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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9일(부활주일) 주일설교 마태복음 28:1~10 '부활하신 예수님 ' 새찬송가 160장 무덤에 머물러
오늘은 마태복음 28장 1~10절 말씀을 중심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부활의 기쁨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안식후 첫날 새벽, 예수님의 무덤에 간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천사를 만나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전하러 가던 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경배합니다. 예수님이 여인들에게 무서워하지 말고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서 주님을 볼 것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의 가장 중심적인 신앙을 형성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한 인간이 죽음에서 되살아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되살아 난 것으로 스스로 하나님이자 인간임을 보여 주는 것이며 나아가 그를 믿는 모든 자의 죄를 사하여 구원하였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인간의 죄를 씻기 위한 죽음이지만, 부활은 인간의 죄와 그 결과인 죽음을 이겼다는 것을 나타내며, 이로써 하나님 스스로가 생명과 죽음의 주(主)임을 계시했다고 성경에서는 말씀합니다. 바울사도도 "만일 예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들의 전하는 것은 헛된 일이며, 또한 여러분의 신앙도 헛된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또한 바울 자신이 부활한 그리스도와 만났다는 간증을 통해 자신이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사도바울도 자신이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한다면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받아들이시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진정 부활의 주님을 만나셨고, 지금도 매일의 삶 속에서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면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한 주간이 고난주간이었는데, 예수님의 부활은 고난과 십자가 죽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사건입니다. 우리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이 있어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생각합니다.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이 없이 부활만 경험하면 좋을텐데. 고난 없이 그냥 꽃길만 걸으면 좋을텐데하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때로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 주간 저도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삶의 고난을 이겼는데요. 어제는 한 고난주간 설교말씀을 통해서 ‘믿음은 자존심을 죽이는 것이고, 절대로 변명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말씀이 깊이 다가왔습니다. 이 말은 믿음이 참 추상적이 아니라 참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보게 되었고, 우리가 예수님은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자존심을 십자가상에서 끝까지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는 나의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하여 되도 않는 변명을 늘어놓는데, 예수님은 그 자존심을 버리기로, 십자가에 못박기로 작정하셨기에 구차한 변명조차도 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의 형벌은 ‘천번의 죽음’이라고 합니다. 천번의 죽음을 모아놓는 이루말할 수 없는 고통이라고합니다. 그 분의 부활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피어난 것입니다. 오늘 2023년도 부활절을 맞이하여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도 그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부활의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첫째로,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려면, 사모함과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1~2절). 1절과 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안식 후 첫날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려고 누구보다도 먼저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왜 향유를 가지고 갔는가? 당시 유대인의 장례법에서는 시체를 향유로 씻어 세마포로 쌌다고 합니다. 그런데 임박한 안식일로 인하여 단이 가루 향품만을 예수님의 시신에 뿌릴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에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여인들이 안식일이 지나면 정식으로 장례를 지내기 위해 장례를 마치고 돌아간 직후에 향품과 향유를 준비했던 것이지요. 그 때 무덤에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 부터 내려와 무덤의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습니다. 참고적으로 무덤의 돌에 관한 연구인데요, 미국 조지아 공업 대학교수들이 이스라엘에 가서 직접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예수님 당시 쓰였던 무덤의 문의 크기는 약 1.5미터 정도이고 이 정도의 입구를 막으려면 적어도 1.5~2톤 무게의 바위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간에 바를 향유를 가지고는 갔지만, 수십명의 장정들이 붙어야 옮길 수 있는 무덤의 돌을 어떻게 치우느냐에 대한 걱정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은 믿음으로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마르다의 동생이요 나사로의 누이인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귀신들렸었는데, 예수님 덕분에 새로운 삶을 살았던 여인인지라 가장 먼저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눅8:2). 이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어떤 장애물이 내 앞에 있어도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부활의 주님께 나아가려는 사모함과 간절함입니다. 시편107: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 사람은 무엇이든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는 것을 사모하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고 귀중이 여기는 사람은 돈을 사모하게 되고, 애인을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는 사람은 애인을 사모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은혜를 귀중히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과 그 분이 주시는 은혜를 사모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성령을 사모하는 자에게는 성령을 부어주시고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는 자에게는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이사야 40:30에 “소년이라고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힘을 얻으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앙망하고 사모하는 자들에게는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권세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다 피곤하여 넘어지고 쓰러져도 결코 넘어지지 않는 새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에게는 구원을 주십니다. 이사야 45:22에 “땅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비록 죄인이고, 창녀이고, 도둑이고 강도이며 불의한 부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그 분을 앙망하면 그 죄를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다 씻어주시고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자기의 의와 공로를 믿고 배부른 사람이 밥상 대하듯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만 의지하고 사모하는 자는 부활의 증인으로 구원의 기쁨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적용) 나에게 주께 나아가려는 사모함과 간절함이 있습니까? 또한 사모함과 간절함이 있다고 해도 예수님과의 만남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무엇입니까?
둘째로,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려면,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3~7절).
3절부터 보시면 천사가 무덤에서 내려오자 4절에 그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천사와 그 무덤의 돌이 굴려내어진 것을 보자 무서워하며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천사는 5절에 여인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고 안심시키면서 6절에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예수께서 살아나셨음을 알려줍니다. 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경비병들은 없어진 예수님의 시신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벌을 받을까봐 두려워하지만, 이 여인들은 죽었다고 생각했던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무서움도 조금 있었지만, 8절에 ‘큰 기쁨으로’ 천사의 명을 받아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전하려 갈릴리로 빨리 달음질하여 갑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권면하십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지금 전 세계를 살펴볼 것이면 금일은 문자 그대로 공포의 시대입니다. 어떤 나라나 어떤 민족을 막론하고, 2차대전의 쓴 경험을 본 그들은 이제 3차대전이 세계 어느 구석에서 일어나지 않을까? 혹은 이제 원자탄의 세례가 내가 사는 도시에 맞아서 오랫동안 건설했던 현대 문화를 말살하지나 않을까? 문자 그대로 공포와 불안 가운데 싸여 있습니다. 38선을 가운데 두고 6·25사변의 참담한 경험을 가진 우리 민족은 더욱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으리만큼 하루하루의 생활이 불안과 공포 가운데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여기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포심이라는 것은 본래 우리 인간의 본능 가운데 하나로써 하나님께서 이 본능을 우리 인간에게 주실 때에는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고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공포라는 감정을 주신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연히 높은 곳에 올라갈 때는 무서워하고 깊은 곳을 들여다보아도 무서워하고, 어두운 밤을 만나도 두려워하고, 낯선 사람을 만나도 두려워합니다. 이것은 다 유익합니다. 그렇게 무섭게 생각하기 때문에 높은 데 올라갈 때나 깊은 데 들여다볼 때 더 조심합니다. 밤에 어두운 길을 갈 때에는 더 조심합니다. 낯선 사람을 만나면 우리가 조심하는 것은 그 사람이 혹 우리를 해하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까닭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본래 공포심은 우리 인간 생활을 도와주기 위해서, 생명을 보존하는데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유익한 본능 중 의 하나로써 주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이후에는 모든 본능이 그 본래의 지경을 지나서 도(度)에 넘게 되고, 또한 형태가 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마땅히 두려워할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을 많이 두려워하게 되었고, 또한 도에 넘치게 많은 것을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는 공포심이라는 것인데, 지금은 보통 사람에게 있어서는 생명에 도움이 되는 것보다도 여러 가지의 인간의 생활을 해하는 한 감정적 요소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무서워서 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서워서 심령도 죽고, 무서워서 육신도 죽고, 무서워서 사업도 실패를 하고, 무서워서 시험에 낙제를 하고, 경기하다가 지고, 무서워서 죽은 사람 많습니다. 공포 때문에 사람들이 미신을 숭배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부르신 것은 건강히 깨끗이 살기만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이 공포심을 이기고 평안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평강으로 기쁘고 즐겁게 살게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사야 12장 2절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지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공포를 이기는 방법은 오직 하나 있는데,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온전히 의지하는 그것 밖에는 없습니다. 창세기 15장 1절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너의 상급이니라” 어느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런 말씀을 했는가 하니, 모든 나라가 움직이면서 큰 싸움이 일어나서 자기의 조카가 잡혀갔던 것을 겨우 빼앗아 왔을 때, 이제 다시 무슨 일이 날지 알 수 없고, 자기는 후손도 없고 가까운 친척도 많지 못하고 외지에 와서 사는데, 장래의 생각을 하니 아득하고 국제 정세는 대단히 동요하고 어지러운 가운데서 미래를 생각할 때에 아브라함의 마음에는 공포심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와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내가 방패가 되어서 너를 막아줄 테니 두려워 말라.” 열왕기상 17장 1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입을 통하여 사르밧과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지고 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고” 그것은 3년 6개월 동안 유대 나라에 비가 오지 않을 때에 사르밧에 가서 아주 가난하게 사는 과부 하나를 만났습니다. 이 과부는 어린아이 하나만 데리고 사는데, 오랫동안 가뭄이 심해서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다 떨어져 마지막에 가루만 조금 남았는데, 그것을 가지고 떡을 해 먹으려고 나무를 주우러 왔다가 엘리야 선지자를 만났습니다. 엘리야를 보고 하는 말이 “나는 이 나무를 갖다가 떡을 해 먹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그 과부에게 하는 말이 “두려워하지 말라. 네 마음대로 이것으로 떡을 만들어라. 우선 떡을 만들어서 나한테 가져오너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 밀가루 담은 통이 이 흉년이 다 지날 때까지 없어지지 않게 하겠다.” 이렇게 가련한 사르밧 과부에게 약속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순종한 사르밧과부의 집에 이 말씀이 그래도 응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교회도 2007년에 이 말씀을 주셔서 지금까지 붙잡고 그 기적을 체험하면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 부활절에 두려워하는 문제나 사건을 무엇입니까? 두려움 중에서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그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부여잡고 큰 기쁨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적용) 나는 주로 무슨 일을 두려워합니까?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감격한 적은 언제입니까?
셋째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성도는 그 주님을 예배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로 살아야 합니다(8~10절). 천사의 말을 듣고 제자들에게 달려가던 여인들이 9절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평안하냐’고 물으십니다. 이 말씀에는 ‘너희는 기뻐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무서워하지 말고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10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부활의 주님을 만난 여인들은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만난 성도는 부활의 주님을 예배할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증인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의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여인들은 예수께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합니다(9절). 사람은 누구나 성공자가 되길 원합니다. 가정에 성공하고, 신앙에 성공하고, 교육에 성공하고, 사업에 성공하고, 추구하는 어떤 일에 성공하고, 목회도 성공하길 원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성공은 인생에 성공하는 것입니다. 지옥에 간 부자와 같이 인생에 성공하지 못하면 가장 불행합니다. 진정 성공하려면 예배의 성공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배의 성공자만 되면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도 성공자가 되게 해주십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가 워털루 전쟁에서 참패하여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기자가 그에게 찾아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면 언제였습니까?” 나폴레옹은 한참 눈을 감고 회상하더니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전투가 치열하던 어떤 주일이었죠. 그때 나는 졸병이었지만 아침에 철모를 벗고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눈물을 흘리며 예배를 드린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가 내게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느 날부터인가 예배에 빠지기 시작하였고 지금 전쟁에서 패배하여 이처럼 유배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의미 깊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임하시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임하심이 없는 예배라면 실패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하나님의 임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에는 하나님이 성령의 불로서 임하십니다. 그 때 우리 영혼이 그 손의 어루만지심을 느끼고 희열을 느끼고 살아나고 그 품안을 체험합니다. 진정으로 드린다는 것은 이단의 비 진리가 아닌 진리의 예수님이 증거 되는 곳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부활의주님을 만난 성도는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로 살아야 합니다. 이 여인들은 천사를 통해 부활의 소식을 듣고 8절에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하여 갑니다. 그 때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그 주님께 경배하며 10절에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는 사명을 받고 달려갑니다. 예배 드리고 나서 우리의 사명을 복음을 전하는 증인된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18~20 예수님의 대위임령이라는 귀중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전체에서 가장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제일가는 사명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교회의 존재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야만 합니다. 교회가 왜 필요합니까? 교회의 가장 중요한 존재이유는 이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존재이유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으며, 그 본을 이 세상에서 친히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즉 교회의 존재이유로부터 출발하는 교회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인간에게 구원의 손길을 제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구원을 시작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죄 값으로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는 순간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할 계획을 즉각적으로 수립하셨습니다. 창세기 3장 9절, 하나님의 첫 번째 부르심으로부터 시작해서, 계시록 22장 17절, 하나님의 마지막 부르심 사이에, 그 분의 한결같은 뜻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순간까지도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셨으며 앞으로도 영혼 구원의 사역을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지금까지도 구속사역을 하셨으며, 지금도 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이 사역을 하실 것입니다. 죄인들이 구원 받을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죄인들이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로 돌아와 하나님의 가족이 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교회의 존재이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교회의 사명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열망이 있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기 원하는 성도라면 어둠 가운데 살아가는 세상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사랑하며,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목숨을 드린 예수님을 본받아야만 합니다. 우리들은 세상에 보내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사랑하도록 보내졌습니다. 우리들은 복음전파의 사명과 함께 이 세상에 보내진 사람들입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 보내졌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며 우리들이 이 세상에 보내진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이 바로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책임감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이며 저와 여러분의 사명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여인들처럼 부활의 주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적용) 나는 부활의 주님을 예배하고 있습니까? 내가 만난 예수님을 전해야 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말씀을 마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려면 첫째로,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려면, 사모함과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 사모함과 간절함이 나에게 있습니까? 둘째로,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려면,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3~7절). 나에게는 부활의 예수님께 말씀을 받으므로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안함을 누리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 무슨 일 때문에 두려워하십니까? 셋째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성도는 그 주님을 예배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로 살아야 합니다. 나는 그 주님의 임재를 통해 진리로 예배를 드리고 계십니까? 또한 나는 주님처럼 잃어버린 영혼에게 복음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고 계십니까? 세상에서 벙어리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주님) 늘 주님께 대한 사모함과 간절함으로 살아가게 하시며 예기치 못한 사건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부활의 주님을 만나 말씀이 들리는 은혜를 얻게 하옵소서. 주님과의 만남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굴러가 언제나 주님을 예배하며, 내가 만난 부활의 주님을 여인들처럼 어디서든지 전하는 증인된 사명을 감당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