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시인도 꽃시인도
이방주
별시인 얼굴에는 아직도 열여섯 윤기가 남았다. 나이는 이순이어도 정서는 열여섯 소녀이다. 생각은 유리처럼 투명하다. 때로 오해받을 만큼 영혼이 맑다. 누가 뭐라 말을 해도 맑게 웃으며 받아들이고, 솔직하게 대답하는 이분이야말로 귀가 순해지는 나이라는 이순(耳順) 값을 제대로 한다. 이름은 그냥 이르는 말일까, 소망하는 주문(呪文)일까. 주문이든 부름이든 ‘별’은 그에게 꼭 맞는 이름이다.
별시인은 어찌 별이 되었을까. 윤동주를 좋아한다고 한다. 맞아, 들여다보면 동주의 눈빛만큼 맑고 깊은 지성이 담겼다. 긍정 속에 동주만큼 쓸쓸함이 담겼다. 시선을 결코 높은 곳에 두지 않는다. 높은 곳만 바라보는 눈을 욕심의 창이라 한다면, 낮은 곳만 내려다보는 별시인의 눈은 사랑의 창이다. 그의 시는 유위(有爲)를 향하지 않고 무위(無爲)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언어라기보다 말씀이다. 그의 사랑은 애쓰지 않아도 물처럼 아래로 향한다. 별시인의 사랑은 깊고 넓고 진솔하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별시인을 바라보고 있으면 별을 노래하여 그가 좋아한다는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 떠오른다. 별시인이 가진 추억도, 사랑도, 쓸쓸함도 동주랑 공유한다. 그의 동경은 과거를 향하고 아래를 향한다. 그는 그런 시를 쓴다. 그는 자신의 시가 읽히거나 말거나 감동을 주거나 말거나 바라는 것이 없다. 윤동주가 그리워하던 어머니처럼 그냥 그의 맑은 영혼을 언어로 표출한 말씀이다. 그의 시는 하느님의 언어처럼 신성하지 않아도 하느님이 먼저 알아듣고 감동할 것이라 믿는다. 진정한 사랑이 담긴 언어는 어려울 까닭도 없고 기교도 수사도 동원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별시인에게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보면 깨닫게 될 일이다.
별시인이 어느 작은 도서관에서 시와 수필을 강의한다고 들었다. 재능기부이기에 네 차례밖에 계획되지 않아서 간신히 시간을 맞추어 참석했다. 그분은 내가 하는 변변찮은 행사에 꼬박꼬박 참석해주었다. 그때마다 쉽고도 부드러운 말로 ‘선배님, 훌륭하셔요. 나는 선배님이 우리 선배라는 게 자랑스러워요.’라고 응원해 주었다. 빈말이겠지 하면서도 참석하는 것이 그분에 대한 답례라 생각했다. 이런 치졸한 생각은 벗어날 수 없는 교만이라는 걸 깨닫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작은 도서관은 이름처럼 작았다. 그러나 깔끔하고 아담했다. 강의할 수 있는 방은 열 명 정도 간신히 앉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 자리를 다 채웠다. 다른 분이 차를 마시는 동안 탁자에 놓인 화분을 정리했다. 시든 꽃은 잘라내고 벙글기 직전의 봉오리를 드러내었다. 별시인은 ‘선배님 눈에는 꽃이 먼저 보이죠.’ 칭찬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분은 좋은 말 만드는 천재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듣기는 좋았다. 나는 대개 쉽게 나오는 좋은 말은 영혼이 없을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 또한 명매기 콧구멍 같은 나의 편견이었다. 쉽게 나오는 말에 오히려 진정성 있다는 것을 그 순간 바로 깨달았다.
별시인은 자신을 소개하는 것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윤동주 시인을 좋아해서 별이란 이름을 쓰기로 했다고 했다. 그렇구나. 별이란 필명이 유아적이라고 생각했던 잘못된 인식이 잠을 확 깨고 일어났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러나 소개 말씀들이 시나 수필의 이론처럼 순박하고 따듯했다. 이런 교수법도 있구나 하고 수긍했다. 나는 껍질을 깨고 교만과 편견의 영역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별시인과 한모임의 동인 한 분이 별시인과 관계를 중심으로 자기를 소개했다. 얼마 전 남편이 오랜 병석에서 이겨내지 못하고 이승의 강을 건넜다. 장례 전날 별시인이 조문을 왔었단다. 한참을 안아주고 위로해주었다. 포근했다. 별시인은 자리를 뜨면서 다시 자신을 안고 귓속말로 ‘오늘밤은 사랑하는 사람과 마지막 밤이니 좋은 시간 보내세요.’ 하더란다. 순간, 나는 숨이 턱 멎는 줄 알았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이런 말을 고이 들을 수 있었을까. 이런 말은 만들어 하는 말이라 폄훼할 수 없다. 영혼이 맑지 않으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말씀이다. 시선을 낮은 곳에 두지 않으면 고이 들을 수도 없다. 인간의 말이 아니라 신의 말씀이다. 그는 그냥 시인이 아니라 신의 언어를 대신 들려주는 사제와 같은 시인이다. 위로하는 분이 별시인이라면 위로받는 분은 꽃시인이다. 끝까지 미소를 머금고 이야기하는 그분은 꽃처럼 아름다웠다. 꽃시인이라 부르고 싶었다.
나는 너무 부끄러워서 꽃시인의 자기소개가 끝나고 내 차례가 돌아오는 것도 몰랐다. 그냥 뭐라고 주절거렸는지 기억조차 없다. 이렇게 참담할 수가 없다. 별시인이 지금까지 내게 했던 말들은 모두 신을 대신해서 들려준 경전 같은 말씀이었다. 나는 그것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나의 수사법이, 나의 유의(有爲)가, 나의 오만이 부끄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별시인과 헤어져 돌아오면서 내내 나를 돌아보았다. 자동차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몰랐다. 늘 아픈 사람과 함께 하고 비 맞는 사람과 함께 비를 맞는 별시인은 언어로 시를 쓰는 시인이 아니었다. 맑은 영혼을 지니고 마음으로 시를 전하는 시인이었다. 낮은 시선으로 사람을 깨우치는 시인이었다.
별시인으로부터 참석해준데 대한 감사 전화를 받았다. 그때 꽃시인이 스마트 폰으로 자작시 한 편을 보냈다. 사랑무리는 ‘어두울수록 빛이 더 환히 비치고’ ‘쓴맛일수록 더 단단하며/ 그리울수록 사랑이 사무치도록 애달프다’라고 했다. 쓰고 애달픈 삶을 사랑무리에 담은 시가 너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사랑무리는 쌉쌀하지만 달콤한 고들빼기의 다른 이름이다. ‘왕고들빼기꽃’이라는 우작(愚作) 한 편을 답으로 보냈다.
별시인도 꽃시인도 함께 지닌 시처럼 맑고 깊은 관계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며 나도 시 한 줄을 외어 본다.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