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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세병관(統營洗兵舘)과 괘궁정기(掛弓亭記)> 고영화(高永和)
통영세병관(統營洗兵館)은 국보 제305호, 통영시 문화동 62-1번지 위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1603년(선조 36) 충무공 이순신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제6대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이 세운 객사(客館), 즉 관사(館舍)이다.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두룡포(頭龍浦)에 설치했던 삼도수군통제사영(三道水軍統制使營)의 중심 건물로, 궐패(闕牌)를 모시고 출전하는 군사들이 출사(出師) 의식을 거행하던 곳이다.
앞면 9칸, 옆면 6칸의 단층팔작지붕 건물로 여수의 진남관(鎭南館)과 함께 남아 있는 군사용 건물 가운데 평면적이 가장 넓은 건물 중 하나이다. 가구(架構)는 11량가(樑架)이며 기둥 사이에 비해 기둥이 높은 비례로 돼 있다. 원래는 벽체가 있었으나 현재는 사면이 모두 개방돼 있다. 내진(內陣)에 높은 기둥을 세우고 다시 대들보[大樑] 아래에 굵은 사이기둥을 세워 당당함과 위엄을 보여준다.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고, 중앙 3칸의 뒤편에는 궐패를 모셨던 시설이 남아 있다. 처마의 무게를 고루 나누어서 받도록, 기둥머리 바로 위에 여러 개의 나무쪽을 짜 맞추어 올린 주심포 후기양식인데, 법주사 팔상전(捌相殿)과 함께 대표적인 예이다.
‘세병관(洗兵館)’의 명칭은 중국 당(唐)의 두보 詩 ‘만하세병(挽河洗兵)’에서 따 온 말로 ‘하늘의 은하수를 끌어와 피 묻은 병기를 닦아 낸다’는 뜻이다. 통영의 만하정(挽河亭)과 함께 두보의 시(詩)가 완성된다.
◯ 1593년 8월에 충무공이 초대 통제사로 임명되어 통제영을 창설하여 그 본거지를 한산도에다 두었으며 3년 후인 1596년 2월 충무공이 잡혀가고 2대 통제사 원균이 1597년 2월에 통제사가 되었을 때도 역시 본거지가 한산도였다. 그 후 한산도가 폐허화 되고 1597년 8월 충무공이 제3대 통제사직에 임명되었을 때는 정유재란으로 전국(戰局)이 총력전(總力戰)이었으므로 충무공이 한자리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진(鎭)치고 다니는 곳마다 통제영이었고 일정한 본거지가 없었던 것이다. 충무공이 잠시나마 머문 곳은 목포 고하도(高下島)와 완도(莞島)의 고금도(古今島) 정도이다. 그러나 고하도나 고금도는 충무공의 전사와 함께 의미가 상실되었다.
제4대 통제사 이시언(李時言 1599년 1월 부임)은 전라 좌수사를 겸하였으므로 여수의 좌순영을 본영(本營)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2년 후, 선조 34년(1601년) 5월에 거제(巨濟)의 경상 우수영(오아포 現가배리)으로 본영을 옮겼던 것이니 조경남(趙慶男)의 "난중잡록(亂中雜錄)"에 의하면, 『통제영을 거제로 옮기다. 전라좌수사겸 통제사 이시언(李時言)이 거제로 바뀌어 오고, 거제수사(경상우수사) 배흥립이 전라좌수사로 바뀌어 나가다.(移統營于巨濟 統制使李時言 自全羅左水營 換入巨濟 巨濟水使 裵興立 換出全羅左水使 卷四 三月條). 전라좌수사가 통제사를 겸하였다가 경상우수사로 하여금 통제사직을 겸하도록 한 것이니 시기는 1601년 본영을 거제도로 옮기기고 부터이다. 그 뒤 제5대 통제사로 임명된 이는 류형(柳珩 1602년 1월 부임)이고 제6대 통제사로 이경준(李慶濬 1603년 2월 임명)이 임명된 뒤에 비로소 지금의 통영시로 옮겨 나온 것이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통제영을 고성땅 두룡포(頭龍浦)로 옮겨서 설치하다. (移設統制營 固城頭龍浦)이라 한 것이 그것인 바, 고성땅 두룡포란 오늘의 통영시 시내(강구안)인 것이다.
세병관(洗兵館)은 이경준(李慶濬) 제6대 통제사가 통제영을 이 고장 두룡포에 옳겨 온 이듬해인 선조 38년(1605) 1월에 기공하여 그해 7월 14일에 준공한 통제영의 객사(客舍)이다. 조선시대의 객사는 절대왕권(絶對王權)을 상징하는 건물로 읍성(邑城)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이를 중심으로 도시계획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경준 통제사가 세병관부터 지었던 것이다. 그 후 1646년 김응해(金應海) 제35대 통제사가 규모를 크게 다시 지으면서 입구에 지과문(止戈門)을 세웠고 고종 9년(1872년) 채동건(蔡東健) 통제사가 중수하였다.
◯ 세병관(洗兵館)은 정면 9칸, 측면 5칸의 단층 팔작지붕으로 된 웅장한 건물로 모든 칸에는 창호나 벽체를 만들지 않고 통칸(通間)으로 개방하였다. 우물마루로 된 평면바닥의 중앙일부를 한단 올려놓았는데 여기에 전패를 모셨던 것으로 보인다. 장대석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기둥 윗몸은 창방(昌枋)으로 결구(結構))하였다. 공포(栱包)는 기둥 위에만 짜 올린 주심포식(柱心包式)이지만 익공식(翼工式) 수법과 다포식(多包式) 수법이 많이 보인다. 즉, 기둥 위에 주두(柱頭)를 놓고, 기둥 윗몸에서 앙서(仰舌)를 하나 내어, 이 위에 소로(小累)를 놓아 외일출목(外一出目)에 오는 행공첨차(行工詹遮)를 받고, 이 행공첨차와 주두를 제이제공(第二諸工)에 놓인 쇠서(牛舌)로 결구하고 있다. 기둥 사이에는 창방 위에 직접 화반(花盤)을 놓아 주심도리(柱心道里) 장여를 받치고 있다. 가구(架構)는 십일량가(十一樑架)로서 대들보를 양쪽 내고주(內高柱) 위에 걸고, 이 위에 동자주(童子柱)를 세워 중보(中樑)를 걸고. 다시 동자주를 세우고 종보(宗樑)를 걸었다. 종보 위에는 대공(臺工)을 세워 종도리(宗道里)를 받치고 있다. 내고주(內高柱)와 전면 평주(平柱) 사이에는 퇴보(退樑)를 걸었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팔작기와지붕을 이루고 있으며 용마루, 합각마루 추녀마루는 양성(兩城)을 하였다.
「洗兵館」이라 크게 써서 걸어 놓은 현판은 서유대(徐有大) 통제사의 글씨라고 전한다. 그 때의 자세한 기록은 세병관 뜰에 있는 두룡포기사비(頭龍浦記事碑)에 적혀 있는데 이 비는 1625년 3월에 세운 것이다.
◯ 세병관은 삼도수군의 본영으로서 수군 36,009명과 전선 548척을 갖추고 303년간 바다의 간성(干城)으로서 위용을 떨쳤다. 통제영 안에는 통제사가 거처하며, 참모들과 작전을 의논하기도 하던 운주당(運籌堂)을 비롯하여 화약고, 군창(軍倉) 등 많은 군관아(軍官衙)가 있었고 영문에는 6방(군행정 관장)과 13공방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훼철되고 없다. 303년간의 장구한 기간동안 통제영 시대가 계속되었으므로 여기에 관련된 유적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세병관은 1963년 1월 21일 국보 제293호로 지정되었다가 2002년 10월 14일 국보 제305호로 승격되었다.
본디 객사(客舍)는 고려 이후 각 고을에 설치되었는데 조선시대에는 임금들 상징하는 전비(殿碑)를 모셔놓고, 매 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소 관원들이 모여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하여 절(向闕望拜)을 하는 의식을 치렀다. 정당(正堂) 앞에 익실(翼室)을 두어 사신의 숙소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읍성계획(邑城計劃)에 공통되는 특징은 왕권(王權)을 상징하는 객사(客舍)가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이고 서측(西側)에는 문관(文官)이 사용하는 본부향청(本府鄕廳)이 놓이게 되며, 동측(東側)에는 중영(中營), 훈련원(訓練院), 군기고(軍器庫) 등이 배치된다. 남문에서 시작되어 객사에 이르는 가로(街路)가 남북주축간선로(南北主軸幹線路)를 이루어서 객사(客舍)가 로단경(路端景)을 형성하도록 되어 있으며, 동서간성로(東西幹線路), 남북주축로(南北主軸路)에 어긋나게 마주 쳐서 삼교차로(三交叉路)를 형성한다. 세병관 앞에 좌우로 동쪽에 ‘괘검루(掛劍樓)’, 서쪽에 ‘괘궁정(掛弓亭)’이 있었다.
1) ‘세병관가’ 통제사 목림기(睦林奇)에게[洗兵舘歌 贈統制睦公] / 이서우(李瑞雨 1633~?) 조선후기 문신.
다음 시편은 목림기 통제사 시절에, 3도수군 합동 훈련을 행한 후, 세병관에서 성대히 연회를 베푼 일을 기록한 글이다.
統制之營大海隅 통제사 영(營)의 큰 바다 모퉁이에 있는
洗兵䧺舘東國無 세병의 웅장한 관사(官舍)는 조선에서 여기밖에 없다네.
聞昔經營壯䂓模 들으니 옛날에 규모가 장대하게 계획하여
瓌材巨木用萬株 좋은 재목인 거목(巨木), 만 그루를 사용했다네.
丹碧輝煌照雲衢 단청에는 광채가 빛나고 햇볕은 구름사이에서 비추니
每歲春秋操舳艫 해마다 봄가을에 배가 꼬리를 물고 수군 조련을 행한다.
操罷宴犒窮歡娛 조련이 끝나면 연회를 열어 심히 즐거워하는데
元戎北壁一榻孤 통제사는 북녘 좌석 책상에 외로이 앉아 있구나.
水使邑宰邊將俱 수군절도사 고을수령 첨사 만호 권관과 함께
褊裨雜職魚貫趨 군영 부장 기타 관리들이 줄이어 추창(趨蹌)한다네.
堂皇列坐餘千夫 약 일천의 장정들이 줄지어 당당하고 성대하게 앉아있는데
遠者不得辨眉鬚 멀리 있는 이들은 눈썹과 수염을 구분하기 어렵구나.
잔을 돌리며 고기를 구워 나른다.(廵觴行炙)
2) 세병관 ‘서루’[洗兵舘西樓] / 이인상(李麟祥 1710∼1760) 조선후기 문인화가.
跳壑魚龍撼古壕 어룡이 솟구쳐 옛 해자(垓字)를 흔들더니
譙樓鐃吹夜嘈嘈 초루(門樓)의 징소리가 밤을 뒤흔드네.
秋淸星月南來大 맑은 가을하늘에 별과 달이 남쪽에서 뽐내는데
海濶雲山北望高 광활한 바다에 북쪽의 구름 낀 산을 높이 바라본다.
三路水師弢劒戟 삼로(三路)의 수군이 활집과 칼, 창으로 무장한
八艘風角靜波濤 전선이 팔(八)자 형으로 늘어서니 바람과 파도도 고요하다.
可憐忠武橫戈地 가련하다! 충무공이 창검 맞부딪친 땅에
惟有漁翁理釣舠 오직 늙은 어부만 거룻배에서 낚시를 드리우네.
◯ 통영성(統營城) 3포루(三舖樓)는 1694년 통제사 목림기(睦林奇)가 세운 것으로, 평상시에는 軍초소 역할을 수행하다가, 훈련을 하는 시기에는 장수가 여기서 군사들을 지휘하였기에 장대(將臺)라 불렀다. 북포루(北舖樓)는 통영성 북쪽 여황산 정상에 위치해 있으며, 일명 ‘북장대(北將臺)’라 하였다. 1993년에 복원되었다. 동포루는 통영성의 동쪽 동피랑 산정에 있으며, 일명 ‘동장대‘라 한다. 서포루는 통영성의 서쪽 서피랑 산정에 있으며, 일명 서장대라 불린다.
3) 통영 ‘북포루’에 올라. 박초암 박성초(문주)와 함께[同朴蕉庵 朴性初(文宙) 登北舖樓] / 강위(姜瑋 1820~1884), 조선 후기의 한학자, 개화사상가.
天高海闊北城樓 하늘은 높고 바다는 넓은 북편 성(城) 누각에
風緊雲繁八月秋 바람 몰아치고 구름 무성한 팔월(음)의 가을이로다.
名州形勝同陘口 이름난 고을의 형승은 지레목 입구 같고
老帥風流似石頭 늙은 장수의 풍류는 돌대가리 같네.
大陸眞看一毬泛 육지가 참으로 공 하나에 떠다니듯 보이는데
神山不與六鰲流 삼신산도 떠도는 여섯 척 자라와는 함께하지 않는다.
悠悠空碧渾無際 푸른 하늘 아득히 온통 끝이 없어도
古異神情不可收 옛날 신묘하고 기이한 뜻을 거두기는 어려울세라.
4) 세병관[洗兵舘] / 남공철(南公轍 1760∼1840) 조선후기 문신.
元戎開幕府 통제사가 막부(幕府)를 개설했는데
高舘枕臺隍 높이 솟은 관사(官舍)를 누대(樓臺)와 해자(垓字)가 감싸 안고
鼓角凌風逈 고각소리가 바람타고 멀리 퍼지니
艨艟壓海長 병선(兵船)이 긴 바다를 압도한다.
挽河懷壯士 만하정의 장사(壯士)를 생각하니
覽物憶神皇 만물에서 신황(神皇)이 기억난다.
萬里斬鯨意 만 리 고래를 잡으려는 마음인데
平臨出日方 수평선에서 나직하게 해가 떠오르네.
5) 세병관 통영(洗兵館 統營) / 신좌모(申佐模,1799∼1877) 이조판서.
統轄三南一大營 삼남 모두를 관할하는 하나의 대규모 진영,
元戎裘帶屹長城 통제사의 가죽옷과 띠, 긴 성(城)이 우뚝 산을 둘렀네.
老冲牙下多名將 노련하고 어금니 깨무는 명장은 많은데
小范胷中足勝兵 소범로자(范老)의 가슴속에만 뛰어난 군사가 넘쳤구나.
已具舟船防斗絶 이미 큰 배를 갖추고 단단히 방어하니
且將簫皷樂升平 장차 풍악소리 즐겁고 나라가 태평하리라.
此來快遂桑蓬志 이제야 유쾌히 상봉지지(桑蓬之志) 이루어
三宿譙樓枕海聲 재삼 머문 문루(門樓)엔 바다소리 잠겼어랴.
[주1] 소범노자(小范老子) : 범노(范老), 송(宋) 나라 범중엄(范仲淹)을 가리킨다. 그가 용도각 직학사(龍圖閣直學士)로 있다가 섬서 경략사로 나가 서하(西夏) 지역을 수년 동안 변방을 지킬 때에 강족이 그를 존경하여 '용도노자' 또는 '소범노자'라 부르면서, “소범로자(小范老子)는 가슴속에 수만의 갑병(甲兵)이 들어 있으므로, 속일 수 있는 대범로자(大范老子)와 비할 데가 못된다"며 두려워하여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주2] 상봉지지(桑蓬之志) : 남자가 사방(四方)으로 활약하려고 하는 큰 뜻. 능운지지(陵雲之志). 청운지지(靑雲之志) 푸른 구름의 뜻을 품었다.
6) 세병관대열(洗兵館大閱), 통영에 있는 객사(館在統營) / 남용익(南龍翼).
刁斗聲宏畫角鳴 동라(銅鑼)소리 널리 퍼지고 화각(畫角)소리 울리니
九枝燈燭滿船明 아홉 개의 등불과 촛불이 온 배(船)안을 밝힌다.
靑袍從事紅蓮幕 푸른 도포 입은 종사(從事), 붉은 연꽃 휘장,
玉帳將軍細柳營 장군의 장막(帳幕), 군율이 엄한 모범적인 군영이다.
高館揷雲天欲近 높은 객사 구름사이 솟아, 하늘 가까운 듯,
遠山蟠海地無平 먼 산들이 바다 둘러 평평한 땅이 없다.
何時截得鯨鯢浪 언제 드넓은 만경창파 다스릴까?
手挽銀河淨洗兵 은하수 잡아당겨 무기를 깨끗이 씻으련다.
[주1] 대열(大閱) : 조선시대에 행해진 군사사열인 교열(敎閱:교련과 열병) 가운데 국왕의 참관하에 행하는 습진(習陣)을 일컫는 말.
[주2] 조두(刁斗) : 군대에서 야경(夜警)하느라고 치던 동라(銅鑼).
[주3] 화각(畫角) : 목기 세공품의 공예기법, 옛날 군중에서 쓰던 대나무나 가죽 따위로 만든 나팔의 일종.
[주4] 세류영(細柳營) : 유영(柳營), 장군이 머무는 군영, 한 문제(漢文帝) 때에 주아부(周亞夫)가 군사를 주둔시켰던 군영이다. 군령이 아주 엄하였기 때문에 후에 모범적인 군영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주5] 정세갑병(淨洗甲兵) : 무기를 깨끗이 씻다. 즉 전쟁이 끝나는 것을 비유한다.
[주6] 남용익(南龍翼) : 1628년~1692년, 본관 의령, 호는 호곡(壺谷), 부(父)는 남득붕(南得朋), 효종3년 1652년 암행어사. 임란 후에 둘러본 통영 세병관에서 느낀 감회를 적은 글이다.
7) 통영세병관(統營洗兵舘) / 조긍섭(曺兢燮 1873∼1933).
欲洗無兵况洗兵 씻으려 해도 병사가 없는데 때마침 세병관의
楣間大字尙虛名 기둥사이 큰 글자가 오히려 명성에 헛되네.
滄波萬斛淸如許 푸른 파도 수많은 물결 이다지도 맑은데도
一任蠻兒舞棹行 오랑캐에게 일임하니 노가 춤추듯 다닌다.
[주1] 세병관(洗兵舘) : 전쟁을 그만두고 평화를 염원하는 시성 두보의 시, ‘세병마행(洗兵馬行)’의 마지막 두 구에서 따서 '세병관'이라 했다. 세상이 다시 평화로워져서 전쟁할 필요가 없으므로 갑옷과 병기를 씻어두고 군마를 풀어 사용하지 않음을 읊은 노래이다.
[주2] 오랑캐에게 일임 : 한일 합병으로 일본에 나라 빼앗긴 시절을 표현 함.
[주3] 조긍섭(曺兢燮) : 1873년∼1933년. 한말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중근(仲謹), 호는 심재(深齋). 조병의(曺柄義)의 아들이다. 당시 영남 사림에서 거목으로 1910년 합병소식을 듣고부터는 두문불출하면서 아무도 만나지 않았으며, 동서의 학설을 비교 궁리하여 《곤언(困言)》을 저술하였다. 정통 유학자로서 주체적 사고를 강조하였고 나라를 빼앗긴 시절 통영에서 지은 글로 다시금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한다.
8) 통영세병관(統營洗兵舘) / 조태억(趙泰億,1675∼1728) 1720년 경상도관찰사.
三路舟師節制間 삼로의 수군절제사 사이에서
將軍䧺鎭擁重關 장군은 뛰어난 지휘로 중요한 관문을 지켰다.
城頭逈壓滄溟水 성곽 위에는 푸른 바닷물이 멀리서 압박하는데
案外低看巨濟山 뜻밖에 거제도의 산들이 낮게 보인다.
地勝樓臺偏爽塏 경치 좋은 곳의 누대가 확 트여 상쾌한데
時平鼓角自淸閑 태평시절 고각소리는 절로 청아하고 한가하다.
腐儒按察眞多愧 쓸데없이 안찰하는 선비는 참 부끄러움 많은데
五石强弓恨不彎 오석(五石)의 강한 활을 당기지 못하니 한스러울 뿐.
[주] 오석(五石) : 약 600근, 360Kg.
9) 통영세병관(統營洗兵舘) 懷李忠武公 二首 / 이서구(李書九,1754∼1825) 실학사대가.
海國關防險 해양 국가는 변방방어가 험한데
樓船節制䧺 다락배 위 절도사 씩씩하도다.
㫌旗明曉日 군기가 아침 해에 밝게 빛나고
鼓角動春風 고각소리 봄바람 타고 울리네.
寵錫仍開府 임금의 하사품 관아에 늘어놨는데
威名舊揔戎 모든 병장기에 오랜 그 명성,
至今朱鳥外 오늘도 주조(朱鳥) 밖에서
猶說伏波功 가히 굴복하는 말(言)은 물결의 공(功)이리라.
공은 왜 침략에 방어해 여러 번 승리했다. 명나라 조정의 하사품인, 동관방(銅關防), 귀도(鬼刀), 곡병(曲柄), 징(鐃), 영패(令牌) 각 1령(各一令), 깃발 2면이 지금도 진영에 보관중이다.(公禦倭屢捷 皇朝賜銅關防鬼刀, 曲柄鐃令牌各一令 旗二面 今尙留營中)
世亂英才出 세상이 어지러울 때 영재가 나타나니
如公更逸群 공과 같이 출중한 분이 이어받아
七年成保障 7년 동안 나라를 보호하였고
一死報明君 한 번 죽어 총명한 임금에게 보답했다.
䧺釰收星彩 영웅이 별빛을 받으니
靈旗閃海雲 신령스런 깃발이 바다구름에 번쩍인다.
遺祠迎送曲 옛 사당의 영송곡(迎送曲),
重吊鄧將軍 등장군(鄧將軍)을 삼가 조문하도다.
노량해전에서 명나라 총병 등자룡과 공은 동시에 전사했다. 명 조정에서 본국에 사당을 세우라 명하여, 노량사당에 등자룡 홀로 제사드릴 겨를이 없다하니 이것이 바로 잘못된 의식입니다.(露梁之役 鄧揔兵子龍與公同時戰死 皇朝命立祠本國 而露梁之祠 鄧公獨未暇享 是爲闕典).
[주1] 주조(朱鳥) : 남방의 수호신(神)은 적조(赤鳥, 또는 朱鳥) 또는 주작(朱雀)이다.
[주2] 영송곡(迎送曲) : 송영하다, 송영 곡조, 마중과 바램 가락, 맞이하고 보내는 곡조.
10) 세병관(洗兵館) 판 차운(次板韻) / 오숙(吳䎘) 1632년 경상감사.
置鎭南維控制雄 남쪽 끝에 진영을 배치하여 웅장하게 다스리니
異時籌策藉群公 훗날의 계책이라고 여러 공들이 업신여겼다.
銀潢注海腥膻洗 은하수에 바다를 쏟아 붓듯 비린내를 씻으니
銅柱橫天職貢通 구리 기둥 하늘을 가로질러 공물이 통하네.
棨戟千行光射日 두 갈래 창에 수많은 햇빛이 비추고
艨艟萬軸勢培風 전선의 굴대는 기세 좋게 바람을 탄다.
將軍自是凌煙客 당연히 장군은 신선을 얕잡아 보듯,
更佇餘氛一掃空 쌓아둔 남는 기운으로 말끔히 쓸어내었네.
당시 통제사는 변흡으로 진무공신이었다(時統制使邊潝 乃振武功臣). 1632년2월~1633년4월 재임.
[주1] 변흡(邊潝) : 1568(선조 1)년∼1644(인조22)년.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원주(原州).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 1617년(광해군 9) 종성부사(鍾城府使)가 되었다. 1622년에는 등극부사(登極副使)로 상사(上使) 오충겸(吳充謙)을 수행하여 명나라에 다녀왔고, 여러 관직을 거쳐 경상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황해도병마절도사로서 양서순변사(兩西巡邊使)를 겸하여 난의 평정에 크게 공헌하였으므로 진무공신(振武功臣)2등으로 책록되어 원흥군(原興君)에 봉해졌다. 1629년 강화도의 수비를 강화할 목적으로 교동현(喬桐縣)을 교동부(喬桐府)로 승격시키고 경기도 수영(水營)을 교동부로 옮기게 할 때 경기도수군절도사 겸 교동부사에 임명되었다. 뒤에 삼도수군통제사와 오위도총관을 역임하였다.
[주2] 연객(煙客) : '안개를 마시며 사는 사람'이란 뜻으로, '신선(神仙'을 일컫는 말.
11) 세병관(洗兵館) 각 수영(水營)을 통제하는 웅대한 청사(廳事) / 이식(李植 1584∼1647)
巨港呑滄海 푸른 바다 집어삼킨 거대한 항구
華軒起半空 공중에 우뚝 솟은 화려한 전각
山形連棨戟 산세는 마치 의장대가 도열한 듯
水怪避艨艟 물속의 괴물들도 전함이 무서워 피하리.
一帶襟喉壯 웅장하도다! 일대의 요해처여~
三方節制通 세 방면 모두가 절제를 받는구나.
銀潢不可挽 은하수 물 끌어다 씻어 버릴 수 없을까?
氛祲尙迷東 동방에 아직도 얽혀 있는 저놈의 요기!
12) ‘세병관 방회음[洗兵舘榜會吟]’ 이세선 통제사에게 바치다.(贈李統帥世選) / 이세화(李世華 1630∼1701) 조선후기 문신.
통제사 이세선(李世選 1628∼1698)은 1687년10월~1689년6월까지 통제사를 역임했는데, 30년 전에 함께 문무과에 합격한 동기들을 통영 통제영 세병관으로 불러서, 모임(榜會)을 가졌다. 다음 시(詩)는 이 자리에 참석한 이세화(李世華)가 읊은 글이다.
浪漫鯨海杳連天 물결 일렁이는 넓은 바다에 하늘이 잇닿아 아득하고
咫尺扶桑白日懸 부상의 지척에는 밝은 해가 걸려있네.
三十年前龍虎榜 삼십년 전에 함께 나란히 합격했는데
數千里外綺羅筵 수천 리 밖에서 화려한 자리에 모였구나.
甘棠布化吾何敢 선정을 베풀고 교화를 행하는 일, 내 어찌 감당하랴.
細柳紆謀子獨賢 세버들도 굽어 살피니 그대 혼자 어질도다.
更有窮閭歌杜母 다시 가난한 마을에서 두모(杜母)의 노래 부르니
一塲樽酒共怡然 한바탕 통술 들이키며 공히 즐거워했다네.
[주1] 용호방(龍虎榜) : 조선 시대, 문과와 무과에 합격한 사람의 이름을 게시하던 나무판.
[주2] 두모(杜母) : 두모는 후한(後漢)의 두시(杜詩)를 남양(南陽) 사람들이 어머니처럼 친애하여 부른 칭호이다. 그가 남양 태수가 되어 선정(善政)을 베풀자 남양 사람들이 전한(前漢) 때에 남양 태수로 선정을 펼친 소신신(召信臣)에 견주어 “전에는 소부(召父)가 계시더니, 뒤에는 두모가 계시네.〔前有召父 後有杜母〕”라고 하였다.
13) 세병관 시사[洗兵舘試射] / 오횡묵(吳宖默) 1886년 영남향별사, 고성부사(固城府使, 1893~1894년).
元戎鍊武賞施寬 통제사가 무예를 단련하고자 성대히 개최했는데
百發鳥號德可觀 백번을 발사하니 새가 놀라, 그 덕(德)을 볼만 했다네.
今日吾軍張亦足 오늘의 우리 군대는 용감하고 기세등등했으니
不須勁弩數燕韓 강한 활로 우물의 몇 마리 제비를 쏠 필요가 없으리.
[주] 시사(試射) : 활이나 총포 따위를 시험 삼아 쏘아 봄.
14) 세병관에 올라[登洗兵舘] / 오횡묵(吳宖默) 1886년 영남향별사, 고성부사(固城府使, 1893~1894년).
閣裏淸風五百間 맑은 바람이 오백 칸 다락집 안으로
登臨六月暑炎剛 오뉴월 무더위가 한창일 때 들어왔구나.
方花壓地靑山重 사방의 꽃이 대지를 가로막고 겹겹의 청산인데
畵棟浮空白日閒 공중에 떠있는 그림이 그려진 마룻대, 한낮이 한가하네.
天朗斗墟無戰氣 맑은 하늘에 북두성이 뜬 터에는 전쟁의 기운 없으니
人遊海國破愁顔 사람들은 얼굴을 활짝 펴고 바닷가를 노닌다네.
李公祠屋長隣近 이공(이순신)의 사옥(祠屋)이 가까운 이웃에 있으니
伏臘村翁自往還 삼복(三伏)과 납일(臘日)에 시골 노인들만 오고갈 뿐이네.
15) 세병관에 올라[登洗兵舘] / 오횡묵(吳宖默) 1886년 영남향별사, 고성부사(固城府使, 1893~1894년).
客舍宏麗湧半天 객사가 웅장하고 화려해 하늘 가운데 솟았는데
兵塵一洗昔何年 전란의 티끌을 일제히 씻어낸 후, 옛날 어느 때에 지었던고.
將軍志決身先死 장군이 뜻을 결정했지만 몸이 먼저 죽었으니
絲月至今空上絃 지금까지 실 같은 달이 상현달 되듯 공허하구나.
16) <세병관 괘궁정기(掛弓亭記)>
괘궁정기(掛弓亭記)는 현재 세병관 건물 안에 유일하게 걸려 있는 기문(記文)이다. 괘궁(掛弓)은 '활을 걸어둔다', 세병(洗兵)은 ‘병기를 씻어 거두다’, 지과(止戈)는 ‘창을 멈춘다’ 모두 비슷한 의미로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추구한다는 뜻이다. 괘궁정기(掛弓亭記)는 숙종(肅宗) 24년(1698)에 제74대 이홍술(李弘述) 통제사가 세운 것으로 기문에 나와 있으나, 장소 및 규모 등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다. 괘궁(掛弓)은 ‘하늘의 은하수를 끌어와 피 묻은 병기를 닦아 낸다’는 만하세병(挽河洗兵)의 뜻과 일맥상통한다. 세병관 경내에는 좌우로 행랑이 있었는데 동쪽 행랑이 ‘괘검루(掛劍樓)’, 서쪽 행랑이 ‘괘궁정(掛弓亭)’이라 전한다. 기문(記文)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홍술(李弘述) 통제사가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한산도에서 지은 ‘진중음(陣中吟)’과 제승당 야음(制勝堂夜吟)의 구절을 일부 인용하여 기문을 작성했으며, ‘괘궁(掛弓)’ 편액(扁額)과 괘궁정(掛弓亭) 또한 이순신장군의 애국충정에 따라 건축한 행랑임을 밝히고 있다.
옛날 우리의 선조(先祖) 충무공께서 당시 임진·계사년의 몹시 혼란한 시기에 시가 있어 이르노니, "근심 가득해 잠 못 드는 밤, 새벽달이 칼과 활을 비추네.“라고 읊었다. 아! 활이라는 것이 군대에서 가장 훌륭한 기구로다. ”이미 당긴 내 활이, 흉악한 칼날들을 소탕(掃蕩)하였다.“하니 활의 쓰임이 대단하였다.
내가 통제사로 임명된 이듬해 여름 당의 서쪽에 정자를 짓고 그곳을 활 쏘는 곳으로 삼았다. 깎은 듯 아름다운 산에 맹세하고 가없는 바다에 맹세하고는 칼을 씻고 활을 걸어 둔 지난 자취를 대개 상상할 수 있다. 지극한 추념(追念)을 마땅히 어찌해야 하리오?
이윽고 이것으로 정자의 이름을 지었는데, 이것은 활집과 화살통을 두르거나 얹어두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수루(戍樓)의 쇠잔한 달에 활 그림자가 아직도 이 집에 걸려 있으니, 어찌 괘궁(掛弓)으로 편액(扁額)을 걸지 않으랴. 남몰래 감모(感慕)의 정성으로 붙인다.“ / 1698년(戊寅) 한여름(仲夏)
[昔我先祖忠武公當龍蛇搶攘之時有詩曰, 憂心轉輾夜殘月照弓刀 噫弓者軍實中一良器也 旣張我弓蕩掃凶鋒弓之用大矣 余受節之明年夏爲亭於堂之西以爲射鵠之所 爲盟山戌削誓海漭瀁 洗劒解弓之遺躅槩可想矣 羹墻之慕當何如哉 旣以名亭則此非帶鞬哉櫜之謂也 戍樓殘月弓影尙掛舍是弓 而奚爲遂以扁掛弓 而竊寓感慕之忱云 戊寅仲夏]
[주1] 용사(龍蛇) : 걸출한 인물, 또는 용과 뱀, 고래와 악어는 모두 포악한 존재, 곧 왜적을 가리킨다. 또한 용과 뱀은 각각 진(辰)년과 사(巳)년을 상징하며, 이러한 용사년(龍蛇年)은 흉년으로 간주되었다. 여기서는 처음 왜란이 난 임진년과 그 이듬해 계사년을 가리킨다. 임진왜란 때 왜적을 섬멸하지 못해 정유재란이 났다는 뜻이다.
[주2] 창양(搶攘) : 몹시 혼란(混亂)하고 수선스러움. 혼란하다. 왁자(지껄)하다. 질서가 없다.
[주3] 맹산서해(盟山誓海) : 산과 바다에 맹세한다는 뜻으로, 썩 굳은 맹세를 이르는 말. 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 "바다에 맹세하니 어룡이 감동하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아는구나." '이충무공 전서' 중 15권에 실린 "진중음(陣中吟)"으로 임금의 피난 소식을 접한 후 나라의 앞날을 근심하면서 충신의 굳센 의지와 장부의 기개 및 충혼을 표현한 말이다. 특히 충무공의 칼에 새긴 검명으로도 유명하다.
[주4] 해궁(解弓) : 활시위를 벗김. 활줄을 걸어 쏠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주5] 갱장지모(羹墻之慕): 옛날 요(堯)임금이 붕어한 뒤에, 순(舜)임금이 요임금을 앙모(仰慕)한 지 3년 만에 앉아있으면, 요임금이 담장[墻]에서 보이고, 밥 먹을 때는 요임금이 국[羹]에서 보였다는 데서 온 말로, 선왕(先王)을 우러러 사모하는 것을 이른 말이다.
[주6] 고건(櫜鞬) : 활집과 화살통, 활과 화살을 꽂아 넣어 어깨에 멜 수 있도록 가죽으로 만든 물건.
[주7] 감모(感慕) : 마음에 끌리어 사모함.
● 참고 : 괘궁정기(掛弓亭記)에 언급한 ‘제승당야음(制勝堂夜吟)’ ‘진중음(陳中吟)’
① 제승당 야음(制勝堂夜吟) 1595년 10월. 이순신(李舜臣) 한산도.
水國秋光暮 한 바다에 가을빛 저물었는데
驚寒鴈陣高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떳구나.
憂心展轉夜 가슴에 근심 가득해 잠 못 드는 밤,
殘月照弓刀 새벽달이 칼과 활을 비추네.
② 진중음(陳中吟) [右無題三韻逸] 이순신(李舜臣).
거제읍지, 이충무공 전서 15권에 실린 "진중음"은 임금의 피난 소식을 접한 후 나라의 앞날을 근심하면서 충신의 굳센 의지와 장부의 기개 및 충혼을 표현한 글이다. 특히, 경련<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은 충무공의 칼에 새긴 검명으로 유명하다.
天步西門遠 임금의 행차는 서쪽에서 멀어지고
東宮北地危 왕자는 북쪽 땅에서 위태롭다.
孤臣憂國日 외로운 신하는 나라일 걱정할 날,
壯士樹勳時 사나이는 공을 세워야 할 때로다.
誓海魚龍動 바다에 맹세하니 어룡이 감동하고
盟山艸木知 산에 맹세하니 초목도 알아주네.
讐夷如盡滅 이 원수 왜적을 모조리 멸한다면
誰死不爲辭 비록 내 한 몸 죽을지라도 사양치 않으리.
17) 두룡포기사비문(頭龍浦記事碑文)
두룡포기사비문(頭龍浦記事碑文)은 경남 시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12호, 높이 215cm, 너비 90cm, 두께 20cm이다. 경상남도 통영시 문화동 62번지에 위치한 세병관(洗兵館) 광장에 있는 이 비(碑)는 1625년(인조 3년)에 건립했다. 원래 통제영(統制營) 남문 밖 바닷가 큰 길에 서 있었는데, 1904년(고종 8년)에 현재 위치로 옮긴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귀부(龜趺)가 없어진 듯하며, 비신(碑身)이 오랫동안 땅에 묻혀 있어 완전한 판독이 어려웠었다. 1996년에 받침돌을 새로 만들고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이수(螭首)에는 구름과 두 마리의 용이 하나의 여의주를 받치고 있는 모습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이 두룡포기사비는 선조 때 제6대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였던 이경준(李慶濬)이 수군 본영을 이곳에 건설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일종의 사적비이다. 이후 통제사 구인후(具仁侘, 1578~1658년, 통제사 1633년 5월~11월 재임)가 다시 세우고 창원대도호부사 박홍미(朴弘美, 1571~1642)가 비문을 지었다. 비문의 주된 내용은 비를 세우게 된 경위와 이경준 통제사의 세계(世系)와 관력(官歷), 통제영을 두룡포로 옮기게 된 이유, 그리고 이경준의 인간됨과 업적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찬자(撰者 글을 지은 사람)와 서자(書者 글씨를 쓴 사람)의 성명은 판독되지 않고 직명(職名)인 통훈대부 창원대도호부사(通訓大夫昌原大都護府使)와 어모장군행훈(禦侮將軍行訓) 등만 판독될 뿐 그 이하는 마모되어 있다.
<두룡포기사비(頭龍浦記事碑)> 박홍미(朴弘美,1571~1642) 1625년3월 창원대도호부사.
두룡포(頭龍浦)에 진영(陣營)을 설치한 때는 오래되지 않았다. 선조 때(1604년)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제6대 통제사 : 1603년-1605년 재임)이 세웠다. 그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었고 또 요충지에 진영을 설치하여 만세토록 나라에 이익이 되게 하였다. 사람들이 그 이로움을 잊지 않고 그 덕을 생각하여 돌에 그의 업적을 기록하여 길이 전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당시의 통제사 구공(具公)(具仁후 : 제19대(1623-1625), 제25대(1633-1633) 통제사)에게 하소연하였다. 구공(具公)은 일찍이 공(公)의 보좌관으로 있을 때 공에게 크게 신임을 받았던 적이 있어 또한 그의 은덕을 사모하여 그 기록을 빛내고자 나에게 비문을 지어줄 것을 부탁했다. 내가 감히 글을 잘하지 못한다고 사양할 수가 없어 그 대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공(公)은 옛날 정승을 지냈던 증(增)의 아들이며 한산 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이다. 가문의 흥성함과 세상에 전해진 덕의 무성함은 나라의 역사에 새겨져 있고, 묘비(墓碑)에도 새겨져 있으므로 이 비문(碑文)에서는 생략한다. 공(公)의 형제는 네 분인데 함께 나란히 세상에 드러났다. 첫째는 현재 지사(知事)인 경함(慶涵)이니 쌓은 덕과 높은 명성이 당대의 제일이다. 셋째는 좌랑(佐郞)을 지낸 경류(慶流)인데 임진란(壬辰亂)에 휩쓸려 나라 일에 종사하다가 죽었기 때문에 그 능력을 다 펴지 못하였다. 넷째는 현재 소윤(少尹)인 경황(慶滉)인데 비록 과거를 거쳐 관직에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여 여러 번 내직, 외직으로 옮겨 다니며 벼슬을 하여 유능하다고 알려졌다. 공(公)은 비록 무예로써 몸을 드러내었으나,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널리 통하였고, 시(詩)와 예(禮)에도 조예가 깊었다. 태도가 온화하여 옛날 선비 같은 장수의 기풍이 있었다. 그래서 이르는 곳마다 명성을 얻었다. 평안절도사(平安節度使)를 두 번 지냈고, 황해절도사(黃海節度使)도 두 번 지냈으며, 충청병사(忠淸兵使)를 한번 지냈다. 군사와 백성들이 부모처럼 그를 공경하고, 신명(神明)같이 위엄 있게 느꼈다. 그가 다스리는 땅은 편안하고 무사하였으니, 그의 어짐과 위엄과 일을 처리해 나가는 솜씨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조정에서 그를 중히 여겨 요새지를 맡겼고 두 번이나 통제사로 삼았다. 통제사라는 직책은 경상, 전라, 충청 삼도(三道)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지키는 자리이며, 벼슬이 높고 임무가 중대하여 지방의 무신(武臣) 가운데 이보다 중요한 자리는 없다. 그러므로 당대의 으뜸이 아니면 능히 맡지 못하는 직책이었다. 그러나 통제영(統制營)이 설치된 것도 오래되지는 않았다. 임진란(壬辰亂) 때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바다 위에서 적은 군사로 큰 적을 무찔러 이겨, 바다와 육지에 진로를 차단함으로써 나라의 중흥에 가장 큰 공을 세웠다. 조정은 관직으로써 그에게 상줄 만한 것이 없었고, 또 중대한 권한을 주지 않으면 군사를 통솔하여 나라의 동남쪽을 방어하기 어려우므로, 특별히 통제사라는 관직을 만들어 그에게 내려 주었다. 그러니 통제사라는 직책은 이순신 장군 때문에 마련된 것이었다. 통제영(統制營)은 처음에 한산섬에 있었는데 한쪽으로 치우쳐 있고 멀어서 고성(固城)으로 옮겼다. 배를 숨기기에는 편하였으나 갑자기 당하는 변을 막는 데는 불편하였다. 통제사로 오는 사람들이 우선 편한 것만 생각하여 능히 고치지 않고 두었는데, 공(公)이 통제사가 됨에 미쳐 개연히 이를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고 마땅한 땅을 살펴서 진영을 두룡포(頭龍浦)로 옮겼다. 서쪽으로는 판데목을 의거하고 동쪽으로는 견내량(見乃梁)을 끌어안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큰 바다와 통하고, 북쪽으로는 육지와 이어져 있어, 깊숙하면서도 구석지지 않고, 얕으면서도 노출되지 않아 진실로 수륙(水陸)의 형세가 뛰어난 곳이요, 국방(國防)의 요충지(要衝地)이다. 동쪽에서 쳐들어와 남해안과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왜적들이 이곳을 지나 제멋대로 날뛰지 못하게 해서 바다가 조용해진 지 수십 년이 넘었다. 옛날 조적(祖狄)이 초성(醮城)에 진영을 옮기니 후조(後趙)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고, 유익(庾翼)이 면구(沔口)에 진영을 옮기니 북로(北虜)가 감히 엿보지 못하였다. 지리(地利)의 험난함은 비록 하늘이 베푸는 것이지만 반드시 사람을 만나야만 비로소 국방의 요충이 되는 것이니, 이는 예나 이제나 같은 이치이다. 지금 이 두룡포(頭龍浦)가 옳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면 한낱 소금끼가 많아 농사도 지을 수 없는 바닷가 어촌, 여우와 토끼가 뛰놀던 잡초 우거진 언덕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이미 몇천년 만년동안 몇천 몇백 사람들을 겪어 오다가 비로소 공(公)의 손에서야 이 일이 이루어졌다. 하늘이 이 요새를 설치하고서 이때를 기다렸고 또 그 사람을 기다렸던 것이니, 이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앞서 적을 파하여 나라를 다시 일으킨 업적을 세웠고, 공(公)이 뒷날 진영을 설치하여 만세토록 이로움을 주었으니, 전후 두 이씨(李氏)의 출현이 때를 맞추었다고 말할 만하다. 그런데 유독 공(公)의 행적은 거의 허물어져 전하여지는 것이 없으니, 어찌 현명한 자손이 능히 집안을 일으키지 못했기 때문이겠는가. 아. 두룡포(頭龍浦)의 요해지가 공(公)을 만나 국방의 요충지가 되었고, 공(公)의 공적과 덕이 또 구공(具公)을 만나서 비석에 새겨 전하게 되었다. 그러니 단지 땅만이 사람을 기다린 것이 아니고, 사람도 또한 사람을 기다린 것이니, 이 또한 어찌 우연이겠는가. 구공은 정사이등공신(靖社二等功臣)이며 왕실의 외척(外戚)이다. 외척 중신(重臣)이 이 진영을 맡았으니, 그 공덕과 명성과 쌓은 업적에 대해서는, 공(公)이 지금 진영에서 통제사로 있고 또 이 일을 주관하였으므로 감히 찬사를 드리지 않기로 하고 뒷사람이 논하기를 기다리노라. [頭龍浦之設鎭非古也 萬曆中 故統制使李公慶濬之所建 公旣有惠澤在於人 又設鎭要害 爲萬世之利 人安其利思其德 咸欲石以記其蹟 以壽其傳 訴於今統制具公 於公曾爲幕佐 受知最深 亦思其澤 樂聞而成其美 命余爲之記 嚴不敢以不文辭 紀其梗槩如左 公故宰相某之子 韓山牧隱公之後也 氏族之盛 世德之茂 載在國乘 銘在墓道 卽於是碑 斯可略矣 公兄弟四人 聯璧共顯 其一卽今知事慶涵 宿德重望 爲當今第一 其一故佐郞慶流 壬辰之亂 死於國事 不克展其才蘊 其一卽今少尹慶滉 雖不由科第以進 而醇謹奉職 累遷中外官 有能名 公雖以武藝發身 博通書史 敦說詩禮 雍容有古儒將風 故所至輒有聲 再鎭關西 再鎭海西 一師湖右 兵民愛之若父母 畏之如神明 封疆帖然無事 盖其仁威方略有大過人者 是以朝廷重焉 委以鎖鑰 再爲統制 統制之職 兼領三道 控扼嶺海 位尊任重 閫外之寄 無出其右 故非當世極選 不能居是職焉 然統制之設 亦非古也 粤在壬辰 李公舜臣以海上偏師 克摧大敵 使不得水陸並進 爲中興第一功 朝廷無官以賞之 且不卑重權 無以憚壓羣帥 捍禦東南 故特置統制以官之 其營始在閑山 卽偏於右而遠於左 中移固城 卽宜於藏船而不便於應卒 相繼爲帥者 狃於姑息 莫能改置 及公爲帥 慨然以爲己任 相度地形 移鎭于頭龍 西依握浦 東控見梁 南通大洋 北連平陸 深而不奧 淺而不露 眞水陸之形便 關防之要害 自東而南而西之賊 不得過此而橫行 海波不驚者 殆將數十年矣 昔祖逖移鎭譙城 而後趙不敢近 庾翼徙治沔口 而北虜不敢窺 地利之險 雖天所設 必待人而後得所焉 自古及今 其揆一也 今夫頭龍未得其人 卽一海港瀉鹵之地 荒榛狐兔之墟而已 歷幾千萬年 閱幾千百人 而始成之於公之手 天之設是險以待時又待人 豈偶然哉 忠武克敵於前 以收中興之績 公設鎭於後 以爲萬世之利 前後二李之出 雖謂之應時可也 而獨公之迹 幾乎泯沒而無傳 豈無賢子孫能業其家者歟 噫 頭龍之險 得公而爲關防之地 公之功與德 又得具公而有峴之傳 則不惟地之待人 人亦待人 亦豈偶然哉 / 通訓大夫 昌原大都護府使 朴弘美 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