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와 나 / 곽병길
사업을 한답시고 이리저리 판을 키웠더니 결국 고난과 환난만 커갔다. 위정자들이 나라를 어떻게 다스렸기에 사업자들에게 이렇게 고통을 주는지 모르겠다. 금융실명제로 시작해서 IMF라는 생소한 단어들이 블랙홀처럼 생겨나 정신없이 빨려 들었다. 견디기 힘든 환경으로 바꿔 놓더니 그만 그것들이 애간장을 태우게 했다.
약속어음이 종잇조각으로 변해버린 날이면 얼굴이 파래졌다. 빨간 도장이 찍혀버린 수표는 바닥에 차곡차곡 쌓인 낙엽처럼 쓸어 담기도 힘들었다. 겨울철 꽁꽁 얼어붙는 강물처럼 마음도 조여들었다. 최고조로 달한 고민, 두려움이 엄습하는 고통의 시간이 계속되었다. 남들은 술로 자신을 달래 보지만 나는 그러지는 못했다. ‘세상이 왜 이래’라고 고함지르면 타들어 가는 심장을 식힐 수 있지 싶어 야구장을 찾았다. 응원 열기에 섞여 걱정, 근심을 잠시 떨쳐 버릴 수 있는 공간, 그곳에서 조금이나마 스트레스가 해소되길 바랐다.
경기장에 왔으니 시합에 몰두하자며, 그 순간만이라도 근심 걱정을 잊어보자며 마음먹어 본다. 마침 하얀 공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밤하늘을 가른다. 쭉쭉 뻗은 공이 뒤쪽 펜스를 훨쩍 넘어 날아간다. 유격수는 닭 쫓던 개가 되고, 투수는 머리를 숙인 채 한숨을 쉰다. 자리에서 일어난 관중은 환호와 함께 순간의 기분을 최대로 끌어올린다. 맞은편 쪽에선 망연자실이다. 관중은 양분되어 웃고 울고 하는 동안 날아온 공을 주운 관객은 횡재한 듯 두 손을 뻔쩍 쳐들고 온몸으로 감격의 극치를 표현한다. 이런 게 홈런 후의 장면이다
멀리 사라지는 공을 보면서 내 돈뭉치가 날아가는 것 같았다. 영영 돌아오지 않는 공처럼 말이다. 거래한 대금이 떼이면 멀리 날아간 공처럼 된다. 종이 한 장에 그려진 숫자가 사라지면 헛고생의 눈물이 어린다. 발행자는 입을 닫고 피할 것이고 어쩔 수 없이 나는 그 돈을 갚아야 한다. 돈의 흐름이 가스라이팅이 되어버린 동안 나의 인생은 평생을 몸살 하며 살 것 같다. 앉은자리에서 즐기다 보면 내가 타자가 되었다가 투수가 되었다가 수비를 했다가 온 몸이 그때마다 저려 오싹해진다.
야구는 다른 팀의 타자를 차례로 죽이는 것부터 시작한다. 다이아몬드 트랙을 돌지 못하게 하려고 혼신을 다하는 투수를 본다. 서로의 눈치싸움은 매섭다. 마찬가지로 세상은 마치 투수처럼 보인다.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잘되게 아니면 망하게 한다. 꿈꾸는 자들을 요리하듯 끓이고 지지고 볶고 해서 운과 재수로 잘 나눈다. 이처럼 야구의 투, 타 대결엔 인생의 희로애락이 숨어있고 동시에 생사의 문제가 잘 연출되는 경기이다.
9회전까지 펼치는 경기다. 그래도 승부가 안 나면 연장전이 있다. 최종 12회전까지다. 피 말리는 싸움의 끝은 기쁨과 슬픔의 교차점이다. 시련이 있더라도 운칠기삼이라고 했던가. 운에 따라 간간히 역전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마찬가지로 우연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 속에는 기회를 통해 노력의 대가와 운이 따르면 재기할 수 있다는 교훈이 있다. 야구에도 기회의 시간이 있듯 나에게도 뜻밖의 일이 생겨나는 연장전이 있으면 좋겠다.
공과 배트의 싸움, 서로의 무기가 다르다. 사업가들은 경제 동향과 기술과 투자로 세상에 나선다. 경제 정책의 잘못으로 불황이라는 악재가 생기면 치명적일 수가 있다. 그 아픔이 어련하랴만 어느 경우든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이다. 타자의 살아남는 기술은 싸움에서 이겨 점수를 많이 내면 된다. 그렇듯 사업은 이윤을 남겨 물질이 많이 쌓일 때 불황을 견딜 수 있다. 그러나 곳간이 비워져 있으면 힘들 듯 야구에서도 점수를 쌓아 놓지 않으면 패인의 원인이 된다.
실력에 따라 선수의 몸값이 다르다. 선수 누구든 가치를 상실할 경우 여지없이 2군으로 내려간다. 은행에서도 기업체를 신용으로 관리한다. 어떻게 해서든 신용을 쌓아야 하는 것이다. 신용은 밥을 먹여 준다. 예측불허의 시간들, 풀리지 않는 문제들로 신용은 잃어 가기만 한다, 하지만 매사 희망을 가지고 싸움터에 선다. 투수가 어떤 구질로 어떻게 어디로 던질지 판단의 기술도 필요하다. 타자는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공을 예측하며 쳐내는 기술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처럼 사업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돈의 흐름이 신용을 좌우한다.
세상 살아가는 일이 야구 경기와 다를 바 없다. 매사 히트 치는 삶은 마르지 않은 샘물과 같아 기쁨이 쏟아 날 것이다. 헛스윙이나 또는 친 공이 공중에서 땅에 떨어지는 순간 잡히면 아웃이다. 다 된 밥에 고춧가루 뿌리듯 하는 장면들이 있다. 판단의 잘못으로 공보다 늦게 도착하면 아웃된다. 사업도 다를 바 없다고 생각된다. 돈 날리는 방법이 어디 한두 가지겠는가.
야구 경기가 끝나면 모든 것이 제 위치로 돌아간다. 오늘의 패배를 내일의 설욕으로 벼른다. 그날의 승패는 접어두고 다음날에는 처음처럼 시작한다. 나는 그렇지 못하다. 나의 실패는 어쩌면 영원히 갈 수 있다. 머릿속에는 경기장처럼 오늘을 잊고 내일을 바라볼 수가 있으면 좋으련만 나의 뒤끝은 회생 불가능이라는 오명을 남길 수 있다. 삶 속에 늘 공존할 고통은 죽음 같은 것이다. 어쨌든 재기할 수 있을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야구와 다른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응원한 팀이 이기길 바랐다. 그걸 위하여 세상 욕하며 소리 질렸다. 스트레스가 확 날아가도록 애 섰다. 현실을 잊고 그냥 하루를 흘러 보낼 수 없는 것이 사업가다. 매일의 연속, 지쳐 쓰러지기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내가 원하는 단 한 가지, 뭔가 훨훨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용기다. 뜻대로 되는 일은 없겠지만 그러나 행여 부도난 것들을 메꾸고 위기에서 모면하는 그런 꿈을 꾸고 싶다. 돈 줄인 은행에 가봐야겠다. 그곳에서 회복의 길로 가도록 기름이라도 짜 보자. 야구가 나처럼 하루를 살다 간다. 밤하늘에 뿌린 함성은 내일이면 다시 돌아온다. 파죽지세의 힘으로 나아가기 위해 희망의 끈이라도 붙들고 집으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