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시절, 시골에 살아서인지 어릴 적 친구들은 하나같이 일찍 도시로 떠나고,
나는 은둔 생활을 하다시피하며 집에서 책을 보면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런 평범한 일상을 보내다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군대에 가신 시아주버님을 추월해서 남편과 결혼을 하게 됐다.
아무래도 당시엔 장남을 두고 둘째가 먼저 결혼하는 일이 흔치 않다보니,
처음에 주변 일가친척들도 수군거렸다고 한다.
왜 둘째가 결혼을 먼저 하냐고.
그러나 시부모님은 남들과 달리 흔쾌히 허락하셨다.
6남매의 둘째지만 첫 며느리로 집안에 들어와
맏며느리 역할을 하는 모습이 예뻐 보이셨는지,
이것이 바로 천국이구나 할 만큼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한 날을 보냈다.
그렇게 꿈같던 어느 날,
서울에서 오랜만에 내려온 동창 친구가 내 얼굴을 보며 깜짝 놀라더니,
“니 얼굴이 피죽도 못 먹은 사람처럼 말랐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
이 말에 나는 물론이고, 남편과 시어머니도 충격에 빠졌다.
나름 잘 먹고 잘 산다고 생각했는데,
친구한테 그런 말을 들었으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던지...
그러다가 문득 든 생각.
그 시절에는 회충들의 반란(?)이 심한 때라 회충 때문에
내 얼굴이 그렇게 보였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남편에게 연락해 퇴근길에 구충제를 사오라고 했다.
그렇게 회충약을 먹고 혈색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는데,
다음 날 갑자기 몸이 이상하더니, 하혈을 했다.
너무 놀라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에게 들은 천청벽력 같은 이야기. 유산이란다.
임신이었던거다.
임신이라 혈색이 안 좋아보였던 것도 모르고,
회충약을 먹었으니.
너무나도 기막힌 상황에 충격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고,
죄책감과 안타까운 마음에 얼마를 시름시름 앓았다.
하지만, 충격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다행히 또 임신을 했다.
임신 소식에 남편과 시어머니는 내가 예뻐서 새털처럼 불면 날아갈까,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한다고 해도 표현할 길이 없도록
지극정성으로 큰 사랑을 주셨다.
다시 찾아온 소중한 아이를 잘 지키겠다는 마음에 조심하고 또 조심했는데,
정말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열 달을 뱃속에 품은 아이를 출산하는 과정에서 의료사고가 발생했다.
출산 예정일이 8월 13일이었는데 그 전날 밤 진통이 와서 병원에 갔더니,
전문 여자의사는 다른 산모의 아기를 받고 있었다.
자격증이 있는지 없는지도 확실치 않은 의사의 남편이 아이를 받게 되었는데,
잘못된 처치로 인해서 소중한 내 아들이 목숨을 잃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그 상황이 원망스럽고 한스럽기만 하다.
분명한 의료 사고였지만 순진하고 착하신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남편은 말 한 마디 못하고 병원비도 정상으로 지불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남편이 얼마나 서럽게 우는지
나는 너무 고통스러워 슬픔도 미처 느끼지 못했다.
뱃속에서 나와 핏기도 없는 아들의 얼굴이 얼마나 말끔하고 잘생겼던지.
그 모습이 뇌리에 남아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았다.
지금 같으면 무자격자 진료로 인한 의료 사고로 언론에서도 난리가 났을 텐데
그때만해도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던 터라 그 심각성에 대해서 다들 무지했다.
그 후 2 년 뒤에 다행히 다시 임신이 되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첫째 아들의 출산 예정일이었던
8월 13일이라는 날짜에 큰 딸이 태어났다.
정말 운명 같은 일이다.
우리 가족은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여러 번의 시련을 겪고 태어난 큰 딸을 애지중지 키웠고,
2년 뒤 둘째 딸도 태어났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딸들이었지만
당시 아들을 선호하던 시절이라 잃은 아들에 대한 애틋함과
아쉬움이 순간순간 상처로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들이 없어서 남편이 나를 배신하고,
새 장가라도 가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도 안고 살았던 거 같다.
한 선배님도 딸이 하나가 있는데도 아들이 없어
작은댁을 셋이나 얻은 모습을 본터였다.
당시만 해도 아들을 못 낳는 며느리들은
괜히 죄인 같은 느낌으로 살던 시대였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출처 : 제천단양뉴스(http://www.jdnew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