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재 삼거리에서 화도 쪽으로 가는 길은 쭉 뻗은 길이라서 일명 강화의 아우토반이라고도 불린다. 길 양 옆으로는 더없이 너른 들판이다. 그래서 운전자들은 마음 놓고 속도를 높이기도 한다. 시속 60킬로가 적정 속도인데도 그 이상을 밟으면서 속도감을 즐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을 느낄 사이도 없이 길은 금방 끝이 난다. 굽이가 진 길을 돌면 동네가 나오니 속도를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산굽이를 돌자 큰 동네가 나온다. 바로 마니산이 있는 화도면의 소재지인 상방리이다. 상방리에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비롯해서 각종 관공서들이 있고 그리고 서울 신촌까지 오가는 직행버스의 최종 종착점이자 출발지인 화도 터미널이 있다. 주말이라도 되면 제법 많은 승객들이 서울행 버스를 기다리는데 근처에 있는 마니산에 왔던 등산객들인 모양이다.
화도 터미널에서는 서울로 가는 직행 버스가 있다. 그 버스는 전등사가 있는 온수리를 거쳐 초지대교를 건넌다. 그리고 새로 생긴 김포한강신도시 도로를 달려 한달음에 올림픽도로로 들어선다. 김포 시내를 거치지 않으니 시간이 단축 되어서 신촌까지 한 시간 삼사십 분 정도 밖에 걸리지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 서울이 마치 지척인 양 느껴진다.
서울로 통하는 화도터미널
화도터미널에는 배낭을 등에 진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다. 오늘 길을 걸을 사람들이다. 모두 길을 걷기에 편한 차림을 하고 있다. 그 중 키가 껑충하게 큰 한 사람이 눈에 띈다. 손전화를 귀에 대고 있는 걸로 봐서는 누구와 통화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조금 늦게 도착할 것 같으니 기다려 달라는 부탁의 전화를 받고 있는 것일까. 바로 오늘 길을 앞장서서 이끌어 줄 ‘염하가람’님이다.
강화나들길은 길안내를 받지 않고 혼자서도 길을 걸을 수 있도록 군데군데 길안내 표지판이 잘 설치되어 있다. 갈래 길이 나오면 어김없이 바닥에 방향을 알려주는 분홍색 화살표가 보인다. 또 노란색과 초록색의 리본이 팔랑대며 가야할 방향으로 인도해준다. 마치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손을 내밀어 주는 가까운 이들의 온정(溫情)처럼 나들길 안내 리본들은 꼭 있어야 할 자리에서 길손들을 맞아준다.
그러니 굳이 길을 안내해주는 사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자원해서 길잡이를 해주는 분들이 몇 분 계신다. 그 분들은 매주 두 번씩 요일을 정해 주기적으로 길을 걷는다. 그러니 형편에 맞춰 아무 때나 그 분들을 따라가면 편하게 길을 걸을 수 있다.
오늘 길안내를 할 분은 ‘염하가람’이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다. 닉네임은 인터넷 상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이름인데 보통 본인이 스스로 짓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닉네임만 듣고도 그 이름을 가진 당사자의 성향이며 취향까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염하’란 강화와 김포 사이에 있는 바다를 말하는데, 바다라고 하기에는 폭이 좁아서 마치 강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염하(鹽河)라는 이름이 붙은 모양이다. ‘염하가람’님은 닉네임 그대로 강(江) 같은 사람이다. 강은 말이 없이 아래로만 흐른다. 또 강은 온갖 더러운 것을 다 품어버린다. 그처럼 염하가람님도 말수가 적고 사람이 온화하고 수굿하다. 그리고 사람을 가리지 않고 다 섬긴다. 그 분은 언뜻 보면 존재감이 크게 느껴지는 사람은 아니다.
염하가람의 미덕
어떤 분야든 앞장을 서는 사람은 목소리가 큰 게 보통인데, 그들은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그런 이들과 함께 하면 구속을 받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길을 걷는 사람들은 다르다. 그들은 자신을 주장하지 않는다. 자연의 한 부분으로 스며들어가서 묵묵히 앞길을 열어준다. 길이 그들을 그리 만들어 준 듯하다. 염하가람님 역시 마찬가지다. 나를 내세우지 않는 그 어수룩함이 그 분이 가진 미덕이다.
오늘 같이 길을 걸을 사람은 모두 합해서 열 명이 안 된다. 평일이라서 그런 듯 했다. 서울에서 온 사람도 있고 또 인천이며 부천에서 온 이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화에 살고 있는 이들이다. 그들에게 나들길 걷기는 일상적인 운동이고 놀이인 듯 했다.
오늘 걸을 길은 강화나들길 7코스인 ‘갯벌 보러 가는 길’이다. 그 길은 화도터미널에서 출발해서 마니산의 끝자락을 넘어 흥왕리의 갯벌센터까지 가는 길이다. 마니산 아래 동네인 상방리에서 출발해서 내리라는 동네를 거쳐 산으로 들어가는데 깊지 않은 산인데도 산 밑의 소리는 일절 들리지 않는다. 마치 깊은 산 속으로 들어온 듯해서 그 길을 걷노라면 어느새 마음은 정화(淨化)가 된다.
산길에는 우리의 발걸음을 붙잡는 것들이 많다. 길가에 피어있는 온갖 꽃들이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도 하지만 가을이면 길섶에 떨어져 있는 도토리며 산밤을 두고 그 냥 지나치지 못한다. 본래 사람의 피 속에는 수렵과 채취의 유전자가 남아 있다. 그러니 어찌 그냥 갈 수가 있겠는가. 반들반들한 알밤은 마치 유혹을 하는 듯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다. 허리를 굽혀 밤톨 하나를 주운 사람은 이내 그 유혹에 빠져버린다. 이제 길 걷기는 뒷전이고 밤 줍기가 본업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길꾼들의 밤 줍기는 오래 가지 않는다. 줍는 즐거움을 누릴 만큼만 줍지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뒤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 남겨두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본시 물욕이 많은 이들이 아니라서 그러한 듯하다.
비움과 채움
길을 걷는 사람들은 일상을 벗어난 이들이다. 그들은 늘 입던 옷을 벗고 야외용 옷으로 갈아입었다. 신발 또한 일상에서 신던 것은 아니다.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설 때부터 그들은 자연에 든다. 그것은 비움이고 또 가벼움이다. 그런 이들이니 어찌 욕심을 부리겠는가. 그들은 자연을 더럽히거나 자연에게 함부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이들이 잠시 쉬었다 가는 장소에는 티끌 하나도 버려진 게 없다.
처음에는 배낭 속에 잔뜩 무언가를 채워오던 사람들도 길에 자주 나서다보면 가방이 점점 가벼워진다. 배낭이 가벼워질수록 마음 또한 비워진다. 세상에는 꼭 있어야할 것도 많지만 그것 없이도 살 수 있는 것들도 많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이 없으면 안 되는 줄 알고 챙기고 또 챙긴다. 그러면 그럴수록 챙겨야 할 것들은 더 많아진다. 왜 채울수록 채워야 할 것이 더 많아질까.
비어있음은 결핍이 아니다. 그것은 채움의 또 다른 이름이다. 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그런 것을 배운다. 비우고 또 비워서 가득해지는 마음을 우리는 얻는다.
이제 산을 벗어났다. 눈 아래로 바다가 보인다. 오늘따라 바다물빛이 푸르다. 개흙을 품어서 늘 못자리 논처럼 검회색이던 바다가 오늘은 청자색으로 빛난다. 이제 우리는 바다를 옆에 두고 길을 걸을 것이다. 바다가 품은 뜻을 알아들을 수 있는 날을 그리면서...
삭제된 댓글 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