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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
출 25: 31-40. 마 5: 14-16. 엡 3: 14-19.
예전에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시골에 가면 그리 아름다웠습니다. 밤하늘의 그 수많은 별들을 세어 보면서 참으로 아름다운 추억들을 만들어 갔습니다.
그런데 도시 생활에 익숙하여지다보니 밤에도 낮같이 훤하게 비춰진 가로등 등으로 인하여 밤하늘의 별들을 세워 본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시골에 오랫동안 묵는것이 싫어졌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불빛이 없는 시골 거리가 싫어서 그런지도 모릅니다.
빛이라는 것을 생각을 하여 봅니다. 빛이 없는 시골의 그 밤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불안합니다. 불이 켜져 있지 않은 가정에는 들어가기가 싫습니다. 불이 없는 교회에는 왠지 그리 마음이 들지가 않습니다.
왜 그럴까? 인간에게서 늘 도전이 되는 것은 어둠입니다. 그 어둠은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오늘은 우리들이 그 불안으로부터 헤어 나올 수가 있는 진정한 빛을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도 성막을 묵상을 하면서 지난 시간에 기억한 성소를 들여다 보고자 합니다. 조각목으로 만들어진 그 성소, 그리고 4개의 덮개로 씌워진 성소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무렇게나 자라난 조각목을 금으로 입혀서 만들어진 성소를 들어가면 여기에는 인간의 감격을 표현하는 그 표현을 다 동원한다 하여도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것을 발견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금으로 입혀진 성소안의 그 휘황찬란한 광경을 보고서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금들은 정금입니다. 아마도 순금 99.99%의 금으로 만들어진 성소입니다. 그리고 천정을 보면 가늘게 꼰 베실로 천사들이 수놓아 새겨진 천으로 덮여진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금 등대에 불이 켜져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금 등대에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면 그것은 불가능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금 등대는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어져있을까? 성소 안에 세워진 3개의 특별한 기구들 중에 먼져 우리는 등대를 생각을 하려고 합니다.
그 등대는 먼저 일곱 개의 가지가 있고 그 위에 등잔이 하나씩 달려있는 모양의 등대인 것입니다. 물론 기름은 그 하나 하나에 공급이 됩니다. 그 줄기는 모양 없이 그냥 길게 나온 것이 아니라 중앙에 한 줄기가 있고 나머지는 양쪽으로 두개씩 나와서 대칭형으로 만들어진 등대였습니다.
이 등대는 금 1달란트를 쳐서 만들어진 등대라는 것입니다. 금 한달란트는 지금의 돈으로 환산을 한다면 이고 무게로 따진다면 얼마입니다.
금 한달란트를 쳐서 등잔은 살구꽃형상으로 만들고 불집게와 불똥그릇도 정금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유심히 보면 그것은 등대가 아니라 살구나무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꽃모양중에 살구나무로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에는 살구나무 가지가 두 번 쓰이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 한번은 모세의 권위가 도전을 받았을 때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백성들이 도전할 때에 하나님은 그를 향하신 하님님의 계획을 이 살구나무의 모양을 통하여 하나미의 권위가 그에게 있음을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열두 족장의 지팡이를 하나님의 법궤 안에 두도록 명령을 하십니다.
그때에 다른 족장들의 지팡이는 그대로 있지만 아론의 지팡이는 싹이 나고 꽃이 피는 열매가 맺히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바로 살구나무가지였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레미아 때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범죄를 합니다. 그들의 죄가 최고에 다다릅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예레미아를 부르셔서 여러 가지 심판의 표징에 말씀을 하시는데 그에게 묻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고? 그러자 예레미아는 말을 합니다. 살구나무가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살구나무를 보여주신 이유는 무엇일까?
살구나무의 꽃이 다른 꽃보다 일찍 핀다는 것입니다. 심판을 빨리 내리신다는 하나님의 표징이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 살구나무는 참으로 익숙한 나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왜 하나님은 성소의 제일먼저 보이는 이곳에 등대를 만들어 놓으신 주님의 의도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우리들에게 이런 의미를 부여하시는 것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항상 빛을 이야기 합니다. 주님은 그래서 우리들에게 빛으로 다니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다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빛 된 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 등대의 법칙을 세워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등대에는 제일 먼저 믿음의 법칙이 있습니다. 등대는 금으로 만들어 졌음을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먼저 가져야하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는 것은 우리들의 다른 면을 이야기함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의 사람들에게 어떤 것으로 빛을 비출 수가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권세입니까? 모양새입니까? 능력입니까? 건물입니까? 사람들의 모이는 숫자입니까? 아닙니다. 세상에는 우리보다 권세가 더 큽니다. 세상에는 우리들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에는 우리들보다 더 능력이 많습니다. 세상에는 우리들보다 더 큰 건물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세상에는 우리들보다 얼마나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들이 세상과 비교 할 때에는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비취라고 말씀을 하십니까? 그것은 믿음입니다. 우리들에게 빛 된 생활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그 근원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죄악시대에 믿음은 그 어떤 것보다 더 빛이 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이 어둠의 시대에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어떤 대상보다도 빛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창세기 6장을 보면 하나님이 그의 형상으로 지은 사람들의 모양을 보고 실망을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모양대로 장가가고 시집을 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관여하시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 어둠의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대에 혜성처럼 빛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노아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믿음의 빛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그 시대와 오늘의 시대에도 믿음의 모델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믿음의 모양을 비취는 교회로 남아있기를 소원합니다. 다른 방법이 아닙니다. 다만 믿음의 사람들의 모양입니다.
마5:14-16절의 말씀을 보시면 주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의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와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송계교회에 전직 경찰서장이 교회를 출석을 하고 있는데 그는 어느날 등산을 하다가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사력을 다하여 노력을 하였지만 그날 저녁을 넘기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길을 찾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 순간에 그가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를 보다가 믿음의 사람들의 모양이 떠오르기 시작을 하면서 교회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모양이 나타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등대를 보면서 고난의 법칙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등대는 금 1달란트로 만들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대개는 금으로 녹여 부어서 만드는 것들이지만 이 등대는 금을 쳐서 만들어진 등대라는 것입니다.
정금으로 만든 등대는 모두 쳐서 만든 등대입니다. 한 덩어리의 정금이 망치에 두들겨 맞고 쳐짐을 받아서 정금등대가 된 것입니다.
결코 틀에 부어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뜻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그분은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분은 질고를 당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생명의 주가 되시어 부활의 소망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 등대는 고난 받는 주님을 상징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등대를 통하여 예수그리스도의 그 고난을 통하여 생명을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다.
믿음은 고난을 전제로 합니다. 고난은 우리들을 정제합니다. 맑고 깨끗하게 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성숙하게 합니다. 아픔의 과정이 없이 빛을 낼 수가 없습니다. 정금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치지 않고는 등대의 역할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의 사건이 없었더라면 교회는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시련의 과정이 없이는 정금같은 믿음을 소유할 수가 없음을 인정을 하시고 고난의 과정을 주님과 함께 걷는 자가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련의 과정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처럼 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환난은 우리를 인내로 만들어 내며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우리들에게 주시는 통로인 것을 인정을 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의 서신에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정금같은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변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생각을 합니다. 이 등대는 양쪽으로 뻗은 세 가지, 즉 숫자적으로 본다면 그것은 6을 상징을 합니다. 6은 인간의 숫자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약합니다. 인간은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언제나 넘어집니다. 인간은 의로운 것 같아도 여전히 불의 앞에서 넘어집니다. 인간의 의지는 완전한 것 같아도 조석변이 입니다.
그러나 그 여섯 가지는 그리스도에게 연합이 되어 하나 된 완전을 이야기 합니다.
모든 백성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온전하여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상징하는 기름부음을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등대에는 아침과 저녁으로 감람유가 부어졌던 것입니다. 감람유 없이는 절대로 등대의 역할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감람유는 성령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사명을 감당을 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 성령의 부으심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열망을 하여야 합니다. 주님의 사역을 감당을 하기 위하여는 성령의 인도를 인정을 하여야 합니다.
오늘 부족한 저에게 성령의 부으심을 간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설교자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부으심입니다.
아무리 완벽한 설교를 준비하였다 할지라도 기름부음이 없이는 이것은 하나의 뉴스를 전하는 이야기꾼 아나운서에 불과한 것입니다.
단 한명의 사람도 변화를 시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진 설교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 속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없이는 사람의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설교에는 사람을 두려워하여 하고 사람을 피하면 그 설교는 끝난 설교입니다. 때로는 그 말씀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때로는 그 말씀이 나를 회개하게 만듭니다. 때로는 그 말씀 앞에 나 자신이 아파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말씀은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한 것으로 만들어나가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말씀이 되기를 기도하며 말씀에 대한 도전을 받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거스틴이 어느날 성령의 지시를 받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들어 읽으라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경을 들어 읽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말씀으로 들리기를 시작을 합니다.
롬13:11이하의 말씀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투쟁과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하시는 기름 부으신 주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에 그의 죄 된 행실을 걷어내고 신령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기름 부어져야 합니다. 세상의 온전한 교회가 어디쯤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교회는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여서 온전한 곳을 향하여 달음질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실망스럽습니까? 잘 판단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실망스러운 교회가 성령의 기름부음 받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온전한 교회를 찾아 떠나는 방랑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만 그 교회가 성령의 기름 부음 받기를 원하는 기도의 불을 붙이시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다른 것으로 세워지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인간적인 것들입니다. 인위적인 인간적인 것으로 판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의 말씀을 인정을 하고 그 말씀 앞에 엎드리는 거룩함의 역사가 오늘에도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의 많은 교회들은 인간적인 방법을 우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등잔은 만들어 놓고 물을 붓는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등대에는 여전히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기름 부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생각을 하여 봅니다. 이것은 출27:20-21절의 말씀입니다.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으로 찧어 낸 순결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내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말고 등불을 켜되 아론과 그 아들들도 회막 안 증거 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감검하게 하라”하십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영역에서 믿음의 자리에서 간검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삶을 누리면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 영역을 돌아 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주일을 온전히 성수하였습니까? 예배를 귀중히 여기고 있습니까? 기도하였습니까? 성경을 늘 읽고 있습니까? 십일조를 감당을 하고 있습니까? 직분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순종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감사의 생활을 하십니까? 찬양으로 값진 영성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전도의 역사를 일으키고 있습니까? 등등의 간검입니다.
죽은 신앙을 살리기 위하여 그 믿음으로 만족하지 말고 다시 한번 성소로 들어가는 열심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성소에는 한 등불만이 아닙니다. 그 일곱의 등불이 다 켜져 있어야 하였던 것입니다. 연합입니다. 나만의 개성있는 신앙생활만을 고집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독창이 아닙니다. 합창입니다.
서로 하나되는 합창입니다. 모세는 대단하였지만 그의 뒤에는 아론이 있었습니다. (바울-바나바, 요한 웨슬리-촬스 웨슬리, 무디-생키, 등대는 7곱의 등대가 모두 켜져 있었던 것입니다.
함께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안 들어도 함께 하십시오 그래야 교회가 연합으로 만들어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명을 감당을 할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빛으로 살라
25: 31-40
31. 너는 정금으로 등대를 쳐서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하게 하고
32. 가지 여섯을 등대 곁에서 나오게 하되 그 세 가지는 이편으로 나오고 그 세 가지는 저편으로 나오게 하며
33. 이편 가지에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저편 가지에도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여 등대에서 나온 여섯 가지를 같게 할찌며
34. 등대 줄기에는 살구꽃 형상의 잔 넷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35. 등대에서 나온 여섯 가지를 위하여 꽃받침이 있게 하되 두 가지 아래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게 하며 또 두 가지 아래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게 하며 또 두 가지 아래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게 하고
36. 그 꽃받침과 가지를 줄기와 연하게 하여 전부를 정금으로 쳐 만들고
37. 등잔 일곱을 만들어 그 위에 두어 앞을 비추게 하며
38. 그 불집게와 불똥 그릇도 정금으로 만들찌니
39. 등대와 이 모든 기구를 정금 한 달란트로 만들되
40.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 할찌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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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이 예수님에 대한 증거이듯이, 성막 또한 모두 예수님에 대한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성막으로 들어가는 문이 오직 하나인 것은,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 천국으로 영생으로 들어가는 문은 예수님 한분 밖에 없음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림 NO. 3) 성막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맨 먼저 번제단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림 NO. 8) 이 번제단은 죄인들을 대신해서 희생동물이 불태워 죽음을 당했던 곳으로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사역을 예표한다고 했습니다. 번제단은 조각목을 놋으로 싸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조각목은 아카시아 나무의 일종으로 이는 버림받고 쓸모없는 인생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죄악으로 쓸모없는 아카시아 같은 인생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싸여진 인생은 결코 지옥 불에 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번제단 위에는 네 개의 뿔이 있었는데, 어떤 죄인이라도 성소에 들어가서 이 번제단의 뿔을 붙잡기만 하면 살고 죽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 또한 제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의 손으로 붙잡기만 하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을 보여준 것이라 했습니다.
성막 안에 있는 두 번째 성구는 물두멍이라고 했습니다. (그림 NO. 16) 이 물두멍은 아론과 그 자손인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리고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손과 발을 씻는 일종의 커다란 세수 대야라고 했습니다.
만일에 손과 발을 이 물두멍에 씻지 않고 성소에 들어가는 자가 있다면, 그는 죽음을 면치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물두멍의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데,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늘나라에 이르기까지 항상 힘써야 할 일은, 말씀의 거울을 데려다 보고 자신의 심령을 늘 깨끗이 씻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멀어지면 사탄에게 가깝고, 성경에 가까워질수록 하나님께 가깝다”는 말이 있고, “성경책이 더러울수록 그의 마음이 깨끗하고, 성경책이 깨끗할수록 그의 마음이 더럽다”는 말도 있습니다. 번제단을 통하여 근본적인 죄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도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는 반드시 물두멍에서 손발을 씻어야 했듯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저 하늘 지성소에 들어갈 때까지 영혼의 거울인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데려다보고 자신의 심령을 씻어 정결케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다시 한 번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은 성막 안에 세 번째 성구인 등대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이제 우리는 성막 문으로 들어와서 번제단을 거처 물두멍에서 수족을 씻고 성소에 들어섰습니다. (그림 NO. 1) 그런데 성소에 들어서면 우리는 성소 내부의 휘황찬란함에 경탄을 금치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소 안으로 들어가면 눈에 보이는 모두가 정금이기 때문입니다. 성막의 외부는 해달 곧 검은 물개 가죽으로 덮었지만, 성소의 내부는 금빛 찬란한 곳이었는데 이러한 성소의 모습 역시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해 줍니다. 성막의 외부를 보잘것없는 해달의 가죽으로 덮은 것은, 초라한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의미하고, 성소의 내정으로 들어서면 모든 것이 정금으로 되어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영광스러운 신성을 상징해 줍니다. 골 2:10에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으나” 그 속에는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 빛나리라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 성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소에 들어섰을 때 우선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왼쪽의 순금 등대입니다. (그림 NO. 18) 창문하나 없는 집이지만 성소 안이 밝은 것은 이 등대에서 비취는 빛 때문이었습니다. 이 등대에 대하여 좀더 깊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등대의 형태
이 등대는 정금으로 쳐서 만들었습니다. 등대는 가운데 줄기 하나에 가지 6개가 붙어 7개의 등잔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등대는 수직으로 되어진 가운데 줄기와 그 좌우에 각각 세 개의 가지가 균형을 이루어서 늘어서 있습니다. 가운데 줄기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좌우의 가지는 그의 백성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성도의 중심에 위치하고 계시며 성도의 모든 일에 깊이 관여 하고 계십니다. 양쪽의 세 가지가 다 줄기에 붙어 있으며 줄기에서 나온 것과 같이 성도들은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만 빛을 내며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동차는 휘발유와 함께 할 때 발동이 걸립니다. 고기는 물과 함께 할 때만 활동할 수가 있습니다. 성도는 주님과 함께 할 때만이 존재가치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어부였으나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모세가 혼자 있을 때는 미디안의 한낱 양치는 목자에 불과하였으나,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2. 등대를 만드는 방법
등대는 금을 녹여 부어 만든 것이 아닙니다. 등대는 금을 쳐서 만들었습니다. 등대는 온전한 모형이 나올 때까지 쳐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지혜 문학인 ‘미드라쉬’는 이런 이야기를 전하여 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성막을 만들면서 등대 때문에 가장 고생을 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성물들은 다 만들었는데 등대만 만들지 못하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식양대로 성물을 만들려고 여러 번 시도하였으나 결국은 실패하였습니다. 도무지 등대가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만 모세는 등대 만드는 것을 포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야 네가 만들었던 등대를 불속에 넣어라”
모세가 만들던 등대를 불속에 넣었다가 꺼내서 한 번 쳤더니 등대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후일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의 등대에 대해서도 ‘미드라쉬’는 이렇게 전해줍니다.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는 등대를 10개 만들어야 했습니다. 솔로몬이 금 1천 달란트를 용광로에 넣고 계속 불을 피웠습니다. 아침에 보니 한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이 금으로 등대를 만드는데 만들고 나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보다 1디나가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작품이 나오기까지 80번을 불 속에 넣었다고 합니다.
등대는 수많은 고난을 통과하고서야 만들어진 것입니다.
등대는 쳐서 만들어야 하기에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고난 없이 빛 된 생활을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채찍에 맞아 고난당하신 분이십니다. 빛 된 생활을 하려면 고난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고난의 이야기가 감동의 이야기가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고난의 사건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지 않아도 되실 하나님의 아들이 피 흘려 죽으신 사건은 가장 빛나는 등대와도 같은 것입니다.
3. 등대의 사명
등대의 목적은 말할 것도 없이 빛을 비추기 위함입니다. 등대는 성소에 안치되어 어두운 성소 안을 밝히는 기능을 했습니다. 성막 안에는 창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천정은 햇빛 빛 하나 들어올 수 없이 4개의 덮개로 덮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캄캄합니다. 단 하나의 빛 등대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등대의 역할은 너무도 컸습니다. 등대의 빛이 없으면 성소 안에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작은 불꽃 하나가 유난히도 빛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등대는 죄악의 어두움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밝히기 위해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아담의 범죄 이래 모든 인류는 죄 아래 놓이게 되었고, 그것은 온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절망과 좌절 가운데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즉 온 인류는 죄의 지배 아래서 멸망으로 내달려가고 있었었으며, 소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 때 그 어둠과 절망을 깨고 인류에게 참된 소망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빛으로 찾아오신 분이 있었으니 곧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등대가 어두운 성막 안을 환하게 밝히듯이,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빛으로 오셔서 죄로 어두워진 이 세상을 밝혀 주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위해 자기 생명을 드리심으로 이 세상을 억압하고 있던 죄악의 어두음을 몰아내고, 인류에게 구원의 참된 소망의 빛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흑암의 세력도 그 빛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 빛은 지금도 죄로 어두워져 있는 모든 인류를 향해 찬란하게 비취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이 빛을 영접하기만 하면, 그 빛은 그 안에 찾아 들어가서 죄악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밝고 소망 있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죄의 어둠 속에 거하며 인생에 대한 절망과 신음 가운데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빛이신 예수님께 나아오십시오.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십시오. 빛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여러분의 인생은 흑암에서 광명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4. 등대의 기름
등대는 아침저녁으로 감람유를 공급해 주어야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감람유 없이는 절대로 빛을 낼 수가 없습니다. 기름이 없는 등대는 있으나마나 한 것이 되고 맙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영적 교훈을 얻게 됩니다. 성경에서 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등대가 성소 안을 밝히기 위해 기름이 필요했다는 사실은, 교회와 성도가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야만 한다는 것을 교훈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와 성도가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는 등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을 받기 전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면서 3년 동안이나 따라다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수많은 기적과 이적을 목격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베드로는 조그마한 계집 아이 앞에서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고, 나머지 모든 제자들도 각기 자기들의 갈 길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수없이 말씀하셨던 것들이 그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오순절날 성령을 받고 나서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계집 아이 앞에서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가 산천초목도 떤다는 공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은 베드로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령은 그들 모두를 변화시켰고 그들로 말미암아 복음이 온 세계로 확산되게 하였습니다. 사실 로마를 복음화 시켰을 뿐 아니라 오늘날 전 세계에 복음이 전해지도록 한 것은 모두 성령의 능력이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와 교회가 이 시대에 빛으로서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 충만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교회가 자력으로 아무리 복음의 빛을 비추려고 노력해도 성령의 능력으로 아니 하고는 결코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말과 전도가 모두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았다고 고백하였으며, 또한 베드로 사도는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도움을 힘입을 때만 우리가 세상의 빛 된 생활을 할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촬스 피니는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하는 이유를 6가지로 들고 있습니다.
1)위선적인 생활
2)경박한 생활
3)교만
4)탐욕
5)회개가 없는 생활
6)의무를 소홀히 하는 생활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요소들을 제거함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아 빛 된 생활을 하도록 더욱 간절히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등대의 관리
출 27:20-21에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으로 찧어 낸 순결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말고 등불을 켜되 아론과 그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 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간검하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의 대대로 영원한 규례니
라.”고 했습니다.
등대의 불은 밤낮 계속 켜져 있어야 했습니다. 밤은 밤이니까 물론이지만 낮에도 성막 안은 등대가 없으면 빛 한 점 없이 캄캄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등대는 계속해서 빛을 발해야만 했습니다.
등대의 불이 늘 꺼지지 않도록 간검해야 했듯이, 빛된 생활을 하려면 늘 내 안에 불이 꺼져 있지 아니한가?
간검해야 합니다.
내 속에 기도의 불이 꺼지지 않았는가?
버리지 못한 죄는 없는가?
헌신의 불이 희미해지지 않았는가?
구령의 열정이 식어지지 않았는가?
알고도 이끌려 가는 죄는 없는가?
에베소 교회처럼 첫 사랑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가?
버가모 교회처럼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에 따르고 있지는 아니한가?
서머나 교회처럼 죽도록 충성하고 있는가?
두아디라 교회처럼 이세벨의 교훈을 따르고도 회개에 무뎌지지는 않았는가?
사데 교회처럼 죽은 믿음을 그대로 두고 있지는 않는가?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죽도록 충성하고 있는가?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믿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이같이 우리의 믿음의 불을 늘 간검해야만 빛 된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6. 등대의 상징
성소 안의 등대는 또한 성도들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는데,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심은 세상의 어두움을 전제로 하신 말씀입니다. 세상이 어둡다니요? 전기가 얼마나 발달했습니까? 밤이면 도회지의 거리는 네온싸인으로 휘황찬란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어둡다니요? 지식이 얼마나 발달했습니까? 문화가 얼마나 발달했습니까? 그러나 세상은 너무도 어둡습니다. 왜 세상이 이처럼 어둡습니까? 고후 4:4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신 곧 마귀가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 때문에 세상은 어둡습니다.
그런데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주님은 그 자신이 빛이셨습니다.
요 1:9에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빛이 누구입니까?
요 8:12에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빛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 참 빛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빛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반사하는 영광스러운 반사체가 되는 것입니다.
엡 5:8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했습니다.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빛이라!” 여러분에게 이 분명한 생의 전환점이 있습니까? 아프리카에 간 선교사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의 거룩한 선교의 사명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그 선교사님의 비문에 이렇게 썼습니다. “당신이 이 곳에 올 때에는 어두움이더니, 당신이 떠나간 지금 우리는 빛 가운데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한 자루의 촛불이 방안의 어두움을 밝히듯, 한 사람의 참된 신자가 복음의 빛을 발할 때 어두운 미신이 물러가고, 어두운 풍속, 어두운 사상, 어두운 습관, 어두운 생활이 점점 더 밝아집니다.
시골에서 예수 믿는 처녀가 버스 통학을 하다가 안 믿는 총각과 눈이 맞아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안 믿는 시아버지 시어머니 뜻 맞추고 살기가 무척이나 힘이 들었습니다. 더군다나 교회에 간다고 얼마나 구박을 하는지 교회도 못 다녔습니다. 처음에는 좋아서 결혼했지만 남편 된 사람도 부인을 구박하고, 술 먹고 오면 때리고, 시어머니는 남들 다 잘 낳는 아들도 못 낳고 딸만 낳는다고 얼마나 구박을 하는지 도저히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밤중에 목사님을 찾았습니다. “목사님, 이제는 제가 떠나야겠습니다. 이렇게 구박받느니 떠나야겠는데 친정으로는 못 가겠고 서울로 가야겠습니다.” “아이들은 어떻게 하고 떠난다는 것입니까?” “아이들은 할머니가 기르겠죠.” “서울에 가서 뭘 하시려고요.” “낮에는 일하고 야간에는 신학교를 다녀서 전도사를 하렵니다.” “여기에서도 못 사는 사람을 누가 전도사로 오라고 한답니까? 당신이 여기에서 소금처럼 녹아지시오. 완전히 녹아져서 이 가문에 맛을 내고 그때 나에게 와서 서울로 간다고 하면 내가 장학금을 주겠소.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된다고 했으니, 여기에서 완전히 죽었다 하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시오. 그리고 나를 만나러 오시오.” 그 말을 듣고 그 여성도는 새벽마다 나와 기도하면서 자기 존재를 완전히 깨뜨렸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때리면 맞고, 시어머니가 뭐라고 구박하면 “어머니 마음을 불편하게 해서 죄송합니다.”하고 울면서 웃으면서 자기는 죽었다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1년 동안 그렇게 사니까 시어머니가 그리스도에게 갈증을 느껴서 교회에 나왔고, 나중에는 시아버지와 남편까지도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어두움을 밝히는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통하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큰 영광과 찬송이 돌려지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세상의 빛이시고 참빛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