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 더 익어가는 사랑의 열매(마25:31-46)
2024.12.15, 김상수목사(안흥교회)
20세기 저명한 기독교 영성가 중에 헨리 나우엔(Henri J. M. Nouwen, 1932-1996)이라는 분이 있다. 그의 책 중에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있다. 제목만으로도 여러 가지를 생각을 하게 한다. 이 책의 제목처럼 그리스도인 이라면 마땅히 그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이 생각나야 한다. 우리(나)는 평소 주로 누구를 생각나게 하는 편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예수님? 천사? 스크루지 영감? 욕쟁이 할머니? 등)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할 수 있을까? 그 가장 좋은 성경적인 방법 중의 하나가 환대(Hospitality)이다. 환대는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환대는 긍휼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특히 소외된 이웃들)을 있는 그대로 조건 없이 섬기고 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환대의 절정이다.
그렇기에 환대를 통해 우리 주변에서 극심한 심리적 정신적인 문제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이 치유될 수 있다. 또한 환대를 통해 우리들 자신의 신앙도 더 성숙해 질 수 있다. 어떤 분들은 ‘전도를 위해’ 다른 사람을 환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같다. 그러나 전도를 위한 환대가 아니라, 환대는 그 자체만으로도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전도의 토양과 촉매제가 되기도 한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폴(Paul)’이라고 하는 한 회사원이 뉴욕에서 중요한 미팅을 마치고, 자기 팀 동료와 함께 공항으로 가기 위해 길거리로 나왔다. 그런데 비행기 출발시간은 다가오는데, 마침 그 날이 금요일 오후 퇴근시간이어서 택시 잡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러던 중에 기적적으로 빈 택시 하나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폴의 동료들은 쏜살같이 택시를 향해 달려갔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너무 빨리 달려가는 바람에 팀원 중의 한 사람이 길 가에서 장사하고 있는 노점상의 야채 과일 박스를 차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과일과 야채의 일부가 여기저기 굴러 떨어졌다. 폴의 일행들은 누구도 이를 개의치 않고 급히 택시에 올라탔다.
그러나 폴은 택시를 타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때 동료들이 외쳤다.
“폴, 시간 없어. 빨리 타! 이 택시를 타지 않으면 비행기를 놓친다구!”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은 일행에게 먼저 가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노점상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노점상 할머니를 울고 있었다. 할머니를 가까이에서 본 폴을 깜짝 놀랐다. 그 할머니는 앞을 보지 못한 시각장애인이었다. 눈이 성한 사람이라면 바닥에 흩어진 과일이나 야채를 주워 담으면 그만인데, 그 할머니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바닥에 앉아서 울고 계신 할머니에게 사과를 하고, 땅바닥에 떨어진 야채와 과일을 하나씩 줍기 시작했다. 이때도 많은 사람들이 그 곁을 지나갔다. 그러나 아무도 이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폴은 정돈이 끝난 후에 지갑에서 돈을 꺼내 할머니의 손에 쥐어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 이 돈이면 손해 보신 것 충분히 해결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시각장애인인 할머니가 이렇게 물었다.
"혹시 예수님이 아닌가요(Are you Jesus)?"
이 말을 듣고 당황한 폴이 "나는 절대 예수님이 아닙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때 할머니가 다시 말했다.
"조금 전 가판대가 넘어지고 과일과 야채가 땅에 떨어질 때 제가 도움을 요청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나에게 다가오셔서 제발 나를 도와주세요.’. 그랬는데 그 기도를 마친 후에 당신이 와서 나를 도와주었으니까, 당신은 예수님이 틀림없습니다(You must be Jesus!)”
그날 밤 폴은 뉴욕 호텔에서 하룻밤을 더 보냈다. 그러면서 그는 좀 전에 있었던 일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자신을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내가 누군가의 눈에 예수님처럼 보였을 때가 언제였던가? 나는 정말 작은 예수가 맞았는가?"
비록 미국에서 있었던 한 회사원의 경험이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이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어쩌면 폴의 이야기와 유사한 상황과 권면을 주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신다. 보통 오늘 본문의 비유를 ‘양과 염소의 비유’라고 한다. 종말의 심판 때에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주님은 사람들을 두 무리로 구분하신다. 그리고 두 무리에게 동일한 의미의 말씀을 하셨다. 다 같이 읽어 보자(마25:35-40).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35-40)
이 비유는 마지막 때에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할지, 성도들의 사회생활을 비유로 말씀해주신 것이다. 이 비유는 하나님을 안 믿어도 착한 일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의 성도들은 어려운 이웃을 환대함으로 그 믿음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본문에 나오는 고통당하는 자들(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가 되고, 병든 자 등)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은총과 기적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했을 것이다. 그때 그들에게 손을 내민 성도들이, 그들의 눈에는 마치 하나님이 보낸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겠는가? 확신컨대 오늘 이 비유는 지금 성탄절을 앞두고 있는 우리들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확신한다. 결국 이웃을 환대하는 것이 곧 주님을 환대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는 소외된 이웃을 천대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천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본 설교자는 이 비유를 묵상할 때 마다 마음의 부담을 안고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있다. 앞에서 언급한 폴이라는 회사원이 뉴욕 호텔 방에서 고민했던 것과 유사한 것이다.
“그들은 나를 통해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까?”,
“그들은 나에게서 무엇을 볼까?”
“예수님은 죽기까지 나를 환대하셨는데, 나는 주님을 천대하고 있지는 않는가?”
물론 지금까지 입으로 감히 하나님을 천대한 적은 없다. 그러나 소외 된 사람에게 하는 행동이 바로 예수님을 환대하거나 천대하는 것이라면,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천대한 적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그러면서 일제 강점기에 크리스천 시인 윤동주가 잎새에 이는 작은 바람에도 괴로워하면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서시」)”라고 결심했듯이 말씀 앞에서 다시 한 번 마음을 새롭게 하였다. 여러분들은 어떠신가?
그러나 비록 이처럼 우리들 모두가 연약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의 마음과 삶의 방향이 하나님을 향해 있고, 하나님도 여전히 우리(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의 연약한 모습이나 실수로 인해 괴로워하는 것들도 성숙의 과정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성숙(成熟)은 한자로 ‘이룰 성(成)’, ‘익을 숙(熟)’이다. 즉 성숙이란 익어가는 것이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믿음이 익어가고, 성품과 인격이 익어가고, 삶이 익어가고, 생각이 익어가고, 언행이 익어가는 것이다. 누구처럼? 예수님처럼 이다. 영적성숙이란,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익어 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성화(聖化)라고 한다. 어디까지 주님을 닮아가야 하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다(엡4:13). 이것이 제자의 삶이자, 목표이며, 방향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들이여, 이 세상이 아름답게 되는 것은 나의 재능이나 돈이 주는 안락함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섬김을 닮기를 힘쓸 때만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비록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환대하기를 힘쓰자. 특히 이 시대 고통 받는 이웃들의 모습에서, 함께 고통 받으시는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자. 내가 먼저 사랑과 용서의 손을 먼저 내밀자. 이런 것은 단순히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것 이전에 예수님께 손을 내미는 것이며, 주님을 환대하는 것이다. 이렇게 힘쓸 때, 그들은 우리를 통해 예수님을 볼 것이며, 서로의 마음은 열리고, 우리의 삶은 점점 더 아름답게 익어가며(영적성숙)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