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운 단절
임병식 rbs1144@daum.net
자연을 사랑하고 인간의 심성을 다듬어 주는 대상으로 일찍이 선인들은 수석을 생각했다. 수석을 애완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에 접근하여 삶의 품위와 존재론적 의미를 찾는 대상으로 여겼다. 돌 자체에 우주의 근원과 생명, 윤리와 도덕까지도 담겨있다고 생각했다.
돌의 탄생이 지구역사와 같이해온 만큼, 무한한 영원성을 부여하여 외경의 마음을 가짐과 동시에 희로애락을 담아내는 대상이라고 여겼다.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어찌 바위에 경배를 하며 완상 물로 여겨서 가까이하였겠는가.
우리나라에 수석문화가 꽃피운 시대는 19세기 중반이었다. 이때가 순조임금, 효명세자 집권기, 그리고 헌종 때로 수석과 관련하여 일화를 남긴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다. 얼른 떠오른 인물만 해도, 추사 김정희선생과 황산 김유근선생, 자하 신위선생과 옥수 조면호 선생이 있다.
한편, 헌종임금은 예술가의 취향이 다분하여 서화를 즐기고 이름 있는 문인들의 도장을 모으고 수석을 완상하며 아껴서 애완 석을 남기기도 했다.
사대부 시인묵객들은 상호간 마음을 열어 허심탄회하게 교유했다. 그러면서 시정(詩情)을 담아 고상한 인간적 풍미를 세상에 퍼트렸다. 그런 가운데 정신적으로 문화가 꽃피워졌고, 그 중심에는 수석을 애완하는 취미가 자리 잡았다. 그런데 그런 고상한 취미생활이 심각하게 정치색에 오염되었다.
거기에는 안동김씨 세도정권이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정조임금은 그 어떤 임금보다도 당쟁의 폐해에 몸부림친 사람이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서인세력의 눈 밖에 나 뒤주 안에서 죽는 참변을 겪었기에 얼마나 각오하고 명심을 했겠는가 마는, 막상 아들 순조의 혼처를 정할 때는 다시 안동김씨를 찾았다.
그리하여 간택된 사람이 바로 순원왕후이다. 아버지는 나중 극심한 세도정치의 문을 연 장본인 김조순. 왕후의 오빠 김유근은 시서화에 능하고 수석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특별히 묵란도를 잘 쳤다. 추사와는 절친한 사이였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 정치적 입김이 끼어들어 사이를 벌려놓은 사건이 발생했다. 순조 집권시 안동김씨 일문의 국정농단은 심각했다. 김조순 세 아들이 다 문제가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영의정을 세번이나 역임한 김좌근의 전횡과 첩실 나합의 부정부패가 우심했다.
순조말기, 임금은 잠시 아들 효명세자에게 친정을 명하고 뒤로 나앉았다. 이때 효명세자는 안동김씨의 전횡을 막고자 반대쪽에 있던 인사들에게 약간 힘을 실어주었다. 그런데 효명세자가 갑자기 요절하고 말았다. 정국이 요동치는 틈을 타 윤상도라는 선비가 안동김씨를 탄핵을 주청하고 나섰다. 그런데 상소문의 문구가 조금 거칠고 과격했다.
이를 빌미삼아, 안동김씨 세력은 윤상도를 귀양 보내고, 추사의 부친 김노경도 그 배후라며 역시 귀양을 보냈다. 김노경을 귀양지에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
그런데, 사그라진 불씨가 10년이 지나 안동김씨 김양순에 의해 다시 들춰졌다. 이번에는 추사선생을 물고 늘어졌다. 윤상도가 상소문을 올릴 때 추사선생이 관여했다는 것이었다. 그로인해 윤상도는 사형에 처해지고 추사선생은 제주도로 귀양 보내졌다. 안동김문은 그들의 집권에 방해가 된 인물은 모두 제거하고자한 속셈이었다.
김좌근이 주도로 국청을 열린 자리에서 수많은 반대파가 죽어나갔다. 이때 추사도 여섯 차례나 문초를 당해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죽이려고 들었으나 확실한 증거가 나오지 않자 귀양을 보내는데 그쳤다. 그렇지만 조치는 가혹한 위리안치였다.
이런 터에 한때 절친이던 김유근은 물론, 알고 지낸 그의 동생 김좌근은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다. 이 대목에 이르러 혹시 안타까움을 표시한 글귀라도 있나하고 자료를 살펴보았지만 그것은 발견할 수 없었다. 정치의 세계란 이처럼 매정한 것인가. 추사선생은 해배 후에도 또 다시 북청으로 귀양 보내졌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선생은 제주 귀양살이 4년째 되던해 부인 이씨가 별세했는데, 가볼 수도 없었다. 그 안타까운 심사를 담은 시 ‘배소망처상(配所輓妻喪)이 ’도망시(悼亡詩)란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구절에 “다음 생은 바꿰 태어나 천리 밖의 나 죽고 그대 살아서”라는 내용이 있는데 가슴을 저리게 한다.
정치란 이처럼 가혹하고 무서운 것인가. 그러나 이런 것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일이다. 돌을 좋아하고 애완함에 있어서 수석이 전하는 품위와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하늘 앞에 먹구름이 스치고 지나는 현상일 뿐, 하늘이 흐려졌다고 할 수는 없다.
수석은 일찍이 우리의 정신문화에 이바지 해왔다. 역사를 거슬러 오르면 당나라에서 화엄경을 배워온 신라승려 ‘승전법사(勝詮法師)는 80개의 돌을 두고 개강을 하였으며, 인제 강희안선생은 돌에 이끼를 키워 물을 끼얹어 놓고 돌의 변화를 보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면서 그 돌을 ’향석(香石)이라 하였다.
그런가 하면 많은 애석인은 둥근 원석을 두고 신비로움에 취하여 선(禪)과 각(覺)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그런데 그러한 애석생활이 당쟁으로 물들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그러다가 다시 수석의 붐이 일어난 것은 1970년대 초이다. 이때는 많이 오염이 되었다. 뜻있는 사람들은 옛 분들의 고상한 취미를 되살려 닮고자 했으나, 계념 없는 사람들이 뛰어들어 분위기를 흐려놓은 것이다.
좋은 돌을 값이 나간다고 하니 너도 나도 산천을 돌아다니며 돌을 주어 날라 환금성에만 눈독을 드린 것이다. 해서 애석 본래의 고상한 완상 전통은 변질되고 멋없는 취미생활로 많이 전락하고 말았다.
애석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연 경배를 바탕으로 수석의 영원성, 천금 같은 침묵, 모양의 신묘함, 인연과 신의까지도 생각하며 맛보는 대상이 아닌가.
그런데 애석생활을 하면서 수석을 앞에 두고, 정치적인 견해로 등을 돌리고, 대상을 환금성에만 두어 수석을 욕보이고 만 것이다. 역시 흔들리는 갈대, 그름처럼 수시로 변하는 사람의 마음은 수석이 가르치는 손짓 앞에서는 지극히 속물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고 상한 정신을 배우는 데 있어 턱없는 천박함으로 인해 진정한 애석도의 길은 멀고도 먼 것이 아닌가 한다. (2024)
첫댓글 愛石생활을 하면서 壽石을 앞에 두고, 정치적인 견해로 들을 돌리고,
대상을 換金성에만 두고 만 바람에 수석을 辱보이고 만 것이다.
역시 흔들리는 갈대, 그름처럼 수시로 변하는 사람의 마음은 壽石이 가르치는
손짓 앞에서는 지극히 俗物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좋은 글 잘 감상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돌은 참으로 많은 깨달음을 주는 것 같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수석의 명상에 잠기다가
뇌리에 쓰치는 생각을 써보았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예술혼으로 맺어진 우정도 당리당략 앞에선 휴지조각에 지나지 않음은 수석은 있으되 그 심오한 사상을 깨닫지 못하고 동화되지 못한 연고라 생각합니다 비단 수석에 그치지 않고 모든 예술품을 돈으로 환산하는 작금의 행태입니다 다시금 고고한 수석문화가 꽃을 피웠으면 합니다 사람들의 심성이 수석을 닮아가면 좋겠습니다
수석을 생각하면서 김정희선생과 김유근선생을 떠올리며 세상사가
우정도 당리당략앞에서는 한갓 물거품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죽을 죄인이 아닌데, 구해주지 않은것은 인간에 대한 비루한 모습을
확인한듯 하여 혀가 치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