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개에게 답함
우연히 자연 속에서 한적하게 살기를 즐기다가
스스로를 고라니와 닮았다고 한 것은
고라니가 사람만 가까이하면 잘 놀라기에 그리 말했을 뿐
내 결코 잘난 체해서가 아니었지요. 아니고말고요.
지금 그대의 편지를 받아 보니
스스로를 기마 꼬리에 붙은 파리에 비했는데 어쩌면 그리 작지요?
진실로 그대가 작게 되기를 구한다면
파리(《사기》 백이열전에서 사마천은
“안연이 비록 학문을 독실하게 했지만 기마의 꼬리에 붙었던 덕분에
그의 행실이 더욱 알려졌다.”고 하였다.
쉬파리가 기마의 꼬리에 붙어 천리를 가듯이,
안연도 공자의 제자가 된 덕분에 후세에 더욱 유명해졌다는 뜻이다)도
오히려 크고말고요. 개미도 있지 않소?
내 일찍이 약산(평안도 영변군에 있는 산이다.
‘영변에 약산’은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에도 나온다)에 올라 도읍을 굽어보니
사람들이 달리고 치닫고 하여 땅에 가득 구물대는 것이 마치 개밋둑에 진을 친 개미와 같아서,
한번만 훅 불면 뿔뿔이 흩어질 것만 같았지요.
그러나 반대로 그 도읍 사람들이 나를 바라본다면,
비탈을 더위잡고 바위를 오르고 다래 넝쿨을 움켜쥐고 나무를 타고서 산꼭대기에 올라가서는
망령되이 스스로 높고 큰 체하는 모습 아니겠소.
그렇소. 이 모습이야말로 ‘이’가 머리털을 타는 것과 뭐가 다르겠소?
그런데 지금 마침내
큰소리치며 스스로 비하기를 고라니라 했으니,
얼마나 어리석었던지 모르겠소.
마땅히 식자들에게 비웃음을 살만 했지요.
하지만 다시 그 형체의 크고 작고를 비교하고
보이는 바의 원근을 분별하기로 든다면
그대나 내나 모두 다 망령된 짓을 할 뿐이지요.
고라니는 정말 파리보다는 크다지만 코끼리가 있지 않소?
파리가 진정 고라니보다 작다 하지만,
만약에 저 개미에게 견주어 본다면
그것은 코끼리와 고라니 사이나 마찬가지이지요.
지금 저 코끼리가 서면 집채만 하고 걸음은 비바람같이 빠르며,
귀는 구름이 드리운 듯하고 눈은 초승달과 비슷하며,
발가락 사이에 진흙이 봉분같이 솟아올라,
개미가 그 속에 있으면서 비가 오는지를 살펴보고서 싸우려고 나오는데,
이놈이 두 눈을 부릅뜨고 보아도 코끼리를 못 보는 것은 어쩐 일입니까?
보이는 바가 너무 멀기 때문이지요.
또 코끼리가 한 눈을 찡긋하고 보아도 개미를 보지 못하니,
이는 다름 아니라 보이는 바가 너무 가까운 탓이지요.
만약 안목이 좀 큰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백 리의 바깥 멀리에서 바라보게 한다면,
어둑어둑 가물가물 아무 것도 보이는 바가 없을 것이니,
그 어찌 고라니와 파리, 개미와 코끼리를 구별할 수 있단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