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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35 - 카부산지 절을 내려와 전철로 은행나무 거리에 도착해 구경하다!
2024년 11월 28일 우메다 (梅田) 의 JR 오사카 역에서 기차로 다카쓰키 (高規) 역에 도착해서
북구 정류소 1번 승차장에서 하라 오하시 (原大橋) 행 버스를 타고 카부산구치
(神峰山口) 정류소에서 내려 마을로 올라가 20분을 걸어서 카부산지 (神峰山寺) 절에 도착합니다.
카부산지 (神峰山寺) 절의 니오몬 앞에 도착해서는 400엔을 내고 절 안으로 들어가니 새빨간 단풍
천지라 이번 여행에서 비로소 흡족한 마음인데..... 카부산지 (神峰山寺 신봉산사,
가미미네잔지) 는 오사카부 북쪽 다카츠키시( (高規市) 하라(原) 에 있는 천태종의 불교 사원입니다.
일본의 천태종은 덴다이슈 (天台宗てんだいしゅう) 라고 부르는데, 806년 일본에서 공식적으로 확립된 대승
불교로 창립 이래 교토 히에이산에 기반을 둔 천태종은 헤이안 시대 (794~1185) 에 두각을 나타냈으니
점차 강력한 법상종을 능가하고 라이벌 진언종과 경쟁하여 일본 황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파가 되었습니다.
가마쿠라 시대 (1185~1333) 까지 천태종은 수많은 사원과 광대한 토지를 보유한 일본
불교의 지배적인 종파 중 하나가 되었는데, 가마쿠라 시대에 많은 승려들이
부패한 것으로 보고 천태종 떠나 자신만의 새롭거나 "가마쿠라" 불교 종파를 설립합니다.
센고쿠(戰國 전국) 시대인 1571년 오다 노부나가가 교토의 엔랴쿠지 본산을 공격해 승려와
신도들을 죽이고 절에는 불을 질러 파괴하였고...... 그후 19세기 말레
메이지유신후 수도를 교토에서 에도(도쿄) 로 옮기면서 천태종의 영향력은 더욱 약화됩니다.
문득 서울 시립대 교수 염복규씨가 동아일보 '염복규의 경성, 서울의 기원' 에 쓴 "천황 사신
두고 청일 전쟁 승전 기념비 까지..... 경성에 침투한 일본 신사" 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신사로 본 日 식민지 정책 : 1913년 8월 29일 ‘왜성대 (倭城臺) 위대신궁 (大神宮)’ 에서는 ‘일한병합기념일
임시제전’ 이 거행됐다 (매일신보). 이듬해 7월 30일에는 ‘경성의 관민 일동’ 이 메이지 천황(1912년
7월 30일 사망) 을 추모하는 ‘요배 (遙拜) 의식’ 을 ‘왜성대 공원’ 에서 거행했다 (매일신보). ‘왜성대’
혹은 ‘왜성대 공원’ 이라고 부르는 곳이 경성의 일본인에게 뜻깊은 장소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곳은 어디일까?》
서울 지하철 4호선 명동역에서 중구 소파로를 따라 남산으로 올라가다 보면 과거 서울시교육청, 서울애니메이션
센터 등이 있었던 자리가 나온다. 19세기 말 일본 공사관이 들어섰던 곳이다. 공사관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통감부 청사가 됐으며 병합 이후 경복궁에 새 청사를 지을 때까지 조선총독부 청사로 사용됐다.
충무로 일대 남촌에 정착한 일본인들은 공사관 일대를 왜성대라고 불렀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주둔했던 장소라는 데서 비롯한 명명이다. 1897년 일본인 거류민단은
대한제국 정부로 부터 일대의 토지를 얻어 공원을 조성했다. 왜성대 공원이 된 것이다.
공원을 확보한 거류민단은 그들의 정신적 구심점이 될 신사 (神社) 를 건립했다.
거류민단이 건립한 신사는 처음에 남산대신궁 (南山大神宮) 이라고 불렸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작은 이주민 신사였다. 후일 거류민단은 이 작은 규모의
신사를 경성신사 (京城神社) 로 이름을 바꾸고 부속 신사로 텐만궁
(天滿宮) 과 이나리신사 (稲荷神社) 에 하치만궁 (八幡宮) 까지 건립했다.
이와 함께 신사 본사로 올라가는 입구에는 청일 전쟁의 승전을 기념하는
갑오전역 기념비 까지 세우고 매년 위령제나 초혼제 등을 개최했다.
경성신사의 건립과 확장 과정은 일본인의 남촌 정착과 세력 확장 과정을 상징한다. 신사를 세운 주체가
국가나 정부가 아닌 거류민이라는 민간 집단이거니와 토속신인 공부의 신, 농업의 신, 전쟁의
신 등을 모시는 텐만궁, 이나리신사, 하치만궁 등은 모두 신도 (神道) 의 민간 신앙적 측면을 반영한다.
게다가 신도와 직접 관계가 없는 갑오전역 기념비를 세운 것도 의미심장하다. 청일전쟁에서 승리
함으로써 일본은 비로소 한반도에서 청나라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거류민의 입장
에서 보면 그간 남대문통 등지의 상업가에서 늘 청나라 상인에게 눌려 지내던 일본 상인이
기를 펴는 계기가 되었다. 기념비 건립은 이제 남산, 서울의 주인은 일본인이라는 선언 이었달까?
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안중근의사기념관에 이른다. 기념관이 위치한 넓고 평평한 지대는
1925년 조선신궁 상광장으로 조성됐다. 신궁의 본전(本殿)과 배전(拜殿)이 있었던 곳이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을 대표할 신사인 신궁의 건립 계획을 1910년대 초부터 세웠으나, 3·1운동 이후
구체화 했다. 일본 정부는 미증유의 대규모 독립 시위가 가져온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 영구한 식민통치를 신에게 기원하려는 종교적 바람에서 조선신궁 건립을 공식적으로 허가했다.
조선신궁은 국가 의례를 거행하는 ‘관폐대사 (官弊大社)’ 였으며 천황이 사신을 보내는 ‘칙제사 (勅祭社)’ 이기도
했다. 1920년대 일본의 칙제사는 본토에도 16곳 밖에 없었다. 식민지에는 조선신궁이 유일했다. 조선신궁의
제신 (祭神) 으로는 일본 열도의 시조신으로 일컬어지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天照大神) 와 메이지 천황을 선정했다.
이것은 그냥 선정한 것이 아니다. 일 본의 고대 역사서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에 따르면 아마테라스
의 동생인 폭풍의 신 스사노 오노미코토 (素盞鳴尊) 는 난폭한 행동을 하다가 열도에서 쫓겨난다.
당시 식민 사학자들은 스사노가 쫓겨간 곳이 바로 한반도 남부로 이때 부터 일본에서 건너간
세력이 한반도를 지배했다고 주장했다. 식민사학의 주요 논리 중 하나인 ‘임나 일본부설’ 이 떠오른다.
여기에서 좀 더 나아간 이야기가 스사노가 바로 삼국유사의 단군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일본 시조신의 동생이 고대 한반도의 지배자 단군이었기 때문에 원래 일본과 한국은
형제의 나라이며, 한일병합은 헤어졌던 형제가 만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논리다.
그리고 여기에서 형제의 재회를 가능하게 한 병합의 공로자는 메이지 천황(일왕) 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준공 당시 조선 신궁은 총 면적 약 12만 평의 대지에 상, 중, 하 세 광장으로 이뤄져 웅장한 경관을
창출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서 계단을 내려가면 나오는 현재 김구와 초대 부통령
이시영의 동상이 있는 백범광장이 중광장이며, 다시 그 아래 남산공원 입구 삼거리가 하광장에 해당한다.
하광장에는 신사를 상징하는 커다란 도리이 (鳥居) 를 세웠다. 방문객이 단골로 사진을 찍는 장소였다.
일제 말기 조선총독부가 이른바 ‘황국신민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자의 반, 타의 반 조선신궁을
찾는 이들이 증가했다. 일부 부유층 중에는 이곳에서 일본식 결혼식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1934년 남산 일대에는 또 하나의 신사가 들어섰다. 조선총독부는 경성신사 바로 맞은편에 일본
육군 대장을 지낸 노기 마레스 케(乃木希典· 1849∼1912) 를 모시는 노기신사를
건립했다. 노기는 어떤 사람이기에 본토도 아닌 식민지 조선에 그를 모시는 신사가 세워진 것일까?
메이지 유신의 중심 세력인 조슈 번 (長州藩· 야마구치현) 출신 하급 무사였던
노기는 막부와의 전쟁 과정에서 여러 차례 활약해 초기 일본 육군의 주역이 됐다.
그는 청일전쟁에도 여단장으로 출정했을 뿐만 아니라 러일전쟁에도 제3군 사령관으로
참전해 전쟁의 승부를 가른만주 요동반도의 뤼순 (旅順) 공략을 지휘했다.
그러나 이런 공식적인 ‘활약상’ 때문에 그를 모시는 신사가 건립된 것은 아니다.
그는 러일전쟁에 참전한 두 아들이 전사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사망하자
부인과 함께 할복 자살했다. 이후 노기는 이른바 ‘군신 (軍神)’ 으로 추앙을 받아 일본 각지에
노기신사가 세워졌다. 조선에도 노기신사를 건립하기로 결정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조선인에게 천황(일왕) 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충신이 되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광복 후 남산에 신사의 흔적은 비교적 빠르게 지워졌다. 그만큼 상징성이 노골적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신궁의 경우 혹시 한국인에 의해 신궁이 파괴되는 ‘불경한’ 일이
벌어질까 두려워 일본인 신직 (神職) 들이 자신의 손으로 신궁을 신속하게 해체 했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도리이를 철거한 것이 1947년 7월이다 (경향신문·1947년 7월 3일). 그리고 그 자리는
대한민국의 상징물로 채워졌다. 처음에는 이승만 동상이 들어서기도 했으나 1960년대 이래 안중근,
김구등이 자리를 대신했다. ‘식민의 기억’ 이 강렬한 장소였던 만큼 ‘기억의 역전’ 도 선명하게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말없이 남아 장소의 역사를 증언하는 것도 있다. 6·25전쟁 중 군경 유자녀 수용시설로
문을 연 남산원 경내에는 현재도 돌벤치나 탁자 등으로 사용하는 노기 신사 유구가 흩어져 있다.
입구에는 원래 신사의 수조 (신사에 들어가기 전에 손을 씻는 시설) 였던 것이 화단 처럼
놓여 있기도 하다. 숭의여대 교내에도 경성신사의 유구가 적지 않게 남아 있다.
그런가 하면 2014년 한양도성 복원을 위한 남산 회현자락 정비사업 과정에서 조선신궁 배전터가 발굴되기도
했다. 서울시는 한양도성 현장유적 전시관을 조성하며 한양도성의 유구와 그 위에 들어선 조선 신궁의
흔적을 함께 보존했다. 식민의 부정적 유산을 망각하지 않고 역사적 교훈을 남기기 위한 고민의 산물 이었다.
그러고는 옛 생각을 접고는 카부산지 (神峰山寺) 절을 뒤로 하고 나오니 입구에 매점이 있고
많은 방문백들이 탁자에 앉아 차나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눈는 편안한
풍경을 지나쳐서 산길을 20여분 걸어 내려와서는 나무로 된 문을 열고 마을로 들어가는데.....
산에서 멧돼지 같은 짐승이 밤에 마을에 내려올까 걱정이 되어 문을 잠궈놓는데, 열쇠로 잠그는 것은
아니라..... 사람이 쇠막대기를 돌리면 열리는데 문을 통과한후 다시 쇠막대를 내려서 잠급니다.
마을을 지나 내려와서 카부산구치 (神峰山口) 정류소에 이르러 보니 버스 시간표가 붙어 있는데..... 70대 할머니가
어디 가느냐며 말을 걸어 오는데 고야산 다녀온걸 얘기하며 가보라기에 우리가 몇 년전 다녀왔다니 놀랍니다?
그러자 울 마눌은 슬며시 내 소매를 잡아끄는데..... 할머니가 너무 우리에게 접근하니
무슨 의도가 있는건지 아님 혹 치매 같은 것을 걱정하는 모양인데 그런 것은
아니고 혼자 사니 외로운데다가 또 외국인이니 호기심에 대화를 해 보고싶은 모양 입니다?
이윽고 도착한 버스를 타고는 20여분이 걸려 다시 JR 다카쓰키시역 (高規市駅) 에
도착해서는 다시 이코카 카드로 JR 기차를 타고 오사카 시내로 돌아옵니다.
오늘 아침에는 우메다(梅田) 역에서 JR 기차를 타였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우린 원데이패스가 있는지라 그 전인
신오사카역에서 지하철을 타는게 이코카 카드 요금을 어람라도 줄일수 있으니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서 신오사카역에 내리니 역 구내에 꽃집이 있어 마침 붉은 장미가 보이기로 잠시 둘러
보는데...... 장미도 여러 색깔이 보이지만 그 유명한 "푸른 장미" 는 보이지 않습니다.
“있을수 없는 불가능한 것” 을 뜻하는 영어 단어인 "Blue Rose" 를 현실로 변화시킨 일본인의 재능이 떠오르니
장미는 생각할 것도 없이 붉은색 이니 푸른색 장미는 없는지라..... "Blue Rose" 는 불가능 그 자체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매사에 꼼꼼한 일본인들의 습성이 발휘된 것인지 일본 산토리사에서는
팬지꽃에서 얻은 파란 색소를 만드는 유전자인 블루진을 붉은 장미
에 넣어 푸른장미 를 세계 최초로 만들어 한송이에 2천엔(2만원?) 에 팔았다고 합니다!
현실에 파란 장미는 실존하지 않았으니 식물의 꽃에서 푸른색을 내게 하는 색소는 델피니딘
으로 장미에는 델피니딘을 생산하는 유전자가 없기 때문인데 우리나라에서 시판되는
푸른 장미는 흰 장미를 염색한 물건이 대부분이니... 푸른 장미는 '신비로움' 이나
'불가능' 의 상징이 되었고..... 푸른 장미를 얻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설화도 생겨났습니다.
정작 색깔은 푸르다고 말하기는 좀 애매한 색상으로 어두운 보라색 계열의 장미 는 기존에도
품종이 많으니 구글에 블루 문, 블루 라이트 등 검색해 이미지를 보면 색상이 별 차이
없지만 기존의 보라색 장미가 붉은색의 명도 차이 로 인해 그렇게 보이는데 반해서,
위의 일본의 푸른 장미는..... 푸른색 계열의 색소 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다시 오사카 원데이 패스로 미도스지선 (적색) 御堂筋線 みどうすじせん
지하철을 타고 오다가..... 중간에 신사이바시역에 내려서 올라옵니다.
여기는 아주 넓은 대로인데 도로변에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줄지어 서 있으니 노랑색으로 물든
모습이 좋다고 했는데 금년은 늦더위로 단풍이 늦게 든지라 아직은 그리 예쁘지는 않습니다.
거리를 걸으면서 떠오르는게 좀 전에 신오사카역 꽃집에서 푸른장미를 생각했었는데.... 일본은 큰 발명은 못해도
노벨상 수상자는 30명 에 이르는데, 1979년 소니 카세트 라디오 워크맨 을 만든이래 디카를 발명하였습니다.
1994년 덴소 웨이브사는 "QR 코드" 를 발명해 특허 등록을 하지 않았으니 전세계인들이 무료로 사용하고
있는데, 만일 일본 화사가 특허 등록을 한후 개인은 제외 하더래도 MS 나 ARM 처럼 삼성전자등 기업과
기관, 국가에서 로열티를 받는다면 천문학적인 금액 일텐데...... 일본인들은 어리석은가 아님 바보 들인가?
1982년 히로시 우에다 씨는 다테야마산에 올랐을 때, 카메라를 바위에 올려두고 셀카 를 찍으면서
“하늘에서 나 자신을 찍을 수 있는 봉 같은게 있다면 좋겠다” 는 생각을 하다가..... 막대기에
카메라를 장착해 리모컨으로 셔터를 눌러 촬영할수 있게 발명해서 특허 등록을 마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셀카봉은 일본인은 남 앞에 나서는걸 좋아하지 않는 특성으로, 부끄러워서 사람들 앞에서
좀처럼 사용하기 어렵겠다는 부서 의견에도 제조 판매했더니 저조해 사라졌는데... 몇십년후
저 셀카봉이 인도네시아 에서 나타나고.... 이후 한국 에 전해진 후 폭발적인 보급이 이루어집니다.
오늘 은행나무 거리에서 노랑색 단풍을 실컷 구경했으니..... 이제는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서는 사람들로 혼잡한 신사이버스지를 지나서 "도톤보리" 를 찾아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