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복(諡福) 후보자에게 잠정적으로 주어지는 존칭. 시복 조사가 교황청 예부성성에 접수되면 시복 후보자에게 이 존칭이 주어진다.
한국 교회는 1857년에 처음으로 82명의 가경자를 갖게 되었다.
한국 교회는 <1839년과 1846년에 조선왕국에서 발발한 박해 중에 그리스도의 신앙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의 전기…>란 문헌을 교황청에 보냄으로써 시복 조사가 시작됐는데, 1847년에 이 문헌을 접수한 예부성성은 박해로 인해 한국 교회가 교구적 차원의 시복 조사를 할 수 없으나 이 문헌 자체가 순교자를 선정하는 데 매우 엄격했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교회법에서 요구되는 교구 조사를 대치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고,
1857년 9월 23일 한국 교회의 시복 조사를 공식으로 접수하는 법령을 반포하였다.
이로써 82명의 가경자가 탄생하였다.
이 82명의 가경자 중 79명은 1925년에 복자가 되었고, 1984년에 79명 모두가 시성되었다.
이어 한국 교회는 1866년 병인박해의 순교자 중 26명에 대한 시복 조사를 시작했는데, 이 중 24명이 1968년에 복자가 되고, 1984년에 성인이 되었다.
이들도 복자가 되기 전에 잠시 가경자의 칭호를 받았을 것이 확실하지만, 1918년 새 교회법의 반포로 가경자의 기간이 아주 단축된 이후렸으므로 이들에게 실제로 가경자 기간이 있었는 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이다.
1983년 새 교회법의 반포와 더불어 시복·시성의 간소화를 위한 개혁이 추진중에 있는데, 이 개혁으로 가경자의 의의가 더욱 약화되고 거의 유명무실해질 것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