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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히브리서의 말씀 4,1-5.11>
형제 여러분,
1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약속이 계속 유효한데도, 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미 탈락하였다고 여겨지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 주의를 기울입시다.
2 사실 그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로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은 그 말씀은 그들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귀여겨들은 이들과 믿음으로 결합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3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갑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리하여 나는 분노하며 맹세하였다.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안식처는 물론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세상 창조 때부터 이미 다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4 사실 일곱째 날에 관하여 어디에선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5 또 여기에서는,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였습니다.
11 그러니 그와 같은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게, 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
✠ 복음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2,1-12>
1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2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3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4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5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6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7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8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9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10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12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선언되었습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르 2,5)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실 앞에 율법학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말합니다.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마르 2,7)
유다인은 예로부터 죄의 용서를 하느님의 고유 권한으로 여겼습니다(탈출 37,4; 이사 43,25;44,22).
그런데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단 한 분, 오직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용서할 수가 없거늘, 감히 누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할 수 있을까? 더구나 하느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을 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마르 2,10)
그리고 그 증거로 중풍병자를 치유하십니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마르 2,11-12).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치유 받은 이들입니다.
이미 용서받은 이들이요, 그러나 그 상처는 지니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상처는 제거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치유 받았음을 보여주는 표지인 까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라는 상처를 ‘하느님 백성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야곱이 ‘엉덩이뼈의 상처’를 ‘축복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처’를 ‘구원의 표지’로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치유받았다고 해서 ‘들것’을 버리고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더 이상 ‘들것’에 매여 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상처’도 그럴 것입니다.
치유받았다고 해서 ‘상처’를 굳이 제거하고 없앨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더 이상 매여 있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는 기꺼이 ‘들것’을 들고 다녀야 합니다.
‘상처’도 그럴 것입니다.
이제는 오히려 ‘들것’에 아픈 형제들을 태워 들고 집으로 가야 합니다.
마치 내 형제들이 나를 ‘들것’에 태워 예수님께 데려왔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들것’ 위에 인류를 태워 아버지께로 들고 가셨듯이 말입니다.
십자가라는 ‘들것’ 위에서 ‘상처’을 받으시고 바로 그 ‘상처’로 보혈의 피를 흘리시고 우리를 화해시키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우리의 ‘들것’입니다.
그 ‘들것’ 위에는 ‘상처’가 새겨져 있습니다.
‘구원’의 표지입니다.
‘사랑’의 표지, ‘용서’의 표지입니다.
그러니 진정 ‘상처’에서 흐르는 용서의 피를 마실 때라야, 우리는 그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것을 구원의 표지로 지니게 됩니다.
용서야말로 진정한 치유를 가져오는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치유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용서하십시오.
용서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느님께서 용서하셨음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이미 치유 받은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마르 2,11)
주님!
들것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가게 하소서.
들것 위에 당신의 사랑을 들고 다니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사랑을 드러내듯, 저를 일으키신 그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합동작전, 합동 믿음>
오늘 복음은 중풍 병자를 다른 사람 넷이 들것에 실어 지붕까지 뚫어가며 주님께 데려가 치유받게 하는 얘기입니다만, 이 과정에서 주님께 용서의 권한이 있는지 권한 논쟁으로 번지는 얘기입니다.
구약 때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병이 죄의 결과, 그러니까 인간의 죄에 대해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신 결과라고 믿고, 그래서 죄의 치유는 벌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라고 믿는데, 주님께서 용서받았다고 하며 치유하시니 그들에게는 독성죄로 보였던 겁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오늘 히브리서나 복음 모두 믿음이건 용서건 용서에 의한 치유건 공동체적인 거라는 점을 가르칩니다.
오늘 치유는 합동 작전으로 이루어지는데, 합동 믿음으로 이루어진 겁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중풍 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이웃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중풍 병자도 치유받고는 싶었지만 그 믿음이 반신반의 상태였는데 이웃들의 믿음이 그를 설득하였을 것이고, 그들의 설득에 중풍 병자는 믿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가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중풍 병자의 부족한 믿음이 이웃의 확고한 믿음에 결합됨으로써 치유가 이루어진 거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히브리서에는 그 반대의 경우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로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은 그 말씀은 그들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귀여겨들은 이들과 믿음으로 결합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같이 복음 말씀을 들었지만, 불신자들은 복음을 귀여겨들은 신자들과 믿음으로 결합되지 않아 결국 복음 말씀이 구원과 행복이 되지 못합니다.
신앙 공동체 또는 믿음의 공동체란 어떤 것입니까?
개인의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믿음이 공동체의 믿음과 결합되어 함께 주님께 나아가고, 함께 구원을 받는 공동체가 아니겠습니까?
믿음의 공동체라면 치유도 공동체적이어야 합니다.
나의 치유를 너의 들것에 맡기고 너의 치유를 위해 내가 들것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은 용서가 오로지 하느님의 권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새로운 가르침은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이지만 꼭 예수 그리스도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들인 우리도 포함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용서의 권한을 위임하신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주님께서는 이 지상 교회에 용서의 권한을 주심으로써 교회 공동체가 하느님의 용서를 사람들에게 베푸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제 생각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용서가 하늘에 이르러야 하고, 우리의 용서가 하느님의 용서와 결합됨으로써 완결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주님의 기도 가르침에서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시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듯 우리가 서로 용서해야 한다는 우리의 단순한 생각과는 정반대이지요.
권한 문제를 떠나서 우리의 용서는 하느님의 용서와 같아야 하고, 하느님의 용서가 우리를 통해 이 땅에서 실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기도하지 않는 영혼은>
천국을 가야 하는데 성직자는 입만 천당에 가고, 수도자는 귀, 일반신자는 발바닥만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자기 안에 갇혀 산다는 것을 빗대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의 삶은 전인적인 성화의 삶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잘못된 선입견을 지붕을 벗겨 내듯이 벗겨 내고 영적 여정을 기쁘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를 하지 않는 영혼은 중풍병에 걸렸거나 손발이 부자유스럽게 된 사람과 같아서, 손과 발에게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듣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만약에 이런 영혼들이 그 커다란 비참을 깨닫지 못하고, 따라서 스스로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롯의 아내가 고개를 돌리다가 소금 기둥이 된 것처럼 자기한테서 머리를 돌린 탓으로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리고 말 것”(영혼의 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중풍환자, 즉 영적인 감각을 상실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성경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접하고도 아무런 깨달음을 갖지 못하고 은총에 감사할 줄 모른다면 장애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읽지 않고 보관만 하고 있거나 또 설령 읽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듣고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상태가 중풍환자나 다름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 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 2,11)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 것을 가지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그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사실 들것에 누워있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일어난다는 것은 부활을 뜻합니다.
그리고 일어나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들것에 누워있습니다.
이제 일어나십시오.
말씀에 따르십시오.
그러면 영적인 감각을 발휘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중풍환자를 예수님께 데려간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넘어야 할 두 가지 장벽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군중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이 가니까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뚜렷한 목적과 소신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나의 인생은 남이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니요, 군중에 떠밀려 가듯이 가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인생의 선장입니다.
두 번째의 장벽은 지붕이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를 들것에 매달아 내려 보냈습니다.
막히면 뚫고 걷어내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위대합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기적을 낳습니다.
그 믿음이 내 믿음이든 다른 사람의 믿음이든 믿음을 갖고 하는 일에는 그에 상응하는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들것에 누워있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고,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은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혹 누워있다면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믿음의 사람이 될까요?
기도하지 않고는 믿음을 성장시킬 수 없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숨을 곳을 찾아 땅을 파는 두더지처럼 몸과 마음을 땅으로 굽힙니다.
그들은 현세적이고 지나가는 세상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성 요한 비안네)
열심히 기도함으로써 영혼의 중풍환자가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의 은총을 평범한 사람들은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하며 하느님을 찬미하였고, 내로라하는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하며 의아해 하였습니다.
스스로 안다고 하는 이들에겐 안다고 여긴 지식이 장애물이고 병입니다.
영혼의 중풍병을 거두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가 하느님의 ‘모든 것’을 받았다고 믿어야만 하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한 중풍 병자를 고쳐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마르 2,10)을 보여주십니다.
중풍이 고쳐지는 것도 성령의 힘이고 죄를 용서하는 권한도 성령께서 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시며 사람에게도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주어질 수 있음을 명확히 하십니다.
하지만 개신교는 하느님께서 당신 살과 피, 곧 당신 생명을 직접 양식으로 주실 수 있다거나 혹은 교회에 죄를 용서하는 권한까지는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교회에, 혹은 인간에게 ‘많이’ 주시기는 하지만 ‘다’ 주신다고는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는 잘 모릅니다.
이는 하느님을 온전하지 못한 부모로 만드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도 하느님처럼 될 수 있음을 믿지 못하게 합니다.
율법 학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이런 말은 겸손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것을 증명할 뿐입니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마르 2,7)
만약 부모가 자녀에게 다 주지 않고 어떤 것은 제한해서 준다면 자녀는 부모의 진정한 자녀로 성장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못합니다.
다 받았다고 믿어야 부모처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부모로 인정하지 못하여 그 못 받은 것을 더 받으려고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덜 받았다고 믿기 때문에 다른 이에게 덜 주어도 된다고 믿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만약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교회에 주지 않았다고 믿는다면 교회는 남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어차피 자신이 믿는 하느님은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자신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받지 못했다고 믿으면 교회는 이웃의 죄를 용서하기가 그만큼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하느님처럼 되지 못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덜 받았다고 믿었고 그래서 선악과를 바치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하느님처럼 되는 길이 막혔습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는 아버지로부터 사랑 받지 못하여 자신도 자녀를 칭찬할 줄 모르는 엄마가 나옵니다.
안타깝기만 합니다.
아이는 엄마를 아줌마라 부르고 새엄마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엄마는 최선을 다하지만 아이는 사랑 받는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받아야 줄 수 있는데 받지 못했기 때문이고 또 자신도 못 받았으니 그렇게 하는 것을 자기도 모르게 합리화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덜 받는 만큼 덜 인간이 됩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내어주는 일이 용서입니다.
부모로부터 덜 받았다고 믿는 자녀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아도 당연하다 여깁니다.
덜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 받은 자녀는 자신이 다 받았기에 용서하지 않으면 이율배반이 되기에 형제를 다 용서합니다.
전에 눈 큰 콤플렉스를 가진 여인이 이무석 박사를 찾아온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을 두고 술집 여자와 바람을 피운 남편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로부터 온전한 사랑을 받았다고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쌍꺼풀이 있는 자기 동생을 더 사랑하고 눈이 작은 자신은 덜 사랑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하고 여전히 아버지에게 사랑받으려고만 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을 정당화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녀가 꿈을 꾸었을 때 남편과 바람을 피운 여자의 눈이 엄청나게 크게 보였던 것입니다.
덜 받았다고 믿는 사람은 자신이 덜 사랑하는 것을 그 믿음으로 정당화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완전한 사랑이 되려면 다 받았다고 믿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사람의 아들에게도 죄를 용서하는 하느님 고유의 권한이 주어져야만 했는지를 강조하셨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받았다고 믿지 못하면 하느님의 온전한 자녀가 될 수 없고 그리면 하느님처럼 되지 못합니다.
이 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합당하지 않다는 뜻이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러려면 모든 것을 받았다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부터 모든 것을 받으셨음을 아셨습니다(요한 3,35; 13,3 참조).
그래서 온전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셨습니다.
모든 것을 받으셨기에 모든 것을 내어놓으셔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은 만큼만 줄 수 있고 그만큼만 하느님을 닮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목숨까지 내어놓습니다.
그러려면 모든 것을 받았다고 믿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신 것입니다.
성체를 영하면서도 혹은 고해성사를 받으면서도 부족하게 받았다고 느낀다면 더는 하느님을 닮아갈 수 없습니다.
항상 나는 하느님의 모든 권한을 다 받은 사람임을 잊지 않으려 노력합시다.
그래야 하느님을 빨리 닮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고통을 없애주지는 못하겠지만, 고통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도와줍시다>
기적적으로 예수님을 만나 치유의 은총을 입은 중풍 병자를 바라보며 제 자신의 발밑도 내려다보게 됩니다.
오랜 세월 중풍으로 온몸이 경직되고 마비된 채 살아온 중풍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낫게 해주겠다!’가 아니라, “애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코 복음 2장 5절)였습니다.
중풍 병자는 몸이 아프기 전에 마음이 아팠던 것입니다.
영혼과 정신이 아팠던 것입니다.
무엇인가에 강하게 억눌리고 짓눌려, 마음이 마비되고 몸이 마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대상이 어떤 사람일 수도 있고 사건일 수도 있고 죄일 수도 있습니다.
돌아보니 저 역시 오랜 세월 홀린 듯이 무엇인가로부터 억압받고 구속받고 마비되어 살아왔습니다.
어떤 것에 사로잡혀 있다는 강박 관념 속에 스스로 빠져나오기란 불가능하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삶이 늘 지지부진하고 부자유스러웠습니다.
이런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말씀을 건네십니다.
“애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오늘 우리는 어떤 것에 사로잡혀 있는지?
우리를 속박하고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절대 실수하면 안 된다는 완벽주의로 인해 힘겨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어떤 한 사람 때문에 온몸과 마음이 마비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그때 내가 대체 왜 그랬을까? 하는 깊은 후회나 상처, 트라우마로 인해 온 몸이 경직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자유로움의 원천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인 우리 각자가 그 무엇에도 억눌리지 않고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아갈 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상처로부터, 죄로부터, 사람으로부터, 부조리한 제도나 관습으로부터, 비인간적인 조건으로부터...
예수님께서는 단기간에 걸친 증상치료가 아니라 심층적인 원인 치료를 행하셨습니다.
사목자인 동시에 치유자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기적같은 능력을 기대합니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해결되는 완벽한 해결책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우리에게는 그런 역량이 없습니다.
다만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처럼 우선 근본적인 치료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대하는 시선을 바꾸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고통을 없애주지는 못하겠지만, 고통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한없이 나약한 존재이며, 대죄인들이며, 중증 장애를 지니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런 조건 속에서도 하느님 현존 안에서 기쁘고 충만히 살아갈 수 있도록 동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심각한 고통과 상처를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 가까이 늘 현존하시면서,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가 일어설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고무하고 격려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려줄 수 있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
오늘 복음 이야기는 “예수님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곧 ‘구원하는 권한’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사람을 구원하시는 구세주” 라는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낸 일은 그들의 믿음과 간절함을 나타냅니다.
병자 자신과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 모두의 믿음과 간절함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간절함은 상황이 대단히 절망적이라는 것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예수님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지붕에 만든 구멍에서 ‘좁은 문’이 연상됩니다(마태 7,13-14).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또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됩니다.
신앙생활은 그렇게 간절하게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붕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고, 그 사람들이 조금도 비켜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이들이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낼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던 군중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예수님 말씀을 듣는 일에만 집중하느라고 지붕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르고 있었을까?
그것은 아닌 것 같고, 그 사람들은 그 모습을 그냥 구경만 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뒤의 12절을 보면, 치유의 은총을 받은 병자가 사람들 가운데를 지나서 돌아갑니다.
그렇다면 병자가 처음에 예수님께 다가가려고 애를 쓸 때에 군중이 조금씩 옆으로 비켜 주기만 했어도 지붕으로 올라가서 구멍을 내는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듣고 있으면서도 마음과 삶에 아무 변화가 없고, 이기심을 버리지도 않고, 이웃의 사정에도 무관심하다면, 그러면 그것은 예수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모습을 구경만 한 것입니다(루카 13,26).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해 주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만일에 통로가 되기는커녕 장벽만 되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실제로 사도들이 그렇게 했다가 예수님에게 혼난 이야기가 있습니다(마르 10,13-14).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독점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는 것은 예수님에게 혼날 일입니다.
여기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는 말씀은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입니다.
이 말씀 때문에 그전까지는 구경꾼이었던 사람들이 적대자로 바뀌게 됩니다.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이신 분’으로 믿고 있고, 하느님과 같은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 믿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지만, 안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로 생각합니다(7절).
만일에 예수님이 그냥 ‘사람’이라면,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다는 율법학자들의 생각은 옳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 사람이시면서 참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율법학자들의 생각은 틀린 생각입니다.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마르 2,9-10)
표현만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한을 율법학자들에게 증명해 보이려고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 병자의 죄를 먼저 용서하고, 그 다음에 중풍을 고쳐 주려고 계획하셨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율법학자들의 생각은 예수님의 권한과 권능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설정된 배경 같은 것이고,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라는 말씀은 “둘 다 어렵다.”, 즉 “둘 다 하느님의 권한과 권능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권능을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권한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게 되면, 하느님의 권한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시자 군중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라고 말하는데(12절), 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9,8).
군중은 예수님의 권한과 권능을 직접 보았으면서도, 예수님을 ‘하느님과 같으신 분’으로 믿지는 않고,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만 생각한 것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교회 공동체에 뿌리 내린 - “개인 신앙”>
어제 요셉 수도 공동체 형제들은 참 좋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마르코 수사님의 예언이 적중하고 말았습니다.
“요셉 수도원의 수도형제들은 순수하다.”
말 한마디 천량 빚을 갚는다 했습니다.
한달 가량 피정을 마치고 떠나면서 왜관 수도원의 박알렉시오 신부님이 감사카드와 더불어 주신 덕담입니다.
이에 마르코 수사님은 웃으며 “프란치스코 수사님이 강론에 인용할 것 같다” 예언하였고, 저는 곧장 오늘 강론 서두에 인용하게 되었습니다.
“순수하다!”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마디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듣고보니 우리 요셉 수도 공동체 형제들의 빛나는 특징은 ‘순수’입니다.
순수한 마음, 순수한 믿음, 순수한 희망, 순수한 사랑은 그대로 ‘주님의 빛’을 반영합니다.
예수님 역시 순수한 이들에게 축복을 전해 주셨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마태 5,8)
알렉시오 신부님의 “순수하다!”란 말마디와 카드 내용을 듣고 후에 게시판에서 읽으면서 새삼 “신부님 역시 순수한 분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마음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수행의 목적도 마음의 순수에 있습니다.
예전 읽은 대목도 생각났습니다.
“기적이나 신비체험에 집착하지 않고 순수한 믿음을 지향하는 것은 종파를 초월한 모든 영성가들의 공통점이다.
비밀스런 능력에 관심을 갖는 인간은 신의 임재속에 살 수 없게 된다.
그러한 현상들이 네 안에 생겨나더라도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마라.
비밀스런 능력을 획득하기는 쉽지만, 마음의 순수에 이르는 길은 몹시 힘들다.
순수함을 소유한 자는 종교의 진정한 모습을 안다.”
인도 힌두교의 신비가 라마크리슈나의 말이지만 참으로 공감이 가는 진리말씀입니다.
이렇게 수도원에 머물다 떠나는 수도형제가 이런 순수한 친필의 카드를 전하기도 처음입니다.
카드에 그림과 더불어 성탄 미사시 입당송인 이사야 9장5절 말씀도 은혜로웠습니다.
“Puer natus est nobis”(한 아기가 우리에게 태어나셨다)
이어지는 신부님의 순수한 마음이 그대로 표현된 친필 내용 전문을 인용하여 나눕니다.
“+ 주님의 평화
요셉 수도원의 여러 형제 수사님들께!
한달 가량 요양하러 온 알렉시오가 진심으로 감사와 새해(설날) 인사를 이렇게 글로나마 올립니다.
지내는 동안 요셉성인상(특히 정문옆 성가정상과 주차장 앞 아기 예수님을 안은 요셉상)에 감동했습니다.
그리고 성전 출입구 신장 맞은편 창문턱에 편안하게 잠든 작은 요셉상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여기 수사님들이 이런 요셉 상에 잘 어울리고 물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불암산보다 옛 이름인 천보사天寶山이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늘이 보호하는, 하늘의 보화인 이 산속에서 부디 묻혀 있는 보물을 찾으시기를 빌며 감사드립니다.
Alex”
얼마나 멋진 순수한 편지글인지요!
하늘의 보물같은 정주의 천보산天寶山처럼 순수한 믿음의 정주의 삶을 사는 것은 우리 베네딕도회 정주 수도자들의 소망이기도 할 것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천장암天藏庵이란, ‘하늘 보물을 감추고 있는 암자’란 이름의 서산 개심사에 있는 불가의 유명한 선사 경허 스님이 머물더 암자이름도 생각났습니다.
한때는 제 집무실 명칭도 천장암天藏庵이라 불렀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중풍병자 동료들의 믿음은 얼마나 순수한지요!
말 그대로 순수한 마음, 순수한 믿음, 순수한 희망, 순수한 사랑의 결정체같은 동료들의 믿음입니다.
여기서 착안한 강론 제목이 바로 “교회 공동체 안에 뿌리 내린 개인 신앙”입니다.
무한한 믿음의 살아 있는 보물창고가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개인의 믿음은 약해도 공동체의 믿음은 무궁무진한 힘이 있습니다.
혼자서는 결코 순교의 죽음 못합니다.
교회 공동체에,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에 깊이 뿌리 내릴 때 비로소 가능한 사랑의 순교, 순교의 죽음입니다.
이래서 순교는 성체와의 결합이라 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에 날로 깊이 뿌리내릴 때 튼튼히 성장, 성숙하는 순수한 믿음입니다.
공동체에서 뿌리 뽑힌 개인신앙은 쉽게 변질되며 얼마 못가 시들어 죽어버립니다.
이래서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성전에서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가 그렇게 고맙고 소중한 것입니다.
기도도. 믿음도, 삶도 반드시 하느님 중심에 더불어와 홀로, 공동체와 개인이 조화와 균형을 이뤄야 함은 영적 삶의 필수적 리듬이기도 합니다.
제 좋아하는 미사경문 중 한 대목도 이와 일치합니다.
영성체 예식 중 주님의 기도 후 평화예식 중 경문의 일부입니다.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되게 하소서.”
이렇게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공동전례기도를 통해 교회의 믿음에 깊이 뿌리 내릴 때 날로 성장, 성숙하는 오로지 주님 향한 순수한 믿음, 순수한 희망, 순수한 사랑입니다.
교회의 믿음에서 그 무엇보다 결정적 도움을 받는 것은 성모님의 전구입니다.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가장 많이 청하는 것도 형제들의 기도와 성모님의 전구입니다.
대림 제1주일부터 2월1일 까지 매일 잠자리에 들기전 바치는 성모찬송가는 곡도 가사 내용도 얼마나 아름답고 깊고 은혜로운지 요즘 새삼 깨닫습니다.
라틴어 가사를 해석한 우리말이 좋아 전문을 인용합니다.
“구세주의 존귀하신 어머니,
영원으로 트인 하늘의 문, 바다의 별이시여,
넘어지는 백성 도와 일으켜 세우소서.
당신의 창조자 주님 낳으시니, 온 누리 놀라나이다.
가브리엘의 인사 받으신 그 후도 전과 같이 동정이신 이여,
죄인을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 육신의 친모는 돌아가셨어도 우리의 영원한 마리아 성모님은 천군만마처럼 늘 우리를 위해 전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의 전구는 “영(0)” 순위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복음의 중풍병자보다 행복합니다.
수도형제들의 믿음과 더불어 성모님의 전구가 늘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것은 우리의 간절한 믿음, 순수한 믿음입니다.
참으로 소망이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할 때 믿음은 순수할 수 뿐이 없습니다.
궁즉통(窮卽通), 궁하면 통한다 했습니다.
동료들의 순수한 믿음의 눈은 활짝 열려 절망적 상황안에서 예수님께 도달할 길을 발견한 것입니다.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를 들것에 실어 내리는 참으로 기발한 착상입니다.
어제는 푸근하기가 겨울속의 봄처럼 느껴졌습니다.
얼마전은 겨울눈이었는데 오늘 밤에 계속 내리는 겨울비는 흡사 봄비처럼 느껴져 참 푸근하고 상쾌했습니다.
겨울속의 봄이, 흡사 절망속의 희망, 죽음속의 생명, 어둠속의 빛처럼, 파스카의 신비를 연상케 했습니다.
결코 절망은 없다는 것입니다.
절망적 상황에서 순수한 믿음, 순수한 희망, 순수한 사랑을 지닌 중풍병자의 동료들은 예수님의 치유 구원을 체험한 것입니다.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감동하신 주님은 즉각적으로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영혼을 치유하시고, 이어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게 함으로 육신을 치유해 주심으로 영육의 전인적 치유의 구원을 완성하십니다.
“예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동료들의 순수한 믿음으로 용서 받는 중풍병자처럼 우리는 이 거룩한 미사중 교회 공동체의 믿음으로 용서를 받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
흡사 미사가 끝나고 치유 구원된 우리를 향한 파견 말씀처럼 들립니다.-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 말씀은 오늘 복음과 연결되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바로 파스카 예수님이,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가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임을 깨닫습니다.
히브리서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우리는 기쁜소식을 들었습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갑니다.
안식처는 물론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세상 창조 때부터 이미 다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합시다.”
이미 히브리서 저자의 권고대로 이 거룩한 교회 공동체 미사를 통해 순수한 믿음으로 영원한 안식처를 앞당겨 체험함으로 복음의 중풍병자처럼 영육의 전인적 치유를 받는 우리들입니다.
이와 연관된 제가 요즘 제일 좋아하는 성가 177장 “만나를 먹은 이스라엘 백성” 성체성가 2절을 나눔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참 기쁨이 넘치는 그곳 내 주님 계신 곳,
내 모든 근심 슬픔을 다 위로하여 주시네.
약속한 땅이여 오 아름다운 대지여,
영원히 머무를 젖과 꿀이 흐르는 그곳,
이 빵을 먹는 자는 그 복지 얻으리,
아, 영원한 생명의 빵은 내 주의 몸이라.”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계속해서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예수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어제의 나병 환자 치유에 이어 오늘은 중풍 병자 치유 이야기입니다.
나병 환자와 중풍 병자는 예수님의 치유기사의 단골 메뉴로 자주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당시 가장 무섭고 힘든 병으로 알려졌고, 그래서 이는 자기나 조상들의 죄 때문에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느님도 외면하는 공적인 죄인이었고, 하늘 나라에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천형(天刑)을 받는다고 여겨졌던 사람들을 그 고통에서 치유시켜 주십니다.
그러나 육신의 치유가 곧 구원은 아니었습니다.
반쪽짜리 구원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고 하십니다.
육신은 치유되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어 기쁠지는 몰라도 그는 여전히 천형을 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심으로써 이제는 영육이 온전히 치유되어 구원을 받게 되었고 하늘 나라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배려요 안배입니까?
사람들은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병이 나아 걸어가라" 하면 이해하겠는데 "죄를 용서받았다니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할 수밖에 없겠지요.
예수님의 목표는 단순히 육신의 병 치유가 아닙니다.
그분의 목표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 모두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쓰자"(히브 4,11)고 독려합니다.
"하느님의 안식처에 우리 모두가 들어갈 수 있다는 약속이 유효한데도 이미 탈락하였다고 여겨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기울이자"(히브4,1)고 강조합니다.
이 기쁜 소식을 모두 들었는데, 그걸 믿고 확신하는 사람은 안식처로 들어가게 되고(히브 4,2-3 참조), 불신하고 불순종하는 이들은 그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느님 친히 맹세하셨다고 전해줍니다(히브 4,3. 5 참조).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여러분은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확신하시나요?
아직도 자신이 없으신가요?
왜요?
여러분이 지은 죄와 허물 때문입니까?
여러분이 더 많이 기도하고 자선을 베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까?
성질이 더러워서 혹은 성당에 잘 못나가서 그렇습니까?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이 모든 죄와 허물과 악습을 덮지 못할 것으로 여기십니까?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 모든 죄가 사함을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상 우리는 모두 하늘 나라의 상속자들입니다.
이것을 믿기만 하면 하늘 나라는 우리 가까이에 와 있습니다.
이것을 믿지 않는다면 하늘 나라는 우리에게서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을 믿고 그 믿음으로 한 걸음 내딛는 사이 어느새 우리는 안식처에 가 닿습니다.
그래서 모든 과정이 소중합니다.
오르막길이건 내리막길이건 꽃길이건 가시밭길이건 진흙탕이건 이 과정이 하느님께로 가는 길목임을 믿고 견딘다면, 모든 과정은 우리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지탱해 줄 버팀목이 될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갑니다."(히브 4,3)
여러분도 그러하시길 축원합니다.
중풍 병자는 예수님을 만나러 올 때 제 발로 걸어오지 못했습니다.
그 병이 워낙 사람의 일부분이나 전체를 마비시켜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니까요.
그는 자신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려는 벗들에 의해 들것에 실려왔고, 예수님이 계시던 집에 이르러서는 지붕까지 올려졌다가 밑으로 달아서 내려지는 조마조마한 순간을 겪습니다.
이 과정은 우리 삶에서도 종종 일어납니다.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해도 부지불식간에 벗들의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난관에 부딪혀 더 나아가지 못할 때 위험천만하게 들어 올려졌다가 달아 내려지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모두의 노력을 가상히 보신 예수님 덕분에 치유받고 용서받습니다.
이제는 그동안 자기의 병을 상징했던 들것을 직접 들고 성큼성큼 걸어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나를 주님 앞으로 데려와 치유와 죄사함의 은총을 받도록 도와준 벗님들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나의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당신의 자비로 하해와도 같은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어 하늘 나라로 초대해 주신 주님께 깊은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벗님들, 고맙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교회를 상징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교황님을 중심으로 하는 교계제도가 있습니다.
바티칸은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구심점입니다.
교계제도는 이단과 분열을 막아주는 방패가 됩니다.
교계제도는 신학과 교리의 오류를 식별합니다.
교계제도는 사적계시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지 판단합니다.
저 역시 교계제도의 ‘틀’에 의해서 사제가 되었고, 교계제도의 ‘인사이동’에 의해서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교계제도는 다양한 목소리를 경청하거나, 새로운 시대의 표징을 읽는 유연성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교계제도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는데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교회는 다양한 방법으로 지역교회의 의견을 경청하고 있습니다.
지역교회의 다양한 의견을 담은 시노드의 문서가 교황청에 전달되었습니다.
이제 대륙별로 시노드의 의견이 정리되면 시노드의 최종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시노드의 의견을 청취하고, 식별하여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데도 3년은 넘게 걸립니다.
2000년 동안 교계제도가 이어지는 것은 교계제도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성령께서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시노드를 통해서, 공의회를 통해서, 교회의 법과 제도는 시대의 흐름에 맞게 수정되기도 하고,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세상을 향해 교회의 창문을 활짝 열었던 공의회였습니다.
라틴어로 사용되던 전례를 자국어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평신도가 교회의 활동에 더욱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사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성사를 통해서 시작되고, 성사를 통해서 성장하고, 성사를 통해서 완결됩니다.
성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이 물질과 형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세례의 품격이 높아졌습니다.
세례성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이고, 죄를 용서받는 선물입니다.
견진성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복음의 사도로 이끌었듯이 세례 받은 신앙인이 그리스도의 사도가 될 수 있도록 성령의 은사를 줍니다.
고백성사는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품어주고 잔치를 베풀어준 자비로운 아버지처럼 회개하는 이들이 공동체와 하느님 앞에 화해할 수 있는 성사입니다.
병자성사는 예수님께서 고생하며 수고하는 이들은 모두 내게로 오라고 하셨듯이 아픈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성사입니다.
혼인성사는 나자렛 성가정이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였듯이 부부가 가정을 이루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허락하시는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신품성사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교회에 봉사할 사람을 선발하는 성사입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몸과 피를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내어주시는 사랑의 성사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우리들 또한 우리의 몸과 피를 기꺼이 이웃을 위해서 나누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사탄이 교계제도와 성사의 ‘울타리’를 부수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시기, 질투, 욕심, 분노와 같은 것들입니다.
시기, 질투, 욕심, 분노는 늘 상대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상대와 화해하거나, 상대가 용서를 청하면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마지막 수단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절망과 낙담’이라고 합니다.
유다와 베드로는 똑같이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베드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고, 예수님께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절망하였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우리의 죄가 크기 때문에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 죄가 크다 할지라도 우리가 희망을 끈을 놓지 않는다면, 우리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간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교계제도와 성사의 ‘울타리’에서 우리가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우리가 잘못한 것을 뉘우친다면,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용서한다면, 우리는 모두 희망으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약속이 계속 유효한데도, 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미 탈락하였다고 여겨지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 주의를 기울입시다.
그와 같은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게, 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 기억납니다.
어머니께서 제 위의 누님에게 식사 후에 무엇인가를 먹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누나는 어머니의 강압에 의해 억지로 그것을 먹어야 했지요.
그런데 당시에 너무 배가 고파서 누나만 무엇인가를 주는 어머니가 미웠고, 누나가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모두 자는 밤에 몰래 나와 그것을 훔쳐 먹었습니다.
달콤한 사탕이 아니었고, 생각보다 너무 썼습니다.
하지만 물을 마시며 억지로 몇 알을 삼켰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에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부엌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저를 발견한 어머니는 옆집 친구분을 불러 저를 업고 병원 응급실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더 큰 병원에 가라는 말을 듣고 또 저를 둘러업고 더 큰 병원 응급실에 가서 저는 살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그때 제가 죽는 줄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눈이 뒤집혀 있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친구분이 오셔서 정신없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저를 업고 병원으로 간 것입니다.
병원에 가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다시 깨어나는데 저의 역할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프니 병원에 가자고 한 것도 아니었고, 아프다고 말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가장 믿었던 옆집 친구를 불렀고, 그 친구분은 병원을 믿었습니다.
어렸을 때의 일이 떠올려진 이유는 오늘 복음 때문입니다.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애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라고 말씀하십니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중풍 병자였지요.
그의 곁에는 예수님을 통해 치유 받을 것이라고 믿었던 그래서 지붕을 뚫고 내려보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의 믿음으로 병원에 간 것이 아닌 것처럼, 중풍 병자의 믿음을 보고서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고쳐 달라고 하지 않았지만 의사 선생님께서 어머니와 친구분을 보시고 고쳐 주신 것처럼, 중풍 병자가 고쳐 달라고 달려오지 않았아도 예수님께서는 친구들을 보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이렇지 않을까요?
내가 열심히 해야 구원받을 것 같지만, 내 곁에 있는 사람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곁에 있는 많은 사람을 두어야 할까요? 아니면 그들을 내쳐야 할까요?
함께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구원을 위해 큰 힘이 되는 그 누군가를 위하여 함께 할 수 있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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