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사람들의 가슴에 살아있는 아버지! 아버지! 우리 아버지!
고향의 어른이신 마리아 지신애 어머님이 소천(召天)하셨다.
출판기념회가 끝난 직후에 모임에 참석한 고향 후배로부터 소식을 들었을 때 가슴에 슬픔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분은 마을 어른으로서 유일하게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축복해주신 분이었다. 나는 그분에게서 따스한 사람 냄새를 맡았다.
온유하고 겸허하며 말이 없는 그 분을 좋아한 나머지 고향에 들리면 꼭 그 분을 만나뵈었다. 어느 새 그분의 나의 친구가 되었다.
나의 출판기념회에 참여하고자 애써 먼 길을 와주신 조교수님과 친구들을 대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지신애 어머님이
계신 곳으로 쏠려서 죄송하다는 인사를 남기고 장례식장으로 향하였다.
지신애 어머님은 나에게 아주 특별하였다. 연배가 다르지만 나는 그분을 사랑하였고 그분 또한 나를 사랑하였다. 그분은 우리 마을에서 유일하게 나에게 후원금을 주면서 나의 활동을 지지해주신 분이었다. 그분은 마을에서 나를 이해하는 유일한 분이었으며 내가 훌륭한 사람이며 귀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산다고 믿어준 분이었다. 그러면서도 편히 살 수 있는 사람이 어렵고 힘든 길을 간다며 불쌍하고 안쓰럽게 여겼던 분이다. 내가 고향 집에 왔다는 말을 들으면 그 분은 으례 깻잎 김치와 파김치를 손수 만들어서 가져오셨고 때로는 홍어무침을 만들어 오시기도 하였다. 나는 집에 가면 거의 밥을 먹지 않았지만 그분이 만든 반찬을 먹기 위해서 밥을 먹었다. 그 분의 반찬은 그 분의 사랑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분의 사랑을 먹기 위해 밥을 먹곤 하였다.
사랑했던 어르신의 영정을 뵈올 때 눈물이 났지만 마리아 지신애 어머니의 덕성과 순박한 삶, 희생과 헌신을 회고하며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천군천사의 영접과 하나님 품안에서 편히 쉬기를 빌며 눈물을 아꼈다.
상주인 두 아드님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두 따님과 한 자리에 앉아 밀린 인사를 나누었다. 나보다 나이가 15년 20년 아래인 그들이 나를 살뜰하게 맞아 주었다.
오랜만에 고향의 동생들에게 그들의 어머니 지신애 어머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신애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였고 나또한 어머님을 사랑했노라고. 그러자 놀랍게도 두 딸들이 이구동성으로 어머니가 정말로 언니를 사랑하고, 좋아하였다고 대답하였다. 눈물이 났다. “어머니는 언니가 왔다는 말을 들으면 곧 바로 깻잎 김치와 반찬을 만들어 언니네 집에 갔어요.”라고 말하는 딸들이 너무 고마웠다. 그들이 이어서 “엄마가 홍어 무침을 만들어서 우리에게는 주지 않고 언니네 집에만 갖다 주기도 했어요.”라는 말을 하였을 때 눈물이 왈칵 솟았다. 집에 들를 때 마다 마리아 지신애 어머니의 반찬을 먹는 기쁨이 컸는데 딸들이 볼 때도 자기 어머니의 정성이 보통을 넘어서게 보였던 것이다.
마리아 지신애 어머님의 이야기를 꽃 피우다가 우리 아버지가 화제로 대두되었다.
막내가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로 말하였다.
“제가 대학교에 합격을 하자 아저씨가 대학생은 용돈이 필요하다며 용돈을 주셨어요. 그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저는 그 때 아저씨에게 받은 용돈을 잊을 수가 없어요. 아저씨는 세상을 떠나셨지만 제 가슴 속에 살아 있어요.”
내 가슴 속에 살아계신 아버지가 이웃집 동생들의 가슴 속에도 살아 있다는 사실이 믿기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간직하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가 언니네 집에 가서 자전거가 타고 싶다고 말하면 아저씨는 하던 일을 멈추고 저희들을 자전거에 태워 주었어요. 한 번도 싫다고 하지 않고 언제나 자전거를 태워서 대부뚝도 달리고 논길도 달렸어요.”
“하루는 우리가 자전거 타는 것을 배우고 싶어서 자전거를 빌려 달라고 하였어요. 아주머니는 안된다고 말렸지만 아저씨는 두말 하지도 않고 자전거를 빌려 주었어요. 세상에 그런 분이 어디 있어요.”
“아저씨가 운전하는 경운기도 많이 탔어요. 경운기가 지나갈 때 손을 들면 경운기를 세우고 우리를 태워주셨지요.”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그 아이들을 애처롭게 여기고 사랑으로 돌보셨던 것이다. 그 때 나는 집을 떠나있었기에 자세한 사정을 잘 모르지만 아버지의 여린 성품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동네 아이들이 정신이 반쯤 나간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어르신을 눈으로 싼 돌멩이를 던지는 것을 목격하고 나와 오빠를 불러서 아픈 분을 괴롭히면 안 된다고 훈계를 하였고 매사에 그 어른에 대한 특별한 배려를 하였다.
“우리는 배고프면 언니네 집에 갔어요. 그러면 아저씨가 눈치를 채고 집에 있는 간식거리를 꺼내주고 또 따로 싸주셨어요. 그래서 우리는 자주 언니네 집에 놀러갔지요. 그러면 아저씨는 우리와 함께 놀면서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셨어요.”
“아저씨가 우리 집 논에 농약을 가끔 주었어요. 어렵고 힘든 농사일들도 해주셨어요. 그래서 엄마는 종종 다 잊어도 언니네 아버지 은혜는 잊지 말라 고 우리에게 말을 했어요.”
우리 마을에는 돌아가시면서 우리 아버지의 은혜, 우리 어머니의 은혜를 갚으라고 한 분들이 계셨다. 우리는 그 할아버지를 박 씨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얼굴이 검고 이마에 굵은 주름 잡힌 곰보 할아버지, 허리가 구부정하고 턱수염을 길렀던 할아버지였다. 그 할아버지는 우리 집에 와서 일하는 것을 즐거워하셨다. 우리 집은 일꾼들의 밥을 아침부터 먹게 해주었다. 그러나 가끔 아침밥을 먹으러 오는 것을 염치가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오지 않는 분들이 계셨다. 그러면 아버지가 나를 몇 번이고 보내서 모셔 오게 만들었다. 박 씨 할아버지는 그 대표적인 분이었다. 그래서일까? 박 씨 할아버지는 돌아가시면서 그의 딸과 사위에게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은혜를 잊지 말고 “희택이네 집에 진 빚을 갚으라”고 하셨다. 장원 아저씨가 돌아가실 때 그 아내에게도 같은 말을 하였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은혜를 기억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우리 아버지와 상의하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장원 아저씨 부인또한 세상을 뜨면서 자녀들에게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은혜를 기억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 아버지와 상의하라고 유언을 하였다. 그래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들의 울타리가 되어 주었고 아버지는 그 딸들이 결혼할 때 그들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입장을 하셨다.
둘째 딸이 힘을 주어 말하였다.
“아저씨는 뒷담화가 전혀 없어요. 사람들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법이 없어요. 마을 사람들은 서로 흉을 보며 말이 많은데 아저씨 입에서는 한 번도 남의 이야기가 나온 적이 없어요.”
아버지는 말을 결코 옮기는 분이 아니었다. 우리 자녀들이 아버지 직장에 가서 용돈을 몰래 타갔다는 사실을 어머니에게조차 단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으셨다. 내가 월사금을 분실하여 납입기간이 지나도록 돈을 내지 않아서 아버지가 학교에 호출되어 온 일이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를 보고 당황한 나에게 아버지는 한 마디도 꾸짖지 않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 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분실 경위를 말씀드리고 ‘어머니에게 절대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그 때 아버지의 대답이 ‘앞으로 그런 일이 있으면 혼자 고민하지 말고 바로 아버지에게 알려라’와 “니 엄마에게 알리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 는 말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약속을 끝까지 지키셨다.
아버지가 정년퇴직을 하고 농사에 전념을 하자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를 이장으로 뽑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을 만류하였다. 사람들이 당시 이장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생각은 달랐다. 그 분이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고 한 번 더하길 원하고 계시므로 그분이 더 일하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그 말을 어머니에게 전해 듣고 아버지에게 사람들이 반대하는 사람을 왜 이장으로 지지했냐고 물었다. 당시 아버지의 대답은 보통 사람들의 생각을 넘어서 있었다.
“작은 마을에서 별 것도 아닌 것으로 트집을 잡아서 사람을 일자리에서 쫓아내면 마을이 분열 된다. 그 분의 가족들은 상처를 받게 되고 또 그분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분개를 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며 공격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 작은 마을이 두 파로 나뉘어서 바람 잘 날이 없을 것이다. 이장이 별 것이냐? 그 분의 능력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고 부족한 것을 내가 보충해주면 된다. 이장 직을 싸우고 다투며, 상대방을 밀어내면서 까지 할 필요가 없다. 내가 그런 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필요가 없단다.”
아버지는 현자였다!
아버지는 사람들의 분위기에 편승하여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거나 마을을 분열시키는 이장 직을 끝내 고사하였고 그 분이 한 번 더 이장을 하도록 배려하였다. 때가 되어 그 분이 이장 직을 자연스레 사임하게 되자 아버지는 자연스럽고 평화롭게 이장이 되었고 이장 직을 잘 수행하려고 경운기까지 사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온 동네의 머슴처럼 일하였다. 농약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경운기를 끌고 시내에 가실 때는 동네 사람들의 심부름을 도맡으셨다. 아버지는 이장으로서 공복(公僕)의 직책을 좋아하고 즐기셨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사랑한 나머지 모두에게 최선을 다하였다. 무엇보다 어려운 가정을 위해서 손수 노동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두 딸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경제적으로 어려웠어요. 엄마는 돈 빌리러 언니네 집에 자주 가셨지요. 그럴 때 마다 아저씨가 다양한 방법으로 도움을 주셨지요. 그래서 우리들은 아저씨를 좋아했어요. 아저씨는 정말 우리를 사랑했어요. 우리가 가면 무엇이든지 주고 싶어 하였지요. 우리들은 아저씨의 사랑을 잊을 수가 없어요.”
마리아 지신애 어머님의 품성을 닮은 두 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버지가 고향의 후배들 가슴 속에 살아계심에 감동과 감사의 비명을 질렀다.
아! 아버지! 아버지! 사랑하는 아버지여!
나만이 아니라 이웃 사람들을 품고 모두의 행복을 빌어주신 아버지여!
아버지의 장례식 날, 하관 의식이 거의 끝나가고 있을 때, 어떤 분이 나에게로 와서 작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내가 지비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내가 임시직 인부로 일할 때 너무 가난해서 도시락을 안가지고 다녔는데 지비 아버지가 밥을 함께 먹자며 자주 불러 주었어요. 그리고 가끔 내 주머니에 돈을 찔러 주었어요. 가난은 끝날 때가 있으니 그때까지 잘 견디라고 하시면서요.”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 지 4년이 되었지만 내 가슴 속에 살아 계시듯이 고향 후배들의 가슴에 살아 있었다. 그들은 내가 아버지를 그리워하듯이 우리 아버지를 그리워하였다. 우리 아버지를 나처럼 잘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선물로 나누어 준 고향의 후배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위로와 평화가 함께 하길 빌었다. 또한 나를 장례식장으로 불러서 두 딸들과 이야기를 하도록 좋은 시간을 만들어주신 마리아 지신애 어머님께 깊은 감사를 들렸다.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며 돌아오는 길은 동화 속처럼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아! 아버지! 아버지! 사랑하는 아버지!
마리아 지신애 어머님이 세상을 떴습니다.
반갑게 영접해주세요.
그리고 함께 고향 이야기를 나누시며 행복하세요.
2023년 12월 6일 목요일 인시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