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1.daumcdn.net/cfile/cafe/223B08415835F61820)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타고난 신동들이 끊임없이 등장했다. 요즘도 TV에 방영되는 영재 프로그램을 보면, 일찍이 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장래가 촉망되는 아이들이 수두룩하다. 재물이나 권력을 부러워해본 적은 없지만, 천재적인 두뇌와 두주불사하는 주량은 언제나 부럽다. 그러나 과거 김웅용 송유근 등 천재소년들이 끝내 타고난 재주를 꽃피우지 못하고 평범하게 성장한 사례가 있었다. 제도적인 뒷받침이 없으면 타고난 재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국가와 사회가 체계적인 영재 개발 계획을 마련하여 이들이 뛰어난 재능을 꽃피울 수 있도록 해줘야 할 것이다.
어릴 때부터 시재(詩才)가 출중했던 소월 김정식(1902~1934)은 19세 때인 1920년 『창조』紙에 다섯 편의 시가 추천되어 시단에 나왔다. 그를 추천해준 시인은 오산중학교 스승인 김억이었는데, 훗날 소월의 많은 시를 자신의 작품으로 발표한 파렴치한이었다. 청록파 시인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은 모두 <향수>의 시인 정지용으로부터 추천을 받았다. 세 사람 다 20대 초반에 『문장』紙를 통해 등단했다. 이들은 남달리 친하게 지냈는데, 지훈과 목월은 사인(死因)까지 같은 고혈압으로 요절하여 가족과 동료들을 안타깝게 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5391F3F5835F63F2A)
여류소설가 박화성(1904~1988)은 22세 때인 1925년 춘원 이광수의 추천으로 단편소설 「추석 전야」가 월간지 『조선문단』에 게재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박화성은 최초의 여류 근대문인으로서, 1932년에는 여류작가 최초로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백화」를 연재한 기록도 가지고 있다. 천재시인 이상(1910~1937) 역시 22세 때부터 신문과 잡지에 활발하게 시를 발표했다. 대구 계성고 출신인 김동리(1913~1995)는 22세 때인 1934년에는 시 <백로>가, 1935년에는 단편소설 「화랑의 후예」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시 소설 양쪽에 다 데뷔했다.
김민부(1941~1972)는 고등학생 때인 1956년 첫 시집 「항아리」를 출간한 뒤, 1957년 동아일보에 시조 <석류>가, 1958년 한국일보에 시조 「균열」이 잇달아 당선되었다. 그는 초등학교 때 두 번이나 월반을 한 천재 중의 천재였다. 김민부와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동기인 시인 이근배는 ‘시인에게도 계급이 있다면 나는 이등병이고 민부는 4성 장군’이라고 얘기했을 정도로 김민부의 詩才를 극찬했다. 1965년 방송작가로 활동할 때는 장일남이 곡을 붙여 일약 국민가곡이 된 <기다리는 마음>의 가사를 쓰기도 했다. 김민부는 부부싸움 끝에 부인을 밖으로 내보낸 뒤 석유를 뒤집어쓰고 불을 붙여 자살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13D80415835F66E1F)
이근배(1940~)는 22세 때인 1961년 경향신문 서울신문 조선일보에 한꺼번에 시가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1962년에는 동아일보에 시조가, 1964년에는 한국일보에 동시가 당선되었다. 이근배는 지금도 현역 시인 가운데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김승옥(1941~)은 22세 때인 1962년 단편소설 「생명연습」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했다. 그는 서울대학교 불문과에 재학 중이었는데, 잇달아 「무진기행」과 「서울 1964년 겨울」을 발표하여 문단의 큰 호평을 받았다.
이들과 반대로 늦깎이로 등단하여 文名을 날린 작가도 여럿 있다. 늦깎이로되 일찍부터 영재 못지않은 필재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경제부총리를 지낸 김준성(1920~2007. 대구)은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뒤 대구에서 사업으로 크게 성공했다. 대구은행을 설립하여 초대 은행장을 지내면서 단기간에 정착시킨 수완을 인정받아 여러 시중은행장을 거쳐 산업은행과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했다. 경제부총리에 발탁되어 국가경제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으며,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삼성전자와 (주)대우 회장으로 영입되어 활약하기도 했다.
대구로 내려가 다시 사업체를 맡은 김준성은 1983년 장편소설 「들리는 빛」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문학의 길에 들어섰다. 사실 그는 1955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단편소설 「인간상실」이 『현대문학』에 실리면서 등단했던 ‘장롱’ 작가였다. 이후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모두 8편의 장편소설을 잇달아 발표했다. 주제는 중후하고 문체는 유려하여 발표하는 소설마다 문학상을 타고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말년에 이수그룹 회장으로 재임할 때는 이수문학상을 제정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후배 문학도들에게 큰 힘이 되고 있다. 大盜 조세형이 그의 집에서 국내 최고가의 물방울 다이아를 훔쳐 세간에 화제가 된 적도 있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2436B3D5835F69730)
이병주(1921~1992. 경남 하동)는 왜국의 메이지대학과 와세다대학을 다녔다. 와세다대학 재학 중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중국에서 숱한 전투를 경험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해인대학 교수로 재직할 때인 1953년, 부산일보에 장편소설 「내일 없는 그날」을 연재하면서 혜성처럼 등단했다. 신문에 장편소설을 연재함으로써 등단한 건 이병주가 최초였다. 부산 국제신보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옮긴 이병주는 1965년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시작으로 「지리산」「산하」「그해 5월」「관부연락선」「그를 버린 여인」 등 굴곡이 심한 현대사를 소재로 선 굵은 작품을 양산했다. 이병주는 1970년대 최고 인기 작가였다.
김훈(1948~. 서울)은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별명이 딱 어울리는 작가다. 여동생과 함께 고려대학교 영문과에 다니던 중 신문기자로 일하던 아버지가 작고하여 학비 조달이 버겁게 되자, 여동생에게 ‘너는 대학을 안 나오면 사람 구실을 못 할 녀석’이라며 싹싹하게 대학을 중퇴한 뒤 한국일보 기자로 입사했다. 기자로 활동하면서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탁월한 筆才로 꾸준히 에세이집을 냈다. 1994년 47세의 늦깎이로 계간 『문학동네』 창간호에 장편소설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을 발표했는데, 문단이나 친지들 가운데 아무도 그게 소설로서 처녀작인 줄 몰랐을 정도로 그는 이미 필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이후 「칼의 노래」「현의 노래」「남한산성」「흑산」 등 굵직굵직한 작품을 잇달아 발표했다. 기자생활을 그만둔 뒤에는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누비며 주옥같은 수필을 쏟아내고 있다.
첫댓글 문인들에 대한 뭔가 조금 알고 가네.
고맙네.
다들 천재로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