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눌(李安訥)-送人朝天(송인조천)(이른 새벽 임을 보내며)(이별하는 이 새벽)
落月落何處(낙월락하처) 달은 지면 어디로 가는가
蒼茫遼海西(창망요해서) 아득히 멀고 먼 서해로 간다네
君今向此去(군금향차거) 그대도 저 달 따라가니
那得不悽悽(나득불처처) 내 어찌 슬프지 않으리
*위 시는 “생각이 맑아지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한시 김용택의 한시산책1(김용택 엮음)(화니북스)”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김용택님은 “한시에서 님과 이별하는 시간은 대개 새벽입니다. 하기야 지금처럼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으니 새벽부터 일어나 걸어가야겠지요. 그 새벽이라는 말이 이별하는 데 있어서 더욱 아쉽고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어슴푸레한 새벽에 님을 보내는 마음, 그 새벽빛에 가슴이 무너지는 것을 느껴보았다면 찾아온 사랑 절대 놓지 마세요”라고 감상평을 하셨습니다.
*이안눌[李安訥, 1571년 ~ 1637년,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동엄(東广).]-조선 중기의 시인, 문신. 당대의 전쟁 체험과 현실 인식의 다양한 층위를 보여주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의 시는 시어가 쉬우면서도 서정적이어서 긴 여운을 남긴다.
이행(李荇)의 증손으로 아버지 진사 형(泂)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0여 세에 시 지은 것이 이미 10여 권이어서 기동(奇童)의 일컬음이 있었다. 18세에 진사 초시에 장원하고 한성시에 뽑혔으나 시샘을 받아 비방이 있자 벼슬길에 뜻 두지 않고 정작(鄭碏)·권필(權韠)·윤근수(尹根壽)·이호민(李好閔) 등과 교유하였다. 29세(1599) 때 다시 과거를 보아 정시에 급제하였다. 예조정랑을 거쳐 1601년 서장관이 되어 조천하였고, 같은 해 겨울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원접사의 종사관이 되어 중국 사신의 찬탄을 받았다. 이후 20여년 간 함경도 단천군수를 비롯하여 충청도 홍주, 경상도 동래, 전라도 담양, 금산, 경주, 경기도 강화 등의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54세(1624) 때 이괄의 난을 방관하였다 하여 경원에 유배되었다가 4년만에 풀려나 강화류수 및 함경도관찰사를 제수받았다. 인조 10년(1632)에 명나라에 주청부사로 가서 오랜 숙원이던 원종(元宗)의 추존을 받아왔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중에 남한산성에 호종하였고, 환도한 뒤 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떴다. 문집 ≪동악집 東岳集≫ 26권에 모두 4,379수의 방대한 시가 전하며, 문은 남기지 않았다. 평생 두시를 만 번 읽은 것으로 유명하고, 시의 조탁에 힘을 쏟아 굳세면서도 차분한 시격을 이루어 권필과 함께 동국의 이백·두보로 일컬어졌다. 임진왜란 후 동래부사로 재임하면서 지은 <사월십오일 四月十五日>은 임진왜란 당시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노래한 절창으로 꼽힌다. 이밖에 당대의 전쟁 체험과 현실 인식의 다양한 층위를 보여주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의 시는 시어가 쉬우면서도 서정적이어서 긴 여운을 남긴다. 숭록대부의정부좌찬성 겸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을 추증하였다. 뒤에 담양의 의암서원(義巖書院)과 면천(沔川) 향사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혜(文惠).
*蒼茫(창망) : 1.물이 푸르고 아득하게 넓은 모양(模樣), 2.넓고 멀어서 아득함.
*那得(나득) : 어찌~을 하다.
*不悽悽(불처처) : 슬프지 않겠는가. 반어적인 표현
첫댓글 헤어짐의 안타까움이 새벽의 여명과 함께
더욱 절절히 다가옵니다....
사랑하는 님과의 헤어짐... 그것은 아픔입니다....
이별은 언제나 서러운 거 같아요,
회장님의 멋진 댓글에 감사드리고,
행복한 금요일과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같은 심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