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17:17-24]
“반전의 하나님”
<인사이드 아웃>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 ‘라일리’의 마음에
5가지 감정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기쁨, 불안, 까칠, 분노, 슬픔 이렇게 말입니다.
여기서 ‘기쁨이’는
‘슬픔이’가 왜 필요한지 몰랐어요.
그래서 늘 ‘슬픔’을 가둬두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이 커가자
기쁨이보단 슬픔이의 존재가
점점 부각되었어요.
나중에 기쁨이가 깨닫습니다.
기쁨이 있기 위해선
슬픔이란 감정이 먼저 있구나.
누구나 삶이 기쁨과 환희로 가득차길 원합니다.
그러나 슬픔이 없다면
기쁨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죽을 병에서 살아난 사람이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듯이 말입니다.
평안하거나 인생이 잘 풀릴 때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의심이 들지 않죠.
그러나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만나면
하나님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면
나한테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 거지?’
성경에는 이런 인물들이 정말 많습니다.
요셉이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갈 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나오미가 모압 땅에서 남편과 아들들을 잃고
과부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이들처럼 절망의 현실을 경험한 인물이
본문에 등장합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함께 본문 속으로 들어갑시다.
지난달에 엘리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당시 아합 왕은 악한 왕으로
이스라엘에 수많은 우상 신전을 세웠습니다.
이때가 바로 이스라엘의 암흑기였죠.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그가 비가 오지 않을 것을 예언했습니다.
농경 사회에서 비는
생명의 젖줄기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비가 오지 않는다는 것은
사형 선고와 같았습니다.
이로 인해 아합 왕이 그를 죽이려 하자
사르밧이란 동네까지 숨어 들어가게 됩니다.
사르밧은 이스라엘에서도 북쪽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시돈 땅입니다.
시돈 땅은 이세벨의 고향이니다.
이곳에서 숨어지내는데
거기서 만난 인물이 바로 과부입니다.
지금도 남편없이 아이를 키우는 건
너무 힘듭니다.
당시엔 더 했습니다.
당시 남편이 없는 여인은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어요.
이런 현실 속에서 죽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엘리야가 뭐라고 합니까?
“나를 위해 빵 좀 가지고 와라.”
“먹고 죽으려고 했는데요?”
“어. 그거 가지고 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거야.”
이 사르밧 과부가 믿음으로 순종했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가뭄 기간동안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이렇게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던 것이
이전 상황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르밧 과부와 같았다면
어떨 것 같으십니까?
아침에 눈을 떴는데 통장 잔고가
어제와 똑같아요.
옷을 사고, 밥도 먹었는데 그대로 인 겁니다.
상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집니다.
오늘 본문은 ‘이 일 후에’라고 시작합니다.
은혜의 사건 후에 비극적인 현실이
찾아옵니다.
무슨 병인지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아들이 죽고 맙니다.
아이가 아프기만 해도
부모는 자기가 아픈 것처럼 느낍니다.
아이만 보고 살던 여인에게
아이의 죽음은 감히 측정 불가한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18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열왕기상 17:18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여인의 이 고백은 너무 중요합니다.
앞서 말씀 드린 시돈 땅 사르밧은
우상 숭배의 본거지였습니다.
이 여인도 여기서 우상을 섬기던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차별 없는 은혜 덕분에
그녀도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아주 작은 믿음의 씨앗이
심겨진 겁니다.
그런데 아들이 죽자 거대한 문제가
심겨진 씨앗을 짓눌러 버렸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주일에 나와 은혜로운 시간을 보내고
세상에 다시 나갔을 때
세상의 거친 풍파가 휘몰아 치면
어떻게 됩니까?
언제 내가 믿음이 있었는지 잊을만큼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생각하고
선택합니다.
우리의 모습과 이 여인의 모습이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본문에 나오는
반전의 역사가 우리 것이 되길 축복합니다.
계속 말씀을 살펴봅시다.
사르밧 과부에게 아들은
그녀 자신이었고, 그녀의 전부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꿈이나 직장, 행복한 가정,
바라던 대학, 집 등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살면서 경험하는 게 있습니다.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게 더 많은 거죠.
‘이 대학만 가면 내 인생 펼 것 같은데.’
막상 대학에 가보니까 다른 겁니다.
과제, 인간 관계, 학비 등 생각보다
너무 무거운 짐들이 어깨를 짓누르죠.
행복한 가정만 꾸리면 될 거란 기대감으로
멋진 배우자를 만납니다.
그런데 막상 결혼 생활 10년 정도 해보니
우리의 기대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죠.
‘이 사람을 내가 왜 만났을까?’란 질문이
내면에서부터 올라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런 고백합니다.
내 인생 꼬였구나!
예수 잘 믿고 열심히 신앙 생활하면
인생이 풀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현실을 마주합니다.
여전히 돈 걱정, 자식 걱정을 합니다.
때론 배우자로 인해 마음이 상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도
우리와 같은 맥락에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고백 중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는
그녀의 신앙고백과 같습니다.
이전에 그녀가 섬기던 바알과 아세라는
어떤 신이었나요?
물질 주는 신, 풍요롭게 하는 신이었습니다.
내가 바라는 꿈을 이뤄주는 신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란 분은 아닙니다.
생명의 주관이십니다.
그녀는 아직 여기까지 가지 않았어요.
그러니 그녀에게 찾아온 고난은
자기의 잘못은 생각나게 하는 신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일을 하다가 꼬일 때
자기 잘못으로 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9장 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향해
한 말씀입니다.
모든 일이 죄 때문이라면 하나님을 믿을 때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 찾아온 문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입니다.
우리가 이걸 봐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걸 보지 못하니까 문제를 만나서
두렵고 떨리고,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는 것이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이전엔 노예처럼 살았던 그들인데,
출애굽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사는 인생을 사는데 먹을 게 없으니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려고 여기 보냈구나.
옛날이 더 좋았어.”
하나님을 향해 원망과 불평을 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 믿으면 잘 될 줄 알았고,
복 받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닐 때 어떻게 하세요?
원망과 불평 하지 않으세요?
왜 나한테만 이러냐며 따지진 않습니까?
왜 이런 사람 만나게 하셨냐며 말입니다.
과부의 신관, 하나님을 향한 관점이 그랬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엘리야는 불행을 가져다 준 장본인이었어요.
엘리야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마지막 식사를 하고 죽었을 거잖아요.
굳이 살려 놓고 먹을 거 주면서
자기 아들을 데려가시니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이런 상황 속에서 엘리야는
어떻게 했을까요?
믿음의 사람 엘리야는 이렇게 했습니다.
본문 2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열왕기상 17:20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엘리야가 차갑게 식어있는 아이를
자기 침실에 눕히고 했던
첫 번째 행동이 무엇입니까?
‘여호와께 부르짖어’
문제를 만났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짖길 바랍니다.
문제를 만나면 이런 분들이 계십니다.
‘이거 사촌 오빠한테 연락해 볼까?’
‘이거 우리 옆집 아저씨한테 물어볼까?’
그러나 인간은 한계를 가지고 있기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훨씬 많습니다.
특히 죽음의 문제는 더 그렇죠.
반면에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요?
한계가 없으십니다.
모든 일에 부족함이 없으세요.
생명을 주관하시는 창조주십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았어요.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는 겁니다.
차이가 보이세요?
과부는 문제를 만나자 사람 앞에 나아가
원망과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이와 달리 엘리야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야기합니다.
내용은 비슷하지만 대상이 다릅니다.
이게 믿음의 차이입니다.
이렇게 기도한 후에
아이의 혼이 돌아오길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어떤 기적이 일어납니까?
22절입니다.
열왕기상 17: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안 들으시는 것 같죠?
아닙니다.
다 듣고 계십니다.
엘리아의 소리를 들으신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입니다.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노역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
부르짖었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그곳에서 구출해 내십니다.
오늘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너무도 많은 문제를 만납니다.
그런데 그 상황 속에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보여주리라!”
이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과 한계를 뛰어넘어
일하실 줄 믿습니다.
이전에 바알과 아세라 신은
풍요로움을 주는 신일 뿐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는
생명의 주관자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게 있어요.
기도하면 무조건 병이 낫는다고 생각해요.
맞습니다.
기도하면 병이 나아요.
하지만 때론 우리의 생각과 계획보다
더 크게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부르키나파소에서 선교하시던
선교사님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남편 선교사님이 사역도 잘했지만
가정도 잘 돌보셨어요.
아내는 친정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남편을 더 의지했죠.
어느 날 뱀에 물린 성도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심방을 갔어요.
멀리 가야해서 차를 몰고 갔습니다.
환하게 웃으며 헤어졌죠.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질 않는 거예요.
지금처럼 카톡이나 영상 통화를
할 수도 없었죠.
멀리 가면 그 지역 선교사님께 물어야지만
소식을 알 수 있었어요.
아내 선교사님이 남편의 연락을 기다리며
기도를 시작하셨어요.
한참 후에 하나님께서 찬양을
하나 주시더랍니다.
<내게 있는 향유 옥합>
그리곤 주님께서 이런 감동을 주셨데요.
“이제 그를 내게 주었으면 좋겠다.
가장 좋은 때 내가 받기를 원한다.”
울면서 기도를 마무리 했는데
나중에 비보가 들려왔습니다.
길에서 소 떼를 만났는데
미쳐 피하지 못해 사고가 났고,
결국 소천하셨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일이 끝났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는 분이 되었겠죠.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크셨습니다.
남편 선교사님의 부모님은 불신자였습니다.
선교지에서 아들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큰 충격에 빠졌죠.
하지만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분들 마음에 믿음이 들어갔어요.
‘내가 우리 아들을 만나려면
예수 믿고 천국 가야겠구나!’
그렇게 이분들이 예수를 믿고
신실한 집사님과 권사님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부르짖어야할 줄 믿습니다.
기도는 ‘주권이양’입니다.
내 문제를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으니
주님께서 해결해 달라고 하는 거죠.
그렇게 맡겼다면 주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 걸음이 우리의 생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길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우리 함께 24절을 읽겠습니다.
열왕기상 17: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오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그녀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이제야 아노라.’
다시 말해 진짜 신앙고백을 드린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는
죽고 사는 문제도 해결해 주십니다.
바알 숭배의 본거지였던 사르밧에서
하나님은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속한 이 세상은 어떻습니까?
맘몬이라는 돈의 신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너도 돈을 의지하니?
그래서 나를 맘몬 신처럼
똑같이 여기고 있진 않니?
안 돼! 나는 그런 신이 아니야!
나는 생명의 주관자야.”
베드로전서에서 사도 베드로가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베드로전서 4:12,13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를 찾아온 그 시험이 우리를
낙담시키는 것이 아니랍니다.
불시험을 통해 우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다른 것 같은 현실이
눈 앞에 펼쳐질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함께하십니다.
유기성 목사님께서 말기 간암 환자를
심방하러 가실 때 일입니다.
가망이 없다고 판정이 난 환자에게
뭐라고 기도해야 할지 몰라
답답하셨데요.
병을 낫길 기도하기엔 이미 늦었고,
그렇다고 안 해주자고 하니
직무유기 같았던 거죠.
‘하나님 제가 어떻게 기도해야 돼죠?’라고
계속 기도하셨어요.
그런데 병실 앞에서 하나님께서
이런 감동을 주신 겁니다.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을 가져라.”
병이 낫고 안 낫고는
자기에게 있지 않음을 깨달으신 거죠.
우리는 낫길 위해 기도할 뿐이고
치유는 하나님 손에 맡긴 거죠.
우리가 할 일은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이 함께하신다는 걸 믿는 것입니다.
바로 이 믿음으로 엘리야처럼 기도하면
반전의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 그런
기도의 사람이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