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색을 쓰지 않고 주로 선으로 그리는 회화표현'
소묘를 정의하는 말이다. 연극을 보기 전 이 정의를 가지고 제목만으로 연극을 유추해 본 결과, 채색을 쓰지 않았다는건 그들이 연기하는 사랑은 비록 본질상 연기이지만 꾸미거나 과장하지 않은 일상적인 이야기로만 이루어진 선으로 만들어진 연극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여기에서 생각을 접고 연극에 임했다.
다섯개의 소묘 중 첫번째 이야기는 노총각과 노처녀의 이야기이다. 초등학교 동창생인 그들은 오랜 친구답게 과거의 약점을 들추어내며 서로 약올리며 다툰다. 남*녀가 한 방안에 같이 있다는 것이 방안의 분위기를 조심스럽고, 따뜻하게 만들법도한데, 이들은 시종일관 장난이다. 하지만, 서로가 노총각, 노처녀인지라 농담하는 중간중간에도 상대방의 사랑의 감정을 떠보는 시도가 계속 나타난다. 그들의 행동이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보았을 때, 그들의 사랑은 마치 물을 주기만을 기다리는 씨앗과 같아 보였다. 물을 주면 이쁘게 피어날 씨앗같이.
두번째 이야기는 다른 방안의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기 위해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온 남자와 상처를 입은채 사랑을 끝내고 자살을 시도하는 여자. 그들은 각기 다른 방에 있다. 사랑을 시작하려는 남자와 사랑을 끝낸 여자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다가왔지만, 마지막 장면인 서로 등을 부딪히며 '누구?'라고 하는 장면은 뭔가 다른것을 암시하고 있는거 같았다. 그것은 두 사람이 떨어져 있는 방에 각각 있는것 같지만, 결국 둘은 한 방에 머물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하나의 방에는 시작하는 사랑이, 다른 방에는 끝난 사랑이 들어가 있어서 서로는 합쳐질 수 없는 1cm의 N극과 다른 1cm의 N극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원래 하나의 2cm의 N극이라는 걸 암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했다. 누군가 사랑을 그리고자 한다면 2cm의 N극을 그려야 그것이 진정 더하지도 빼지도 않은 사랑에 관한 소묘 그림일 것이라 생각했다.
세번째 이야기는 거시기한 사랑. 고향서 선장과 싸움을 하고 서울로 도피해 온 남편과 뒷 수습에 고생하는 부인의 이야기이다. 전체적으로 전라도 바다 사나이의 도발적이지 않은 유머와 그 부인의 귀여우면서도(?) 소탈한 연기가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생일 선물이라고 남편이 준 스카프를 보며 '뱃 놈 안목하긴'하며 씁쓸해 하더니, 거울 앞에선 '잘 어울리네'하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는 그 나름대로의 순박함에 소녀같이 보였다.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거 같으면서도, 다정히 귀를 파주는 그들의 거시기한 행동속에서도 거시기한 애정이 들어나는 그들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사랑은 다음과 같아 보였다. 걸을때나 뛸때나 항상 땅을 두드리는 소리를 내지만 항상 붙어있는 발과 땅의 사랑같이.
네번째는 죽음을 눈앞에 둔 남편과 이를 무뚝뚝하게 지켜보지만 가슴속에는 100개의 나이테 만큼의 슬픔을 간직한 부인의 이야기이다. 처음엔, 남편의 행동을 보며 '정신병자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계속 지켜보면서 죽음을 목전에 두면 저럴수도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남편을 옆에 둔 부인의 심정도 공감할 수 있었다. 자신을 화장한 후 바로 재혼하라는 남편과 그러겠다는 부인의 안타까움이 묻어 있지만 들어내지 않은채 수평을 유지하는 목소리는 간접적으로 죽음을 느끼게 했다. 그런 그들의 사랑은 낙엽잎을 떨어뜨려 보내며 안으로는 나이테의 상처가 새겨지지만 겉으로는 전혀 그런 아픔의 비명이 새어 나오지 않는 나무의 사랑같았다.
마지막 이야기는 각각 배우자와 사별한 후 자식내외와 살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이다. 한 고향에서 자랐던 그들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사랑을 시작한다. 나이에 맞지않게 어린 아이들같이 행동하는 모습에서 미소가 지어졌고, '늙은 부부 이야기'가 눈 앞에 스쳐 지나갔다.
위의 방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진 다섯가지의 사랑에 관한 소묘를 보면서, 상당히 현실적인 소재라고 느꼈고, 소재를 표현함에 있어서도 매우 리얼리즘적이었다고 생각했다.
남자와 여자가 있는 공간. 그 공간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지우면 과연 그 공간은 어떠한 의미가 있을지 의심이 든다. 그리고 방안이라는 소재 밖의 다양한 공간에는 얼마나 많은 사랑에 관한 소묘들이 있을까 기대가 된다.
끝으로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순수한 마음의 상태이고 그것을 나타내는데에 있어서도 꾸밈이 없어야 한다는 내 주관적인 관점에서 '소묘'라는 단어는 이러한 것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 끝으로 배우들과 사진을 찍게되는 경험을 통해 '소묘'로써의 배우들을 접할 기회를 조금이라도 가졌다는 것이 앞으로 기억에 매우 남을거 같다.
첫댓글 소묘...^^ 기억으로 남을 수있는 공연..그 말이 참 가슴 따뜻하네여..^^
사랑이란 단어를 지우면 우리의 모든 공간은 어떤 의미가 있을 지, 정말 그렇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