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순위 |
重要 史實(年代) |
選定 理由 |
1 |
대한제국 성립
(1897년) |
1897년 2월 고종이 환궁한 후 독립협회와 일부 수구파가 연합하여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추진, 8월에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쳤으며, 9월에는 원구단(圜丘壇)을 세웠고, 드디어 1897년 10월 12일 황제즉위식을 올림으로써 대한제국이 성립되었다.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같은 해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됨으로써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국호는 다시 조선으로 바뀌었다. 주체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기회였고 실제 그런 움직임이 이뤄지고 있던 시대였기 때문에 대한제국 시기는 우리나라의 주체적인 근대화 시기 |
2 |
을사조약 체결
(1905년) |
을사조약은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한국 정부를 강압하여 체결한 조약이다. 을사조약을 체결한 이후 대한 제국은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겨 국제 사회에서 독립 국가로 인정을 못 받았으며, 사실상 이때부터 일본의 속국이 되었다. |
3 |
갑신정변
(1884년) |
조선 고종 21년(1884)에 김옥균, 박영효 등의 개화당이 민 씨 일파를 몰아내고 혁신적인 정부를 세우기 위하여 일으킨 정변. 거사 이틀 후에 민 씨 등의 수구당과 청나라 군사의 반격을 받아 실패로 돌아갔다. |
4 |
동학농민운동
(1894년) |
조선 고종 31년(1894)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接主) 전봉준 등을 지도자로 동학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와 착취에 대한 항거에서 발단하여 한때는 관군을 무찌르고 삼남 지방을 휩쓸었으나, 결국 중국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으로 실패로 끝났다. 후에 항일 의병 투쟁과 3·1 운동으로 계승되었다. |
5 |
갑오개혁
(1894년~1896년) |
갑오개혁을 추진한 개화파 관료들은 개항 후 1880년대 초반에 외교사절단원이나 유학생으로 외국에 있으면서 세계정세를 익히고 일본과 청나라의 개혁 등을 살핀 후 조선에 필요한 개혁안을 실천에 옮긴 것이므로 자율적인 개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갑오개혁의 정신은 독립협회운동과 계몽운동으로 이어져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하였다. |
6 |
을미사변
(1895년) |
선 고종 32년(1895)에 일본의 자객들이 경복궁을 습격하여 명성 황후를 죽인 사건.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등이 친러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켰으며, 이로 인하여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하였다 |
7 |
독립협회 창설
(1896년) |
독립협회는 민중계몽에 나선 서재필을 중심으로 이상재, 윤치호 등이 참여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정치단체이다. 독립협회는 정부의 외세의존정책에 반대하는 개화 지식층이 한국의 자주독립과 개혁을 표방하고 활동함으로써 민족적 자주의식을 높이고, 민중에게 자유 민권사상을 보급시켜 권리의식을 높였으며 이로 인하여 봉건적 신분제도를 지탱해 온 명분관념을 붕괴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
8 |
강화도 조약
(1876년) |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 고종13년(1876)에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한 조약. 군사력을 동원한 일본의 강압에 맺어진 불평등 조약으로 이 조약에 따라 당시 조선은 부산 외에 인천, 원산의 두 항구를 개방하였다. |
9 |
안중근의사의 하얼빈 의거
(1909년) |
안중근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으로 가장, 하얼빈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를 사살하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 만철이사 다나카 세이타로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곧 일본 관헌에게 넘겨져 뤼순의 일본 감옥에 수감되었고 이듬해 2월 14일,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 3월 26일 형이 집행되었다. |
10 |
우정국 설치
(1884년) |
한국 최초의 우편행정관서로서, 1884년(고종 21) 종래 역참제(驛站制)에서 탈피하여 근대적 통신제도를 도입, 그 운영을 위해 설치하였습니다. 전에는 소식을 들고 며칠씩 걸려서 가야만 했던 번거로움을 우정국을 설치함으로써 해소시킬 수 있었죠. 하지만 우정국 운영에 관여한 일본 관리들이 우리나라의 정보를 입수하기 좋은 상태로 우리나라의 정보 체계를 일원화 했다는 한계도 지니고 있었다. |
그들이 추진할 개혁에 믿음을 갖게 한 뒤 그 개혁 방침에 대한 동의와 지지를 받아 백성들을 함께 이끌고 개혁을 추진해 나갔더라면 더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올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남지 않은 대통령 선거도 이와 같은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내거는 수많은 공약들 중에서 지키지도 못할 약속들은 국민들의 불신만 가져올 뿐입니다. 국민들을 안심시키고, 과거의 실패를 좋은 경험으로 삼아 체계적이고 계획성있게 일을 추진해 나간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박상율 학우와 비슷한 의견입니다. 리더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박상율 학우에 달아준 댓글처럼 우리는 예비교사인 만큼 세상을 이끌어나가는 리더를 만드는데 교육을 통해 리더를 길러야 합니다. 미래를 바라보고 현재를 올바르게 바라보는 시선을 갖춘 리더 말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통합하는 능력도 갖춘 리더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교사로서 이런 능력들을 갖춘 학생들을 교육을 통해 양성해야 하겠습니다.
안진성 학우, 발표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갑신정변과 마찬가지로 갑오개혁은 외세의 간섭과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등 여러 한계점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일본의 간섭 하에 있었기 때문에 군사개혁을 이루지 못한 사실은 주체적이고 독립적 위치에 서지 못한 우리나라의 현실을 안타깝게 합니다. 그리고 갑오농민운동을 통해 나타났듯이 민중들이 느끼던 기존사회에 대한 불만을 해소시켜줄 개혁내용이 누락되었다는 사실은 아직까지 근대사회로 완벽하게 진입하지 못한 당시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만약 갑오개혁이 외세의 간섭없이 민중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더라면 근대사회로의 진입이 훨씬 앞당겨 졌을 것이며, 근대사회에서 주체적 위치에 서게 되어 불행했던 근대사가 조금은 바뀌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갑오개혁의 실패원인은 여러 방면에서 빠른 변화를 요구하던 당시의 시대적 요구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데 있습니다. 시대적 변화에 적극적으로 태처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네 이선녀 학우의 의견처럼 갑오개혁이 외세의 간섭 없이 민중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더라면 근대사회로의 진입이 훨씬 앞당겨 졌을 것이며, 근대사회에서 주체적 위치에 서게 되어 불행했던 근대사가 조금은 바뀌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선녀 학우의 의견처럼 시대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바르게 대처하는 법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현대를 살아가는데 좋은 지침이 될 것입니다.
안진성 학우의 발표 잘 들었습니다.^^ 갑오개혁이 조선을 독점적으로 지배한 일본에 의해서 추진되고 뒷받침되었다는 것은 그 동안에 일본의 침략의도가 도사리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로부터 냉담한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갑오개혁은 그야말로 제도하의 근대화에 그치고 말았으며 국민의 지지나 참여를 받을 수 없어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110년 전 갑오개혁을 우리가 다시 살펴보는 이유는 그것이 19세기 이래 오늘날까지 위로부터의 근대화 운동이 갖는 ‘외세 의존성’이라는 한계의 원형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율적이 자세와 주체적인 자세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갑오개혁이 외세 의존적이지 않고 자율적이고 주체적으로 펼쳐나갔다면 좀 더 빠른 근대사회로의 진입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네 외세에 의존 없이 자주정신을 지니고 일을 성사시켰더라면 갑오개혁은 과연 실패로 막이 내렸을까 라는 아쉬움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점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일을 하는데 우리는 자신의 역량을 올바르게 깨닫고 그에 맞추어 일을 실행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분수도 모르고 자신의 역량보다 큰일을 하려 한다면 이는 실패할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는 이렇듯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의 역량에 비추어 주체적으로 일을 실행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갑오개혁은 한국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정치, 경제, 사회 등 다방면에 걸친 대개혁이었습니다. 이렇듯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할 수도 있었지만 너무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5년동안 무려 200여건의 개혁안이 발표되었는데 다 실행하기엔 시간이 부족하였습니다. 변화에만 급급하여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해서 개혁에만 열을 올렸던 것입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후에 3년간의 검토기간을 가졌고 그로인해 좋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이처럼 계획을 세운 후에는 충분한 준비기간이 필요하고 또한 재검토한 후에 시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계획을 세우고 나서 잘 지키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너무 단기간에 효과를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하고, 며칠이 지났는데 발전이 없으면 금방 포기하고 맙니다. 이것은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목표를 세운 후에 그것을 너무 급하게 이루고자 하여 과정에 충실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금방 그 결과를 알고 싶은 마음에 충분히 검토하지 않아서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너무 급하게 생각한 나머지 목적과 과정이 전도되지 않도록 좀 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확실히 준비하는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 일의 성과가 바로바로 나타난다면 우리는 더욱 신이 나서 일을 수행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바로 일의 성과가 들어나는 것이 있는 반면 천천히 나중에야 비로소 일의 성과가 나타나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조창현 학우의 의견처럼 결과만을 생각한 나머지 목적과 과정이 전도되지 않도록 좀 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확실히 준비하는 삶의 자세가 필요하겠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일을 하는데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합니다.
갑오개혁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개혁이기도 하면서 후에 독립협회와 여러 계몽운동에 영향을 준 대단한 개혁입니다. 하지만 갑오개혁은 일본의 간섭하에 이루어진 개혁이므로, 군사개혁은 하지 못했습니다. 토지제도의 개혁도 하지 못했고요. 무슨 일을 하든지 누군가의 간섭이 있고, 지나친 관심이 있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신의 의지가 부족해지고 눈치를 보게 되기 때문이지요. 시대적으로 여러 층의 사람들이 개혁을 원했던 시기인만큼 그 시대의 집권층은 실질적인 개혁을 위해 나름의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그것을 빨리 깨닫고, 어느 누구의 간섭하에서 개혁을 진행하기 보다는 우리 조선인의 의지가 담긴 개혁을 했어야합니다. 또한 갑오개혁은 너무 급진적인 개혁을 실행하려고 했습니다. 짧은 기간동안 200여개를 개혁하려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한국인의 근성이 나옵니다. 너무 빨리빨리만 하려고하는 근성 말입니다. 요즘 현대사회에서 주목받고 있는 '느림의 미학'이라는 말도 있듯이 여유를 가지고 하나를 하더라도 제대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짧은 기간동안 많은 것들을 이루려고 하니, 오히려 제대로 된 개혁을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마음이 급해지기 마련이니까요.
우리도 어떤 일을 하고 싶다고 해서 마구잡이식으로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계획하면 그 중 하나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나를 하더라도 제대로 하는 마음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 (위에 댓글과 끊겼네요. 혜림학우 댓글 위의 하나와 연결해 읽어주세요^^)
네 박지은 학우의 말처럼 우리는 일을 하는데 하나에 몰두하여 자신의 힘을 모두 쏟아 넣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일을 성사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마구잡이식 일, 너무 앞만을 생각해서 하는 일 등은 우리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자신의 힘만 낭비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 하나를 하더라도 제대로 하는 마음가짐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 박지은 학우의 의견 잘 들었습니다.
근대화의 물결에 합류하고자 했던 그 당시 조선 개화파들의 몸부림이었던 갑오개혁!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개혁이라는 타이틀에 맞게 갑오개혁은 사회 전반적인 부분에 걸쳐 근대적인 개혁을 꿈꾸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 개혁의 허점을 꼽자면 바로 농민들의 요구였던 토지개혁에 대한 부분이 무시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토지제도 개혁의 누락으로 인해 갑오개혁은 농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채 실패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안진성 학우께서도 도출해 내신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는 어느 방면에서나 ‘힘’을 소유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역사 속에서도 그러하고 지금에 와서도 모든 것이 ‘힘’의 우위에 의해 결정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힘’을 배양하기 위해서 미래 교사를 꿈꾸는 사범대인으로써 책임감과 의무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혁신적인 개혁을 꿈꾸었던 갑오개혁이 한 순간 실패로 돌아간 것을 보았을 때 무슨 일을 추진할 때에는 그에 충분한 준비성과 구체적인 전략이 필수적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발표 준비하시느라 안진성 학우 수고하셨습니다.
저의 의견과 가장 많이 부합된 의견을 내주셨습니다. 제가 결론에 도출하였던 민중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고 기득권층의 생각만으로 갑오개혁을 이루려 하였다는 점에서 실패를 하게 되었고 힘이 없어 일본의 간섭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힘을 길러야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 우리는 교사인 만큼 교육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과 비슷하게 의견을 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결론인 무슨 일을 추진할 때에는 그에 충분한 준비성과 구체적인 전략이 필수적임은 현재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덕목으로 생각되었습니다.
변화는 잔잔한 물에 떠있는 나뭇잎처럼 되어야 합니다. 만약 나뭇잎이 급류를 만난다면 침전하거나 뒤집히거나 물에 흠뻑 젖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변화도 너무 빠르지도 않게 너무 느리지도 않게 순리에 따라야 합니다. 그런면에서 갑오개혁은 실패한 개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충분한 계획을 세우고 하나하나씩 바꿔나가야합니다. 또한, 오늘 본 영상처럼 일제가 며칠만에 유적조사를 끝내고 간 자리에는 온전히 남아있는 유적이 얼마 없었습니다. 이처럼 변화는 천천히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좋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신분제 폐지 등 많은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고 백성들이 원했던 변화도 있었습니다.
* 박윤석 : 1) 바꿔나가야합니다. ->
하지만, 백성들이 원했던 가장 중요한 변화를 읽어내지 못한점은 참 아쉬운 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서양의 변화를 좀더 살펴보고 개혁을 할 필요도 있었습니다. 일본처럼 서양의 것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변화시킨 것처럼 우리도 개혁을 할 때 우리입맛을 고려할 수 있는 개혁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상황을 고려하지 못한채 실행된 이 개혁은 지도자와 백성들의 교류, 해외와 국내의 교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여실히 말해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박윤석 학우의 의견처럼 우리의 상황을 고려하지 못한 채 실행된 갑오개혁은 지도자와 백성들의 교류, 해외와 국내의 교류를 통해 이룩하였더라면 성공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보다 나은 서구에 모델을 찾아 그와 같지 않아도 비슷한 형식을 통해 우리의 입맛에 맞게 이 개혁을 실행시켜나갔더라면 성공한 갑오개혁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해 봐야할 것이 자신보다 나은 모델을 찾아 그를 모방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구미에 맞게 변화시켜 자신에게 적용시킨다면 우리는 발전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 박윤석 : 2) 못한점은 -> 3) 우리입맛을 -> 4) 못한채 -> 5) 말해준다고 ->
갑오개혁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불안과 일본의 침략적인 간섭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이 컸기 때문입니다. 군국기무처가 존속한 5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에 200건이 넘는 많은 개혁안이 발표되어 실시되기 어려웠던 것도 하나의 이유입니다. 우리 현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서양과 일본에 맞추어 제도를 근대적으로 개혁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앞의 갑신정변과 비슷합니다. 실패로 끝난 개혁에는 미숙한 준비에 원인이 있었습니다. 국방 강화를 위한 군사제도의 개혁을 소홀히 하였고
농민들이 절실하게 원하고 있던 토지제도 개혁 등이 포함되지 않아 농민들로부터 외면을 당하였습니다. 의욕만 앞서지 말고 체계적으로 준비했다면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라는 사실을 소홀히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국가 혹은 우수한 엘리트 개인이 국민의 합의 없이 단독적으로 하는 개혁은 개혁이 아니라는 진리 또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김두레 학우의 의견처럼 우리는 모든 의견을 통합하여 그에 맞게 일을 실행시켜 나가야 합니다. 지식층의 의견이나 기득권층의 의견만을 내세워 실행시킨 갑오개혁의 실패를 예로 들을 수 있습니다. 농민군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내세운 개혁안의 실패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교육을 받고 힘이 세다고 다른 나보다 약한 학우의 의견을 무시한 적은 없는지 말입니다. 만약 이런 적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일을 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입니다. 우리는 나보다 약자라도 그의 의견을 수용하여 일을 실행시켜 나가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실패한 갑오개혁에서 저는 성공한 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갑신정변의 실패를 조금은 재고했다고 생각합니다. 동학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갑신정변보다는 더 나은 개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완벽한 시민사회는 아니었지만 신분제를 폐지하려는 노력을 높이 사고 싶습니다. 허나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갑오개혁을 통한 변화는 참된 변화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조선 관료들의 미약하지만 자주적인 면이 보였지만 조선 스스로의 개혁의지가 박약했기 때문에 완벽한 개혁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항상 준비를 외치지만 완벽한 준비는 없습니다. 실패를 거듭 경험하며 완벽을 추구하게 됩니다.
우리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우리 자신의 변화를 준비했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명품을 만드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댓글을 늦게 올려 죄송합니다. 집계표 수정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