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셨다(20-36a)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20)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23)
이렇게 말씀하신 후에,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눈을 피해 은둔하신다(36)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그 이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37)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을 수없이 목격했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기적과 이적이 우리로 예수님을 믿게 만들지 못한다.
"예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말은 거짓이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한다(9-11)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10)
그래서 예수님은 일시적으로 대중들로부터 거리를 두신 것이다.
요한은 이렇게 유대인들이 기적을 목격하고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서 이사야의 글을 인용한다.
38절과 40절에서 각각 이사야 53:1과 이사야 6:10절 말씀을 인용한다.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으며 주께서 보여주신 능력을 누가 깨달았습니까?"(사53:1, 공동번역본)
이사야시대에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기적을 보여주었지만, 아무도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이사야의 항변이다.
요한은 이 말씀으로 이사야때나 예수님 때나 동일하다고 주장.
그리고 사6:10절 말씀이다.
이사야시대때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는 구절이다.
그 이유? 하나님께서 이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이들의 마음을 둔하게 하셨기에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게 된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요한의 주장?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은 원인도 이와 같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을 완곡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든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스라엘땅에 보내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기적을 베풀게 만드신 장본인이시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도록 이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드셨는가?
하나님은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하신 것인가?
앞에서는 믿음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처럼 행동하시고, 뒤에서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시는 것인가?
우리는 그렇치 않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양가성? 이라는 용어가 있다.
"양가성"? 서로 대립적인 감정이 공존하는 현상을 말한다.
동일 대상에 대해서 정반대의 상대적인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현상을 나타내는 용어.
예를 들자면, 약속 장소로 가는 도중, 우연히 너무나 반가운 대상을 만났다.
그래서 그 대상과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고 싶은 "반가움"이라는 감정이 생겼다.
동시에 하지만 이 사람이 나를 너무 오랫동안 붙들고 있으면 약속시간에 늦어지게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생길 수도 있다.
지금, 이 사람은 "반가움"이라는 감정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이런 현상을 "양가성 현상"이라고 한다.
한자로는 兩(두 양) 價(값 가) 性(성품 성)?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진 성질이 동시에 발생하는 현상을 설명하는 용어.
이탈리아 영화 <로스터 도터>에 주인공 레나가 등장. 레나는 7살과 5살 딸을 키우는 워킹맘이다.
자신과 남편은 대학교수이다. 레나는 엄마와 교수로서 자녀 양육과 바깥 일을 동시에 병행해야 한다.
그런데 남편은 자신의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두 딸의 양육을 아내에게 떠 넘기고 있다.
그러자 레나는 두 딸의 양육에 지쳐 어느날 가족들을 버리고 훌쩍 휴가를 떠나버린다.
극중 레나는 이런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 말한다. "아이를 사랑하면서도 미운 마음, 아이와 함께 있고 싶으면서도 아이와 멀어지고 싶은 마음, 혼자 있는게 행복하면서도 아이 사진을 자꾸 들여다보는 마음.
이렇게 모성은 두 가지 상반된 마음이 늘 공존한다"
이렇게 사람은 양가성이라는 성질을 가지고 산다. 이것은 이율배반적인 것이 아니다. 누구나 그렇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자.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은 예수님의 사역을 "양가성"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하여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
예수님은 팔레스틴 땅에서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말씀을 전파하시고 기적을 행하셨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신 기적을 보고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그 이유를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눈과 마음을 닫아버리셨기 때문이다라고 제시.
더 나아가 예수님을 거부한 모든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신다(48)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고 동시에 세상을 심판하실 마음도 생기신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에는 세상을 구원하실 마음과 세상을 심판하실 마음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47-48)
즉 하나님에게 있어 구원과 심판은 이원론적인 즉 상반되는 개념이 아니라, 일원론적인 하나의 개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에게 있어 구원과 심판은 이질적이고 서로 상반되는 개념이다. 구원이 있는 곳에 심판이 있을 수 없고, 심판이 있는 곳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는 이원론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있어 구원과 심판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동전의 뒷면이 있는 곳에는 앞면도 존재한다. 뒷면과 앞면이 같이 있을 때에야 동전이 존재한다.
심판이 있는 곳에 구원이 있고, 구원이 있는 곳에 심판이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본문을 살펴보자.
하나님은 구원을 위하여 선지자들을 유대인들에게 보내셨다.
하지만 이들은 선지자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다.
믿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들의 눈과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눈과 마음은? 눈은 감각기관이고, 마음은 이성을 싱징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감각과 이성을 막으셨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감각과 이성을 막으신 이유? 믿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사람이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들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이 날때부터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후천적인 노력으로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감각과 이성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믿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주신 것이다.
내부에서 발현된 그 무엇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신것이다.
반면에 외부에서 주어진 은혜로만 우리가 제대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감각기관과 이성을 막으신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 그 선포된 말씀을 귀로 듣고 그리고 기적이 행해졌을 때 우리의 이성으로 그 기적을 이해하고 용납한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로 인해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해석이다.
듣고 이해하는 것은 본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하지만 인간이 본래 가진 능력으로 인해 믿음은 생기지 않는다.
예수님은 양가성이라는 용어로 우리들에게 외부에서 주어지는 힘으로만 우리 안에 믿음이 생긴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가진 믿음은 우리의 눈으로 우리의 마음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 아니다.
외부에서 주어진 은헤로 우리가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죄다 주어지는 것이다.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생명, 공기, 자연등은 주어지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누리는 데에는 돈이 필요없다.
예를 든다. 해운대 비치에 있는 엘시티 전망대와 대연동에 있는 유엔공원을 비교한다.
엘시티전망대에 입장할려면 돈이 필요하다. 유엔공원에 입장하려면 돈이 필요없다.
엘시티전망대, 유엔공원중 어느 곳이 중요한가?
유엔공원이 훨씬 중요한 곳이다.
유엔공원내 호주묘역에 가보면 16살된 남자의 묘지가 있다.
16살된 호주 청소년이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이런 것을 보면 제 감정이 혼란스럽다.
해운대, 태종대에 입장할려면 돈이 필요없다.
이렇게 정말 중요한 곳에 입장할 때는 돈이 필요없다.
정말 중요한 것은 주어진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눈과 마음을 막으신 이유는?
믿음은 노력이나 수고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진다는 사실을 말씀하기 위해서이다.
믿음은 주어지는 것이다. 외부의 힘으로 인해 현재 우리가 가진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 외부의 힘이 은혜이다.
그래서 날마다 감사해야 한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것이 무엇이 주어졌는가?
귀하게 여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