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암(落花巖) 朴籌丙
낙화암이라, 나 같은 늙은이도 이 바위에서 떨어지면 꽃이라 할까? 독하기도 하지, 진정 맨정신으로 천야만야한 이 낭떠러지에 떨어졌더란 말인가?
반쯤 내린 부소산 그늘을 머금고 백마강은 곤곤히 흐르는데, 정자 한 채가 바위 위에 외로이 서있다. 조금은 오연하게 조금은 도도하게 여섯 모 추녀를 화개(華蓋)처럼 활짝 펼치고 사뿐히 내려앉은 자태가 천하절염이다. 백화정(百花亭)이란 현판 세 글자가 사람의 심사를 더욱 쓸쓸하게 한다. 꽃처럼 떨어져간 삼천궁녀의 넋을 어찌 이 작은 정자 하나만으로 다 기릴 수가 있으랴만은 후세 사람들이 그냥 있기가 너무 애틋해 정자라도 하나 세우자 했겠지. 칠백 년 백제 왕업이 부질없다고 느껴지는데 바람에 우는 고란사(皐蘭寺) 풍경소리가 마냥 슬프다. 고란사라, 바위 하나 지고서 엎드린 자그마한 자태가 암자라 해야 어울리겠는데 어째서 절이라 했는가? 사바의 염착(染着)을 다 털어 버리지 못한 게로구나!
고란사 아래 샘물이 솟아난다. 온갖 병에 다 좋다면서 줄을 섰다. 어린 여비서와 나는 서로 차례를 양보하느라 작은 소요를 피우는데 저만치서 한 일행이 얼씨구나 하고 급히 카메라를 들이댄다. 먼저 물을 마시고 난 그녀가 나를 보며 배시시 웃는다. 웃음이 딴 사람한테 들킬까 봐 얼른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얼굴을 돌린다. 의자왕의 호사도 이렇게 풋풋하지는 못했을걸.
고란사를 돌아드니 세 폭 벽화가 눈길을 끈다. 의자왕이 주색에 곯아서 위장병을 얻었는데 부소산에 자생하는 고란초를 달여 먹었다는 전설이 있고 보면 그 탕액인지 그냥 약수인지 궁녀가 그걸 의자왕께 바치는 그림이 있고, 서기 518년에 ‘시마메’ ‘도요메’ ‘이시이’라는 일본 소녀 셋이 비구니가 되기 위해 천만 리 파도를 헤치고 이 난야(蘭若)로 찾아들었다는 소설 같은 설명이 붙은 그림이 경이롭다. 뒤에는 적군이 쫓아오고 삼천 궁녀가 치마를 뒤집어쓰고 낙화암에서 떨어지는 그림이 압권이다. 이 낙화암 그림을 보면서 나는 왜 뜬금없이, “나라는 망해도 산하는 남았다”(國破山河在)라고 한 두보의 초연(愀然)해 하는 모습을 그려보는 걸까?
노래하고 피리 불며 붉은 치마에 취했네. 서쪽 바다 해명(海鳴) 소리 기벌포를 울려도 탄현 고개 저 너머에 음산한 기운 진을 쳐도 태풍의 전조인 줄 알았는가 몰랐는가?
오천 결사대,
황산벌 계백장군 한을 품고 쓰러지고 백마는 히힝 히힝 땅을 차며 길게 울었었지.
구중궁궐 깊은 밤 처마 끝 풍경은 누굴 위해 울었는가? 타오르는 가슴 누르고 누르며 이리저리 뒤척이며 속속곳 단속곳 풀지 못해 동정녀로 늙어가도 허울은 의자왕의 여자라서 목숨보다 절개였나?
두 눈에 핏발 선 적군한테 그 서시옥시를 더럽히느니 차라리 이 절벽에 꽃처럼 하르르 내려앉으려 했단 말까. 죽어서도 적군의 눈에 띄기 싫어 은장도 뽑지 않고 네 폭 치마 뒤집어쓰고 한 많은 그 한 몸, 돌멩이 버리듯 던진 곳이 정녕 여기더란 말이냐?
부소산 귀촉도는 밤마다 피를 토하것다. 고란사 종소리는 목이 덩달아 쉬었것다. 산 그리매 부여잡고 울며 돌아가는 백마강! 조각배 황포돛대도 지칫거린다. 꽃 떨어져 낙화암이냐. 떨어져 꽃 되어 낙화암이냐? 말해다오! 사천궁녀야!
마음에도 없는 녹록한 일을 마지못해 하면서 약약한 세월을 보냈을 궁녀들, 미친 파도에 쓸리는 명주(溟洲)처럼 낙도(落島)처럼 외로웠던 그 세월이 한세상 기방(妓房)에서 청춘을 늙힌 한 여자의 내력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천길 벼랑 아래로 몸을 던지려 할 때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떨렸을까. 그 장면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 온다. 그 낙화의 의미를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어떻게 헤아려야 할지 나는 알지 못한다. 물어보자 삼천궁녀야! 네 간 곳이 어드메냐?
『삼국사기』에, 궁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는 걸 보면 삼천궁녀 이야기는 후세 사람이 꾸며낸 것이라고 한다. 의자왕은 주색에 빠지지도 않았고 정사에 게으르지도 않았으며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게 항복한 곳은 부여가 아니라 웅진(공주)이라고 한다. 일본 소녀 이야기는 어쩐지 왜색이 짙듯이 낙화암 삼천궁녀 이야기는 왜인이 모종의 정치적 야욕으로 그럴 듯하게 조작한 거라고 하는 설도 있다. 고로상전(古老相傳)의 야화 같은 허구이든 왜인이 조작한 것이든 나는, 낙화암에서 지고지순한 사랑을 읽는다.
안내양은 여정이 빡빡하다고 고삐를 다잡는데 일행은 뒤를 자꾸 돌아보며 늙다리 황소걸음이다. 좋은 구경했다고 떠들썩하지만 나는 말이 싫다. 어린 여비서는 말없는 나를 보고 어디 아프냐고 조심스레 묻는다. 나는 되물어 답을 한다. “너는 아프지 않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