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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67) 제주도와 추자도의 모자
황사영 순교 이후 부인은 제주도, 두 살 아들은 추자도로 유배
- 2018년 4월 15일, 우하하 성지순례단이 추자도 황경헌 묘소를 찾았을 때 묘소 위로 현현한 십자가 모양의 구름 형상. 횃불처럼 십자가를 손에 든 사람이 묘소를 굽어보는 신비한 형상이다. 사진=라용집 제공.
뿔뿔이 흩어진 가족
1801년 11월 5일 황사영은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에 처해졌다.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부인 정명련은 제주도 대정현으로, 2세 난 아들 황경한(黃景漢, 1800∼?)은 추자도로 각각 노비가 되어 떠났다. 숙부 황석필과 집안의 종들도 함경도 등지로 끌려가서 황사영의 아현동 식솔들은 풍비박산이 났다.
정명련은 제주도 유배 길에 배가 추자도에 들렀을 때 두 살배기 어린 아들을 섬에 내려놓아야 했다. 이것으로 모자는 이승에서 다시 얼굴을 맞대지 못했다. 「사학징의」의 기록에 따르면 황경한은 서울을 떠날 때부터 추자도에서 노비로 살아가게 되어 있었다. 이것이 국가의 명령이었다. 흔히 알려진 대로 정명련이 아들이 평생 죄인으로 살아갈 것을 염려해서 황경한이 중도에 죽었다고 하고 뱃사람에게 뇌물을 주어 추자도에 일부러 떨군 것이 아니다.
남편이 죽고 시어머니는 거제도로 끌려간 상태에서, 젖도 떼지 않은 마지막 남은 일점혈육을 낯선 섬에 노비의 신분으로 떨구고 가는 어미의 마음이 어떠했을지는 가늠하기가 어렵지 않다. 국법에 따라 추자도에 남겨진 아이는 추자도 별장(別將)의 지휘로 어느 민가에 맡겨져 길러졌을 것이다.
추자도에 남겨진 황경한은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오늘날 그의 무덤은 추자도 예초리에 잘 정돈되어 천주교 성지로 가꾸어져 있다. 정명련은 1801년에 제주도에 입도하여, 38년을 더 살다가 1838년 2월 1일에 세상을 떴다. 그녀의 사망 일시는 정명련이 부쳐 살던 주인집 아들 김상집(金相集)이 정명련의 사망 이듬해인 1839년 1월 23일 대정현 서성리(西城里)에서 추자도의 황경한에게 보낸 부고 편지에 나온다. 편지는 현재 사본만 남아 전한다.
편지의 서두에서 김상집이 “지금까지 뵈온 적 없사오나 소식은 이따금 아옵더니”라고 한 것을 보면, 어머니와 아들은 생전에 이따금 근황을 주고받으며 살았던 듯하다. 하지만 만년에는 소식이 끊겼고, 정명련의 사망 후 부고 편지를 추자도로 보냈지만 아무런 답장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김상집은 추자도에 사는 이서방 편에 안부를 잇게 되어, 다시 부고를 알렸다. 일주일 뒤가 정명련의 1주기였으므로 마음이 더 급했을 것이다. “이곳 주인된 도리로 차마 박절하여 제삿날은 잘 지내고 있으니 염려 말고, 회답은 지금 가는 인편에 바로 보내달라”는 내용으로 글을 맺었다.
정명련은 노비의 신분이었지만 기품 있는 한양 할머니로 존경을 받으며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이름은 난주(蘭珠)로도 알려져 왔는데, 공식 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으니 정명련으로 통일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 정명련이 황경한을 놓고 갔다고 전하는 바위에 재현한 황경한 동자상. 사진=라용집 제공.
추자도의 황경한과 그의 후손
완전히 잊혀졌던 황경한의 기억을 처음으로 환기시킨 것은 1900년 6월에 제주본당 2대 주임 신부로 부임한 라쿠르츠 마르셀(Marcel Lacrouts, 한국명 具瑪瑟, 1871∼1929) 신부에 의해서였다. 신부는 1908년 6월, 교구 사목 방문차 추자도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황사영의 손자와 증손자, 즉 두 살 때 추자도로 유배된 황경한의 아들과 손자를 다시 찾게 되었다.
황경한의 후손은 당시 추자도에서 말할 수 없이 곤궁한 상태로 살고 있었다. 라쿠르츠 신부는 1909년 10월 5일에 파리외방전교회 교수 신부로 귀국해 있던 샤르즈뵈프(Michel Chargeboeuf, 宋德望, 1867∼1920)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 이들의 비참한 상황을 알렸다. 이에 샤르즈뵈프 신부가 리옹에서 발간되던 전교잡지 「미션 가톨릭」에 이 사연을 소개해 모금한 480프랑을 보내주었다. 라쿠르츠 신부는 이 돈으로 황경한의 손자를 위해 집과 밭을 사서 생활의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미션 가톨릭」에 소개된 라쿠르츠 신부의 서간 원문은 현재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다. 이때 황사영의 손자는 제주로 귀양 갔던 자기 할머니가 아버지 황경한에게 쓴 편지를 신부에게 건네주겠다고 약속했다.
현재 사본으로 전해지는 김상집의 부고 편지는 김구정 선생이 1973년 황경한의 4대손 황찬수씨에게서 제공 받아, 1973년 7월 15일 자 이후 가톨릭시보 5회에 걸쳐 연재한 글을 통해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해당 편지의 원본은 지금도 그의 후손이 보관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추자도의 황씨 집안에는 어머니 정명련이 황경한에게 의복을 보내면서 쓴 친필 편지가 있었다고 했으니, 라쿠르츠 신부에게 기증하겠다고 약속했다던 그 편지일 것이다. 이로 보아 2살 때 아들과 헤어진 어머니는 제주도와 추자도를 사이에 두고 이따금 연락를 취하고 옷가지를 보내며 왕래가 있었던 듯하다. 자료의 원본은 백방으로 수소문해 보았지만,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제보를 요청한다.
창원황씨 족보와 황사영의 후손 계보의 난맥상
추자도에 정착한 황경한의 후손은 이제껏 이어져 왔다. 그들은 서울 쪽 후손과는 나중에라도 연이 닿을 수 있었을까? 노비의 신분이 된 황경한과 그의 후손은 라쿠르츠 신부와 만나기 전까지는 완전히 잊혀진 채 방치되었다.
창원황씨 족보는 1857년, 1914년, 그리고 1957년, 1979년, 1995년에 간행되었다. 그런데 부친 황석범과 황사영, 그리고 황사영의 후손에 관한 기록은 이 다섯 가지 족보의 기록이 다 달라 대단히 혼란스럽다. 1857년 「창원황씨족보」까지는 별문제가 없다. 기술 내용이 정확하고, 황사영 항목에는 “진사인데, 사학으로 복법(伏法) 되었다”는 짧은 내용만 나온다. 그러니까 황호에서 내려온 만랑공파의 계보는 황사영에게서 끊어졌다. 2살 때 추자도에 노비로 끌려간 아들 황경한(黃景漢)은 족보에서 말소되었다.
57년 뒤인 1914년에 작성된 「창원황씨세보」 만랑공파의 계보는 황사영 앞에 엉뚱하게 황승연(黃升淵)을 적장자로 내세웠다. 족보상 그는 1801년 1월 6일생으로 나온다. 황사영보다 26살이나 어린 그가 돌연 황사영을 제치고 첫째의 자리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그의 일계가 이어져 여러 대 동안 만랑공파 종손의 자리를 차지했다.
실제로 황승연은 황사영과는 아무 인연이 없다. 그는 황사영의 먼 일가인 황석행(黃錫行)의 둘째 아들로 나온다. 1857년 족보에서 황승연은 정확하게 황석행의 적장자로 대를 이은 것으로 나오는데, 1914년 족보에서 황승연을 돌연 황사영에 앞세운 것이다. 아마도 황사영 집안에 내려오던 토지 소유권 같은 경제적인 문제와 관련이 없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다. 1914년 족보의 황사영에 관한 정보 또한 엉망 그 자체다. 장인을 정약현이 아닌 정약종으로 적었고, 정약종의 조부와 부친의 순서를 바꿔놓았다. 이 족보에는 또 황사영의 아들로 추자도에 귀양 간 황경한(黃景漢)이 아닌, 황경헌(黃敬憲)이란 인물이 처음 등장한다. 생년도 없고, 기일만 1월 5일로 나온다. 묘소가 목천군 북면 성가산(聖加山)에 있고, 배우자는 전주 이씨라고 했다.
추자도 황경한의 직계 계보
친아들 황경한의 무덤은 지금도 추자도에 있고, 황경한의 아들 황상록(黃相錄)과 황보록(黃寶錄)의 묘소도 예초리에 남아 있는 것으로 나온다. 황경한의 후손들은 이후 각지로 흩어졌다. 지금껏 섬에 살고 있는 후손도 있다. 그런데 갑자기 황사영에게 황경헌이란 아들이 있고, 그의 묘소가 목천에 있다는 정보가 1914년 족보에 추가된 것이다. 두 사람은 동일 인물일까? 국법에 역적의 자식으로 노비가 되어 끌려간 죄인을 문중에서 마음대로 빼돌려 목천으로 데려오는 법이 가능할 리 없다. 두 사람은 결코 동일 인물일 수가 없다. 문중의 상의로 양자를 들였을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1957년에 새롭게 편찬된 「창원황씨세보」는 앞선 1914년 본의 오류를 그대로 답습하였다. 하지만 앞뒤 기술은 한층 더 허술하다.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소재 후손을 10세(世) 황호에서 흘러 내려온 계보로 나열하고, 17세 황사영을 소개하면서 또 한번 난맥상을 보여, 황사영의 아들에 돌연 황병직(黃秉直)을 내세웠다. 그 결과 이전 족보에서 황경헌으로 이어진 계보를 무시하고, 황사영에 이어 18세를 황병직으로 잇댔다. 그런데 황병직은 1914년 족보에 황사영의 삼촌인 황석필의 손자로 버젓이 이름이 올라 있는 인물이다. 그 결과 1957년 족보에서는 18세 황병직 이하 22세 황인범까지가 황사영의 계보로 섞여 들고 말았다.
다만 이 족보에는 황사영 일계를 소개한 끝에 ‘별록(別錄)’이라 하여 정명련과 황경한, 그리고 그 아들과 손자에 이르는, 추자도에 살고 있는 황씨의 계보를 적어 놓았다. 황경한의 이름은 공란으로 비워놓았다. 족보에는 “아들은 이름이 없는데 경헌(敬憲)으로 추정된다(子無名, 以敬憲推之)”고 했으나, 사실이 아니다.
최근에 간행된 1979년과 1995년 족보는 더 혼란스럽다. 1995년 「창원황씨 장무공파보」에는 1957년의 오류를 답습해 황사영의 아들이 황병직(黃秉直)으로 바뀌어 있다. 그마저도 오자가 나서 황병진(黃秉眞)이라고 했다. 황병직은 1914년 족보에 황사영의 삼촌 황석필의 손자로 나왔는데, 이것이 다시 황사영의 아들로 뒤바뀌었다. 앞서 1914년본 족보에 나온 황승연 일계를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는 대신, 황경헌 일계는 한번 더 엉뚱하게 황병직의 동생으로 순위가 밀려났다.
이제껏 많은 족보를 보아왔지만 이렇게 혼란스런 족보는 본 적이 없다. 후계 문제가 이토록 복잡해진 것은 황씨 집안에 장무공(莊武公) 황형(黃衡, 1459~1520)의 강화도 사패지(賜牌地)와 제전답(祭田沓)이 종손인 황사영의 적몰 재산에 포함되었으니, 이를 반환해달라는 청원 문서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이에 얽힌 복잡한 사정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68) 불멸과 개벽을 꿈꾼 사람들
미륵 세상 꿈꾸던 이들, 천주교의 차별없는 세상에 빠져들다
- 초기 천주교 신자 중에는 천주교를 받아들이기 전에 도교 계통의 「정감록」 신앙에 빠졌던 경우가 의외로 적지 않다. 숙종조 이래로 조선을 강타했던 「정감록」 신앙은 거의 재림 예수 신앙의 조선 버전에 가깝다. 십승지를 찾고, 미륵 세상을 꿈꾸며, 도화낙원을 갈망하던 이들에게 천주교의 가르침은 그들이 원하던 바로 복음의 소리였다.
신선을 꿈꾸다 서학과 만나다
황사영은 백서에서 정약종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일찍이 신선술을 배워 장생하려는 뜻이 있어, 그릇되이 천지가 개벽한다는 주장을 믿었다. 그러다가 탄식하며 말했다. ‘천지가 바뀔 때는 신선 또한 소멸하여 없어짐을 면치 못할 테니 끝내 장생의 도리는 아니다. 족히 배울 것이 못 된다.’ 성교(聖敎)를 듣게 되자 독실히 믿어 이를 힘껏 행하였다.”
그는 젊어 신선술에 빠져 천지개벽설을 믿었다. 천지가 바뀔 때를 콕 집어 말한 것은 정약종이 후천(後天) 개벽의 말세 신앙, 즉 「정감록」 계통의 유사 종교에 꽤나 심취해 있었다는 뜻이다. 정약종은 불로장생하는 육신의 영생을 꿈꾸다가, 천주교와 만나게 되면서 이를 버리고 영혼의 영생을 받아들였던 셈이다.
초기 천주교 신자 중 천주교를 받아들이기 전에 도교 계통의 「정감록」 신앙에 빠졌던 경우가 의외로 적지 않다. 노론의 명문가 안동 김씨 김상헌 집안의 제사를 받드는 봉사손(奉祀孫)이었던 김건순 요사팟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황사영은 백서에서 “김건순은 나면서부터 비범하여 9세에 문득 선도(仙道)를 배우려는 뜻이 있었다”고 썼다. 또 「사학징의」 가운데 여러 사람의 증언과 「추안급국안」의 기록으로 볼 때, 김건순은 단학(丹學)에 상당히 깊이 빠졌고, 육임(六壬)의 술법까지 익히는 등 도교 계통의 신앙에 꽤 깊이 들어간 상태였다.
김건순의 족형이자 그의 동지였던 김백순(金伯淳)에 대해서도 황사영은 백서에서, 그가 젊어 성리학을 공부하다가 “또 도리가 의심스럽고 어두워 온전히 믿을 수 없음을 알아 마침내 노장의 책을 읽었다. 인하여 사람이 죽더라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음을 깨달아 새로운 이론을 창안하여 벗들에게 강설하였더니, 벗들이 나무라며 ‘이 사람의 의론은 새롭고도 기이하니 틀림없이 서교를 따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기록했다.
이렇게 정약종, 김건순, 김백순 세 사람 모두 젊은 시절 노장이나 신선술에 빠졌다가, 서학으로 전향하였다. 특히 위 김백순의 언급은 당시 노장 또는 신선술의 논리와 서학의 관념이 포개지는 지점이 있었음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여기에 더해 특별히 김건순과 김백순의 경우는 강이천(姜彛天, 1768~1801) 등과 함께 바다 섬 가운데 유토피아가 있고, 그곳에서 해도진인(海島眞人)의 영도 아래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모의 행동으로 이어져 역모의 심각한 파장을 일으켰다. 그의 무리였던 정원상(鄭元相)의 공초에 따르면 김건순은 뒤에 천주교 신자로 순교한 여주 사람 원경도(元景道) 요한과 이중배(李中培) 마르티노 등에게 둔갑술과 장신술(藏身術)을 가르쳤다. 그는 돈과 재물을 모아 큰 배를 만들고, 사람들과 함께 섬에 들어가 군사 훈련을 시켜, 장삿배의 물화(物貨)를 탈취하고, 등주(登州)와 내주(萊州)를 취해, 이곳에 눌러살며 무궁한 복락을 영원히 누릴 것을 다짐했다. 그러던 그가 1797년 가을 주문모 신부를 만난 뒤, 그간의 술법 공부를 다 버리고 천주교도로 거듭났다.
황사영은 백서에서 또 이렇게 썼다. “당시 서교를 받드는 자는 대부분이 남인이었고, 노론은 한 사람도 없었다. 요사팟은 흠모하는 자취가 깊었으나 들어갈 방법이 없다가, 우연히 고향 지역의 교우를 통해 총령(總領) 천신(天神), 즉 미카엘 대천사의 상본(像本)을 얻어 보고는 성교가 기문(奇門)과 서로 통한다고 오해하여 마침내 강이천 등과 함께 술법에 종사하였다. 강이천이란 자는 소북(少北)의 명사로 심술이 단정치 못해, 본국이 틀림없이 오래가지 못하리라 여겼다. 장차 풍운의 기회가 오면 이 술법을 배워 익혀 때를 틈타 나아가 취하려 했던 것인데, 요사팟이 알지 못하고 잘못 사귀었던 것이다.”
김건순이 천주교에 혹한 것은 자신들이 익히던 기문둔갑의 술법과 천주교의 가르침이 일맥상통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처형 당시 김건순은 저자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죽었다. “세간의 벼슬과 명성은 모두 헛되고 거짓된 것이오. 나 또한 얼마간 이름이 일컬어졌고, 또한 능히 벼슬할 수도 있었지만, 헛되고 거짓된 것이라 여겨서 버리고 취하지 않았소. 오직 천주의 성교(聖敎)만이 지극히 참되고 지극히 알차니, 이를 하다 죽더라도 사양하지 않을 것이요. 그대들은 모름지기 잘 알아 두시오.” 이때 그의 나이는 황사영이 죽을 때 나이보다 한 살 어린 26세였다.
깨지기 쉬운 그릇
연암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정리한 「과정록(過庭錄)」에서 김건순이 부친을 찾아온 일을 기록했다. 그에 따르면 김건순은 고매한 재주와 해박한 학문으로 공자의 제자 안연(淵)이 환생했다는 말까지 들었던 대단한 천재였다. 그가 여주에서 한번 상경하면 서울의 내로라 하는 사람들이 그를 만나보려고 줄을 섰을 정도였다.
그런 김건순이 자기 집의 식객이자 연암의 제자였던 화가 이희영의 주선으로 연암을 찾아왔던 모양이다. 연암은 김건순과의 만남에 내심 기대를 품었던 듯하다. 긴 이야기 끝에 그가 떠나자 연암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연암이 아들에게 말했다. “김생은 내가 한번 만나보기를 원했다. 만나 보고 나니 다만 가여울 뿐이로구나. 그 재주는 진실로 천하의 기이한 보배라 할 만하다. 천하의 기이한 보배를 간수하려면 모름지기 굳세고 질기고 온전하고 두터운 그릇을 써야 손상 없이 오래 보존할 수가 있다. 내가 그 그릇을 보니 이 보배를 간직하기엔 부족하더구나. 너무 슬프다.” 연암은 김건순과의 한 차례 대화에서 그의 마음이 영 딴 곳에 가 있음을 간파했다. 그리고 이를 슬퍼했다. 김건순이 연암을 찾아온 것은 1797년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초기 천주교 신앙을 가졌던 이들 중 상당수가 천지개벽을 꿈꾼 선도(仙道)에 빠졌던 점은 천주교 신앙이 당시 조선인들에게 지녔던 질량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마다 말세 신앙이 기승을 부린다. 미륵이 내려와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 하생 신앙과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후천 개벽의 꿈은 절망적 현실의 빈틈을 교묘하게 비집고 들어온다. 여기에 술사들은 무릉도원의 유토피아를 입힌 도화낙원의 판타지를 만들어냈다. 희망 없는 현실의 삶은 곧 끝나고, 믿는 자만이 들어 올려져서 낙원에 들어간다. 그것은 오로지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허용되는 꿈이다. 미리 깨어 준비해야만 그날의 면류관을 쓸 수가 있다. 그날 그때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때로 먼 바다 삼봉도(三峯島)에 살고 있다는 푸른 옷을 입은 진인(眞人)의 모습으로, 그도 아니면 정도령의 이름을 내건 홍경래 들의 깃발로 나타났다. 나라의 시스템은 멈춰 섰고, 관료들은 더없이 부패하고 타락했다. 사람들의 삶은 딱 그만큼 괴로워졌고, 희망은 싹도 찾을 수가 없었다.
재림 예수 신앙의 조선 버전, 「정감록」
숙종조 이래로 조선을 강타했던 「정감록」 신앙은 거의 재림 예수 신앙의 조선 버전에 가깝다. 십승지를 찾고, 미륵 세상을 꿈꾸며, 도화낙원을 갈망하던 이들에게 천주교의 가르침은 그들이 원하던 바로 복음의 소리였다. 이런 꿈은 19세기 전 세계를 떠돌던 메시아니즘의 변용일 뿐이다.
현실의 삶에서 희망을 찾지 못한 이들이 현실 너머에서 천국을 꿈꿨다. 희망 없는 세상에서 불로장생을 선망하다가, 오래 사는 것에조차 의미를 둘 수 없게 되자, 그들은 정신의 초월과 저 높은 하늘나라의 꿈을 그것과 맞바꿨다. 지금은 라자로처럼 땅바닥에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를 얻어먹고 살지만, 저 하늘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었다. 이 꿈이 조선을 강타했다. 짐승처럼 살던 민초나 여성들에게 전해진 복음의 소식은 그들의 몸을 부들부들 떨게 할 만큼 전율을 안겨주었다. 물불을 가릴 수 없었다. 고통이 차라리 기뻤다. 박해는 천국으로 건너갈 보증수표와 같은 것이었다. 고통의 담금질이 거셀수록 영혼은 순수한 정금(精金)으로 더욱 빛날 터였다.
천주의 계명을 지키고 십자성호를 긋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 누구나 차별 없이 천국에 갈 수가 있다. 그곳에는 양반 상놈의 구분도 없고, 남녀의 차별도 없다고 했다. 누구나 평등하고, 평화롭고 공평한 세상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믿음을 실행에 옮김에 조금의 주저함이 없었다.
하지만 지배층에게 저들의 활화산 같은 용암의 분출은 곧바로 체제 전복의 위험하고 불온한 시도일 뿐이었다. 이전의 혁명을 외쳤던 반역 집단이나, 깊은 산 속에 별천지가 있다고 속삭이던 사교 집단과 이들은 확연히 달랐다. 그 너머에 선진 서양 문물의 아우라가 있었고, 복음으로 대표되는 경전의 질서가 정연했다. 사람들은 차별 없는 세상의 비전 앞에 열광했다. 위정자들은 그 위에 대역부도의 이름을 덮씌웠다.
다블뤼 주교가 1850년 9월에 프랑스에 있던 가족에게 보낸 편지 중에 흥미로운 내용이 보인다. “모두가 무슨 큰 사건이 터지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있고, 불길한 예언들도 들리고 일이 돌아가는 형세에 얼마간 변화도 보입니다. 심지어 사람들 얘기로는 사람들이 숨기고 있는 책 속에 오래된 예언이 적혀 있다고 하는데, 즉 서양의 종교가 이 왕국에 들어와 널리 퍼질 것을 예고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있잖아요. 그런 책은 전적으로 믿을만한 것은 못 되는데, 조선 사람들은 그러한 기이한 참언이나 허언 따위에 너무나 빠져 있답니다.”
다블뤼 주교의 이 편지는 「정감록」이나 「남사고비결」 같은 비결 신앙이 천주교와 습합되어가는 경로를 암시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말세 신앙, 개벽 신앙이 확산되는 사회는 그만큼 불안하고 우울한 사회다. 이 신앙의 뿌리는 아주 깊고도 광범위해서 민중들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69) 김건순의 개종과 여주 교회
도가의 술법 익혔던 김건순의 사람들, 일제히 천주교로 전향
- 김건순의 사람으로 도가의 술법을 익혔던 이중배와 원경도는 1800년 3월 여주 정종호의 집에서 주님 부활 대축일을 지냈다. 이들은 개를 잡고 술을 많이 장만해서 길가에 모여 큰 소리로 알렐루야와 부활삼종경을 외우고, 바가지를 두드려 가며 기도문을 노래했다. 이들의 부활 축제는 온종일 노상에서 계속되었다. 그림=탁희성 화백.
천당 가는 법을 얻었소
김건순의 추종자였던 정원상은 1797년 10월에, 8월 중순 과거 시험을 보러 상경했던 김건순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중배와 함께 그의 집을 찾았다. 당시 김건순의 집에는 이중배, 원경도와 서양화가 이희영과 그의 조카 이현, 김치석, 김이백, 김익행, 성명순 등이 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진작부터 도가의 법술을 함께 익히고, 둔갑술과 장신술 공부를 같이 하며, 바다 섬에서 새로운 세상의 건설을 꿈꾸고 있었다.
근 두 달 만에 이들과 만난 김건순은 새 소식을 기대하며 모인 그들 앞에서 갑자기 몸을 돌려 벽을 향해 앉더니, 알지 못할 주문을 한동안 외웠다. 차고 있던 칼을 풀고는 이렇게 선언했다. “이번 과거 시험을 보러 간 길에 서양국의 도인과 만났소, 그에게서 죽어 천당 가는 법을 얻었고, 약살법(若撒法, 요사팟)이란 별호까지 받았소. 이제까지 익혔던 육임(六壬)의 법술과는 결별하고, 이제부터 그 도를 힘껏 배우려 하오. 이 자리에서 차고 있는 칼들을 풀고 정도를 함께 행합시다.” 이희영의 공초에 따르면 당시 이들은 섬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는 표식으로 각자 작은 칼을 차고 있었다.이후 김건순은 십자가를 그어 보이며 밤새도록 천주교 교리를 강론하였다. 칼을 끌러 맹세하자거나, 벽을 향해 앉아 주문을 외우는 등의 행동에는 여전히 술법하는 부류들의 분위기가 남아 있다. 이들은 김건순에 대한 충성도가 대단히 높은 집단이었다. 이후 이들은 일제히 천주교 신자로 전향했다.
애초에 김건순과 주문모 신부의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주문모 신부는 1797년 가을, 김건순의 자자한 명성을 들었다. 그는 노론 최고 명문가의 적장자였다. 그런 그가 천주교에 입교할 경우 교회는 든든한 배경 하나를 더하고, 날개를 얻게 될 것이었다.
달레는 「조선천주교회사」에서, “그는 천주교에서 마술의 비밀과 특별한 비방(方)을 얻을 줄로 생각하고 그것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고 썼는데, 당시 자신들이 강이천(姜彛天, 1768~1801) 등과 계획하고 있던 해도거병(海島擧兵)의 일에 서학이 도움이 될 것으로 믿었던 듯하다.
남곽선생(南郭先生) 주문모와 해상진인(海上眞人) 김건순
김건순이 서학에 관심이 높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주문모 신부는 1797년 8월 초에 같은 여주 출신인 벽동의 정광수 편에 서신을 주어 김건순에게 만남을 청했다. 편지를 받은 김건순이 기뻐하며 말했다. “이 사람이 나왔다는 말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소. 한번 보고 싶었는데 먼저 문안 편지를 받으니 참으로 다행이오.” 김건순은 겉봉에 ‘주선생전답상서(周先生前答上書)’라고 쓴 답장을 보냈다. 주문모 신부는 답신을 받고 김건순의 높은 학식과 유려한 문장에 크게 놀랐다. 이 내용은 「사학징의」 중 정광수의 공초에 나온다.
얼마 뒤 김건순은 8월 21일에 열리는 감시(監試)의 응시를 구실로 8월 13일경 상경하였고, 상경 이틀 뒤인 8월 15일, 추석날 저녁에 그는 수각교(水閣橋) 인근 창동(倉洞) 강완숙의 집으로 주문모 신부를 찾아왔다. 수각교는 현 중구 남대문로4가 1번지에 있었던 다리다.
주 신부가 그에게 천주교를 믿으라고 권하자, 그는 신부를 협객의 부류로 여겨, 도리어 천주교인 수십 가구를 모아 섬으로 함께 들어가 천주교를 포교하는 것은 어떠냐고 말했다. 자신은 그 섬에서 무기를 마련하고 큰 배를 만들어 청나라로 쳐들어가 선대의 치욕을 씻겠다고 했다. 터무니없는 계획에 놀란 신부가, 자신이 조선에 건너와서 포교하는 것은 영혼을 구원하려는데 있다며 천주교의 주요 교리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김건순은 그제서야 기뻐하며 새벽녘에 돌아갔다. 주 신부는 다시 장문의 설득 편지를 써서 정광수 편에 보냈고, 두 사람은 시험이 끝난 뒤인 8월 26일에 한 번 더 회동했다.
주문모 신부는 남쪽 성곽 즉 남대문 근처 창동 강완숙의 집에 머물렀으므로 이후 김건순과 강이천 등에게 남곽선생이란 은어로 불렸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김건순과 강이천 등이 해상진인(海上眞人), 서방의인(西方義人), 남곽선생 운운하면서 해랑적(海浪賊)의 변을 꾀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걷잡을 수 없이 퍼졌고, 11월 11일 정조는 진사 강이천을 붙잡아 들여 사학의 죄로 추국한 뒤 유언비어 유포죄를 물어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이때 김건순은 주모자였음에도 정국에 미칠 파장이 너무 클 것을 염려해 문제 삼지 않고 그저 덮어버렸다.
정조는 한 해 뒤인 1798년의 「일득록(日得錄)」에서 강이천의 무리를 유배형에 처한 까닭을 밝히면서 “김건순은 명현(名賢) 김상헌의 총손(孫)이니, 10대까지 용서한다는 뜻에서 놓아두고 죄를 묻지 않았다. 이 또한 세신(世臣)을 온전하게 보전하려는 고심이었다”고 말했다. 이 일로 김건순은 신앙을 갖겠다고 선언한 지 불과 석 달이 못 되어, 그의 천주교 개종 소식에 경악한 집안의 집중적인 감시와 관리 속에 놓이게 되었다.
김건순의 신앙생활
임금으로서는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던 주문모의 이름이 강이천 등의 공초에서 언급되는 데 긴장했지만, 김건순을 혐의 선상에서 아예 배제해버림으로써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문제를 덮고 말았다. 하지만 남인들의 종교였던 천주교에 노론 최고 명문가의 종손이 자발적으로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은 파장이 큰 사건이었다.
달레는 「조선천주교회사」에서 “영세한 뒤 김건순 요사팟의 행동은 항상 굳건하고 점잖고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의 겸손은 그의 공로와 맞먹었다. 그는 모든 교우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고, 그 덕의 광채는 미리부터 그를 박해의 희생자로 지목하였다. 이런 환경에서 그의 부모 친척과 친구들이 그가 추적되지 않게 해줄 나약한 말 한마디를 얻어 내려고 얼마나 노력했을지는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썼다.
1797년 10월에 여주로 돌아온 자리에서 김건순은 좌중에게 요사팟이란 별호까지 받았노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건순이 주문모 신부에게 정식으로 세례를 받은 시점은 이때가 아니라 두 해 뒤인 1799년 6월 6일의 일이었다. 「추안급국안」의 1801년 3월 17일 자 이희영의 공초에 관련 증언이 남아 있다. 당시 김건순이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을 때, 신부는 손에 작은 금 항아리를 들고, 그 속에 물을 채워 여러 번 김건순의 이마에 물을 찍어 바르면서 성경을 외우는 것을 이희영 자신이 직접 입회하며 목격했노라고 말한 것이다. 세례를 행한 장소는 송현(松峴) 홍익만의 집이었다.
달레는 정약종이 김건순 요사팟과 협력하여 천주교의 모든 진리를 순서 있고 체계 있게 설명하는 「성교전서(聖敎全書)」의 저술에 착수했다가, 책이 절반 정도 완성되었을 때 신유박해가 일어났다고 썼다. 이로 보아 김건순은 가문의 격렬한 반대와 차단에도 불구하고, 교계 핵심 인사들과 지속적으로 왕래하며 뛰어난 문장과 식견을 바탕으로 정약종, 황사영과 함께 교회 내 최고의 이론가로 발돋움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여주 교회의 부활절 부흥회
여주 교회의 성장도 대단했다. 특별히 김건순의 사람으로 도가의 술법을 익혔던 이중배, 원경도, 정종호 등의 활약이 눈부셨다. 이중배는 이전까지 직선적 성격에 거칠고 난폭한 성격을 지녀 불의한 행동도 거리낌 없이 하던 협객이나 술사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는 김건순을 따라 천주교인이 되어 마르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은 뒤 완전히 딴사람이 되었다. 여주 읍내에 살던 원경도는 그의 사촌이었다. 이들은 모두 온 가족이 함께 신앙을 받아들였다.
1800년 3월 부활절 때 두 사람은 정종호의 집에 가서 함께 주님 부활 축일을 지냈다. 이들은 이날 개를 잡고 술을 많이 장만해서 길가에 모여 큰 소리로 알렐루야와 부활삼종경을 외우고, 바가지를 두드려 가며 기도문을 노래했다. 이들의 부활 축제는 온종일 노상에서 계속되었다. 일종의 공개적인 부흥회를 열었던 셈인데, 전후로 달리 예를 찾기 힘들 만큼 참으로 대담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외교인의 신고로 이 소식을 접한 여주 목사 김희조(金熙朝)는 너무도 놀라 즉각 포졸을 보내 이들을 붙잡아 들였다. 이들은 결국 신유박해가 일어나기 한 해 전에 여주 감옥에 갇혔다. 이 일로 여주와 양근 일대에 검거 선풍이 불면서 양근의 정약종은 터전을 버리고 상경을 결심해야만 했다. 평소 이들의 기질이 잘 드러난 사건이었다.
원경도의 아우 원경신(元景信)과 원경도의 외종 김치석(金致錫), 처사촌 최재두(崔在斗), 최재두의 처삼촌, 그리고 윤유일의 부친 윤생원 등도 다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이다. 이후 이들은 10월까지 반년 넘게 감옥에 있으면서 보름마다 온몸이 너덜너덜해질 지경으로 혹독한 고문과 회유를 받아, 일부 배교를 선언하고 풀려났지만, 대부분 뜻을 굽히지 않았다.
특별히 옥중에서 이중배가 행한 치유의 은사는 이제껏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의 손이 닿기만 하면 병이 모두 나았으므로 그가 갇혀 있던 여주 감옥은 인산인해로 몰려드는 병자들의 행렬에 옥문이 무슨 장마당 같았다고 했다. 관속 중에서도 무거운 병을 나은 사람이 여럿 있었으므로 관장도 이를 막지는 못했다.
놀란 옥졸들이 의술의 비결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독특한 처방은 없소, 천주를 섬기기만 하면 되오, 의술을 배우고 싶은가? 먼저 천주를 믿으시오.” 옥졸들이 책이 다 탔는데 어찌 배우는가 묻자, 이중배는 “내 마음속에 타지 않은 책들이 있다네. 얼마든지 가르쳐 주겠네.” 그의 이 같은 질병 치유 능력은 종교적 이적 외에 앞서 본 술사(術士)로서의 그의 역량과도 무관치만은 않으리라고 본다. 이들은 해가 바뀌면서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1801년 3월 13일 다시 여주로 끌려와 읍성 밖에서 참수되었다. 원경도가 28세, 이중배와 정종호는 50세가량이었다. 여주 교회는 김건순을 정점으로 한 상당히 조직적이고 충성도가 높은 신앙 집단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