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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7월4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청주] 만나야 할 분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창세 22, 1 - 19
† 복음 : 마태 9, 1 - 8
★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모리야
땅에서 번제물로 바칠 것을 명령하신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선물 사이에서 결국 하느님의 선물을 포기하는 결단을
보인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하신다(제1독서).
★ 중풍 병자는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평상에 누인 채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하신다. 그러나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는 것을 하느님에 대한 모독이라고 여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질병은 하느님께 죄를 지은
결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성서학자들 가운데 많은 이가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도 여느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은 사고방식에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풀이합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정확한 것이 아닙니다. 질병이 죄의 결과라는
사실은 성경 전체의 관점이 아니며, 예수님께서 이러한 관점을
가지셨을 리도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제자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두고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요한 9,2) 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요한 9,3)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방탕한 생활로 몸을
망치는 경우처럼 죄와 질병이 직접 관련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질병과 죄 사이에 필수적인 상관관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에게 ‘너는 걸을 수
있다.’ 하지 않으시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의 육체적인 치유보다도 죄의 용서에
관심을 더 가지신 점을 보여 줍니다. 그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육체적인 질병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우리의 구원입니다. 오늘 중풍
병자가 걷게 된 것은 그가 죄를 용서받아 구원된 사실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건강함과 풍요로움,
편안함을 주님께 청하면서도 정작 예수님께서 가장 큰 관심을
두고 계시는 우리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지 않는지요?
- 매일 미사 -
◈ [청주] 만나야 할 분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7월4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 마태오 9,1-8
만나야 할 분
성지 순례를 통해 로마, 베니스, 피렌체, 피사, 나폴리, 바티칸의
여러 성당과 광장, 종탑, 문, 세례당 등등을 보면서 신앙과 예술이
살아 숨 쉬는 박물관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유명 작가들의
손을 통해 이루어 졌기에 뛰어난 작품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향한 신앙 안에서 이루어졌기에 걸작품입니다. 걸작품을
통하여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는 은총이 더해지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우리 성당 유물관도 신앙의 숨결이 살아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희망하며 보완작업을 하려고 합니다.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마음은
간절한데 전문가를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당은 그 안에 주님을 모시고 있느냐와 그 주님을 바라보고
찬미하는 이들에 의해 거룩함이 더 빛나게 됩니다. 아무리 웅장하고
멋진 예술작품으로 채워져 있다고 하더라도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 아름다움은 목적하는 바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옛 것을 보수하는데 급급해 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혼을
살아나게 할 수 있는 믿음의 작품들이 오늘도 많이 만들어지길
희망합니다. 옛것이 고귀하고 시대에 맞는 새로운 작품도 역사의
변화를 드러내는 아름다움이 숨어있습니다. 고정된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손길이 더 바쁘게 움직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외적인
병을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죄까지 용서해 주셨습니다.
당시는 병은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그 근원을
고쳐 주신 것입니다. 그야말로 영육의 치유를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외적인 질병의 치유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원인을 다스리는 치유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능력을 지니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병의 치유는
그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과 구원을 보여주는
표징일 따름입니다. 손가락 끝으로 달을 가리킬 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손가락’이 아니고 ‘달’인 것처럼 우리가
만나야 할 분은 나를 구원하실 예수님이지 병의 치유가 아닙니다.
눈으로 보이는 현상에 매달리는 것보다 언제든지 그러한 은총을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주님을 만나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그리고
그분께 대한 믿음을 간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환자 자신이
갖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중풍병자를 평상에 뉘어 주님께 데려온
이웃의 믿음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사실 중풍병이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무지와 껍데기 믿음이 더 큰 문제입니다.
미국 남북 전쟁시에 링컨의 참모가 “하느님께서 우리의 편이
되시게 하기위해 기도합시다.”라고 하였을 때 링컨은 “하느님이
우리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 편에 서기위하여
기도하도록 합시다.”라고 답변하였다고 합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믿음의 사람은
생각하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편이 되어주시고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길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의
편이 되어주셨고 죄를 용서해 주시며 마음의 자유를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께 대한 믿음을 다지고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신실하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나에게 잘해주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의 걸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나의 우둔한 믿음 탓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에 눈뜨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주책’을 생각합니다. ‘주책’ 아시죠? 주님께서 책임져주신다는
믿음으로 산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희망의 주님을 굳게 믿고
2013년 다해 7월4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한 군인이 커다란 중상을 입어 군인병원에 실려 왔습니다.
그런데 워낙 큰 부상이라 도저히 치료가 불가능해 보였지요.
군의관은 이 환자를 보면서 무심코 이런 한 마디를 던졌다고
합니다.
“이 병사가 내일 새벽까지 죽지만 않는다면 희망이 있을텐데...”
거친 숨을 몰아쉬던 이 환자 군인이 내일 새벽까지만 버티면
살 수 있다는 말을 어렴풋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에 희망을
걸고 새벽까지 살고자 몸부림을 쳤지요. 죽음에 굴복하지 않고
버틴 것입니다. ‘새벽까지만....’을 외치면서 말이지요. 그리고
정말로 새벽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군의관의 말처럼
당연히 살아났고요.
군의관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거의 죽어가던 군인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희망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나
살아날 수 있도록 만든 것이지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의 말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나의
말은 과연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말인지, 아니면 절망을
주는 말이었을까요? 내가 무심코 내뱉는 한 마디의 말이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항상 희망의
말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늘 이렇게 희망의 말로 다가오셨지요. 그래서 오늘
복음을 보면 중풍 병자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질병에 걸린 이유를 하느님께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병자는 곧 죄인이라고 취급하면서 희망을 잃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용기를 내라고 말씀하시면서 희망을
건네주십니다.
이에 사람들, 특히 종교지도자들은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서
신성목독 죄를 범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자신들의 잣대를
계속해서 내세우면서, 사람들에게 씌우고 있는 절망의 말을 이제
예수님을 향해서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말과 생각들을 잘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희망의 생각과 말로써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역시 주님으로부터
용서받아 주님께서 주시는 희망의 길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들 이사악을 봉헌하려고
했던 것은 희망의 주님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희망의 주님을
굳게 믿고 따를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합시다.
주변 세계가 반짝이길 바란다면 나 자신이 먼저 사랑과 관심을
베풀어야 한다(앨런 브룩).
올초의 사제서품식 제대사진. 내일의 서품식을 위해 고생할
많은 봉사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지금
사람에게 중요한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소금입니다.
몸에 염분이 없으면 뇌가 부어서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고
하네요. 그런데 이 소금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고 하지요. 그
두 번째가 바로 ‘황금’입니다. 황금을 주면 소금을 살 수 있어서
그럴까요? 하지만 이 황금보다도 더 귀한 것이 있으니 바로 세
번째 ‘지금’입니다.
언젠가 사진을 찍을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자매님 중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세요.
“저는 사진 찍는 것이 제일 싫어요. 이렇게 나이 들어서 무슨
사진이에요?”
그런데 사실 그분에게 있어서 지금이라는 그 순간이 자신의
삶 안에서 가장 젊을 때가 아닐까요? 앞으로는 더 나이가 들
텐데 조금이라도 젊을 때의 모습을 남겨 놓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이지요.
지금이라는 이 순간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에 대한 걱정만을 간직하고 있으면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는 이 순간에 충실한 사람은 성공한
과거를 만들 수 있으며, 멋진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간직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한 세 가지. 그 중에서도 ‘지금’을 꼭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지금을 만들어 보세요.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수도회] 때로 우리를 테스트하시는 하느님
2013년 다해 7월4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마태 9,1-8
때로 우리를 테스트하시는 하느님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는 일화는 정말 특별합니다. 언제 읽어도
우리에게 경탄과 당혹, 두려움과 혼동을 유발시키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전 생애에 걸친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가장 큰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지속적으로 부르시고 인도하시는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나름대로 꽤 하느님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으시나 하느님은 선하신 하느님,
드넓고 비옥한 땅과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은 후손을
약속하시는 축복의 하느님, 드디어는 소중한 아들 이사악을
선물로 주신 하느님이었습니다.
떠나라는 하느님의 한 마디에 고분고분 고향땅을 떠나
여행을 계속해온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 오랜 여정이
기약 없어 보여서 무척이나 고달팠고, 때로 약속에 대한
강한 의혹을 떨쳐 버릴 수 없었지만 드디어 아들 하나를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하느님은 이제 약속을
지키시는 성실하신 하느님, 정의의 하느님, 진리의 하느님이
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 입장에서 ‘이제야 하느님께서
약속을 지키기 시작하시는구나.’ 하고 희희낙락했겠지요.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잘 나가던 상황을 또 다시
한번 완전히 뒤집고 계십니다. 그 계기가 된 사건이 바로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아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아브라함은 또 다시 혼동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충실성에 대한 강한 의혹과 불신을 떨쳐버릴
수가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외아들 아사악을 번제물로 바치기 위해 모리야 땅을 향해
가는 길의 분위기가 어떠했을까요? 하루 온종일 팽팽한
긴장감과 가슴을 찢는 듯한 슬픔, 두려움과 혼란이
아브라함의 마음을 휘젓고 있었을 것입니다.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
영민한 이사악이 늦게나마 사태를 파악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모르는 채 이렇게
대답합니다.
“애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
이 짧은 대화 그 이면에는 숱한 복선과 긴장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사악의 단순함이 사건의 핵심을 찌르고
있고, 그것이 아브라함의 당황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도 이 사건의 핵심을 잡아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은 참으로 복잡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명백하게 어린 양이 아니라 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했습니다. 곧 아브라함은
양을 번제물로 바칠 때 그렇게 하듯 아들 이사악을 반으로
갈라 죽이고 쌓여진 장작더미 위에 놓고 불살라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느님의 명령이라지만 어떻게 아버지에게 직접
자신의 손으로 자식을 죽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하느님께 올리는 제사라는 최고의 명분으로 최악의 범죄,
근친 살해의 범죄가 강요되는 일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이 스토리는 아직도 많은 사색과 토론을
유발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확실하게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이 기이한 체험을 통해 아브라함의 신앙, 하느님
체험은 질적인 비약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명에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기 위해 칼을 쳐드는 아브라함을 향해
주님의 천사는 이렇게 외칩니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
당시에는 정말이지 수용하기 힘든 명령이었지만 지나고
나서보니 이는 일종의 테스트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아브라함은 큰 시련 앞에서도 더 굳은 믿음을 드러내
하느님으로부터 의로운 사람이란 인정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은
정말이지 순명하기 힘든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순명함을 통해
하느님께 대한 신의를 드러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듯이 우리도 시험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일상적인 시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시련은 매일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때로
그 시련은 너무 강도가 커서 우리를 극한의 상황까지 몰고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더 큰 순명, 더 큰 믿음이 우리를
더 큰 영광과 축복에로 인도합니다.
때로 받아들이기가 힘들겠지만 시련을 견뎌내야겠습니다.
시련 앞에서 더 큰 마음으로 순명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시련을 주시는 분은 우리를 꼭 붙들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시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시련 속에
있을지라도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 손안에 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기타]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2013년 다해 7월4일
살면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습니다. 지난주에는 적성
성당에서 함께 일했던 분이 오셔서 수영장과 무지개
동산을 깨끗하게 칠해 주셨습니다. 4일 동안 수고를
해 주셨습니다. 저와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셨기
때문에 의정부에서 용문까지 기꺼이 와 주셨습니다.
어제는 호평동 성당의 시설 분과장님이 오셔서 식당에
있는 화장실의 전기 공사를 해 주셨습니다. 이 또한
저와의 작은 인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족한
제가 살아 갈 수 있도록 이렇게 도움의 천사들을 보내
주십니다.
분주하게 살면, 나만 생각하며 살면 볼 수 없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스마트폰, 텔레비전, 인터넷과 함께 살면 느낄 수
없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어제는 용문 수련장으로 들어오면서
자동차의 창문을 열었습니다. 창문을 열었을 뿐인데 개구리
소리, 바람 소리, 풀 벌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혜민 스님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란 글을 쓰셨나
봅니다.
아브라함은 늙은 나이에 얻은 아들 이사악을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께
바치려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더 큰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끊임없이
소유하려 합니다. 소비가 미덕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소유의
욕망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더 큰 갈증이 일어납니다.
그 욕망은 사랑하는 사람을 배반하게 하고, 남에게 상처를
주고, 양심을 속이게 합니다. 쓰레기통은 비울 줄 알면서 내
마음에 가득찬 욕망의 덩어리들은 버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의 몸은 밭과 같고, 그릇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서,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몸은
변화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담는다면, 우리의 몸은 성령의 이끄심으로 살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악한 것들을 담는다면 우리의 몸은 악한 기운에
의해서 이끌려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얻기를 바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중풍병자는 혼자서 예수님께 갈 수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평상에 들고 예수님께로 데려
왔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치유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작은 수고와 노력은 중풍병자가 치유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봉사자들의 마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통에서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좋은 방법을 찾기 보다는 지금 잘못된 것들을 찾고
비난하는 것을 봅니다. 그동안 열심히 일했던 분들의 수고와
땀은 생각하지 못하고 눈앞에 드러나는 작은 허물들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을 봅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중풍병자를
평상에 들고 왔던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착한 이웃들을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살지만 이미 하느님나라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나라는 그런 이들 가운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기타]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당신을 기도 중에 기억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2013년7월4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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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생활이 시작된 지 한 달이 채 안 되는 어느 날 밤, 본당
사목회의를 하고 있던 중, 교우 한 사람이 급한 전화라며
받아보란다. 받는 순간 수화기 저편에서 울음 섞이고 격앙된
음성이 들려온다.
"신부님, 세이지가 위독합니다. 병원 응급실에 실려와 있는데
의식불명입니다."
"천천히 침착하게 말씀하세요. 어느 병원입니까?"
내용을 들어보니, 남편이 장애인 모임에 참석했다가 점심 식사
후 경련과 함께 쓰러져 구급차에 실려 갔고 의사들은 가망이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다. 병원은 내가 있는 본당에서 백
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대학병원이었다. 전화를 끊고,
회의실로 들어와 사목회장에게 회의 진행을 부탁하고 수녀님께
병자 성사 준비를 서두르라는 말을 하고 곧바로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다.고속도로로 한 시간 삼십 분 정도 달려 병원에 도착했고
응급실로 향했다. 전형적인 병원 특유의 냄새가 진동하고
여기저기 호흡을 돕는 기계소리가 들린다.
"메자끼 세이지(目崎 誠二)" 그는 18세에 친구와 씨름을 하다가
뇌진탕으로 반신불수의 장애를 얻었다 한다. 하지만 꾸준한
재활운동으로 장애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통사람들과
똑같은 직장을 다니면서 60세 중반을 살아온 형제이다.아마도
보통 사람들과 함께 직장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몇 배의 고통과
어려움을 감수했으리라 짐작해본다.그에게는 아내 "메자끼
사찌꼬(目崎 幸子)"가 있다. 그녀는 수도자가 되겠다고 지원수녀
생활을 하다가 어떤 사연을 가지고 수녀원 생활을 접게 되었고,
어느 분의 중매로 남편 세이지를 만났고, 결국 백년해로를
약속하고 지금까지 신앙 안에서 남편을 도우며 살아온 여인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자식이 없다. 구체적으로 들은 일은 없지만
이 둘은 정상적인 부부생활도 어려운 조건의 부부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보기도 한다. 내가 이 본당의 책임자로 온 이후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미사를 참석하는 부부이다.
두 사람 모두 배운 자산도 경제적 자산도 넉넉하지 못한 극히
평범하고 가난한 마음의 부부이다.
성당의 모든 일에도 늘 솔선수범이었다.
불편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메자끼 할아버지는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장애자 모임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성당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쓰러진 그 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교구
장애인 행사에 참석했다가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응급실 침대에 누워있는 메자끼 할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본다.
목에는 호흡을 돕는 관이 삽입되어있었고 알 수 없는 관들도
몸 여기저기에 꽂혀있다.사경을 헤매고 있음을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을 듯한 상태였다.
답답했다. 이런 상황에서 늘 부딪히는 느낌이지만 철저하게
무능했다. 수녀님께 눈으로 병자성사를 드리자고 말한다.
옆에서 연실 아내 사찌꼬는 눈물을 훔친다. 마음을 집중해
본다. 간절한 마음으로 성사를 집행한다. 수순대로 기도문을
읽고 기름을 바르고 안수를 하고, 주님 당신께 모든 것을
맡겨드린다는 기도를 바친다. 응급실 간호사들도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손과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의식 잃은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응급실을 조용히 나온다.
복도 벽에 붙어있는 긴 의자에 허리를 걸친다. 사찌꼬 자매는
주머니에서 의사 선생이 건네준 종이 한 장을 나에게 넘겨준다.
의사들의 소견서였다.
‘확실한 원인은 알 수 없음.’
‘다만 폐혈증이나 심장 장애나 뇌의 혈관문제로 사료됨.’
‘현재의 전체적인 상황으로 보아 사망의 가능성이 높음.’
이상이 내가 기억하는 내용들이다. 소견서를 읽고 나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무척 빨리 오간다. 일단은 사찌꼬 자매에게
마음 단단히 먹고 열심히 기도하면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자고 말해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간병인이
건강해야 하니 틈을 내서 눈을 붙이라는 부탁도 함께 한다.
시간을 함께 있다가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연락을 해달라는
부탁을 남겨두고 병원 문을 나선다.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함께 동행한 수녀님께 조심스럽게
걱정을 내놓는다.
“무엇을 바라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의식이 돌아온다고 해도 원래 가지고 있던 장애가 있으니 아마
일어서지 못할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면 여생을 보다 심한
장애로 보내야 한다는 이야기고, 여러 조건을 살펴볼 때 사찌꼬
부인의 고생이 말이 아니게 될 텐데......”
삼 년간 누워 계시다가 돌아가셔야만 했던, 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든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사제관으로 돌아와 다시 한 번 기도를 드린다.
“주님, 데려가시려면 빨리 데려가시고 살려주시려면 최소한
쓰러지기 전의 모습으로 일어설 수 있게 해주소서.”
다음 날 미사시간에 신자들에게 기도 부탁을 한다. 그리고
세이지 할아버지의 회복을 지향으로 두고 미사를 봉헌한다.
그 다음 날, 오전에 전화벨이 울린다.
“신부님, 의식이 돌아왔어요. 아직 말은 하지 못하지만
분명히 살아났어요. 의사 선생님들이 기적이라고 해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흥분된 상태에서 하는 전화 목소리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렇습니까? 정말로 감사합니다. 계속 연락을 주세요. 기운
냅시다!”
그리고 이튿날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선생님, 세이지가 걸을 수 있게 되었어요. 의사들도 의학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회복이 빠르데요.”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후, 메자끼 세이지 할아버지는 퇴원을
했고 미사에 참석했다. 감동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어제 두 사람은 고해성사를 청하고자 나에게 찾아왔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내 자신도 신앙이 좀 더 정화가 되는
듯 한 느낌이다.
기도라는 것을 생각해본다.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은 대단한 은총이다. 한 생을 살아오면서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을 우리는 과연 몇이나 만날 수
있을까? 당신을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
수없이 많은 관계와 인연들 그들 중 당신을 위해서, 기도
중에 기억하는 이들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하는 질문이다.
우리가 기도를 한다면 대게 자신을 중심에 놓고 기도를 드리게
된다. 기도를 제법 열심히 한다는 이들을 보아도 가족이나
친구를 위한 기도 정도에서 머무르기 십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참 복 받은 인간임에 틀림없다.
허물투성이더라도 단지 사제라는 이유로 나를 전혀 모르는
이들에게서도 기도를 받으니 말이다.
아버지께서 살아생전에 보여주셨던 일들이 기억난다.
아버지의 방을 들어가 보면 십자가 고상 밑에 숱한 이들의
이름과 본명이 적혀 있는 쪽지가 수없이 붙어있었다.
많은 시간을 기도로 보내신 분이시니 그들의 이름을
기도 안에서 기억하셨음이 분명하다.
좀 심각하게 생각할 일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할 이들을 몇 사람이나 만들었는지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도해준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고 행복한 일이고 힘이 나는 일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먼저 남을 위해 온 맘으로 기도하는 거다.
그리고 그 기도는 반드시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어있다.
누구나 약한 존재이기에 타인의 기도를 필요로 한다. 그
기도에 의해, 비록 죄 속에 있더라도 구령될 수 있다는
것이 교부들의 잦은 가르침이었다.
나는 확신한다. 메자끼 세이지 할아버지의 회복은 성사의
은혜와 아내의 눈물과 많은 이들의 마음 담은 기도의
덕분이었음을 말이다. 또한 그에게 있어서 새로 얻어진
삶은 보다 열심한 신앙생활로 이끌어줄 것은 분명한
일이다. 행복한 일이다.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사람을
만들라! 이 말이 오늘 여러분께 드리고자 하는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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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야기 읽어주심에 고맙습니다.
2003년의 이야기였습니다. 함께 병원을 갔던 수녀님께서도
삼 년 전에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메자끼 부부는
지금도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제가 있는 본당으로 자주
들르십니다. 70세를 훌쩍 넘어선 연세이지만 아직도 변함없이
건강하게 열심히 살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를 해주셨다는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항상 기도하는 우리이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서울] 예수님은 초월의 세계를
2013년 다해 7월4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무한도전이란 말을 깊은 생각 없이 쉽게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은 도전을 하는 데에 그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 따라 한계가 있고 사람이기에 할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적 조건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 한계가 우리의 한계입니다.
병들면 일찍 죽고, 숨 안 쉬면 죽고, 굶으면 죽고 등 많습니다.
이런 한계를 넘으시는 예수님은 초월의 세계를 알려 주신 겁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마태오 9,5)”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수도회] 공동체의 믿음
오늘 복음을 묵상하던 중 불현듯 10년 전의 체험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수도회 협력자인 ‘스승 예수 벗’ 담당 소임을 수행하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월피정을 하는 날, 회원 한 분이 긴급
기도지향을 가지고 오셨다. 그분의 외아들 현수가 혼자 운전을
하고 가다가 벼랑 밑으로 떨어지는 사고가 났고, 불행 중 다행으로
순찰 중이던 경관이 발견했지만 너무 피를 많이 쏟아 소생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그는 서울성모병원으로 옮겨졌고, 사지를
묶인 채 근 한 달을 의식불명으로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의식을
찾는다 해도 정상적인 생활을 못할 바에야 차라리 하느님 나라로
보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해, 고통 없이 하늘나라로 갈 수
있도록 기도를 청해 온 것이다. 하지만 난 그 소식을 접하며 천상
스승님께서 그의 머리를 감싸고 계시는 것을 느꼈고, 벗
회원님들과 함께 특별 성체조배를 했다. 그렇게 근 한 달간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보며, 고통스러워하는 어머니
마음은 어떠했으랴?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한밤중에 성당에서 소리치며 예수님께
항의하고 계셨는데, 수단을 입으신 분이 다가와 어깨를 보듬으시며
“그 아이는 죽지 않아! 그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이가 너무 많아!”
라고 말씀하셨단다. 그 순간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성체 앞에서
기도하시는 벗 회원들과 우리 수녀들이 떠올랐다.’고 하셨다.
그리고 다음 날 현수는 깨어났고, 쾌유되어 다시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다. 오늘 복음에서 중풍병자를 평상에 뉘어 데려온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2절) 예수께서 용서하고 치유해 주시듯,
절망 중에 살아가는 이웃을 위해 우리의 작은 애덕의 손길과
신뢰에 찬 믿음의 기도로 생명을 살리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본다.
- 성시자 수녀(스승예수의제자수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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