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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주는 서북쪽으로는 회산진으로 통하는 함북의 교통 요지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인민군 130여 명을 사살하고 50여 명의 귀순을 받아들였으며 60여 명을 생포했다.
하지만 우리의 피해도 그에 못지 않았다.
전사 20명, 부상자 9명 등으로 원산 전투이래 가장 큰 전투였다.
길주를 점령한 우리 연대는 회산진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우리 수색대는 하늘 아래 첫동네라는 백암까지 진출했다.
허리까지 차는 눈 속을 헤치면서 백암 1km 전방에 이르렀을 때 한 노파의 신고로 인민학교에서 잠을 자고 있는 인민군 대대본부를 기습 60 여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리고 분대장 각삼 이성일을 포로했다.
그는 우리 수색대의 소사에 길이 남겨진 주인공이 되었다.(이성일의 이야기는 후술)
우리는 백암에서 제3사단 수색대에 상황을 인계하고 다시 길주로 이동, 명천을 거쳐서 청진으로 진격했다.
11월 18일 우리가 신명천을 점령했을 때 서부전선에는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와 UN군을 겹겹이 포위하고 대공세를 펴 UN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이들은 인해전술을 사용하여 꽹과리를 치면서 무섭게 공격을 하다가 자취를 감추곤 하여 UN군의 정보판단을 흐리게 했다.
우리는 11월 30일, 나진에 진출했다.
나진의 지형이 日本군의 요새다운 곳이었음을 기억한다.
드디어 두만강이 눈앞에 다가왔다.
안타깝게도 서부 전선에서는 청천강 이남으로 철수 명령이 내려진 이후였다.
우리부대는 L-19 기에서 떨어트린 통신문을 통해서 흥남 부두로 철수하라는 작전명령을 받았다.
결국 우리는 11월 1일 부거까지 진격했던 제2대대를 선두로 해서 11월 4일에는 성진까지 철수하고 말았다.
다시 南으로의 철수
내가 함흥을 점령했을 때 소방서의 물탱크 차가 깨끗한 상태로 방치된 것을 발견하였다.
그 차의 운전사를 찾아보았는데 잠시후 그 운전사가 나타나서 그 차는 새 차와 다름없기에 군의 작전에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우리 수색대는 그 차를 잡물 운반용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를 이용해서 잡물건 등과 함께 3∼4명이 동승, 남으로 철수의 길에 올랐다.
눈 덮인 천릿길, 영하 30도를 밑도는 추위를 이겨내며 흥남 서호진 부두에 집결한 것은 12월 7일이다.
흥남부두에는 10만의 피난 인파가 홍수처럼 물결을 일어 우왕좌왕 하며 대혼란을 만들고 있었다.
해상철수를 기다리는 병력(UN군 포함) 10만 5천, 차량이 1만 7천 5백대, 화물 35만톤(연료 2만9천5백트럼. 탄약 9천톤)이었다.
그러나 이를 수송할 수송선은 115척 뿐 이었다.
내가 아끼던 소방차는 군용트럭이 아니었기 때문에 버릴 수밖에 없었다.
10여일 동안 UN군과 함께 함흥, 흥남선을 방어하다가 수송선에 승선한 것은 12월 16일 밤 12시.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묵호항을 향해 항진했다.
우리들이 흥남 부두에 집결하자 중공군 9만 명과 인민군 3만 명은 UN군을 바닷속으로 몰아 넣을 작정인양 맹공격을 가했다.
이러 난리통 속에서 10만의 피난민들이 UN군이 피난민들을 버리고 철수한다면 철수작전을 방해하겠다며 난리를 피웠다.
그들은 자신들도 함께 대피할 것을 UN군에 요구했다.
이에 UN군은 9만 1천여명의 피난민들을 수송하느라 많은 군수물자를(폭탄 50만 파운드, 다이너마이트 400톤, 계량이 불가능한 막대한 유류 등)폭파해야 했다.
우리들의 승선작전은 참으로 목숨을 건 싸움이었다.
바다 한 가운데에 뛰어 놓은 수송선까지는 상륙정을 타고 가서 그물을 타고 기어올라가야 했다.
눈보라치는 겨울 바다의 맹추위는 영하 30도를 훨씬 밑돌고 있었다.
그물은 꽁꽁 얼어서 마치 빙벽을 타는 것과 같았다.
개인 장구로 완전 무장한 병사들이 파도에 요동치는 그물을 잡고 군화를 신고 기어오르는 것(그런 훈련을 받아 본적이 없는 군인들에게)은 죽음의 곡예와도 같았다.
만일에 미끄러지는 경우 바닷속의 고기밥이 되고 마는 상황이었다.
많은 전우들이 미끄러져서 물 속으로 빠진다 해도 속수무책이었다.
실상 박격포를 멘 두 병사가 나의 발밑에서 사력을 다해 기어오르다가 미끄러져서 수장되고 말았다.
그렇게 수송선을 타고 묵호항에 도착한 것은 출항 24시간 후인 12월 18일이었다.
상륙하자마자 잠시 쉴 사이도 없이 북으로 진격, 다시 38선을 중심으로 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치욕의 속사리 전투
12월 23일 전선을 시찰하던 워커 장군이 전사하고 후임으로 美육군참모차장 「리지웨이」장군이 부임했다. 그의 작전은 치고 빠지는 것이었다.
밀고 올라갔다가는 다시 후퇴하고 또 치고, 이렇게 1950년이 저물고 나는 1951년 설날을 어느 농가의 추녀 밑에서 맞이했다. 1월 4일, 서울은 다시 중공군에게 함락되고 동해안의 전선에는 눈이 그치지 않았다.
3월 1일 속사리 전투는 우리 연대 최대의 패전 기록이요. 치욕의 전투였다.
그러나 여기서 나의 친구이자 포로였던 이성일 이야기를 남기고 싶다.
북진 시에 잠깐 언급한 함북 백암에서 포로로 잡은 李군이 북한에서 선생님이었던 우리 연대 제1대대장 박경호 소령과 함께 다시 인민군에게 포로가 되고 말았다.
어찌 보면 그는 다시 해방이 된 셈이었다.
그가 다시 인민군에 잡히자 "나는 인민군이었다"면서 인민군 편으로 돌아서 국군을 괴롭히는 척 하다가 대대장님을 빼내어 다시 국군으로 탈출 한 미담은 우리 연대 전사에도 기록으로 남겨졌다.
각설하고 속사리의 비극은 1천 5백여명의 전우들이 행방불명, 전사, 부상, 동상으로 연대의 전력이 와해되는 전투로 기록되었다.
나는 겹겹이 둘러싼 적의 포위선을 뚫고 사력을 다해 나오면서 너무나 배가 고팠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눈을 입속에 억지로 넣어서 허기를 달랬고 결국에는 혀가 다 갈라져 오랜 시간을 고생했다.
속사리 전투에서 고배를 마신 우리부대는 강릉 농업학교에서 재편을 한 뒤 준령 설악산 전투를 치렀다.
연대가 향로봉(해발 1.293 m)을 점령한 것은 51년 5월 31일이었다.
제2대대 정보관이 교육을 갔기 때문에 내가 대대 정보관을 대리하여 향로봉의 서북방 924고지 전투에 참가했다.
이 전투의 특징은 오늘은 우리가, 내일은 인민군이 서로 뺏고 빼앗기는 혈전을 거듭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전투에서 박격포탄 하나를 몽땅 뒤집어쓰는 중상을 입었다.
그리고 두명의 포로의 등에 실려 사지를 탈출했다. (이 전투실기는 1999년 국방부 공모작품에서 가작 수상을 한 참전수기로 남겼다.) 그리고 나는 59야전병원을 거쳐 부산의 31육군병원에서 3개월만에 완쾌하여 다시 우리 연대로 복귀했다.
내가 부대로 복귀하자마자 기갑연대는 주문진에서 선편으로 마산에 상륙했다.
지리산등지에서 출동하는 공비를 소탕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12월 2일부터 본격적인 공비토벌작전에 돌입했다.
(여기서 나는 당시 공비토벌 부대의 참전 병사로서 한 증언을 남겨놓고자 한다.)
나는 연대 정보과에 배속되어 잡혀 온 공비의 심문 조사 등에 임했다.
그때 우리들은 공비토벌 작전에 들어가기에 앞서 연대장에게 서약서를 썼다.
"모든 장병은 어떠한 작전 상황 하에서도 부락에서 떨어진 고지에 주둔하고 허락 없이 주민과의 접촉을 일절 엄금한다. 나무 한 개라도 민폐를 끼쳤을 경우에는 군법에 회부하여 엄벌에 처하여도 달게 받는다"
3개월 여의 공비토벌 작전에서 5000여명의 입산자들을 구출했고 여, 순 반란군과 인민군, 남로당원 등 악랄한 공비들만 골라서 처벌하였다.
죽은 이태나 북한으로 송환된 이인모도 우리 연대에서 생포했고 그들의 죄질이 무거워서 중역형을 선고했다.
공비토벌 작전에
우리 사단(수도사단 송요찬 사단장)의 작전이 성과가 좋아 1952년 3월 중순경에 다시 전선으로 복귀하여 지형능선으로 투입되었다.
나는 부상당한 능막에 이상이 생겨 다시 대구의 제3육군병원으로 입원했다.
2개월여 치료를 받고 퇴원을 하게 되었는데 다시 일선으로 나가라는 병원장에게(고 신학진 대령) 당분간 후방에서 좀 근무할 수 있도록 항의를 했더니 1953년 1월 전남 병사구 사령부로 발령을 내 주셨다.
나는 간만에 후방부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나는 병사구사령부에서 6개월 동안, 군, 검, 경 합동 병역기피자 단속의 책임자로 일하며 도내 기피자를 찾는데 전념했다.
나에게 걸린 기피자는 그 배후의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용서 없이 집행했기에 나는 이곳저곳에서 많은 미움을 받기도 했다.
나는 씁쓸한 심정으로 서서히 부대에 대한 정이 식어갔다.
그런데 마침 부대에서는 상사급을 선발해서 보병학교에 입교시킨다는 육본의 지시가 있었고 나는 광주의 보병학교에 간부후보생으로 입교했다.
3개월의 후반기 교육을 받고 휴전이 된지 한달 후인 1953년 8월 나는, 소위로 임관했다.
그리고 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보병제 5사단의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부임 3개월 후, 나는 소대장이 되어 두 번째로 지리산의 공비 토벌작전에 참전했다.
참으로 고생스러운 토벌작전이었다.
이 작전에 참전했던 나의 소대 병사들에게 머리 숙여 위로의 뜻을 전하고자 한다.
특히 눈 덮인 노고단 험준한 산골짜기에서 생고생을 하며 결국 공비와의 총격전에서 전사한 분대장 정중사의 명복을 빌어마지 않는다.
1954년 최후의 공산비적의 괴수 이현상이 살해되고 지리산에는 실로 8년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 왔다.
우리 부대는 다시 중동부 전선의 펀치볼 지역으로 투입, 배치됐다.
나의 공산군과의 전쟁은 1950년 6. 25 이후 멈춤이라는 38선을 통하여 중단되었다.
아무튼 길고 긴 4년 간의 전쟁이었다.
무려 그 기간은 1.110일 하고도 8개월이나 된다.
그러나 내 비록 노병이나 당시의 애국하던 그 마음은 영원히 변할 수 없다.
그 마음을 간직하며 나는 천백십일을 넘어서 70줄에 들어선 지금까지 한국의 참전노병을 위해 살아왔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첫댓글 아무리 스압이어도 한 글에 모아주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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