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주 하느님,
성자 그리스도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며 비오니
그분께서 저희를 찾아와 문을 두드리실 때
깨어 기도하고 찬미하며 그분을 맞아들이게 하소서.
제1독서
<주님께서 영원한 평화의 하느님 나라로 모든 민족들을 모아들이신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2,1-5
1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환시로 받은 말씀.
2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3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4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5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복음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하늘 나라로 모여 올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5-11
5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백인대장이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
6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7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자, 8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9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10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11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이 구조를 갖추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종인 중풍 병자를 고치십니다. 로마 백인대장은 종을 위해 자기를 낮출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가서 고쳐주시겠다고 하시는데,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미사 때 성체를 바라보며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라고 고백하는 믿음의 원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라고 하십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에 지배당하는 상황이었고, 일제 강점기로 보자면 일본군 높은 장교가 한 시골 선생에게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이 없으니 한 말씀만 하시면 자신의 종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겸손해질 수 있었을까요? 희망과 믿음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교만할 수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가끔 남자와 여자가 사귀다 보면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자신이 잘났기 때문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처음엔 ‘나 같이 자격 없는 사람을 사랑해주다니 정말 감사하네!’라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저 사람이 나에게 자격이 되나?’라는 교만한 생각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면 둘의 사랑은 실제적으로는 끝난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겸손이 사라지면 사랑도 믿음도 희망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질까요? 진정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은 그 사랑이 자기 능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하십니다. 사랑은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제가 자주 사용하는 예가 있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아들을 너무 사랑했지만, 그래서 많은 애정을 쏟았지만, 결국 아들에게 미움을 받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 이유는 어머니가 아들의 아내를 못살게 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 어머니에게 잘못이 무엇일까요? 사랑을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어머니가 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는 우리의 어머니가 되시기 위해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아버지께 순종하도록 이끄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혼자 자녀를 사랑하면 자녀로부터 미움을 받게 됩니다. 순종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순종을 배우지 못했다는 말은 큰 자아만 남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어머니가 자녀를 참으로 사랑한다면 남편과 자녀에게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혼자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 위를 걷는 베드로를 상상해봅시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고 있을 때 교만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 덕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고도 배 위에 머무는 이들은 교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예수님인가? 물 위를 걸으려고 하게?”라며 베드로를 나무랄 것입니다.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나를 가장 사랑해주신 분처럼 나도 그분을 사랑하고 나의 자녀들도 그분처럼 사랑할 수 있도록 순종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따라서 백인대장이 이미 종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사랑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압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원천을 쉽게 알아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겸손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도 맞겠지만, 믿기 때문에 겸손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도 예수님께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실 때 주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나는 일분일초도 생존할 수 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 분임을 믿는 것은 이렇게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게 하여 주님께 합당하지 못한 존재임을 알게 합니다. 이때 심지어 저는 예수님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격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겸손함은 결국 하느님 앞에서는 너무 당연하고 이웃 앞에서도 상대를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이 없다는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따라서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사랑하지도, 믿지도, 그래서 희망할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가 자주 쓰는 말 중에 남을 아프게 하는 말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일부러 아프게 하는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평상시에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말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큰 아픔을 주는 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미망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많이 사용하지 않습니까? 이 뜻은 남편을 여의고 혼자 된 여인입니다. 그런데 한자 뜻을 살펴보면, 아닐 미(未), 죽을 망(亡), 사람 인(人)으로 ‘죽지 않은 사람’입니다. 바로 여기에는 남편이 죽으면 아내도 따라 죽어야 한다는 유교적 사상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살색’ 역시 황인종 중심의 사고로, 피부색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표현입니다. 또 ‘결정 장애가 있다’도 그렇습니다. 무언가를 결정할 때 주저하는 사람을 두고 흔히 하는 말이지만, 장애를 단순한 불편함이 아닌 부족하고 열등한 것이라고 바라보는 시선이 깃들여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아프게 할 수 있는 말을 자기도 모르게 사용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도 그런 잘못을 많이 범했음을 반성합니다. 실제로 제 말을 듣고서 크게 상처를 받았다면서, 한동안 저를 많이 원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조심해도 계속해서 실수할 수 있는 우리였습니다. 따라서 최대한 기쁨과 희망을 줄 수 있는 말을 하는 데 노력해야 그나마 아픔을 주는 말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요?
백인대장이 예수님을 찾아와 도움을 청합니다. 자기 종이 중풍으로 몹시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백인대장의 대답이 의외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말이 기억나십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고 계속해서 표징만 보여달라는 말이었고, 예수님이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서 기적을 행한다면서 철저하게 반대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인 로마의 백인대장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진정한 회개와 겸손의 말이었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의 말이었습니다. 이 말에 감탄하시며 이렇게 이르십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우리는 과연 어떤 말을 하고 있습니까? 특히 주님께 하는 말은 어떠했습니까?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에서 나오는 겸손과 감사의 말이었습니까? 아니면 주님께 대한 불평에서 나오는 불평과 원망의 말이었습니까? 우리의 말에 주님께서는 기뻐하실까요? 아니면 슬퍼하실까요?
오늘의 명언: 길이 막혔다면 원점으로 돌아가세요. 미로에서 헤매느라 실마리를 찾지 못할 때는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의외로 색다른 발견을 가져다 줄 수 있답니다(쿠니시 요시히코).
사진설명: 백인대장의 믿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