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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여행] 치유의 섬 손죽도 전편............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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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여행] 치유의 섬 손죽도 전편............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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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가 보리라 마음만 먹었지 결코 갈수 없었던 섬 손죽도(巽竹島) 여행길. 이번 5번째 여수 여행길에서는
이번엔 꼭 가보리라 마음먹고 유랑자는 아침일찍 첫 손죽도행 배에 몸을 실었다. 여수항과 거문도를 오가는
배, 몇 년전 유랑자는 거문도 여행을 하고난 후 실로 오랜만에 거문도행 배에 오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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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렌다. 과연 손죽도는 이 유랑자에게 무엇을 내 밀며 보여줄까. 항상 이지만 미지의 섬 여행은 초딩때 소풍가
는것처럼 설렘뿐이다. 그러나 예전에 거문도를 들어갔을 때엔 풍랑을 만나 멀미를 제법 심하게 했었던 기억이
자꾸만 뇌리를 스친다. 어떡하지 고민을 거듭 하다가 그냥 오르기로 했던 뱃길. 다행이도 오늘 날씨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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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죽도 가는 배는 여수항과 고흥 나로도항에서 출발한다. 하여 멀미가 심한 사람들은 승용차로 고흥 나로도까
지 갔다가 거기에서 배를 타면 30여분, 훨씬 쉬게 손죽도 입도가 가능하다, 여수항에서는 오전, 오후 한 번씩 배
가 출발한다. 동계에는 시간이 다르니, 시기에 따라 예약을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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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여수항에서는 오전 7;40분배가 출발한다. 손죽도 까지는 1시간 30여분 정도 걸리고, 나로도 항에서는 30
분 정도 걸린다. 하지만 먼 바다로 나가는 섬 여행은 항상 기상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수시로 항구에 전화해서
출항 여부를 확인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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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그러나 공해상으로 배가 나가자 역시 배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동안 수차례의 섬 여행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먼 바다 공해상에 있는 손죽도는 가까운 바다와는 다른 기상 상태를 가지고 있다. 속이 약간 거북
할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에 다행이도 유랑자는 손죽도 항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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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을 챙겨서 출구를 빠져 나온 유랑자, 배에서 내리는 현지민들과 등산객등 20여명 모두의 얼굴에는 안도와
기쁨이 교차한다. 바다의 배는 그런것이다. 크고작은 사건 사고들이 많은 해상인지라.... 유랑자가 그동안 오고
싶어 했던 섬, 드디어 손죽도에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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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섬은 섬이다. 먼저 공기부터가 확연히 다르다. 거침없는 숨소리와 뻥 뚫린 코, 소음과 매연없는 선선한
바닷바람이 유랑자를 반갑게 맞이해 준다. 먼저 마을 입구로 들어서자 왼편으로 하얀색 동상이 하나 서있다.
누구지? 가까이 가서보니 충렬공 이대원 장군의 동상이다. 사실 조금은 생소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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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히고 궁금중에 관한 유랑자의 호기심은 그대로 발동한다, 이대원(李大源, 1566~1587.함평이씨)
장군은 1566년에 경기도 평택시 희곡리에서 태어나 선조 16년(1583년)에 17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우리나라 역
사상 가장 젊은 나이인 21세에 1586년 전라남도 고흥 녹도 관직에 진출한 후 3년 뒤 남다른 공적으로 전라도
고흥의 녹도만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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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원 장군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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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명시(絶命詩)
日暮轅門渡海來(일모원문도해래) 해 저무는 진중에 왜군이 바다 건너오니
兵孤勢乏此生哀(병고세핍차생애) 군사는 외롭고 힘이 없어 죽으니 슬프도다.
君親恩義俱無報(군친은의구무보)임금님과 부모님께 충효로 보답하지 못하니
恨入愁雲結不開(한입수운결불개)한스러움과 먹구름이 엉켜 끝내 풀길이 없네
장군의 피맺힌 사연이 구구절절(句句節節)가슴에 와닿는 문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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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왜적들은 남해안 일대를 드나들며 납치 약탈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임진왜란 5년 전인 1587년
(선조 20년) 2월 10일에 고흥 앞바다 손죽도 해상에도 왜선 20여척이 침공하자 이대원 장군은 이들을 대파 큰
승리를 거두고 개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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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직속상관 이었던 관찰수사 심암은 이대원 장군이 세운 전공을 빼앗으려 하였으나(심암은 그 공을 자기
가 세운 것으로 하자고 이대원에게 말했다가 거절당했다), 말을 듣지 않자 원한을 품게 된다. 그리고 7일 뒤에
왜적들은 다시 대 부대를 결성하여 쳐들어왔는데, 심암은 괘씸한 이대원 장군을 보복할 목적으로 아무런 작전
계획도 없이 무작정 출전 명령만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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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원장군은 “오늘은 날이 저물고 준비가 불충분하니 내일 진격하자” 고 건의하였지만, 심암은 듣지 않고 피
로한 병사 100여명만 이대원 장군에게 주며 무조건 적과 싸우라고 독촉하였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이대원 장
군은 명령에 의하여 손죽도 해상에 나가 3일간 적과 맹렬히 싸웠지만, 사전 준비도 부족하고 적은 수의 병사들
로는 도저히 왜적을 이길 수 없어 본령에 구원병을 요청하였지만 심암은 일부러 아무런 지원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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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대원 장군은 적에게 포로로 붙잡혀 항복을 강요받았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자, 왜구들은 배의 돛대에 묶
어 놓고 사정없이 때리고 갈고리로 찍었다. 손죽도 뭍으로 끌려나와 수하병사들과 함께 살해당하였다, 다 피지
못한 22세의 젊은 청년 장군은 그렇게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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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하기 직전 이대원 장군은 손가락을 끊어 피를 내어 속적삼에 절명시를 써서 집안의 하인에게 주어 고향 본
가로 전하게 했는데, 그 한 맺힌 ‘절명시(絶命詩)’가 오늘날까지 전해오며 비 우측에 새겨져 있어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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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暮轅門渡海來(일모원문도해래) 해 저무는 진중에 왜군이 바다 건너오니
兵孤勢乏此生哀(병고세핍차생애) 군사는 외롭고 힘이 없어 죽으니 슬프도다.
君親恩義俱無報(군친은의구무보)임금님과 부모님께 충효로 보답하지 못하니
恨入愁雲結不開(한입수운결불개)한스러움과 먹구름이 엉켜 끝내 풀길이 없네
장군의 피맺힌 사연이 구구절절(句句節節)가슴에 와닿는 문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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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한 섬인 소거문도 상산(328m)이 힘 있는 산세로 우뚝 솟아 푸른 화폭을 꽉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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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는 여담 이지만 ....당시 이대원 장군의 전사 소식을 전해 듣고, 해안 지방의 아녀자들은 물론 기생들까지도
펑펑 울면서 누가 지은 줄도 모르는 다음과 같은 「애도가(哀悼歌)」를 불렀다고 한다. (咄憐哉 鹿島萬戶李大源
端只與國爲忠臣 船入海洋兮 虜進主將退 百萬陣中空張拳).“아, 슬프다/ 녹도 만호 이대원 장군/ 오직 나라 위한
충신이셨네/ 배는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장수들 물러가고 포로가 되었어도/ 백만 적진 가운데서 주먹을 휘둘렀
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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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선조수정실록>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이대원 장군의 억울한 죽음은 덮일 뻔했으나 전투에서 살아남
은 부하 손대남이 우여곡절끝에 적군에서 탈출하여 돌아가 진상이 밝혀졌다. 분노한 선조는 전라좌수사 심암을
참수하라는 어명을 내렸고, 이 장군이 죽은지 44일만인 4월 4일 심암은 한양으로 압송돼 당고개에서 참수하여
목을 높은곳에 매달아 놓고 뭇 사람들이 보게했다.
그리고 장군은 사후 80년이 지난 현종9년(1668년)이야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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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죽마을 전망대’라는 별명답게 파랑·빨강이 섞인 지붕이 옹기종기 모인 것이 한눈에 드러난다. 그 너머에 무뚝뚝한 장남 같은 육산
깃대봉과 재주 많은 막내 같은 삼각산이 바위산 특유의 현란한 굴곡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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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죽 마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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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산 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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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다시 무거운 발길을 옮긴다. 이제 본격적으로 손죽도 산행 길로 이어진다. 나무데크 계단을 오르자 시
누대(조릿대)가 우거져 이어지면서 터널을 이룬다. 시누대 터널은 작지만 환상적인 시골스러운 풍경이다, 또 다
른 멋스러움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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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시 손죽도라는 이름은 당시 장군의 사망기록에도 손죽도(損竹島)라 칭하였다가, 1591년 이순신 장군이 전라
좌수사로 부임하면서 이대원 장군이라는 큰 인물을 잃은 곳이라 하여 손대도(잃을 손, 큰 대)라 불려왔다고 한다.
당시 손죽도 사람들은 이대원 시신을 가묘를 써서 매장했다. 또한 집안사람들은 유언을 받들어 혈서로 쓴 옷을
가져다가 양성현(지금의 평택) 대덕산 아래에 장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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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동쪽 해안선을 따라 걷는 벼랑길 맛도 별미다. 깎아지른 절벽과 순한 송아지 등 같은 산길이 도시에서 온 유랑자의 굳은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바꿔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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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 사람들은 이대원 장군을 살아서보다 죽어서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한다. 살아 있을 때는 주목을 받지 못했
지만, 나라의 어려움을 당했을 때 국가와 백성을 위해 목숨을 바쳐 후대에 크게 추앙받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 뒤 이곳 주민들은 장군을 모신 사당을 짓고 매년 3월 3일에 제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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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임진왜란 이전부터 손죽도라는 지명은 존재하였으며, 섬에 시누대(산죽.山竹)가 많아 시누대섬이라 부
르던 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이후 1914년 3월 1일 일제의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돌산군
에서 여수 군으로 편입되면서 손죽도(巽竹島)로 개칭되어 지금의 '손죽도'로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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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거문도가 손을 내밀면 손에 잡힐듯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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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넘이 전망대 :손죽도는 숨이 찰 만하면 어김없이 전망대를 내어준다. 전망데크의 섬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전망데크가 많다.
벼랑 끝에 자리한 바다전망대인 목넘전망대다. 섬 동쪽 벼랑에 있어, 주민들이 해돋이 명소로 찾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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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산면 손죽리는 행정구역상 삼산면 관문에 위치하며 가족단위 관광객들이 야영, 해수욕을 즐기기에 적당한 곳
이며, 매년 지지미재에서 개최하는 손죽마을 전통 화전놀이 행사와 대보름 헌식 굿, 당제와 용왕제등 다채로운
역사체험을 통하여 관광객에게 다양한 볼거리가 있는 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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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힘겹게 데크 계단을 따라 오른다. 오르다가 안산에서 왔다는 여성 두분과 함께 일행이 되어 함께 길
동무를 하기로 하고 일행이 된다. 아~하늘은 맑고 자연은 싱그럽다, 뒤돌아 볼 때마다 다가오는 다도해의 섬들
이런 때 묻지 않은 섬에서 딱 1달만 살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할 정도로 아름다운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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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을 내려서자 너른 사거리에 정자가 있는 지짐이재다. 매년 봄이면 주민들이 꽃으로 전을 부쳐 먹는다는 화전(花煎)놀이 마당이다.
그래서인지 봄꽃이 산길 구석구석 수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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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중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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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시 손죽도는 치유의 섬으로도 유명하다. 한때 많은 말기 암환자들이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암을 치유하고 나
갔다고 한다. 그만큼 조용하고 아름다운 섬이기에 암환자들의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었을 것으로 본다. 그렇다
면 경치만 그랬을까요? 먹을거리도 풍족하고 인심도 한몫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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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건대 섬마을의 또 다른 활용 아이디어가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에 이런 풍광 좋은 치유의 섬이 많이 생겼
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육산과 암부가 적절히 조화를 이룬 섬, 골산은 아니지만 나름의 연봉과 암릉이 시
선을 사로 잡는산, 그러면서도 중간 중간 데크 전망대가 힘겹게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마음을 풍요롭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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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돌아 볼때마다 아스라이 다가오는 바다는 말이 없었다. 허공을 옮겨 놓은 듯 파도는 손 놓고 있었다. 가만히
차올랐다 가라앉으며 섬의 굴곡을 응시하고 있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바닷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유랑자를 스쳐
지나며 휘이잉~하며 곡소리같이 흐느끼는 소리를 낸다. 마치 목없는 장군과 부하들의 죽음, 에 대한 그날의 아
픔을 알고 있다는듯, 그들의 이름을 초혼가(招魂歌)에 실어 읊고 있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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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봉화산(162.3m)을 지나 점심을 먹는 일행들을 뒤로하고 혼자서 깃대봉(237.4m)을 오른다. 우측으로
멀리 삼각산이 유랑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삼각산이 미리 마중 나온 것 같은 기분이다. 두 개의 바위봉우리인
삼각산이 마치 두 명의 선인이 서 있는 듯 쌍봉은 독특하면서 위엄 있었다. 이대원 장군의 현신(現身)마냥 모진
바닷바람에도 타협 없이 뜻을 세우고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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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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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afe.daum.net/b2345/LKz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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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죽도 :전남 여수시 삼산면 손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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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연안여객선터미널
전남 여수시 여객선터미널길 17
(지번)교동 682-1
연락처 :1666-0920 대표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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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 나로도연안 여객선터미널
전남 고흥군 봉래면 나로도항길 120-7
(지번)봉래면 신금리 12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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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댓글 입니다.
ㅋㅋ 장군이니만큼 나두 거수경례로....ㅋ
예나 지금이나 이런 쓰레기같은 넘들은 차고도 넘침니다.
어디 뭐 놈들 뿐이겠습니까만...... 암튼 뭐~사무실에 앉아
신문이나 보고 빈둥빈둥 시간만 때우며 국민들 혈세나 축내는 는 공무원들
을 비롯해서 우리나라는 전반적으로다가 개혁해야할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나라 공무원 사회의 투명도가 공산국가들 보다도 못한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