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체로 시위하는 사진 있는 책 저자 조지 카치아피카스 교수를 처음 만난 지 3년이 흐른 후 그는 나를 보스톤 사회포럼에 발표자로 초청했고 그런 나의 활동을 보고 핵시대평화재단 David Krieger회장이 나를 그 재단의 한국대표로 초대했다.
2003년도 여름에 그가 한국에 왔을 때 이화여대 교정을 함께 걸은 적이 있는데 어느 건물벽에 여성들의 나신이 흐르는 듯한 얇은 천으로 살짝 가려진 것같은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을 보자 나더러 그 앞에 서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해 웃으면서 사진을 찍었다.
웃은 이유는 그를 처음 만났던 날 밤 내가 그의 이름을 마음 속으로 부르며
떨어지는 꽃잎을 맞으면서 나체로 걸어간 꿈을 꾸었고 그 이야기를 그에게 꿈에 관한 학술적인 글과 함께 메일로 보냈더니 자신도 꿈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답장을 보내왔었기 때문이었다. 그 꿈속에서 나는 어느 정도 불안했었고 바람도 조금 불고 있었다.
그는 이혼해 십여년을 혼자 살다 2005년도에 한국 여성과 결혼했다. 2004년도에 나는 미국에 간 김에 다른 시민운동 단체에서 일하는 젊은 남성과 함께 보스톤에 있는 그의 집에 가 하룻밤을 잤다.
저녁 모임에 자기 친구들 3명을 초대했는데 미국이 괴롭혔던 니카라과에 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을 하는 부부가 있었다. 부부 둘다 하버드대 출신 60대로 남편은 은퇴한 교수였고 여성은 작가였다. 그 남편과 얘기를 많이 했는데 남한 사람은 북한 사람과 정부의 허락을 받지 않고 말하면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는다는 말을 하자 그렇게 나쁜 법이 있느냐며 무척 놀랬다.
나는 그에게 미국이 우리나라에 못된 일을 한 것이 상당하지만 전체적으로보면 좋은 일을 한 것이 더 많아 미국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영향으로 내 개인적으론 여성해방이 되어 행복하다고 말하자 일본 여성들도 그럴 것이라 했다.
그가 자기 이름을 David Gullette이라고 소개하며 나더러 자기를 그냥 David라고 부르라고 해 내가 놀라면서 정말 그래도 되는가 물어보았으나 진심으로 그렇다고 말해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사람을 David라 부르며 즐겁게 이야기 했다. 그가 보스톤 사람들로부터 돈을 걷어 도와주는 남미 학교 인터넷 사이트도 보여주어 이렇게 좋은 미국인들만 있다면 미국이 세계에서 존경을 받을 것인데...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헤어질 때 내 볼에 자기 볼을 맞대는 친근감 있는 작별인사를 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조지 카치아피카스 교수가 내게 자기를 이제껏 그냥 George라고 한번도 부르지 않았다며 앞으로는 그냥 이름으로 불러달라 했다. 그래서 그 후부터 George라 부르고 그는 나를 Sunny라 부른다. 그는 나와 대화를 하면 밝은 에너지를 받기 때문에 내 마지막 이름(선)에서 딴 그 이름이 좋다 했다.
그의 딸이 우리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애인과 함께 왔었는데 이혼했던 부인이 차로 운전해 데려다주러 왔으나 집으로는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차안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나가 인사를 했다. 그는 이혼한 부인과 자녀를 잘 키우기 위해 거의 날마다 전화 통화를 한다고 했었고 심지어 유럽여행을 이혼한 부인, 자녀들과 함께 했다 .
그 딸이 헤어질 때 나를 껴안고 볼에 자기의 볼을 부비는 인사를 했는데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George에게 헤어질 때 그 딸처럼 내게 그런 인사를 해줄 수 있는냐고 물었더니 같이 간 남성 시민단체 활동가에게 먼저 하고 내게 나중에 그런 인사를 해주었다.
그의 생일은 만우절인데 생일 날 생일 선물로 정혜신씨의 스트레스 강좌를 영어로 번역해 보내고 축하 인사를 전화로 했다. 그의 새로운 부인에겐 한국어와 영어로 된 둘 다를 보냈다.
아래는 2001년도에 그 사람을 처음 만난 후 작성한 글이다.
간디는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을 꿈꾸라며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꿈도 못 꿨던 일들이 매일 같이 일어나고 있고 불가능했던 일들이 가능해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폭력'의 영역에서 이뤄지는 새 발견들에 끊임없이 놀라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비폭력'의 영역에서 이루어질 더 놀라운 발견을, 예전에는 꿈조차 꿀 수 없었고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위 간디의 말을 알려준 어느 평화운동가 교수로부터 2001년 12월 조지 카치아피카스 (George Katsiaficas) 교수에 대해 듣게 되었다. 조지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미국 보스턴에 있는 웬트워스 공과대학 인문사회과학부 교수이며, '새로운 정치과학'의 편집장인데 6월 사랑방이라는 모임에 와서 회원들과 함께 대화를 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는 60-70년대 미 전역을 휩쓴 베트남전 반전운동의 한 가운데 있었고, 이 과정에서 세계적 언어학자이면서 미국의 오만과 편견을 질책해 온 노암 촘스키와 사귀게 된다. 촘스키는 그에게 있어서 반전평화운동의 '사령관'이었다.
‘시애틀'에 미좌파세력 결집
'광주'는 파리코뮌과 닮은 꼴
이슬람 근본주의와 공존해야라는 말로 소개된 그에 대한 노동일보 인터뷰 기사 중에 아래와 구절이 있어 나는 그를 꼭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 신좌파가 구좌파로부터 답습하고 있는 권위주의, 관료화, 그리고 조루증을 탈피하려면 '자치의 실현'이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기존의 (정치, 정당적) 체제를 과감히 벗어던져버린 여성운동의 전략을 본받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는 생활한복 차림이었으며 굵은 파마를 한 것처럼 곱슬거리는 머리는 내 머리보다도 길어서 멀리서 보면 여성같은 느낌을 주는 날씬한 사람이었다.
생활한복이 무척 친근한 느낌을 주어서 그것을 어떻게 구했는가 물어보았더니 자신이 직접 샀다고 해 또 한번 신선한 느낌을 주었던 그에게 몇년생인가 물어보니 1949년 생이라고 해 나는 1951년 생이라 50세라고 했더니 내게 젊게 보인다는 말을 해 고맙다고 했다.
그는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에서 다음 단계로 이라크, 북한을 지목하고 있으니 한국인들은 관심을 많이 갖고 평화운동을 대대적으로 해야하며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지 않는다해도 막대한 자원을 낭비하고 힘들게 이룩한 성취를 파괴하는 군국주의 때문에 평화 운동을 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동아시아는 1988년에 미국 무기의 10%를 수입했는데 1997년엔 25%를 수입했으며 남한은 148억불로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대만의 무기구입비를 합친 것과 거의 같은 정도로 많이 수입하고 있다고 했다.
78% 미국인들이 이라크와의 전쟁에 찬성하고 있고 11월 25일 뉴욕 타임지는 "탈레반 다음은, 누구? 북한을 잊지마라"라는 특집 기사를 실어 한국인들이 미국이 전쟁을 확전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 떠보고 있는데 반대 의사를 표현하지 않으면 전쟁을 승인하는 것으로 여기게 될 것이라 했다. 그러면 아프카니스탄에서 처럼 한국인들이 한국인들과 싸우게 될 제한 전쟁을 미국이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미국에게는 제한 전쟁이겠지만 사정거리가 짧아 엠디, 티엠디가 개발된다해도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북한의 방사포(박격포)라는 무기의 인질로 잡힌 우리에게는 제한 전쟁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미국이 북한을 침공하도록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뉴욕타임즈도 몇부 복사해 가지고 온 그는 이슬람이 아니면서 전쟁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한국인들이 1987년 6월 항쟁 때 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월드컵 이전인 2002년 3월쯤에 거리로 나서서 대대적으로 미국의 테러에 대한 전쟁 확대를 반대하는 항의 데모를 하면 전 세계의 정부들과 활동가들이 주목을 할 것이고, 나아가 행동까지 할 수 있도록 고취시킬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인들은 평화에 사활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으며 미래에도 존립하려면 결연히 행동에 나서야한다는 말로 발표를 마쳤다. (이후 노동일보의 오충일 목사를 비롯한 엔지오 활동가들이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2월에 미국 부시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성명서를 발표하고 상당한 수준의 데모를 했다.)
나는 그에게 신좌파가 여성운동에서 본받아야할 정책이 무엇인가 물어보았는데 그는 번역된 자신의 저서 '정치의 전복'(이후, 2001)에 자세히 나온다고 해 나는 그 책을 사서 보겠다고 했다.
그는 풀브라트 장학금을 받아 10년간에 걸쳐 자료를 모으고 정리해 '신좌파의 상상력-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박사학위 논문)라는 책도 냈는데 저서에서 유럽 사회운동가들이 벌여온 풍부한 투쟁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모임이 끝나고 그는 내게 나도 6월 항쟁에 참여했는가 물어보아 (미미했지만) 그랬다고 대답하고 나는 그 후에 민주화운동가들을 후원했다고 말했다.
그와 그 모임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2차로 맥주집에 가게 되었을 때 나는 2차도 함께 가고 싶었지만 가정에 좀 더 충실하기를 바라는 남편을 생각하며 그냥 집에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그에게 남편과 선순환의 관계를 이루기 위해 집에 가야겠다고 말한 후 헤어졌다.
그 모임에 참석한 날 밤에 나는위에 말한 꿈을 꾸게 되었는데 다음 날 사서 보게 된 그의 책에 나오는 나체로 시위하는 사람들 사진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 사진에는 '무엇이든 해라'(Tuwat in 1981) 시위, 1981년 8월 5일. 점거운동은 정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국제적인 행동을 요청했고, 유럽전역에서 아우토노멘(자율적인 인간)이 시위에 결집했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위 글을 서울 신문사(당시는 대한매일) 홈페이지 여성칼럼에 실었다. 그리고 이것을 5개월만에 그 교수를 다시 만나 얘기하며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1600번 정도 조회수가 기록된 글을 보여주었더니 그는 그와 관계된 내가 그 신문사 사이트에 올렸던 다른 글, “팔레스타인에 자유를!”과 함께 프린트하였다. 그리고 그는 내가 앞으로 그 자신과 그의 책을 인용해 칼럼을 쓸 때 자기 허락을 받지 않고 써도 좋다고 했다. 선물로 준 'New Political Science'를 인용해도 허락받지 않아도 돼냐고 했더니 그것도 괜찮다고 했고 관계된 글을 나중에 자기에게 보내달라는 말을 했다.
카치아피카스 교수의 책 '정치의 정복'의 제 6장 자율성의 (반)정치에 보면 누드 행진이 정치를 예술로 바꾼 것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아래에 좀 길게 인용해본다.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는 예술과 정치의 관계를, 예술을 세속적인 것의 수준으로 축소하는 것으로, 예술을 정치의 수단으로 돌리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제 그 반대가 요구되는 것이 당연하다. 즉 정치를 예술로 바꾸고 일상생활을 미적으로 지배되는 영역으로 바꾸는 정치변혁 과정에 미적인 합리성을 투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미 청년 자율운동은 예술가들이 처음 도입한 원칙들을 구현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