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의 감옥’
출판사에서 일을 하다가 개업 광고지를 보고 순두부 찌개를 주문했다. 한참 만에야 배달을 오신 아주머니는 머리가 산발이었고 눈이 잔뜩 충혈되어 있었다. 이유인즉, 아주머니가 순두부를 갖고 오는데 이 출판사에 줄곧 음식을 배달해 오던 다른 가게 아주머니가 손님을 뻬앗아 간다고 달려들어 한바탕 싸우고 나서 음식을 다시 해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3천5백원 짜리 순두부 찌개를 두고 두 아주머니가 필사적으로 싸움을 벌인 것이다.
음식 쟁반을 덮은 신문의 사회면에는 어느 집에서 백억 원대의 현금을 도둑맞았다는 기사와 2천2백4억원의 추징금 중 3백14 억만 납부한 전두환 대통령이 제출한 가족 재산 목록이 50억 원에도 못 미친다는 기사가 한 면을 다 차지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단돈 3천 5백 원에 목숨을 걸고, 또 한쪽에서는 마치 ‘억 원’이 어린아이 사탕 값이나 되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언급한 것이 대조적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집안에 백 억 원이라는 돈을 갖고 있을 수 있으며 2천 2백 4억 원이면 얼마만큼의 액수인지 숫자가 100이상만 되면 정신없이 헤매는 내 부족한 두뇌로는 가늠조차 할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인간 만사가 다 돈, 돈이 문제다. 신파극 주제가처럼 돈에 울고 돈에 웃고, 돈에 살고 돈에 죽고 ------. 영국 시인 바이런은 ‘돈이란 알라딘의 램프’라고 정의했고, 새무엘 버틀러는 사랑의 신 큐피터의 화살도 금촉일 때 더욱 명중률이 높다고 했다. 그러나 삶을 그대로 반영한 문학작품에서도 돈이 배제될 수 없다.
돈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인한 인간성 상실의 예로는 세익스피어의 ‘베니스 상인’에 등장하는 샤이록이나.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에 나오는 스쿠리지를 들 수 있다.
스크루지나 샤일록이 미움 받는 구두쇠라면, 19세기 영국의 여류 작가 조지 엘리엇(1819-1880)의 ‘사일러스 마아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동정받을 만한 구두쇠이다.
마아너는 억울하게 도둑 누명을 쓰고 고향을 떠난 직조공이다. 그는 자기가 짠 직물을 파는 일 외에도 마을 사람들과 아무런 왕래도 없이 외딴집에 혼자 살고 있다. 그에게 유일한 낙이 있다면 하루에 16시간씩 꼬박 앉아 짠 직물을 팔아서 금화를 쓰지 않고 냄비에 담아 마루 밑에 감추어 두고, 밤마다 꺼내어 어루만져 보는 일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인생에 크다란 변화가 찾아온다. 그의 삶의 목적 자체이던 금화를 누가 훕쳐 간 것이다. 자살까지 생각하며 비탄에 빠져 잃어버린 금화를 찾아다니다 허탕치고 돌아온 어느 날 밤, 마아너는 난롯가에 잠들어 있는 두 살 베기 여자 아이를 발견한다. 아이의 반짝이는 금발을 금화로 착각하고 순간적으로 들떴던 그는 그 아이가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한테 버림받은 고아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리고 마아너는 그 아이를 키우기로 작정한다.
그때부터 마아너는 딱딱하고 차가운 금화 대신에 딸 에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키우며 자기를 버렸던 세상에 마음에 문을 열기 시작한다.
마을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친절을 베풀기 시작하고, 마을 사람들도 마아너를 따뜻하게 대한다. 그는 에피를 통해 난생 처음으로 사랑을 준다는 것, 그리고 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느끼고, 이 세상에 선이 존재함을 새롭게 배운다.
“이 세상에 선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 아는 이제 그걸 알아. 세상에는 고통과 악이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는 분명 선은 있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되지만 이 소설에서 강조되는 점은 돈에 집착했을 때 고립되고 의미 없는 삶을 살던 아아너가 그 돈이 없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다시 인간성을 회복하고 진실된 인간관계를 발견한다는 아이러니이다.
투명한 유리에 금이나 은을 칠하면 거울이 된다. 유리를 통해서는 바깥 세상도 보이고 다른 사람들도 보이다. 내가 웃고 손을 내밀면 상대방도 웃고 손을 내밀어 준다. 하지만 거울에는 자기만 보인다. 금, 은으로 사방에 벽을 쌓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마치 거울 속 사람들처럼 자기만 바라보고 자기만 돌보며 감옥인 줄 모르는 채 감옥 속에서 살아간다.
사일러스 마아너는 에피를 통해서 거울 속 감옥에서 벗어났고 그리고 말한다.
“누가 뭐래도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하다.”
첫댓글 장영희 교수으 글을 제가 많이 올리는 이유는, 장영희의 글을 읽으면, 아주 쉽고, 그리고 어린이같은 생각이 드는 순수한 감정이 느껴져서 입니다. 나는 떼묻은 어른이라서 그런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