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원(吳瑗)-망도실(悼亡室)(세상 떠난 아내를 애도하다)(떠나간 아내를 그리며)
吾不負君君負余(오불부군군부여) 나는 그대 버리지 않았는데 그대 나를 버렸으니
良箴信誓一成虛(양잠신서일성허) 좋은 충고 신실한 맹서가 다 부질없게 되었구료
歸侍重泉君則樂(귀시중천군즉락) 저세상에서 어버이 모실 테니 그대는 즐겁겠지만
爲吾何不少躊躇(위오하불소주저) 나를 위해 왜 조금 더 있다 가지 않았단 말이오
*위 시는 “한시 감상 情정, 사람을 노래하다(한국고전번역원 엮음)”(월곡집月谷集)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변구일님은 “오원이 1715년 16세 때 맞이한 안동 권씨(安東權氏)를 떠나보낸 슬픔을 그린 시이다. 오원은 생부가 오진주(吳晉周)인데, 아들이 없었던 백부 오태주(吳泰周)에게 양자로 들어가서 대를 이었다. 오태주는 현종(顯宗)의 딸 명안공주(明安公主)에게 장가들어 해창위(海昌尉)에 봉해졌는데 1716년 49세에 별세하였다. 안동 권씨는 시집온 지 한 해 남짓 지났을 때 시아버지 상을 당했다. 상례를 치르면서 병을 앓다가 소상小祥(사람이 죽은지 1년만에 지내는 제사)을 치른 뒤로 위독해져 결국 1718년 1월 세상을 떠났다. 안동 권씨는 19세의 나이로 슬하에 딸 하나만을 남기고 부부의 연을 맺은 지 3년도 채 되지 않아 남편의 곁을 떠났다.
아, 그대 이 세상에 이십 년도 채 못 머물렀으니, 이 얼마나 짧단 말이오?. 그대 떠나면서 세 살배기 아이 하나 남겨 놓았는데 이 또한 사내자식이 아니니 이 얼마나 박복하단 말이오?. 그대 친정 부모를 만나지 못한 세월이 길었는데도 수일이나 걸리는 먼 곳에 있어 병중에는 서로 의지하지 못하고 임종 때는 얼굴 보며 영결하지 못하였소. 끝내 한을 품고 관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아, 몹시 참담하구료. 아, 슬프구료. 그대가 평소 내 완악함을 모르고 내가 숨이 끊어질까, 내가 몸이 상할까 죽을 때까지 근심하던 일을 생각하노라니, 아마 지금 아득한 저 명부冥府(저승)에서도 그대 자신이 죽은 것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나의 처지를 슬퍼할 것만 같소.
오원이 1718년 안동 권씨를 위해 지은 제문(祭文) 중의 일부로, 아내를 잃은 절절한 슬픔이 행간에 넘쳐난다. 스무 살도 안 된 젊은 부부가 사별하였으니 감정이 북받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미가 어디 간 줄 모를 딸아이의 해맑은 표정을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지 않을 아버지가 어디 있을까?. 더구나 안동 권씨는 효성이 깊고 남편에게 충고할 줄 아는 여사(女士)의 기풍이 있어 인생의 벗으로까지 생각하던 터였다.
오원은 부인과 사별하고 3년 뒤인 1721년 한식 하루 전날 안동 권씨의 묘 앞에 석상과 석주石柱를 세울 때 다시 한 편의 제문을 지어 아내를 추모하였다.
그대 이곳에 묻히고 어느덧 해가 몇 번 바뀌어……곱게 자란 딸아이는 뜰에서 뛰놀게 되었소.…… 야속한 인정은 떠나간 사람을 점점 잊게 만들어 눈물은 마르고 마음은 굳어져 가오. 가 버린 사람을 잊어버리게 되는 슬픔이 그 사람을 잊지 못하는 슬픔보다 더 큰 것은 아닐지?. 그대의 얼굴과 목소리는 희미해지고 꿈에서조차 자주 나타나지 않는구료. 저세상에서 그대 억울한 마음에 구천을 떠돌고 있지나 않을는지?.
장마가 한창이던 7월의 어느 비 오는 밤, 아내가 죽는 꿈을 꾼 적이 있다. 꿈속에서 나는 가슴을 치며 울었다. 꿈에서 깨어 눈을 뜬 채 천장을 바라보노라니, 꿈속의 슬픔이 여운으로 남아 있었는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오원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힘들고 고단한 인생길에서 벗이 되어 주는 아내에게 오늘은 따뜻한 미소와 말 한 마디 건네야겠다.”라고 감상평을 하셨습니다.
*오원[吳瑗, 1700년 ~ 1740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백옥(伯玉), 호는 월곡(月谷)]-조선의 문신. 해주 오씨 시조 오인유(吳仁裕)의 19세손으로, 할아버지는 형조판서 오두인(吳斗寅)이고, 아버지는 오진주(吳晋周)이며, 어머니는 예조판서 김창협(金昌協)의 딸이다. 백부인 오태주(吳泰周)와 조선 제18대 왕 현종의 딸인 명안공주(明安公主)의 양자가 되었다. 1728년(영조 4)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났고 벼슬은 대제학에 이르렀다.
1723년(경종 3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728년(영조 4) 정시 문과에 갑과(甲科)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사서(司書)로 있을 때 영조에게 학문과 덕을 닦는 요령을 진언(進言)하였고, 직언(直言)으로 유명하였다. 1732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733년 교리(應敎), 1735년 대사간(大司諫), 1736년 대사성(大司成), 1737년 승지(承旨)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738년(영조 14년) 부제학(副提學), 1739년 이조참의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올랐다. 영조에게 당나라 육지(陸贄)가 주의(奏議)한 양세법(兩稅法)의 여섯 가지 폐단을 강의하였고, 성학(聖學)의 긴요한 임무를 조목을 들어 밝혔으며, 성덕(聖德)의 문제와 시정(時政)을 거론하였다.
1740년(영조 16년) 공조 판서로 재임 중 41세의 나이로 졸(卒)하였다. 성품은 정직하고 성실하였고, 온후(溫厚)하였으며 총명하였다. 왕이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이 있는데도 일찍 죽은 것을 애석히 여겨 차탄하고 애도하였으며, 시호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箴(잠) : 경계 잠, 1.경계(警戒), 2.돌침(-鍼: 돌을 가지고 놓는 침), 3.바늘
*重泉(중천) : 저승. 사람이 죽은 뒤에 그 혼이 가서 산다고 하는 세상(世上).
*躊(주) : 머뭇거릴 주, 1.머뭇거리다, 2.주저하다(躊躇--), 3.느직한 모양, 踌(간체자), 踌(속자)
*躇(저) : 머뭇거릴 저, 건너뛸 착, 1. (머뭇거릴 저), 2.머뭇거리다, 3.밟다
첫댓글 부부란 삶의 동반자...
그 동반자를 잃는 슬픔이란 이루 헤아릴 수 없지요...
일찍 사별한 작자의 마음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네, 이별 후의 빈 자리가 더욱 더 쓸쓸하게 다가오는 느낌이네요.
회장님의 댓글에 감사드리고,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