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신라의 골품제
이는 후일 김씨들이 신라의 권력을 차지하고,
김씨의 왕위 세습 世襲제도가 정착 定着될 때, 그 전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신라 왕비들은 세자의 비를 선택하는데도 상당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세자비 世子妃 선택권에 있어서는 왕보다 더 비중이 높은 경우가 많았다.
그 이유가 세자비가 배출되는 가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왕비 자신이 태어난 친정 親庭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보다도 세자비의 인성과 품성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세자빈 世子嬪과 그 집안에 대한 자질구레한 정보를 왕보다 왕비가 더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왕도 세자빈 선택시에는 그 권한을 왕비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즉, 동일한 부족 部族,
같은 집안에서 왕비가 지속적으로 배출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삼국시대부터 조선왕조까지의 역사를 훑어보면 여인들,
즉, 왕비나 태후의 권력이 가장 강성했던 때가 신라시대다.
아니, 여왕 女王도 세 명이나 배출시켰다.
이는 골품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골품제의 제일 상위 계층이 성골 聖骨이고 다음이 진골 眞骨로서 두 계층은 왕족이다.
다음은 귀족층으로 육두품, 오두품, 사두품, 삼두품, 이두품, 일두품 이처럼 서열이 정해져 있고,
위계질서 位階秩序가 엄격하다.
성골 聖骨은 단어 뜻 그대로 성스러운 뼈대란 뜻이다.
즉 부모가 모두 왕족 王族 출신이어야 한다.
성골의 전제조건 前提條件은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두 분이 모두 왕이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진골 眞骨은 부모 중 어느 한쪽이 왕 王이어야 한다.
후일,
몽골에서도 이와 같은 황금씨족 黃金氏族 골품제와 아울러 만장일치 滿場一致를 추구하는 신라의 화백회의제도 和伯會議制度와 흡사한 부족장 회의인 쿠릴타이 제도가 나타난다.
* 쿠릴타이 Quriltai
쿠릴타이의 유래는 ‘모이다’는 뜻을 가지는 몽골어와 튀르크어의 공통어근 ‘쿠르(khur-)’에서 나왔고, 대체로 봄과 여름 사이에 활쏘기, 말타기, 씨름 등으로 부족 서로간 힘과 기술을 겨루는 오늘날의 나담(Nadam)과 같은 민속행사와 함께 열렸는데, 현대 몽골에서도 국회나 당 대회 등 중요한 회의를 ‘호랄탄’ 또는 ‘호랄’이라고 부르고 있고, 크리미아 타타르, 바시킬 등 튀르크계 민족은 사회주의 체제 아래서도 ‘쿠릴타이’의 이름을 유지하려고 현재도 노력하고 있다.
물론, 신라의 화백제도 그 이후, 시차 時差가 뚝 떨어져,
쿠릴타이 Quriltai 제도가 몽골에서 홀연히 나타난 것은 아니다.
이는 신라와 원나라 사이 즉, 시대별 시간적인 흐름 속에서도 신라 시대 1,000년의 세월과
그 후대 後代의 흉노와 선비족에게도 지속적으로
신라의 화백제도와 근사 近似한 대인회의 大人會議라는 회의체제를 갖고,
국가를 운영하였으나, 문자 文字가 없어 기록이 제대로 되지 않은 까닭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성골 聖骨이다.
성골은 제17대 내물마립간에서 시작하여,
제 28대 진덕여왕을 성골 출신의 마지막 왕으로 추대하고는 사라진다.
제29대 태종무열왕 김춘추부터는 진골 眞骨이 왕위를 계승한다.
부모 두분이 모두 왕의 아들. 딸이어야 성골이 된다는데,
어떻게?
친조부 親祖父와 외조부 外祖父 모두가 왕 王일 수가 있을까?
한나라(一國)에 왕이 2명 이상인가?
아니면 다른 나라의 왕족과 혼인하였다는 것인가?
모두 아니다.
한나라에 왕이 2명이 있을 수 없고,
그리고 당시에도 상당히 보수성 保守性이 강하며,
주변에 배타적 排他的인 신라는 대 代를 이어가며 매번 국제결혼을 할 수가 없었다.
어느 역사서에서도 이를 명확히 밝히지 못하고 있다.
왜?
흉노의 전통을 이해하지 못하니 그렇다.
근본적인 이유는
사회 지도층인 유학자 儒學者들이 유사이래 有史以來 지금껏 흉노를 배척하고,
백안시 白眼視하여 왔기 때문이다.
모화사상 慕華思想에 젖어 자신의 역사와 가까운 혈연 血緣의 관계를 스스로 단절 斷切 시켜 버린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외침 外侵을 불러오고, 우리 민족의 최대 수치 羞恥인 삼전도 三田渡의 치욕 恥辱도 겪게 된다.
현 강단의 사학자들도 구태의연 舊態依然하게 사대주의에 물든 고리타분한 유학자 儒學者들의 전철 前轍을 그대로 답습 踏襲해 오고 있다.
우리의 역사,
역사의 내력 內歷을,
민족의 핏줄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식민사관과 사대주의 모화사상 慕華思想에 사로잡혀 있으니 그렇다.
식민사관의 요점은
첫째, 조선 민족의 시원 始原 즉, 역사가 짧아야만 한다.
(그러니 자신들이 모르는 고대사가 언급된 서책은 무조건 위서 僞書로 몰아붙인
다.)
둘째, 고대로부터 우리 민족의 관할영토가 한반도를 벗어나면 안 된다.
(최대한 축소 조작하여, 반도사관 半島史觀으로 역사를 고착화 固着化 시켜버 린다)
셋째, 민족 구성이 한반도 토착민 즉, 단일민족 單一民族 이어야만 한다.
(국제적으로 고립된 종족화)
넷째, 과거의 역사가 그러니 미래의 희망도 기대할 수 없는 종족들이다.
(찬란하고 유구한 역사와 관할영역을 반토막 내어버리고, 민족 간의 분열을
조장 助長. 도발시킴)
쉽게 말하면 역사도 보잘것없고, 살아온 터전도 비좁고, 대외 교류도 별로 없는 고립된 종족이었으며,
주변의 대국 大國에게 늘 얻어터지고 조공이나 바치는 암울한 역사,
그러니 장래의 희망조차 기대할 것 없는 하찮은 민족이라는 것이다.
개인이나 민족이나, 그 과거를 들추어보면 현재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고,
현재 모습을 제대로 보면 그 미래를 대략 가름할 수 있다.
그런데,
흉노족이라니,
우랄산맥부터 시작하여 알타이산맥을 근거로 하여 몽골고원과 고비사막을 거쳐 만주까지 동서남북으로 광활한 대초원을 좌충우돌 마구 휘젓고 다니며,
중원 대륙을 벌벌 떨게 만든 거대한 제국(帝國. empire)을 운영하였던 흉노족이라니….
사대주의와 식민사관에 사로잡혀있는 강당의 사학자,
그들로서는
감히 언급 言及조차 할 수 없는 위험하고도 발칙한 상상이다.
그러니,
강단 사학계에서는 그 분야에 대해서는 가급적 언급을 회피하고, 학생들이 공부도 할 수 없게 만들고,
학위 논문도 쓰지 못하게 교묘 巧妙하게 방해하고 있다.
사학과 史學科 학생들이 고대사 부분에 관심을 갖고, 졸업 논문을 작성하려고 그에 대한 조언을 구하고자 담당 지도교수에게 문의하면, 대답이 천편일률 千篇一律 적이다.
“자료가 귀하고 사료 史料가 별로 없는, 그리 어려운 고대사를 뭣하려 연구하려 하느냐?, 자료가 풍부한 근대사를 논문으로 제출하라”며 은근히 회유 종용 懷柔 慫慂하고 있다.
자신들은 고대사에 대하여 아예 연구조차 하지도 않고 또, 공부를 해보겠다는 나름 뜻있는 후학 後學과 제자들의 의욕마저 원천봉쇄 源泉封鎖 시켜 버린다.
고대사에 대하여 아예 손도 대지 못하게 철벽 방어로 봉쇄 封鎖해 버린다.
자료가 귀할수록, 연구하기 어려울수록 더욱 매진 邁進하여야 만, 사실 史實을 밝힐 수 있는 것 아닌가?.
자신들의 본분을 망각한 행실이다.
직무유기 職務遺棄다.
자신들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 그 사실조차도 망각 忘却하고 잊어버린 작자들이다.
그러니, 유구한 우리 고대사의 상당 부분은 아직도 깊은 어둠 속에 묻혀있다.
- 113.
* 사과 수확기라 이것저것 바빠지네요.
당분간 연재 일자가 지연될 수 있습니다.
첫댓글 알고 있던 것하고는 전혀 다른 학설이군요.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