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종추원(愼終追遠)
부모의 장례를 엄숙히 하고 조상의 제사를 정성스레 올린다는 뜻으로, 장례와 제례를 강조하는 말이다.
愼 : 삼갈 신(心/10)
終 : 마칠 종(糸/5)
追 : 쫓을 추(辶/6)
遠 : 멀 원(辶/10)
출전 : 논어(論語) 학이편(學而篇) 9章
이 성어는 논어(論語) 학이(學而)편 9장에 나오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曾子曰; 慎終追遠, 民德歸厚矣。
증자((曾子)가 말했다. '부모의 상을 당해 장례를 엄숙하게 치르고, 먼데(조상)를 추모하여 제사를 드리면 백성의 덕성이 충실하고 도탑게 될 것이다.'
[사서집주] 주자(朱子)
慎終者, 喪盡其禮.
신종(愼終)이라는 것은 초상을 치를 때 예를 다하는 것이다.
追遠者, 祭盡其誠.
추원(追遠)이라는 것은 제사를 지낼 때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民德歸厚, 謂下民化之, 其德亦歸於厚.
민덕귀후(民德歸厚)는 아래 백성이 감화되어 그 덕성이 또한 도탑게 되는 것이다.
蓋終者, 人之所易忽也, 而能謹之; 遠者, 人之所易忘也, 而能追之; 厚之道也.
대개 終(종; 마침)이란 것은 사람들이 쉽게 소홀히 여기는 것이므로 필히 삼가 하여야 하며(예를 다해야 하고), 遠(원)이라는 것은 사람이 쉽게 잊는 것이므로 필히 추모하여 제사를 지내야 하면, 이것이 두터운 도(道)인 것이다.
故以此自為, 則己之德厚, 下民化之, 則其德亦歸於厚也.
이에 이로써(愼追) 스스로 (終遠을) 행하면 자기의 덕이 두터워지고, 아래 백성이 감화될 것이니 즉 그 덕이 또한 도탑게(厚) 되는 것이다.
신종추원(愼終追遠)
부모의 장례를 엄숙히 하고 먼 조상을 추모하다. 상사(喪事)를 당하여 예절을 정중히 갖추고 조상의 덕을 생각하며 제사에 정성을 다한다는 말이다.
일생을 부지런히 살아온 사람일수록 생을 마감할 때 이름에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또 엉뚱한 객사가 아닌 한 저 세상에 갈 때 누구나 조용히 눈을 감고 싶어 한다.
유교에서 말하는 오복(五福)이 있다. 서경(書經)에 나오는 대로 수(壽), 부(富), 강녕(康寧)은 장수, 부귀, 건강을 말한다. 거기에 덕을 좋아하고 행하는 유호덕(攸好德)과 함께 고종명(考終命)이 따른다.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눈을 감는 것이다. 생전에 지은 죄가 큰 사람들은 죽은 뒤에도 편히 쉴 곳이 없다.
마지막 자리를 편안하게 한다는 가르침에 따라 동양에서는 부모의 장례를 엄숙히 치르고(愼終), 역대의 선조를 추모하여 제사를 정성들여 지냈다(追遠). 논어(論語)에서 증자(曾子)가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름이 증삼(曾參)인 증자는 학문이 깊어 공자(孔子)의 고제(高弟)로 도를 계승했고, 그의 가르침은 맹자(孟子)에까지 전해져 동양 오성(五聖)으로 꼽히는 사람이다.
학이(學而)편에 나오는 부분을 보자. '초상을 당해서는 장례를 신중하게 치르고, 먼 조상의 제사에도 정성을 다하면 백성들이 모두 두터운 덕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愼終追遠, 民德歸厚矣).' 終(종)은 죽음, 遠(원)은 먼 선조를 말한다. 현재 자신이 지닌 것은 모두 부모를 비롯한 조상의 은덕이므로 이들에 정성을 다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자세라고 가르친다.
증자는 이십사효(二十四孝)의 한 사람에 들 만큼 효성도 지극해 효경(孝經)을 지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어 이렇게 강조해도 어울린다. 그는 어렸을 때 계모 밑에서 구박을 받으며 자랐지만 어머니를 섬기는 효성은 지극했다. 부모님 상에 올리는 콩잎을 설익혀 먹지 못하게 했다고 증자는 아내를 내쫓고 평생 혼자 살았다고 할 정도다. 황당하게 여겨져도 증려출처(烝黎出妻)란 고사로 남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의 마지막을 집에서 눈을 감기를 원하지만 10명 중 7명은 병원에서 숨진다고 한다. 건강보험 정책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한해 26만여 명의 사망자 중 71.5%가 의료기관에서 숨졌고 자택은 17.7%인 4만여 명에 불과했다. 말기 중증 환자까지 연명치료를 함으로써 환자 본인의 고통은 물론 가족들 부담도 크다. 보건복지부는 가정 호스피스 사업을 늘리고 있어 마지막 오복인 편안한 최후를 기대해도 될까.
신종추원(愼終追遠)
부모와 조상 제사를 정성껏 모셔라
우리말에 ‘음덕을 본다’는 표현이 있다. 음덕을 주시는 분은 조상이다. 음덕은 남이 보지 않는 가운데 행한 좋은 일이라 당사자 외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 덕을 알고 있는 이는 하늘뿐이다. 그래서 하늘은 말하지 않아도 말하며, 드러내지 않아도 드러난다고 한다. 나를 중심으로 가장 가까운 조상은 누구인가. 바로 나를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이다. 그러므로 음덕을 베풀어 주시는 분은 나로부터 먼 조상이 아닌 부모님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다. 이는 살아 있을 때가 좋지 죽고 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음을 뜻한다. 그러니 효도하려면 살아계실 때 잘해야지 죽고 난 다음 아무리 잘해도 소용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풍수지탄(風樹之嘆)이라고 했던가. 이 말은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우리 속담에 그 뜻이 남아있다.
나무는 부모님을 가지는 자식을 뜻하며, 나무에 부는 바람은 가정에 들이닥치는 시련을 뜻한다. 늘 부모님은 자식을 위해 애쓰신다. 부모님 사랑으로 장성한 자식이 부모님에게 효도하려 하여도 부모님은 연로하여 그만 돌아가시고 만다. 이를 한탄하는 고사가 바로 풍수지탄이다.
그러나 어쩌랴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 바로 부모님과 조상을 위해 제사 드리는 일이다. 논어에 “부모님 상례를 성심껏 뜻을 다하여 치르며 조상에 대한 제사를 정성껏 치른다면 덕이 있다하여 백성 모두가 돌아와 의지한다(愼終追遠, 民德歸厚矣 신종추원 민덕귀후의)”라고 하였다.
상례는 돌아가신 부모님과 조상에게 살아있는 자식과 후손이 할 수 있는 최소 행동이다. 최소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이로써 사람(백성) 마음까지 얻을 수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실천할만한 도리라고 할 수 있다.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 은혜를 갚고자 한다면 삼년상도 짧다고 하신 분이 공자이다. 지금은 삼일 장례로 끝을 내고 있으니, 돌아가신 부모님과 조상님에 대한 예로 제사를 거르지 말고 게을리 말아야 함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하겠다.
다함이 없는 효, 신종추원(愼終追遠)
박물관에서 어렵잖게 볼 수 있는 유물 가운데 하나가 명기(明器)이다. 명기는 자기로 작게 만든 그릇이나 항아리 형태가 일반적인데, 자기나 나무로 만든 작은 인형인 용(俑)을 함께 넣기도 한다. 이러한 부장품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내세에서도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무덤에 넣는 것이다. 이처럼 내세의 평안을 기원하는 행위는 곧 생전에 못다한 효를 돌아가신 후에라도 다하려는 지극한 효의 발현이다.
논어에 신종추원(愼終追遠)이란 말이 있다. 부모의 장례를 극진하게 모시고, 나아가 대가 먼 조상에게도 추모의 예를 다해야 한다는 뜻이다. 효는 부모가 살아계실 때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후에도, 즉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유교의 가르침이다. 풍속의 변화로 예가 간소화되는 추세지만, 그래도 장례에 비용을 아끼지 않고, 명절에는 먼 조상들께도 정성껏 제사를 올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현대인, 필자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효에 대한 강박관념을 갖고 살아간다. 즉 부모에 대해서 일종의 부채의식, 죄책감 같은 것이 있다. 더 나은 자식이 되지 못해서, 사소하게는 용돈을 많이 못 드리거나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등으로. 불효를 대가로 얻은 어떤 성취도 그 죄책감을 씻어줄 수 없다는 것, 이것이 불효를 원죄처럼 안고 사는 현대인의 숙명이 아닐까 싶다.
유교에서는 ‘효’가 인간의 근본이다. 따라서 내면화된 유교적 가치관인 ‘효’의 발현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효에 관한 현대인의 정서적 불안은 그 발현이 현실 장애로 인한 부자연스러움 때문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자식이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은 같지 않을까? 다할 수 없어 마음 한 구석이 무거운 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무거운 마음이 있는 우리는 모두 보다 큰 효를 실천할 준비가 된 ‘효자’들이다.
문제는 德이다
중진국 트랩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는 지금 이 한계를 돌파하여 선진국이라고 불릴 수 있는 단계로 상승하려는 의욕이 가장 필요하다. 훈고의 기풍으로 가득 찬 이 나라를 창의의 기풍이 넘치도록 바꿔야 한다. ‘따라 하기’를 벗어나 독립적인 과감성을 발휘해야 한다.
우리는 지식을 저장하여 되새김질에 몰두하기보다는 지식을 생산하고 지혜를 발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이 아니라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생존을 좌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창의적 활동, 독립적인 과감성, 지식의 생산 등은 표피적인 답습이나 분석적인 비판으로 발휘되는 것이 아니다. 좀 더 근본적인 동력에서 나온다. 이 근본적인 동력이 발휘되어 지성적으로 일정한 높이와 흐름을 이루면 우리는 그것을 문화라고도 하고 철학이라고도 하고 예술이라고도 한다.
사마천은 궁극의 지배력은 재주가 아니라 덕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재주가 덕보다 승하게 작용되면(才勝德) 하급이고 덕이 재주를 좌우하거나 재주가 덕이 발휘된 결과로 나타나면(德勝才) 상급이다.
문화나 철학이나 예술이 자신들이 응당 자리해야 할 높이에 있지 못하고 피상적인 잔재주에 가려지면 재승덕이 되고 그것들이 본질적인 위치를 차지한 채 주동성을 획득하여 운전되면 바로 덕승재가 된다. 우리에게 한 단계 상승이라는 말은 ‘재승덕’이 아니라 ‘덕승재’의 길을 간다는 말이다. 이제 우리가 갖추어야 할 근본적인 동력은 바로 ‘덕’이 아닐 수 없다.
덕은 인간이 인간 수준에서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을 수 있는 근거이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근본 동력이자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으로 만드는 내면의 힘이다. 인격의 원천이다. 재주는 외부를 향하지만 덕은 자기 내면을 향하는 집요한 응시로 회복된다. 창의성이나 상상력 등은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발휘되는 것이라고 할 때, 그것들이 발휘되는 인격적인 토대가 바로 덕이다.
이 ‘덕’이 작동되는 사람에게는 그 깊이로부터 우러나는 향기가 발산되고 그 향기가 감화력을 갖게 해준다. 그래서 공자도 “덕이 작동되는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반드시 그 향기에 감화되어 따르는 사람들이 있게 된다(德不孤 必有隣)”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덕’이 있는 사람은 매력이 있고 그 매력이 강한 카리스마를 만들어 지배력을 갖게 한다.
어떻게 하면 덕이 준비될까? 증자는 ‘신종추원(愼終追遠)’하면 덕이 아주 두터워진다고 말한다. 부모 장례식이나 조상에 대한 제사를 정성으로 치르면 ‘덕’이 두터워진다는 뜻이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동력을 두텁게 하는 일을 말할라치면 뭔가 추상적이고 위대한 명제가 나올 것 같은데 전혀 아니다. 아주 구체적인 일상의 일을 잘 관리하는 힘이 있으면 그것이 바로 덕의 표현이 된다. 구체적 세계와 그에 대한 접촉 수준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내는 것이다.
공자는 덕이 없다는 사실도 무슨 거창한 것이 아니라 주워들은 소문을 여기저기 옮기고 다니는 것과 같이 일상적인 구체적 행위로 증명된다고 본다. ‘덕’을 발휘하는 사람은 넓고 근본적이지만 재주를 발휘하는 사람은 대개 자신만의 이념이나 지적 체계에 갇혀 좁고 고집스럽다. 공자는 그런 사람을 덕을 망치는 향원(鄕原)이라고 했다.
좁다란 집단 내에서 형성된 단편적인 명성과 시각에 갇혀 자기를 끌고 가며 원래의 마음을 갖고 살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사람에게 덕은 항상 주변으로 밀려나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뿐 아니라, 이런 사람들에게 휘둘려서도 안 된다.
인간의 근본적인 동력으로서의 덕을 가진 사람은 결국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사회적으로 등장하면 비로소 ‘시민’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사회적 책임성을 다른 데에서 따지지 않고 먼저 자기 자신에게서부터 구하는 사람이다.
남을 탓하거나 비판하기 전에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는 민감성을 유지한다. 거대 이념을 향해 쏜살같이 내달리기보다는 우선 일상을 자기 통제권 안에서 지배한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경망스럽지 않고 진중하다.
덕을 가진 시민은 지적 민감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믿고 있는 이념을 설파하지 않고 구체적 세계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위대한 일이고, 창의적 기풍의 출발점이 된다.
▶️ 愼(삼갈 신, 땅 이름 진)은 형성문자로 慎(신)의 본자(本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심방변(忄=心; 마음, 심장)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세밀하다는 뜻을 가진 眞(진)으로 이루어졌다. 마음을 세밀히 쓴다는 뜻이다. 그래서 愼(신, 진)은 ①삼가다(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다) ②근신(謹愼)하다 ③두려워하다 ④근심하다(속을 태우거나 우울해하다) ⑤따르다 ⑥삼감(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함) ⑦성(姓)의 하나 ⑧진실로, 참으로 ⑨부디, 제발, 그리고 ⓐ땅의 이름(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삼갈 각(恪), 원할 원(愿), 삼갈 비(毖), 삼갈 근(謹), 삼갈 욱(頊)이다. 용례로는 매우 조심스러움을 신중(愼重),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삼감을 신독(愼獨), 신중하게 사려함을 신려(愼慮), 신중히 생각함을 신사(愼思), 상사를 당하여 예절을 중시함을 신종(愼終), 삼가고 조심함을 신계(愼戒), 신중하게 가려 뽑음을 신간(愼簡), 말을 삼감을 신구(愼口), 신중하고 면밀함을 신밀(愼密), 여색을 삼감을 신색(愼色), 신중히 다룸을 신석(愼惜), 조심하여 고름 또는 선택을 신중히 함을 신선(愼選), 조심하여 지킴을 신수(愼守), 말을 삼감을 신언(愼言), 기회를 소홀히 하지 않음을 신기(愼機), 삼가서 침묵을 지킴을 묵신(愼默), 근신하여 경거망동을 삼가는 날이란 뜻으로 설날을 일컫는 말을 신일(愼日), 언행을 삼가고 조심함으로 과오나 잘못에 대하여 반성하고 들어앉아 행동을 삼감을 근신(謹愼), 힘써 삼감을 근신(勤愼), 삼가지 아니함이나 신중하게 여기지 아니함을 불신(不愼), 겸손하게 삼감을 겸신(謙愼), 경계하여 삼감을 계신(戒愼), 공경하고 삼감을 경신(敬愼), 혼자서 스스로 근신하는 일을 독신(獨愼), 온화하고 신중함을 온신(溫愼), 두려워하고 삼감을 공신(恐愼), 성품이 질박하고 신중함을 질신(質愼), 어렵게 여기고 조심함을 난신(難愼), 몹시 두려워하고 언행을 삼감을 외신(畏愼), 양친의 상사에는 슬픔을 다하고 제사에는 공경을 다한다는 말을 신종추원(愼終追遠), 일이 마지막에도 처음과 같이 신중을 기한다는 말을 신종여시(愼終如始), 처음 뿐만 아니라 끝맺음도 좋아야 한다는 말을 신종의령(愼終宜令), 마음을 조심스럽게 가지어 언행을 삼감을 이르는 말을 소심근신(小心謹愼) 등에 쓰인다.
▶️ 終(마칠 종)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실 사(糸; 실타래)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冬(동, 종)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冬(동, 종)과 바느질을 다 하고 나서 실(실사(糸; 실타래)部)을 매듭짓는다는 뜻이 합(合)하여 마치다를 뜻한다. 冬(동; 겨울)은 네 계절(季節)의 끝이므로 실 사(糸; 실타래)部를 덧붙여 감긴 실의 끝이 되고 널리 끝의 뜻으로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終자는 ‘끝나다’나 ‘마치다’, ‘죽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終자는 糸(가는 실 사)자와 冬(겨울 동)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冬자는 새끼줄 양 끝에 매듭을 묶어 줄이 풀리지 않게 일을 마무리했다는 의미에서 ‘끝내다’나 ‘마치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후에 冬자가 ‘겨울’이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면서 지금은 여기에 糸자를 더한 終자가 ‘끝내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終(종)은 끝, 마지막이라는 뜻으로, ①마치다 ②끝내다 ③사람이 죽다 ④다하다 ⑤이루어지다, 완성되다 ⑥채우다, 상당하다 ⑦끝, 마지막 ⑧사방 백 리의 땅 ⑨열두 해 ⑩윤(閏)달 ⑪항상(恒常), 늘 ⑫마침내, 결국(結局) ⑬비록,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마칠 료(了), 마칠 졸(卒), 마칠 필(畢), 마칠 준(竣), 마칠 파(罷), 그칠 지(止), 끝 말(末), 끝 단(端),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처음 초(初), 비로소 시(始)이다. 용례로는 일을 마침을 종료(終了), 끝이나 끝판을 종말(終末), 끝을 냄을 종결(終結), 그 날의 업무를 마침을 종업(終業), 맡아보던 일을 끝냄을 종무(終務), 죽을 때까지를 종신(終身), 필경에 또는 마침내를 종내(終乃), 마지막과 처음을 종시(終始), 전쟁이 끝남을 종전(終戰), 한 때 매우 성하던 것이 주저앉아서 그침을 종식(終熄), 간행을 끝냄 또는 끝낸 그것을 종간(終刊), 마지막에 다다른 판국을 종국(終局),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사이를 종일(終日), 최종으로 도착함을 종착(終着), 끝을 냄이나 끝이 남을 종지(終止), 죽거나 없어져서 존재가 끝남을 종언(終焉), 결정이 내려짐을 종결(終決), 맨 끝이 되는 곳을 종점(終點), 사람의 목숨이 끊어지려 할 때를 임종(臨終), 단계나 차례에 있어서 맨 나중을 최종(最終), 오복의 하나로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것을 고종(考終), 한 해의 마지막 때를 연종(年終), 끝을 완전히 맺음을 유종(有終), 나중으로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를 내종(乃終), 사람의 목숨이 끊어져 죽는 때 또는 일의 마지막을 망종(亡終), 끝이 없음을 무종(無終), 좋지 않은 최후를 악종(惡終), 유종의 미를 거둠을 선종(善終), 처음과 끝 또는 처음부터 끝까지를 시종(始終),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음을 종시일관(終始一貫), 끝내 소식이 없음을 종무소식(終無消息), 이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되는 사모의 정을 종천지모(終天之慕), 그 사람을 한평생 인간다운 대접을 해 주지 않는 일을 종신불치(終身不齒), 죽을 때까지 고칠 수 없는 질병을 종신지질(終身之疾), 빚돈을 갚지 않음을 종불출급(終不出給), 끝내 방문하지 않음을 종불투족(終不投足), 어떤 일을 한번 끝내어 마쳤다가 다시 시작함을 종이부시(終而復始), 끝내 회개하지 않음을 종불회개(終不悔改), 식사를 하는 짧은 시간이라는 뜻으로 얼마 되지 않는 동안을 종식지간(終食之間), 하루낮 동안 들이는 수고를 종일지역(終日之役), 영원히 계속되는 슬픔을 종천지통(終天之痛), 처음부터 끝까지 이르는 동안 또는 그 사실을 자초지종(自初至終),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관철함을 시종일관(始終一貫), 처음이나 나중이 한결같아서 변함 없음을 시종여일(始終如一), 처음에는 부지런히 하나 나중에는 게으름을 이르는 말을 시근종태(始勤終怠), 끝까지 굳게 참고 견딤을 견인지종(堅忍至終), 부모가 돌아가시는 날까지 봉양하기를 원하다는 뜻으로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을 이르는 말을 원걸종양(願乞終養), 우정을 끝까지 잘 지켜 나가지 못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흉종극말(凶終隙末) 등에 쓰인다.
▶️ 追(쫓을 추/따를 추, 갈 퇴, 따를 수)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책받침(辶=辵; 쉬엄쉬엄 가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𠂤(퇴, 추)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부수를 제외한 글자 𠂤(퇴, 추)는 군대가 모인 언덕으로 追(추)는 적의 뒤를 쫓아 나아가다의 뜻을 나타낸다. ❷회의문자로 追자는 '쫓다'나 '거슬러 올라가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追자는 辶(쉬엄쉬엄 갈 착)자와 阜(언덕 부)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阜자는 흙이 쌓인 모습을 그린 것으로 '언덕'이라는 뜻이 있다. 그런데 追자의 갑골문을 보면 辶자가 아닌 발을 뜻하는 止(발 지)자와 阜자만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언덕을 향해 올라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산등성이 너머로 도망간 적이나 산짐승을 추격한다는 뜻이었다. 금문에서는 여기에 '길'을 뜻하는 彳자가 더해지면서 길을 따라 추격한다는 의미를 강조하게 되었다. 그래서 追(추, 퇴, 수)는 ①쫓다 ②이루다 ③잇닿다(서로 이어져 맞닿다) ④거슬러 올라가다 ⑤구하다 ⑥채우다 ⑦부르다 ⑧따르다, 사모하다 ⑨뒤쫓는 사람 ⑩나라의 이름 ⑪성(姓)의 하나 그리고 ⓐ갈다(표면을 매끄럽게 하기 위하여 다른 물건에 대고 문지르다), 문지르다(퇴) ⓑ종을 거는 끈(퇴) ⓒ언덕(퇴) ⓓ따르다(수)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쫓을 축(逐)이다. 용례로는 나중에 더하여 보탬을 추가(追加), 뒤를 밟아 쫓음을 추적(追跡), 어디까지나 뒤쫓아 구함을 추구(追求), 죽은 사람을 사모함을 추모(追慕),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함을 추억(追憶), 죽은 사람을 생각하여 슬퍼함을 추도(追悼), 어디까지나 캐어 따짐을 추궁(追窮), 뒤에서 따라가 앞의 것을 앞지름을 추월(追越), 일이 지나간 뒤를 추후(追後), 뒤쫓아 가며 침을 추격(追擊), 쫓아 냄을 추방(追放), 뒤에 추가하여 말한다는 추신(追伸), 친구 따라 강남 감 또는 자기의 주견이 없이 남의 말에 아부하며 동조함을 일컫는 말을 추우강남(追友江南), 조상의 덕을 추모하여 제사를 지내고 자기의 태어난 근본을 잊지 않고 은혜를 갚음을 일컫는 말을 추원보본(追遠報本), 지난 일을 뉘우쳐도 소용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추회막급(追悔莫及), 남의 여자를 쫓다 제 아내를 잃다라는 뜻으로 지나친 욕심을 부리다 자신이 지닌 소중한 것을 잃게 되는 경우를 비유하는 말을 추녀실처(追女失妻), 피할 곳 없는 도적을 쫓지 말라는 뜻으로 궁지에 몰린 적을 모질게 다루면 해를 입기 쉬우니 지나치게 다그치지 말라는 말을 궁구막추(窮寇莫追), 피할 곳 없는 쥐를 쫓지 말라는 뜻으로 궁지에 몰린 적을 모질게 다루면 해를 입기 쉬우니 지나치게 다그치지 말라는 말을 궁서막추(窮鼠莫追), 지나간 일은 어찌할 도리가 없지만 장차 다가올 일은 조심하여 이전과 같은 과실을 범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내자가추(來者可追) 등에 쓰인다.
▶️ 遠(멀 원)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책받침(辶=辵; 쉬엄쉬엄 가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袁(원)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袁(원)은 뜻을 나타내는 옷 의(衣)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止(지; 발)를 바탕으로 哀(애, 원)이 합(合)하여 옷이 치렁치렁한 모양이나 옷이 길다는 뜻과, 책받침(辶)部는 움직이는 일에서 나아가는 일의 길게 하다, 길다, 멀어지다, 멀다 등의 뜻이 있다. ❷회의문자로 遠자는 ‘멀다’나 ‘심오하다’, ‘오래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遠자는 辶(쉬엄쉬엄 갈 착)자와 袁(옷 길 원)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袁자는 옷깃이 넉넉한 옷을 표현한 것으로 ‘옷이 크다’라는 뜻이 있다. 遠자는 이렇게 옷깃이 넓다는 뜻을 가진 袁자를 응용한 글자로 옷깃이 늘어져 있듯이 길이 매우 ‘멀다’라는 뜻을 표현했다. 그래서 遠자는 ‘(길이)멀다’나 ‘멀어지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지만 ‘(세월이)오래되다’나 ‘심오하다’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그래서 遠(원)은 ①멀다 ②심오(深奧)하다, 깊다 ③많다 ④세월이 오래되다 ⑤멀리하다, 멀어지다 ⑥소원(疏遠)하다 ⑦내쫓다, 추방하다 ⑧싫어하다 ⑨어긋나다 ⑩먼 데 ⑪선조(先祖)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오랠 구(久), 미륵 미(彌), 멀 유(悠), 길 영(永), 멀 하(遐), 멀 요(遙), 멀 료/요(遼), 길 장(長),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가까울 근(近)이다. 용례로는 멀고 가까움을 원근(遠近), 시간이나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원격(遠隔), 먼 곳으로 싸우러 가는 것을 원정(遠征), 먼 데 것은 잘 보이고 가까운 데 것은 잘 보이지 않는 시력을 원시(遠視),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넓은 바다를 원양(遠洋), 멀리 가서 놂을 원유(遠遊), 중심으로 부터 멀어져 감을 원심(遠心), 아득한 먼 시대를 원대(遠代), 멀리 바라다 봄을 원망(遠望), 먼 나라와 친하고 가까운 나라를 쳐서 점차로 영토를 넓힘을 원교근공(遠交近攻), 먼 곳에 있어서 올 수가 없음을 원막치지(遠莫致之), 화를 멀리하고 복을 불러 들임을 원화소복(遠禍召福), 먼 데 있는 친척은 가까운 이웃만 못함을 원족근린(遠族近隣), 먼 데 있는 물은 가까운 데의 불을 끄는 데는 쓸모가 없다는 원수근화(遠水近火)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