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언니. 여자가 자기보다 나이 많은 여자를 부를 때 ‘언니’라고 합니다.
물론 세대 차이가 많으면 그렇게 부르지 않을 것이며, 또 남자가 여자를 그렇게 부르지도 않을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언니라 부른다면 이는 필시 여자들 틈에서 자란 남동생이,
바로 위의 누나가 손위 자매에게 “언니! 언니!” 하며 부르는 걸 보고 배워 그렇게 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한때, 저는 남자였는데도 언니라는 호칭을 많이 쓰던 때가 있었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후, 누가 그렇게 알려 주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신학교에 근무하는 모든 여성 근무자를 언니라고 부르라는 권유를 들었습니다.
처음엔 이게 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가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금방 적응이 되었습니다.
주방 언니, 빨래방 언니, 접수실 언니, 매점 언니, 도서관 언니….
그 당시 우리와 나이가 같거나 우리보다 어린 이십 대 언니도 있었고,
엄마뻘 되는 언니도 계셨습니다.
아, 사십 년 전 그 언니들은 다들 잘 살고 계신지….
요즘 언니라는 호칭을 교우들 사이에서 많이 듣습니다.
예전에는 조폭도 아닌데, 교우들끼리 ‘형님’이라는 호칭이 날아다니는 걸 들으며
좀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서로 ‘아무개 자매님’이라는 호칭이 자연스러웠었는데,
요즘은 언니라 부르는 소리를 더 많이 듣습니다.
여자 교우들 사이에서 형님이나 자매님이라는 호칭보다 언니라는 호칭이 더 많이 사용되는 것을 봅니다.
‘언니는 가까운 사람에게 하는 표현이고
자매님 혹은 형님은 거리감 있는 사람을 부를 때 쓰는 말일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사소한 용어 사용의 변화를 보며 한편으로는 세월이 변한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공 동체의 모습이 신앙공동체가 아닌
사회의 어떤 모임처럼 변해가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모두 말로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살면서 사용한 언어들을 모두 모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지,
그 사람의 의식이 어떠한지 알 수 있습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철학자의 표현을 빌리지 않아도,
분명 그 사람이 쓰는 언어를 통해 분명 그 사람의 의식, 관심, 사상, 나아가
그 사람의 신앙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대면한 율법학자의 슬기로운 대답을 듣습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마르 12,33)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황금률은 머리로 외워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떤 말들로 살아가느냐를 통해 그 사람이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는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대하며 살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신앙고백은 교회의 전례 안에서 외치는 기도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내뱉는 말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마르 12,31 참조)는 이 황금률 역시
우리가 내뱉는 말 그리고 행동을 통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말을 내뱉도록 하는 우리의 의식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대한 의식이어야 저절로 그 의식의 말로서,
말을 넘어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가 내뱉는 말들에서 하느님 사람과 이웃사랑을 느낄 수 있는 언어를 사용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의식하는 삶’을 살면 좋겠습니다.
김승욱 베드로 신부 상1동 본당 주임
연중 제31주일 주보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