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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히브리서의 말씀 4,12-16
형제 여러분,
12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13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14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15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16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2,13-17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14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나를 따라라.">
오늘 복음은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마르 2,14).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앵무새처럼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다람쥐처럼 행실로만 본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단순히 겉으로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가치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인격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의 전환입니다.
곧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삶의 방식이요, 용서와 자비의 삶의 방식이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마르 2,16) 방식입니다.
죄인이기에 단죄하고 처벌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눈과 방식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눈과 방식인 것입니다.
그야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요, 나아가서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로마 8,29; 필립 3,10)이요, “그분의 형상을 지니는 것”(1코린 15,49)이요, “그리스도를 입는 것”(로마 13,14; 갈라 3,27; 콜로 3,10; 에페 4,24)을 말합니다.
곧 단순히 도덕적 치원에서 이루어지는 모방을 넘어서는 신비주의적 차원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단죄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사실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불결한 이들과의 접촉은 그도 불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식사를 하신 것은 단순히 그들과의 타협도, 그들을 두둔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였습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인들과 함께 어울린다’고 비난하는 것은 마치 의사가 병자들과 함께 있다 하여 비난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실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을 나누는 것이요,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써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 놀라운 감격입니까?
이는 죄인을 ‘먼저’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앞세우기보다 ‘먼저’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먼저’ 죄인을 찾아오시고,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보다 ‘먼저’ 당신을 건네주십니다.
우리 역시 죄지은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해야 할입니다.
오늘도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마르 2,14)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 2,17)
주님!
당신께서는 제가 죄인이기에 부르셨습니다.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명 저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그처럼 용서하라 하십니다.
그렇게 당신을 따르라 하십니다.
오늘 제가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귀히 보시는 주님>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유심히 보면 이상할 수도 있는 점이 오늘 주님의 행보에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호숫가로 나가셨는데 산책하러 가신 것은 아니겠지요?
군중이 몰려온 것을 보면 회당이 바리사이들의 주 무대인 것과 달리 호숫가는 주님이 즐겨 가르침을 주시던 장소인가 봅니다.
회당이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던 공식적인 정통 모임 장소라면, 호숫가는 우리의 서울역 광장처럼 사람들이 많이 오가던 곳인데, 주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도 가르치셨지만 아무 때나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을 찾아가 가르치시던 비공식적이고 비정통의 모임 장소였을 겁니다.
아무튼 호숫가에 계실 때 많은 사람이 주님께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 가운데서 제자를 부르지 않으시고,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당신을 찾아온 사람들 중에서 그러니까 당신의 말씀을 경청하는 사람들 중에서 제자를 뽑지 않으시고 찾아오지 않은 사람, 그러니까 별 관심이 없던 레위를 뽑으신 걸까요?
그리고 레위는 당시 죄인으로 지탄을 받는 질이 좋지 않은 사람인데 주님께서는 왜 이 죄인을 당신 제자로 뽑으신 걸까요?
이것을 저희 수도원 성소계발과 관련시키면 대단히 파격적인 거지요.
저희는 아무나 성소자로 받지 않기 위해 믿을만한 분의 추천을 받고 여러모로 검증한 뒤 여러 성소 위원들의 합의를 거쳐 받아들이는데, 이것에 비하면 주님께서는 매우 즉흥적으로 당신 제자를 뽑으시고 아무나 당신 제자로 받아들이시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정말 아무나 받아들이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눈과 우리 기준으로 볼 때 아무나 받아들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주님과 우리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눈에 아무나인데 주님께는 아무나가 아닙니다.
레위가 우리 눈에는 아무나이고 죄인인데, 주님 눈에는 귀한 집 자식이요 또 하느님의 자녀요 당신의 제자감입니다.
사실 아무나를 아무나로 보지 않고 귀히 보시는 주님의 눈, 곧 사랑의 눈 때문에 저도 주님의 귀한 제자가 될 수 있었고 또 된 거지요.
어쩌면 주님의 기준은 당신의 부르심을 귀히 여기고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 그것 하나일 것이고, 그래서 오늘 레위를 제자로 받아들이시고 죄인들과 식사를 같이 하시는 주님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제자가 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그 유명하고 대단한 말씀을 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러니까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는 다 찾아가시고 다 부르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런 주님께 큰 감사를 드리는 오늘이고 우리들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따뜻한 가슴을 요구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신임 추기경에게 보낸 서한에서 “추기경이라는 직위는 승진이나 명예의 상징이 아니라 넓은 시야와 광활한 가슴을 요구하는 봉사의 자리”라며, “멀리 보고 보편적으로 사랑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은 겸손의 길을 걸은 예수의 길을 따라야만 갖출 수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아울러 “추기경이라는 자리를 기쁘면서도 검소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달라”며 “금욕과 청빈이라는 복음의 정신에 맞지 않는 축하연을 열어선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관저 대신 바티칸의 작은 아파트에서 다른 성직자들과 함께 지내고, 방탄 리무진 대신 포드 승용차를 타는 교황은 자선단체를 돕기 위해 선물로 받았던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를 경매에 내놓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따뜻한 가슴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라라”(마르 2,14)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위는 마태오라는 세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세리는 세금징수를 위임받은 사람입니다.
세리들은 이스라엘 사람으로 이스라엘을 식민통치하는 로마인들의 하청을 받아서 세금을 거두어 바치던 사람입니다.
이들은 세무당국과 계약을 맺어 세금을 징수했는데, 정한 액수보다도 더 많이 거둬들여 차액을 착복하는 경우도 많았고, 이들은 돈밖에 모르는 탐욕스러운 사람으로 따돌림받았고, 직책상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민족적인 시각에서는 압제 세력인 로마에 빌붙어서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매국노요, 반역자입니다.
세리는 직업상 이민족인 로마인들과 가까이 지냈기 때문에 늘 부정한 상태에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건한 이들은 그들과 상종조차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다교를 올바로 믿으려면 세리직을 떠나야 했습니다.
하필 그런 세리를 예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더군다나 하느님과의 친교자리를 상징하는 식사까지 하셨습니다.
깨끗한 사람만 참석할 수 있는데 죄인들을 그 자리에 불렀다면 결국 그것은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 행위입니다.
그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음식을 나누며 당신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죄인이어서 행복하였습니다.
의인을 자처하는 바리사이파 율법학자가 아니어서 행복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나를 부르십니다.
내가 건강하지 않기 때문에 의사로써 오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 2,17)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던 레위를 부르셔서 인생을 새롭게 하였듯이 오늘도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내 처지나 상황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부르시고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레위가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듯이 내가 예수님을 따라나서면, 인생이 바뀝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면 행복을 차지하게 됩니다.
부르심에 응답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주관자이십니다.
용서에로의 부르심을 행복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도 주님께서는 다시금 우리 죄인들을 당신 제자로 부르십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죄인’에 대한 개념은 참으로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죄인은 의인의 반대편에 서 있던 사람들, 거룩한 유다 전통을 따르지 않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죄인은 회당 출입이 금지되었고, 일반 사람들과의 접촉도 불가능했을뿐더러, 법정에서 증인으로 설 수도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인간도 아니었습니다.
당시 이방인 노예와 동급으로 분류되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시 랍비들은 죄인들을 ‘회개 불가능한 존재’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된 존재’로 규정하였던 것입니다.
알패오의 아들 레위는 이런 죄인이란 빨간 딱지를 가슴에 달고 그렇게 살았던 것입니다.
알패오의 아들 레위는 ‘세관에 앉아 있는’(마르코 복음 2장 14절) 이란 표현을 참고했을 때, 보통 세리가 아니라 대단한 세리, 카파르나움에서 힘 꽤나 쓰던 세관장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국경을 넘어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요충지였던 카파르나움에서 통행세 징수를 총괄하고 있었습니다.
꽤나 높은 자리에 앉아있던 레위, 꽤나 많은 재산을 모았던 레위였지만,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은 마치 징그러운 벌레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었습니다.
더구나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을 수도 없었고, 회개의 가능성조차도 부여받지 못한 채 하루하루 울적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세리 레위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제거 대상으로 여겼는데, 그분께서는 치료의 대상으로 바라보셨습니다.
스스로를 세상과 하느님의 민폐로 여겼는데, 그분께서 자신을 용서하시고 치료하실 뿐 아니라 당신 제자단에 가입시켜주셨습니다.
모두가 외면하던 나를 눈여겨보시고, 나에게 다시 한번 새 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그분의 은혜가 너무 커서 그냥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동료 세리들, 죄인들을 모두 불러모았습니다.
한바탕 큰 잔치를 벌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다시금 우리 죄인들을 당신 제자로 부르십니다.
어째서 저 큰 죄인들, 부당한 죄인들을 제자로 부르시냐고 따지는 이들에게, 똑같이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코 복음 2장 17절)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제자의 길 - 갈망, 따름, 배움>
"새벽부터 일어나서, 도우심을 빌며, 당신의 말씀에 희망을 거나이다."
(시편 119,147)
이 시편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문득 떠오른 성규 머리말이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만일 네가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원하거든, 네 혀는 악을 삼가고 네 입술은 간교한 말을 하지 말라.
사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며 평화를 찾아서 뒤따라 가라.”
(성규, 머리17)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 할 금과옥조의 가르침입니다.
제자의 길은 평화의 길입니다.
이어 토마스 머튼의 사제서품 상본시 성구가 생각납니다.
구약에서 승천한 인물 셋은 에녹, 모세, 엘리야가 있는데, 에녹의 삶에 대한 영어 묘사로 제가 참 좋아하는 성구(창세 5,2)입니다.
“Then Enoch walked with God, and he was no longer here, for God took him”
(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다. 하느님께서 그를 데려가신 것이다).
주목되는 바 직역하면 하느님과 함께 ‘걷다’인데 의역하여 하느님과 함께 ‘살다’입니다.
새삼 ‘걷는 것’은 ‘사는 것’이요 ‘기도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2014년도 800km 2000리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도 걷는 것이 사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매일 1시간 4km 정도, 적게는 하루 20km, 많이는 32km 거리를 33일 정도 기도하며 걸었습니다.
“걸어야 삽니다. 걷지 못하면 죽습니다.
저는 하루 6시간 정도의 택시 운전이 끝나면 오후 매일 3시간 정도 걷습니다.
장단지와 종아리의 근육도 탄탄합니다.”
어제 잠시 병원에 택시로 가다가 들은 기사의 힘찬 설명입니다.
올때는 40분 정도 걸어서 귀원했습니다.
그러니 에녹처럼 주님과 함께 걷는다 생각하고 평생 도반인 주님과 함께 매일 일정시간 걸으시기 바랍니다.
걷는 것이 사는 것이자 기도하는 것이며 걷는 운동보다 더 좋은 운동도 없습니다.
그러니 혼자가 아닌 평생 도반 주님과 함께 걸어야 합니다.
걸어야 삽니다.
저도 평생 매일 강론 쓰기가 끝나면 4:00-4:30분까지 주님과 함께 산티아고 순례 여정의 연장으로 생각하고 수도원 경내를 묵주기도하며 걷는 것이 완전히 습관화되었습니다.
오늘은 ‘제자의 길’에 대한 묵상입니다.
레위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음식을 드시는 복음 장면이 제자의 길에 대한 가르침을 잘 보여줍니다.
제자의 길에서 뚜렷이 부각되는 세 요소입니다.
첫째, 갈망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선행하는 레위의 갈망입니다.
예수님은 길을 지나가시다 세관에 앉아있던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먼저 부르십니다.
예수님께는 일체의 선입견이나 편견이 없습니다.
길에서 길이신 주님을 마음 깊이 갈망하며 기다렸던 레위요, 누구보다 우리의 속마음을 잘아시는 주님은 레위의 갈망을 알아챘음이 분명합니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은 수도승의 기본적 자질입니다.
어디 수도승뿐이겠는지요!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에 들어선 이들이 우선적 자질이 주님을 찾는 갈망이자 열정이자 배움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런 열정과 더불어 함께 가는 순수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주님을 찾는 갈망의 불이 타오르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둘째, 따름입니다.
“나를 따라라.”
주님의 부르심에 지체없이 따라나선 레위입니다.
당신을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은 한두번이 아니라 평생 날마다 계속됩니다.
날마다 하루하루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을 만나 주님을 따라 나선 ‘따름의 여정’중인 우리 제자들입니다.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레위가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 무의미한 일상을 어떻게 보냈을까요.
우리 역시 주님께 부름받지 않았다면?
새삼 은총의 부르심이 우리 삶에 얼마나 결정적인 사건인지 깨닫습니다.
무엇인가 찾고 따라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궁극의 찾고 따라야 할 우리 주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 삶의 목표와 방향이요 삶의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이런 삶의 궁극의 목표와 방향, 중심과 의미를 잃고, 말그대로 길을 잃고 두려움과 불안중에 뿌리없이 표류, 방황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예수님은 세리 레위를 부르시어 당신의 제자공동체에 합류시키시고 함께 음식을 나누십니다.
바로 우리 주님은 당신을 찾는 누구에게나 활짝 열린 구원의 문같은 분이십니다.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가 위대한 대사제이신 예수님께 대한 소개도 참 은혜롭고 힘이 되어 전문을 인용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갑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며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하느님 곁에 계시면서 동시에 우리 곁에 함께 하시는 초월과 내재의 대사제 예수님 친히 당신 사제를 통해 미사를 집전하십니다.
흡사 은총의 어좌에서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는 미사전례처럼 생각됩니다.
셋째, 배움입니다.
우리가 평생 따라야 할 분은, 평생 보고 배워야 할 분은 우리의 평생 주님이자 스승이요 도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주님께 평생 배움뿐입니다.
배워야 삽니다.
공부해야 삽니다.
평생 졸업이 없는 평생 주님의 학교에서 주님께 배워야 하는 죽어야 졸업인 평생제자이자 평생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이래서 주님의 평생제자이자 평생학인의 기본적 덕목이 침묵과 경청, 겸손과 순종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배움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배움에 대한 사랑은 호학好學을 주장한 공자의 사상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참으로 평생 스승이신 주님께 배워야 할 것도 무궁무진입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우리의 생명과 빛이자 희망이신 예수님이십니다.
한결같이 온유와 겸손, 섬김으로 일관된 삶을 사신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자 주님인 예수님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의 학교로 정의하기도 합니다.
다음 복음의 주님 말씀도 우리가 깊이 새겨할 가르침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왔다.”
세상에 병자아닌 사람, 죄인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
최고의 명의이신 주님께 치유받아야 할 우리들이요 부단한 회개를 통해 용서받아야 할 회개한 죄인들, 바로 우리의 신원입니다.
하느님 공부, 예수님 공부는 바로 말씀 공부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니 사람의 본질은 말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의 말씀 공부의 여정에 충실할 때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러니 말씀의 사람, 진리의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 말씀이 참으로 통쾌하고 명쾌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의 힘은 얼마나 놀랍고 경이로운지요!
살아 있는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는 우리들이요, 이런 말씀 수행이 늘 주님 앞에서 살게 합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도 온통 말씀 예찬입니다.
‘주님 당신의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십니다’의 화답송 후렴에 이어지는 다음 시편 고백도 참 좋습니다.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를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
주님의 규정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 밝으니, 눈을 맑게 하네.”
(시편 19,8-9)
제자의 길은 평화의 길입니다.
주님 제자의 길은 평생입니다.
평생 영원한 스승이자 도반인 주님과 함께 걸으면서 한결같이 배움의 여정에 충실해야 할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께 대한 갈망을, 배움에 대한 사랑을 북돋아 주시고 한결같이 주님을 따르게 하십니다.
"주님 사랑 우리 위에 꿋꿋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셔라."
(시편 117,2)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 모두는 '거룩한 죄인'이고 '축복받은 죄인'입니다.>
병자들을 고치신 이적사화들을 전해주고 나서 마르코는 이제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시는 예수님의 낯선 행동을 전해줍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자타가 공인한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은 육신에 천형을 받은 나병 환자들이나 중풍 환자와 일맥상통합니다.
우리에게는 낯설게 보이는 이 기사를 여기에 제시하는 마르코의 의도는 분명해 보입니다.
즉,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으며"(마르 2,17) "건강한 이들이 아니라 병든 이들을" 치유하러 오신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나병 환자와 중풍 환자가 육신이 건강하지 못한 이들이라면 세리와 죄인들은 영혼이 건강하지 못한 이들인 셈이고, 이들도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음을 보여주시고자 하십니다.
벗님 여러분,
우리도 어떤 면에서는 영육이 건강하지 못한 죄인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에 머물러 있는 자신을 바라보면 나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고,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다."(히브 4,13)고 생각하면 사실 앞이 캄캄하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연약한 우리를 동정해 주시는 대사제"(히브 4,15)이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의인이기 때문에 하늘 나라에 초대하시지 않고, 오히려 죄인이기 때문에 오늘 부르심을 받은 세리 레위처럼 하늘 나라의 삶에로 불러 주십니다.
스스로 의인이라 여기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을 부르시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세리와 죄인같은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다"(마르 2,15)고 마르코는 힘주어 말합니다.
사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 중에는 세리와 죄인같은 이들이 더 많을 수 있고 그중에 우리도 포함됩니다.
오늘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듯이, "그러니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히브 4,16)
행복하여라,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사람들.
그들은 하늘 나라의 잔치로 초대받습니다.
불행하여라, 스스로 의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
그들은 하늘 나라 잔치에 초대받지 못합니다.
행복하여라, 육신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
하느님의 자비와 치유를 받을 것입니다.
불행하여라, 지금 건강한 사람들.
언젠가는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하고 몸져 눕게 될 것입니다.
죄인인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병약한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오늘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씀과 세리의 집에 가서 친교를 나누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 또한 죄인들에게 더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환자 앞에서 잘잘못을 따지지 않습니다.
환자를 불쌍히 여기고 병이 낫기를 바라고 기도하고 치료해줍니다.
병 걸렸다고 환자를 비난하는 의사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모르는 자격 없는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죄를 범했다고 비난하고, 나쁜 행동을 한다고 멀리하는 것은 예수님 제자 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순결한 창녀'라고 어느 신학자가 말하였지요.
우리 모두는 '거룩한 죄인'이고 '축복받은 죄인'입니다.
죄인이어서 행복한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매일 꿈을 꾸지만 대부분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꿈은 생생하게 기억나기도 합니다.
최근에 생생하게 기억나는 꿈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약속장소로 가는데 제가 자꾸만 다른 길로 가는 거였습니다.
약속시간은 다가오는데 전혀 생소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꿈속이라도 너무나 답답했습니다.
마치 꽉 막힌 공간에 갇힌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잠에서 깨어났고 꿈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꿈에 대한 해몽을 찾아보았습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꿈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꾼다고 합니다.
마음에 드는 해몽을 찾아보았습니다.
새로운 목표를 찾아서 나가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2023년 저의 새로운 목표는 ‘성지순례’입니다.
1월에는 과달루페 성지순례가 있습니다.
4월에는 이스라엘과 요르단 성지순례가 있습니다.
5월에는 그리스와 터키 성지순례가 있습니다.
6월에는 이탈리아 성지순례가 있습니다.
10월에는 한국 성지순례가 있습니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2년 동안 성지순례를 갈 기회가 없었습니다.
성지순례가 많이 예정되어 있어서 걱정도 되었나 봅니다.
성지순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지러웠던 방을 깨끗이 정리하는 꿈도 꾸었습니다.
버릴 것은 다 버렸고, 벽지도 새로 붙였습니다.
넓고 깨끗해진 방에서 가족이 모여 식사하는 꿈이었습니다.
꿈이었지만 마음이 편했고, 가족이 모이니 즐거웠습니다.
이번에도 마음에 드는 해몽을 찾아보았습니다.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말끔히 해결되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식사를 하는 꿈이니 모든 문제는 이웃들의 도움으로 해결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2022년을 돌아보면 제 주변에는 저를 도와주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회계사와 변호사님께서 회사의 문제들을 도와주었습니다.
퀸즈의 정하상 바오로 성당의 신부님들은 언제나 저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미국생활의 어려움을 잘 들어주었고,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동북부 ME 대표 신부를 맡으면서 엠이 부부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줌으로 하는 강의를 녹화해주기도 했고, 편집도 해 주었습니다.
모임이 있으면 차량 봉사도 해 주었습니다.
엠이에서 주관하는 행사는 따뜻했고, 먼 타향에서 사는 저에게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3년 째 부르클린 한인성당 미사를 다니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손님신부라서 어색했는데 지금은 가족처럼 친근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2023년 새해에는 저 역시 누군가의 어려움에 함께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꿈을 꾸게 됩니다.
어떤 꿈은 걱정과 근심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어떤 꿈은 선택과 결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꿈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에 의탁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제 바오로 사도의 꿈은 바뀌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하고, 신자들을 잡아가던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함께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떨기나무 아래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약하게 숨어 지내던 모세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평범하게 가축을 키우던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신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반석이라고 말씀하셨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배반했던 베드로 사도는 회개하였습니다.
초대교회의 으뜸 사도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레위는 지금가지는 세상의 재물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해도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저 재물을 모으면 만족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레위는 이제 마태오가 되었습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마태오는 주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복음사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마태오를 통해서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재물을 모으던 세리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복음사가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한다면 우리는 삶의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기꺼이 따른다면 우리들 역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될 것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해외 성지순례를 가면, 종종 가이드가 이렇게 말합니다.
“사진 찍을 시간을 충분히 드릴 테니, 제 설명 좀 들어주세요.”
비싼 돈 내고 해외 성지순례 왔는데, 사진만 찍어서 가면 얼마나 아깝냐는 말도 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남는 것은 사진뿐이다.’
설명을 잘 들으면 분명히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억의 한계 때문에 3일만 지나도 좀처럼 기억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해외 성지순례 중에 보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잘 기억하지 못할 테니, 열심히 사진 찍으세요. 남는 건 사진뿐입니다.”
설명도 중요하지만, 사진도 중요합니다.
특히 자신이 찍은 사진에는 마음에 각인될 수 있는 기억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사는 존재라고 합니다.
추억이 없으면 지금을 행복하게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력이 좋은 사람도 지나간 일 전부를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이때 그 기억을 도와주는 것이 ‘사진’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진으로 추억을 떠올리고, 지금을 더 잘 살게 해 줍니다.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역시 이 사진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과거에 그러했음을 떠올리면서 지금 희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도 그렇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무시하고 경멸했던 세리인 알패오의 아들 레위에게 “나를 따라라.”(마르 2,14)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집에 가셔서 그의 동료인 다른 세리들과 함께하며 먹고 마십니다.
이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 2,17)
이 장면을 여러분의 사진기로 찍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죄에 기울어져서 좌절하고 절망에 빠졌을 때, 이 사진을 바라본다면 어떨까요?
“맞아. 주님께서는 나 같은 죄인도 사랑하시지.”라면서 힘을 다시 내지 않겠습니까?
성경 말씀은 새로운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예수님을 계속 떠올리게 하는 것입니다.
특히 주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예수님처럼 살게끔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내 마음의 사진기로 분명하게 찍어 놔야 합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 바로 잡아주는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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