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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의 운명이란 이 시대에 이미지가 이용되는 불가피한 방식을 말한다. 그것은 이미지가 통용되는 사회적 형태와 거기에 엮인 담론들이지, 이미지의 고유성을 이미지 자체에서 연역하는 것도(낭만주의) 생산과 전파 장치에서 찾아지는 것도(매개론) 아니다.
이미지의 종언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미지가 매개되는 장치 차원에서 벌어지는 파국(가령 디지털의 도래에 맞서 과거의 매체가 가졌던 힘을 가져와야 한다는 파국)이 아니다. 그것은 예술이 통보하는 해방의 모습들이다. 이미지는 관념을 형상화한다는 생각으로부터, 이미지의 현전 그 자체와 그것이 새겨지는 역사의 증언 사이에서, 사회적으로 승인받은 형태와 예술이 조작해 놓은 형태의 유사성들 사이의 긴장에서, 예술은 '해방'을 기획한다.
이 해방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
1) 이미지를 매개하지 않고 직접적인 감성으로 관념을 실현하는 순수예술, 이것은 이미지의 집합이 사회적으로 거래되는 것을 막고 분리한다.
2) 예술의 절차를 현행하는 모든 삶의 형태에 일체화시키고, 노동과 정치에서 한치도 분리시키지 않는 예술.
이 형태들은 유사성의 생산 뿐만 아니라, 독해와 독해의 중지라는 조작의 과정, 즉 이미지의 힘 모두를 없애버리기를 기획한다. 행위와 형태의 동일성 위에서 이미지는 희생되는데, 이 희생을 제공받은 권력은 아주 제한된 이미지만을 예술에 요구하게 된다.
이미지를 매개로 행해지는 유사성의 사회적 생산, 비-유사성의 예술적 조작, 징후의 담론성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원리"가 그것을 가능케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범주오류일 것이다. 이것은 기능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유지되는 것이지, 가령 쾌락원리/죽음충동과 같이 외재적으로 이미 정립되어 있는 '어떤 원리'로 환원되지 않는다.
대신, 랑시에르는 이러한 기능들이 모였다 흩어지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묶어 제안한다.
1) 벌거벗은 이미지는 어떤 유사성의 조작 가능성도, 이것을 지휘하는 해석도 거부한다. 따라서 그것은 예술을 구성하지 않는 이미지다(가령 나치 수용소 사진).
2) 이와 "구별되는" 직시적 이미지는, 벌거벗은 이미지와 같이 조작을 거부한다. 의미 작용에서 배제된 현전의 역량을 자기 자신에게서 강조해낸다. 이는 현전을 논평하는 담론, 그것을 연출하는 제도, 역사화된 앎, 따위로 현전을 변경하는 '의미의 역량'과 대조된다.
3) 이에 "대립되는" 이미지는 변성적metamorphic이라 불린다. "여기에 있다"가 아니라 "거기에 있다". 예술(조작)과 이미지의 관계를 결정 짓는 이 특정한 관념은, 현전의 고유한 영역이 있다는 관념을 부정하고, 유통되는 이미지들을 다시 배치하려는 이미지 비판의 임무를 맡은 모습이다. 역사가 기입되어 있다거나 그 모든 역사화를 포함한 의미화 전반을 중단한다는 미학적 이미지의 두 가지 본성에 대응하여, 이미지의 변성적 특징은 예술(조작)과 이미저리(승인받은 사회적 유통) 사이를 순환한다. 이 이미지는 이것을 보면서 저것을 의미하도록 변태한다.
이미지의 세 형태는, 보여주는 힘과 의미하는 힘, 현전의 증명과 역사의 증언을 묶거나 풀어 버리는 세 가지 방식이다. 그러나 각각의 형태는 독자적으로 기능할 수 없고 다른 형태를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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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증언에 바쳐진 '벌거벗은 이미지'는 어떤가? 이것이 증언하는 (일반적으로 가장 완전하게 승인된) 현실이란, 이미지가 결부된 힘들이 가장 단일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형식일 것이다. 그러나 이미지는 이 현실 바깥으로 확장되고 호명되어 다르게 작동한다. 이 작동을 막을 수는 없다. 또한 이 단일한 시선은 그것의 단일성, 일반성이 어떤 본질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미학적 교육의 산물이며 이미지를 대하는 관념의 산물이다(랑시에르는 이 예시로, 머리가 잘린 시신을 들고 가는 ss대원의 사진을 드는데, 그러나 이것이 '렘브란트가 [사물을] 관조하는 방식'이 사회적으로 일반화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자신의 용법을 따르면] 어떠한 조작으로 평가될 수 있을까? 그것을 렘브란트의 풍경이 아니라 가축 도살의 풍경으로 본다면 어떨까?) 그러나 동시에, 이 이미지는 어떤 미학적 평가도 중단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이것은 이미지가 여타의 조건에서 해방되었다는 직시적 이미지와 맞닿는다. 다만 그 현전성이 순수 관념이 아닌 순수 사태(혹은 거기 결부된 가장 일반적인 관념)일 따름이다.
지금 랑시에르는 힘의 요소들과 이미지의 범주들을 1:1로 대응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이미지 범주들이 전개되는 것을, 순전히 다른 범주와의 비교로만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요소와 범주라는 것을 침투불가능한 (고전적 의미에서의) 개념처럼 다루지 않고, 그것들을 필요에 따라 결합하게 한다.
가령 변성적 이미지가 대립하는 것은 앞선 이미지들의 한 범주 전체라기보다 범주의 한 요소, 그 기능이 성립될 때 필요한 과정의 일부이다. 이미지의 유통(이미저리)를 혼란에 빠뜨리는 움직임은 "결정되어 있지 않음"이라는 공리에 의지하지만, 이 공리가 작동하는 방식, 즉 결정된 이미저리를 다시 미결정의 상태로 돌려 놓고 변화시키는 이 작용은 그것이 순수한 미결정의 상태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라 직시하는 이미지가 제공하는 마주침을 조작하고 특정한 물리적 증언이 뒷받침되어 가능한 것이며 그것은 특정한 요청을 "명시"해야 가능한 것이다.
그는 직시적 이미지가 곧 변성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단지 개념으로만 이해되는 현전을 가시적 형태로 "현전화"할 때, 그것을 현전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것은 이 사태에 대한 주해의 담론이 보충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팝, 네오리얼, 단색회화, 미니멀리즘의 작용은, 모더니티의 원풍경이라는 역사 속에, 그 역사의 권위 아래 성립되는 것이며, 이 권위는 "말"의 권위 아래에 놓인다.
또한 직시적 이미지의 그 무매개성이 의미화되기 위해서도 담론적 연출이 필요하다. 가령 그것은 초월적 타자를 요청하고 자신을 초월적인 것의 증인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대립물의 필요는 고다르의 영화사에서 명백한데, 그는 사물들의 순수 현전을 위해서 히치콕의 "이야기"를 대립시킨다.
이미지를 다른 연관관계가 아닌 즉자적인 상태로 찬양할 거리를 만들려는 모든 시도는, 오히려 이 이미지가 앞서 언급한 모든 요소들이 포함된 서사시로 여겨질 때에만 가능하다는 자기모순에 빠진다. 이 뒤편에서 무엇이 거래되고 있다.
https://naver.me/FKxHrk51
1강 이미지의 운명
상영관에서 혹은 텔레비전 화면이나, 영사기 등
의 어떤 도구를 사용해서 보든, 브레송의 이미지
들이 지닌 본질적 성질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같은'(동일자)이 한쪽에 있고 '다름(타자)'이 다
른 한쪽에 있는 것이 아니다. 빛이 내장된 텔레비
전 수상기와 <챔피언에게 던지는 질문〉의 카메라
는 그것들에게는 그 자체로 낯선 기억과 임기응변
의 퍼포먼스를 우리로 하여금 목도하게 만든다.
거꾸로 〈당나귀 발타자르〉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것이 상영관에서 필름으로 상영되든 비디
오로 비치든 다른 무엇도 지시하지 않는 이미지,
그 자체가 퍼포먼스인 이미지이다. 12p
이미지의 이타성
이 이미지들은 '다른 무엇'도 지시하지 않는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이타성이 이미지의 구성 자체
에 관여한다는 것이며, 또한 이런 이타성이 영화
라는 매체의 물질적 특성과는 다른 어떤 것에 속한
다는 것이다. 〈당나귀 발타자르>의 이미지는 일차
적으로 어떤 기술적 매체의 특성을 현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operation이다. 즉 전체와 부분
사이의 관계, 어떤 가시성과 그것에 결부된 의미
작용과 정서의 힘 사이의 관계, 기대와 그것을 충
족시미기 위해 일어나는 것 사이의 관계인 것이
다.13p
크레디트 타이틀과 그에 이어진 세 개의 샷에는 어
떤 이미지성의 체제 전체 (요소들 사이의 관계와
기능들 사이의 관계의 체제)가 있다. 그것은 무엇
보다도 검은색이나 회색 화면이 지닌 중립성과 음
향 콘트라스트 사이의 대립이다. 스타카토로 곧
장 내달리는 슈베르트의 멜로디와 이것을 중단시
키는 당나귀의 울음소링는 뒤에 나올 우화의 긴장
을 이미 남김없이 전달한다. 이 대조는 당나귀의
검은 털 위에 놓인 하얀 손이라는 시각적 대립으
로, 목소리와 얼굴의 분리로 이어진다. 그리고 다
시 목소리와 얼굴의 분리는 말에서 드러나는 결단
과 이것에 대한 시각적 모순 사이의 연결로, 연속
성을 강화하는 디졸브 기법과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반전 효과 사이의 연결로 확장된
다.15,16p
브레송의 '이미지', 이것은 한 마리의 당나귀와 두
명의 아이들과 한 명의 어른이 아니다. 그저 근접
촬영 기술이나 그렇게 클로즈업된 것을 확대하는
카메라의 움직이나 디졸브만도 아니다. 그것은
볼 수 있는 것과 그 의미 작용, 또는 말과 그 효과
를 묶기도 하고 분리시키기도 하는 작용이며, 기
대를 낳고 어기는 조작이다. 이 조작은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특성들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심
지어 이 조작은 영화라는 매체를 사용하는 통상적
인 방식과의 철저한 간극을 전제하고 있다.
15,16p
브레송식의 단편화는 영화를 연극이나 소설과 나
란히 두는 사람들이 하는 식의 내러티브의 연쇄라
기보다는 이 영화라는 예술에 고유한 순수 이미지
를 우리에게 제공한다고 말해야 할까?
브레송의 영화가 영화의 고유한 본질을 실현하는
방식은 행위를 지각과 운동의 연쇄로 압축함으로
써도 아니고, 이유에 관한 그 어떤 설명도 단락(短
絡)시킴으로써도 아니다. 브레송의 영화는 플로베
르에 의해 열린 소설적 전통의 연속선상에 기입되
어 있다. 즉, 똑같은 절차가 의미를 산출하는 동시철회하고, 지각과 행위와 정서의 연결을 보증
하는 동시에 해소하는 양의성의 전통 말이다.
16,17p
이미지는 결코 단순한 리얼리티가 아니다. 영화
의 이미지는 결코 단순한 리얼리티가 아니다. 영
화의 이미지는 무엇보다 우선 말할 수 있는 것과
볼 수 있는 것 사이의 조작이자 관계이며, 전과
후, 원인과 결과를 가지고 노는 방식이다. 이런 조
작은 상이한 이미지-기능들, 이미지라는 말이 지
닌 상이한 의미를 포함한다. 따라서 영화의 두 샷
이나 샷의 연쇄는 매우 상이한 이미저성과 곤련될
수도 있다. 거꾸로 영화의 한 샷은 소설의 문장이
나 그림과 동일한 유형이 이미지성과 관련될 수 있
다. 17p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에밀조라나 찰스 디킨스,
엘 그레코나 조반니 피라네시에게서 영화의 몽타
주 모델을 찾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며, 고다
르가 렘브란트의 회화에 관한 엘리 포르의 문장을
사용하여 영화게 관한 찬사를 만들 수 있었던 것
도 그 때문이다.
우리가 브레송의 이미지들에 관해 말할 때 우리 다른 곳에서 일어났던 것과 우리 눈앞에서 일어
나고 있는 것 사이의 관계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
니라,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의 예술적 성질을 형성
하는 조작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지'는 두 개의 상이한 것을 가리킨다. 우선 원본의
유사성을 생산하는 단순한 관계가 있다. 여기서
는 원본을 충실하게 모사할 필요가 전혀 없고 원본
을 대신하기만 해도 충분하다.
그리고 우리가 예술이라 부르는 것을 산출하는 조
작들의 놀이가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유사성
의 변경이 있다. 이 변경이 취할 수 있는 형태는 무
수히 많다. -18p
이런 의미에서 예술이 구상적인가 아닌가와 무관
하게, 우리가 그 속에서 식별 가능한 등장인물과
형태를 인식하느냐 아니냐와 무관하게, 예술은 이
미지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예술의 이미지는
어떤 간극, 비-유사성을 산출하는 조작이다. 눈으
로 볼 수 있을 것을 묘사하거나 눈이 결코 보지 못
할 것을 표현함으로써 어떤 생각을 의도적으로 명
료하게 만들거나 모호하게 만든다. 시각적 형태들
은 파악되어야 할 의미를 제공하거나 제거한다.
카메라의 움직임은 어떤 광경을 선취하며 다른 스
펙터클을 노출시킨다. 피아니스트는 검은 장막
'뒤'에서 약절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이 모든 관계
가 이미지들을 규정한다. 이는 두 가지를 뜻한다.
첫째, 예술의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서는 비-유사
성이라는 것이다. 둘째, 이미지는 볼 수 있는 것에
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볼 수 있는 것에는
이미지를 이루지 않는 것도 있으며, 오로지 말로
만 이루어진 이미지들도 있다. 하지만 이미지의
가장 일반적인 체제는 말할 수 있는 것과 볼 수 있
는 것 사이의 관계, 이 둘 사이의 유비와 비 유사
성 모두에 기초하여 작용하는 관계를 연출하는 체
제이다. -19p
이 관계는 두 항이 물질적으로 현전할 것을 결코
요구하지 않는다. 볼 수 있는 것은 유의미한 전의
속에서 배치될 수 있으며, 말(하기)는 눈을 멀게
할 정도의 가시성을 펼쳐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즉, 유사성이라는 자기동일적인 이타성이 예술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관계들의 작용을 늘 방해했기
때문이다. 닮았다는 것은 오랫동안 예술에 고유한 것으로 통했던 반면, 모방에 기초한 무수한 광경과 형태는 예술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오늘날에
는 닮지 말라가 예술의 정언명령으로 받아들여지
고 있는 반면, 사진, 비디오, 일용품을 닮은 오브제
의 전시가 갤러리와 미술관에서 추상화를 대체하
고 있다. 하지만 비-유사성이라는 이 엄격한 정언
명령은 그 자체로 특이한 변증법에 사로잡혀 있
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불안이 커지고 있기 때
문이다. 즉, 닮지 말라는 것은 볼 수 있음을 포기하
라는 것 아닌가? 혹은, 언어활동을 모체로 삼는 조
작들이나 기법에 '볼 수 있는 것'의 구체적인 풍부
함을 종속시키라는 말이 아닌가 하는 불안 말이
다. 그래서 대상 움직임이 출현한다. 유사성에 대
립되는 것은 예술의 조작성이 아니라 감성적 현전
육화된 정신, 절대적인 같음(동일자)이기도 한 절
대적 다름(다름)이다. "이미지는 부활의 때에 올
것이다"라고 고다르는 말한다. '이미지'란 그리스
도교 신학의 '원초적 이미지', '성부'와 전혀 '닮
지 않았으나 성부의 성질을 나누어 갖고 있는 '성
자'인 것이다. 우리는 이 이미지를 다른 이미지와
분리시키는 다름(차이) 때문에 더는 서로 죽도록
치고 받으며 싸우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거
기에서 유사성의 시뮬라르크, 예술의 기법, 문자
의 전횡을 떨쳐버리는 데 적합한 육체의 약속을 계
속 보게 된다.
-20~2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