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에 나타난 기도③
(「가톨릭교회 교리서」 2578~2580항)
기도할수록 교회 공동체의 자녀가 된다
기도하는 목적은 아브라함처럼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되고 모세처럼 개인의 소명을 깨닫고 완수하기 위함입니다. 이번에는 사무엘과 다윗, 솔로몬 임금의 기도를 통해 기도의 공동체성에 대해 살펴보려 합니다.
사무엘 상권에 보면 하느님께서 어린 사무엘을 어떤 소명을 위해 부르십니다. 사무엘은 세 번째 부르심에서야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10)라고 응답합니다. 그런데 이 응답은 사무엘의 스승인 엘리가 알려준 것입니다.(1사무 3,9) 사무엘이 주님께 개별적으로 응답하지만, 그 응답을 위해 먼저 “자기 어머니 한나에게서 ‘주님 앞에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배웠을 것이며, 사제 엘리에게서는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지를 배웠던 것입니다.”(2578) 그리고 기도로 성장한 사무엘은 자기 백성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나 또한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거나 하여 주님께 죄를 짓지는 않을 것이오. 그리고 나는 여러분에게 좋고 바른 길을 가르쳐주겠소.”(1사무 12,23)
이렇듯 기도는 아주 개인적인 하느님과의 만남이지만, 또한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기도를 배우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 기도합니다.
1954년 콜롬비아의 다섯 살 소녀 ‘마리나 채프먼’은 괴한들에게 납치당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사정으로 소녀는 정글 속에서 원숭이 무리에게 키워집니다. 시간이 흘러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사냥꾼들이 그녀를 발견하고 소녀를 매춘 조직에 팔아넘깁니다. 시간이 더 지나 성인이 된 그녀는 말도 배우고 결혼도 하여 영국의 평범한 주부가 됩니다. 그녀는 5년간의 숲속 경험을 「이름 없는 소녀」란 제목으로 책에 기술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름 없는 소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각자 속한 공동체에 의해 형성됩니다. 마리나 채프먼이 원숭이에게 키워지면서 사람의 모습으로는 살 수 없었고, 사창가에서 몸을 팔면서 순결한 가정주부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의 수준이 그 사람의 수준을 결정합니다. 이스카리옷 유다는 자신이 속한 사도단에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공동체를 떠났고 결국엔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교회 공동체와의 단절이 곧 기도의 포기, 하느님과의 단절을 의미했습니다. 반면 토마스는 처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했지만, 사도단 안에 머물 수 있었기에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구약의 대사제는 가슴과 어깨에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는 보석과 이름들을 지니고 다녔습니다. 나의 기도는 내가 속한 공동체, 나의 영향을 받는 이들을 위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다윗 왕도 개인적으로는 “‘하느님 마음에 드는’ 훌륭한 임금이었으며, 자기 백성을 위하여, 또한 그 백성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목자였습니다.”(2579) 솔로몬도 성전 봉헌 때 온 “백성의 마음이 온전히 주님께 향하도록 기도하였습니다.”(2850)
우리는 모두 광야를 지나는 백성입니다. 광야에서 혼자서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공동체에 속해야 합니다. 나의 영성은 내가 속한 공동체의 믿음 수준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기도로 가장 높은 곳까지 올랐던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도 돌아가시기 직전 “저는 결국 교회의 딸입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하였습니다. 기도할수록 교회의 자녀가 됩니다.
전삼용 노동자 요셉 신부(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본당 주임) 가톨릭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