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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례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를 시작하는 대림 제1주일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언제나 한결같이 기억하시고 아버지의 풍요로운 은총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우리 모두 사랑을 실천하며,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아드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깨어 기다립시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 마음을 이끄시어
저희가 이 세상에서 옳은 일을 하며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를 맞이하게 하시고
마침내 하늘 나라에 들어가 그리스도 곁에서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제1독서
<아, 주님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63,16ㄹ-17.19ㄷㄹ; 64,2ㄴ-7
16 주님, 당신만이 저희 아버지시고
예로부터 당신 이름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17 주님, 어찌하여 저희를 당신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저희 마음이 굳어져 당신을 경외할 줄 모르게 만드십니까?
당신 종들을 생각하시어,
당신의 재산인 이 지파들을 생각하시어 돌아오소서.
19 아, 당신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
당신 앞에서 산들이 뒤흔들리리이다.
64,2 당신께서 내려오셨을 때 산들이 당신 앞에서 뒤흔들렸습니다.
3 당신 아닌 다른 신이 자기를 고대하는 이들을 위하여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은
예로부터 아무도 들어 보지 못하였고 아무도 귀로 듣지 못하였으며
어떠한 눈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4 당신께서는 의로운 일을 즐겨 하는 이들을,
당신의 길을 걸으며 당신을 기억하는 이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죄를 지었고 당신께서는 진노하셨습니다.
당신의 길 위에서 저희가 늘 구원을 받았건만
5 이제 저희는 모두 부정한 자처럼 되었고
저희의 의로운 행동이라는 것들도 모두 개짐과 같습니다.
저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어
저희의 죄악이 바람처럼 저희를 휩쓸어 갔습니다.
6 당신 이름 부르며 경배드리는 자 없고
당신을 붙잡으려고 움직이는 자도 없습니다.
당신께서 저희를 외면하시고
저희 죄악의 손에 내버리셨기 때문입니다.
7 그러나 주님, 당신은 저희 아버지십니다.
저희는 진흙,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입니다.
제2독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1,3-9
형제 여러분,
3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4 나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은총을 생각하며,
여러분을 두고 늘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5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
어떠한 말에서나 어떠한 지식에서나 그렇습니다.
6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여러분 가운데에 튼튼히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7 그리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도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8 그분께서는 또한 여러분을 끝까지 굳세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잡을 데가 없게 해 주실 것입니다.
9 하느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셨습니다.
복음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33-3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34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
35 그러니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36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37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인생이 공짜라는 잠에서 깨어나라
오늘부터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됩니다. 이때마다 나오는 복음의 주제가 ‘깨어있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깨어있음은 각자가 주인이 맡긴 일을 하느냐, 아니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있으라고 분부한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마르 13,34-35)
누가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고, 왜 어떤 이들은 그 일을 하지 않을까요? 그 해답은 우리 마음에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들이 ‘공짜’라고 믿게 만드는 자아의 계략에 속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달렸습니다.
영화 ‘치킨 런’(2000)은 1950년대 요크셔 양계장을 배경으로 한 무리의 닭들이 농장주인 트위디 부부에게서 탈출하려는 과정을 다룬 애니메이션입니다. 주인공 진저는 자유를 꿈꾸며 거듭 탈출을 시도하는 암탉 무리의 리더입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이가 공짜일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냥 편하게 주인이 주는 모이만 먹으며 알이나 낳으며 살자고 말하는 닭들도 있지만, 진저는 자유를 갈망합니다. 수없는 시도와 실패 끝에 비행기를 만들어 닭장에서 탈출한다는 내용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이 닭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공짜로 주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고 성적을 높이기 위해 공부를 합니다. 노력한 만큼 얻어지는 게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우리 생명만큼은 공짜라고 여깁니다. 만약 아이가 부모에게 주어지는 것이 공짜라고 여기면 어떨까요? 예전에 박한상이라는 청년은 부모의 재산을 노리고 부모를 살해하고 불을 질러 방화로 위장하려다 잡혔습니다. 그는 부모가 워낙 부자라 자신에게 주는 것이 그렇게 고맙지 않았습니다. 극히 일부분을 주면서 생색낸다고 여겼습니다. 이렇게 되면 돈과 쾌락과 자존심의 노예가 되어 사람이 망가집니다. 부모의 뜻을 따라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그렇게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문제는 자녀가 부모에게 받는 것이 공짜라 ‘감사’의 마음이 생기지 않는 데 있습니다.
만약 우리 생명이 공짜로 주어졌다고 여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분명 생명은 부모가 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다시 생명을 줄 능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주지 않았다면 다른 누군가가 주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그분에게 받은 생명이 공짜가 아님을 안다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이 마음밖에 바라지 않습니다.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저절로 부모의 뜻을 따르게 됩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 에덴동산에 해 놓은 장치가 하나 있습니다. 선악과입니다. 선악과는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 받은 에덴동산과 자신들의 생명 전체에 대해 공짜로 여기나, 받은 것으로 여기나를 시험하는 버튼과 같았습니다. 하느님은 땅에서 나는 소출의 십분의 일은 당신의 것이라며 당신께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사를 몰라 불만 속에서 더 가지려고 세상 것에 집착하며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악해집니다.
닉 부이치치는 손과 발이 없이 태어났습니다. 처음엔 그것이 불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못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살 시도도 몇 번이나 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자 삶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손과 발을 안 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만 빼놓고 다 주신 것입니다. 생명을 주셨으니 감사해야 합니다. 아니면 이 세상에 존재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느끼게 되자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왜 생명을 주셨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 결론은 하느님께서 자신과 같이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전도사가 되라고 세상에 보내신 것이란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대로 살아 결혼하고 자녀들까지 낳고 수많은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목동들이나 동방박사들은 하나 같이 그러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처지에 감사하며 무슨 일을 하든 하느님께 보답해드린다는 마음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불만에 싸여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해도 자기들 부족한 것들만 청합니다. 닉 부이치치의 경우면 팔과 다리를 달라고 청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깨어있을 수 없습니다. 깨어있음이란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은 공짜는 없음을 깨달아 받은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1986년 우주 왕복선 챌린저호가 발사 직후 폭발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미국의 모리 대학의 교수 율릭 나이서는 다음 날 자신의 강의를 듣는 100여 명의 학생에게 ‘위 사고 소식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들었는지’ 자세히 적게 한 다음, 그 답지를 보관했습니다. 그리고 2년 반 후에 같은 학생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고 답을 받았습니다.
이제 두 답지를 비교합니다. 그 차이는 어떠했을까요? 학생 중에서 25%가 완전히 다른 대답을 했고, 65%는 세부 사항에서 큰 차이를 보였으며, 단 10%만 동일하게 답변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사실은 대부분 현재의 기억이 아주 확실하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기억은 이렇게 정확하지 않습니다. 대략적이고 나머지는 추론으로 채워가며, 이 과정에서 자신의 경험, 감정, 환경 등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 기억하는 것, 생각하는 것 등이 정확하지 않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자기 기억이 무조건 맞는 것처럼 생각하고, 다른 이의 기억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지혜로운 사람은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자기주장을 확실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나의 틀림도 인정할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이 진짜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겸손을 강조하신 이유는 이렇듯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세상의 종말에 대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주인이 집을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을 맡긴 종들처럼 우리 모두가 부지런하고 충실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지요. 주인은 언제라도, 또 아무 때라도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종이 언제 올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까요? 종은 절대로 예측할 수 없습니다. 종은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어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자기 생각만을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그때가 언제 올지 전혀 모르면서 마치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자기 생각을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하긴 언젠가 죽을 것임을 알면서도 절대로 죽지 않을 것처럼 사는 사람처럼 살고 있지 않습니까?
초대 교회 때부터 신앙인의 참된 자세를 ‘깨어 있음’으로 묘사했습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깨어서 주님께서 오실 날을 잘 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깨어 있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하느님의 큰 선물입니다.
오늘의 명언: 욕구를 절제하는 사람은 욕구가 절제될 수 있을 만큼 약한 것이기 때문에 절제한다(윌리엄 블레이크).
첫댓글 오늘도 복음읽으며 묵상합니다
항상 감사드려요~^^
호노리나 홍보부차장님의 게시판 너무 멋찌네요
앞으로의 활약이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