.
문은 잠겨있어 담넘어 카메라를 집어넣어 서원의 현판을 담는다. 이 건물은 빙계서원의 강당인 명교당(明敎堂).
명교당은 정면 5칸,측면 2칸 반으로,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로,양쪽으로 각각 1칸씩 방으로 되어있다.
2층 문루엔 빙월루(氷月樓) 현판이 걸렸고,문은 굳게 잠겼다.
우측으론 동재(東齋)인 학이재(學而齋)가...
당겨본 학이재 현판.
좌측 담넘어론...
서재(西齋)인 시습재(時習齋)를 당기고...
책이 있는 다락인 서루(書樓) 편액과...
공부방인 동몽재(童蒙齋) 편액도 실눈으로 반쯤 감고 당긴다.
공수청의 열린 문으로 들어와 나란히 걸린...
음식을 만드는 공수청(公需廳)과...
전사청(典祀廳)현판을 담는다. 전사청은 제사를 쓸 음식을 준비하고, 제사를 담당하는 전사관(典祀官)이 업무를 보는 곳이다
공수청에서 까치발을 하고,빙계서원 안을 들여다 본다.
빙계서원 안내판.
빙계2교를 건너 자연 표석이 우뚝한 '경북명승지일'을 쳐다본다.
빙계계곡에서 이 글귀를 각각 크기는 다르지만 세군데에서 똑같은 글체를 보았다.
버스로 돌아가면서 서원의 제일 위에 어렴풋한 숭덕사(崇德祠) 현판을 올려다 보다 바짝 당겨본다.
서원 제일 상단의 내삼문 안에 있는 사당.
빗방울이 쏟아진다. 입산을 하면서 멈춘 빗방울이 하산을 하면서 다시 내리는 모양새다.
산행을 마치고 빙계계곡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권사장님.
빙계계곡은 유불도(儒佛道) 또는 유불선(儒佛仙) 삼교(三敎)가 공존하는 세상이였다.
빙계서원은 전자요,빙산사 오층석탑은 중자이며,빙혈의 깨우침은 후자이다.
나들이의 산행궤적엔 빙혈과 오층석탑 탐방을 포함하여 약 8.5km로서 4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빙계팔경]
★ 제1경 빙혈(氷穴) : 마을 뒷산 산기슭의 바위 아래 너덧 명이 들어 설수 있는 방 한칸 만한 넓이의 공간이다.
★제2경 풍혈(風穴) : 洞口 도로 변 바위와 바위 사이에 깊은 곳으로 여름엔 찬바람이, 겨울은 훈훈한 더운 바람이 일고 있다.
★제3경 인암(仁岩) : 옛날 서원터 앞에 위치한 큰 바위 전면에는 햇빛으로 인해 정오가 되면 인(仁)자 모양이 나타난다.
★제4경 의각(義閣) : 임진란 때 윤은보가 모재 김안국, 회재 이언적 두 분의 위패를 청송 주왕산으로 모셔 들어가 7년 동안 향화를 이어와 잘 피난시켰다가
평란 뒤 서원에 안주케 했다. 그 공으로 의사(義士)라 불리고, 비와 이 전각을 세워 의사각(義士閣) 이라 부른다.
★제5경 수대(물레방아) : 시냇물을 이용해 매일 많은 곡식을 찧던 규모 큰 물레방아가 있었지만 오래 전 자취를 잃어 재현하였다.
★제6경 빙산사지오층석탑(石塔) : 보물 제327호로 빙산사 구지(氷山寺 舊址)에 당시 (신라말 내지 고려초) 이뤄진 오층석탑.
이 탑은 인근에 있는 탑리오층석탑을 닮았는데 탱주 감싱옥개받침 낙수면등이 간략화 되었다.
한편 감실대좌석은 빙혈입구에 시멘트로 고정시켜 보전되고 있다.
★제7경 불정(佛頂) : 불정봉(佛頂峰) 꼭대기 북쪽능선에는 움푹 파여서 못을 이룬 곳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그 옛날 부처님과 용이 물길을 놓고 다투는 와중에 쇠스랑으로 이곳을 찍어 자국이 남아 생긴 연못이라고 전하고 있다.
★제8경 용추(龍湫) : 절벽 밑 시냇물이 굽이치는 곳에 깊은 웅덩이가 있었다는데 현재 거의 메워졌다.
부처님과 싸운 용의 머리가 부딪쳐 파인 곳이라 하며,일설에는 부처님이 아니라 장수와 용이 싸우다 생긴 흔적이라고 전하고 있다.
'冰溪書院記 :古有太一殼, 又有冰山寺, 不知刱於何代. 而成化戊戌, 殼移泰安郡, 萬曆壬辰, 寺亦火于兵'
<빙계서원기 : 옛날에 태일각(太一殼)이 있었고 또 빙산사(冰山寺)가 있었는데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수가 없다.
성종9년인 1478(成化 戊戌)년에 太一殼은 태안군으로 옮겼다. 선조 25인 1592 (萬曆 壬辰 )년 임진왜란때 冰山寺는 화재로 소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