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를 꿈꾸기를 멈춘다면 (외 1편)
한영미 폐허의 복원은 우연한 발견 때문이었지요 유적이 발굴되었을 때 어디에도 사람은 없었어요 숭숭 뚫린 구멍에 석회 물을 부어 넣었더니 놀랍게도 사람 형상이 굳어 나왔다고 해요 허공도 사실은 누군가의 틀이었던 거죠 그래요, 나는 당신 꿈에 주입된 복제본이에요 하지만 그런 당신도 에디션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요 화산 폭발에 놓인 최후의 모습들을 보았어요 죽음이 간절해하는 것은 결국 삶이라는 것을 절박은 누군가의 형틀이겠지요 우리, 라는 자리에 석회 물을 흘려 넣고 싶었어요 껴안은 채 수천 년 묻혔다가 복원된 형상엔 영원도 묻어 있을 까요 기억을 흘려 넣으니, 유적지의 휑한 바람벽조차 그 자리를 지키느라 그리 오래 견뎌왔다는 걸 알겠어요 숱한 감정이 찍혀 나오고 있어요 하지만 그러한 과정이 원형으로부터 점점 마모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당신에게서 나를 깨어내고 있어요
객공(客工)
재봉틀 소리가 창신동 골목을 누비고 있었다 담장이 막다른 대문을 맞춰 다리면 원단 묶음 실은 오토바이가 주름을 잡았다 스팀다리미 수증기 속으로 희망도 샘플이 된던 겨울 어린 객공은 노루발을 구르다 손끝에 한 점 핏방울을 틔우곤 했다 짧은 비명이 짓무른 패턴에 스미면, 엉킨 실은 부풀어 오른 손가락 감고 밤하늘의 별자리를 이었다 이제 그 슬픔도 완제품이다. 붕대처럼 동여맨 구름 자수(刺繡)의 밤하늘은 그녀의 눈물을 진열한 쇼핑센터가 아닐까 화려하게 화려하게 너무나 눈이 부셔서 쪽가위처럼 날카로운 바람에 이따금 실밥처럼 잘려나가는 유성을 보았다 —시집 『슈뢰딩거의 이별』 2024.7 ------------------------ 한영미 / 서울 출생. 2019년 《시산맥》, 2020년 〈영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슈뢰딩거의 이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