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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16일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제1독서 : 묵시 1,1-4.5ㄴ; 2,1-5ㄱ
복 음 : 루카 18,35-43
35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36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37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38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39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0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41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42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43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개안開眼의 여정
-주님과의 끊임없는 만남-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은 한평생 불꽃같이 치열한 삶을 살았던
13세기 독일 출신의 분도회 수녀로 가장 위대한 신비가이자 ‘예수성심의 신학자’인,
또 서울분도수녀원의 주보 성녀인 성녀 제르투르다 기념일입니다.
성녀의 일화 중 늘 잊지 못하는 것은 임종 전 신랑이신 주님을 만났을 때
눈이 활짝 열려 환호 중에 외친 임종어입니다.
헬프타 수도원에서 오랫동안 중병으로 고통 받던 성녀 제르트루다는
1302년 11월 16일 “아! 신랑이 오신다. 신랑을 맞으러 나자자!”(마태25,6)라고 외치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45세였습니다.
성녀 제르트루다는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올려지지 않았지만,
1606년 교황청으로부터 공식 전례의 기도와 독서, 찬가에서
그녀를 공경할 수 있다는 공인을 받았습니다.
이후 그녀의 축일은 전 세계 가톨릭교회로 확대되었고,
1738년 교황 클레멘스 12세(Clemens XII)는 다른 제르트루다 성녀와 구별하고
그녀의 영적인 깊이를 재평가하면서 ‘위대한’(the Great)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예리코에서 눈먼이를 고치신 복음은 늘 읽어도 새롭습니다.
주저 없이 ‘개안의 여정’으로 강론 제목을 택했고,
이 복음을 대할 때 마다 언제나 똑같은 제목입니다.
흔히 오늘 복음을 ‘작은 복음서mini-gospel’라 불릴 정도로 영적 상징들로 가득합니다.
흡사 미사장면을 연상케도 합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눈먼 이’
그대로 주님을 찾는 가난한 무지의 눈먼 보편적 인간을 상징합니다.
길 위에서 길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눈은 멀었어도 내면은 주님을 뵙고 싶은 갈망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그 유명한 시편 63장 2절이 생각납니다.
“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 이 몸은 당신이 그립나이다.”
육신의 눈은 멀었어도 내면의 눈은 주님을 향해 활짝 열려있는 맹인입니다.
참으로 양상과 정도만 다를 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먼 상태로 지내는지요.
편견, 선입견, 탐욕, 무지, 교만, 허영, 질투, 분노 등
눈이 멀어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직시 못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육신의 시력과는 별개로 영혼의 시력이 형편없는
소위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눈 뜬 소경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문득 어제 받은 카톡 메시지가 재미있어 인용합니다.
제가 했던 강론 중 떠도는 메시지 일부가 저에게 도착한 것입니다.
수십년 전 강론에 인용했던 ‘팬티 끈과 팬티 천’의 비유인데 지금도 공감이 갑니다.
“팬티끈이 영혼이라면 팬티천은 육신이다.
팬티끈이 튼튼하면 팬티천이 어떻든 끝까지 입을 수 있지만,
팬티끈이 약해지면 아무리 천이 곱고 튼튼해도 팬티를 입지 못한다.
팬티끈이 영혼이라면 팬티천은 육신이며, 바로 영혼과 육신의 관계가 이러하다.”
새삼 개안의 여정을 통해 영혼의 시력을 회복함이 얼마나 중요한 영적 수행인지 깨닫습니다.
영혼은 생래적으로 주님을 갈망합니다. 영혼의 영혼이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눈은 주님을 뵙고 싶어 하고 귀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하고
두 손은 합장하여 주님께 기도드리고 싶어하며 두 발은 주님을 따르려 합니다.
주님 향한 청정욕淸淨慾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개안의 여정에 주님과의 끊임없는 만남이 얼마나 결정적이고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하여 평생 날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성전에서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 기도를 바치는 우리들입니다.
주님과 끊임없는 만남으로 육안의 시력은 약해져도 영혼의 시력은 날로 좋아지는 우리들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자 소경의 반응이 전광석화 참으로 신속합니다.
내적으로 주님을 열망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 측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거푸 자비송을 바칩니다.
흡사 미사 전 간절한 마음으로 자비송을 바치는 우리를 연상케 합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혼신의 힘을 다한 영혼의 부르짖음입니다.
아마 이렇게 주님을 찾지 않았더라면 주님은 그대로 지나쳐 가셨을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간절히 항구히 찾을 때 주님을 만납니다.
참으로 간절한 소원을 지닐 때 물음도 답도 짧고 순수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과 눈먼이의 주고받는 문답이 너무나 공감이 갑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예수님의 단도직입적 질문은 주님을 찾는 우리 모두를 향한 보편적 본질적 질문입니다.
과연 무엇이라 대답하겠는지요? 답은 단 하나 눈먼 소경이 알려 줍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부연 설명하자면 오매불망 자나 깨나 그리워하던 주님이신 당신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보라 있는 눈이요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 있는 귀요, 주님을 따르라 있는 발입니다.
다음 주님 말씀은 눈먼 소경은 물론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구원의 복음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지금 여기 현존하신 주님의 구원의 복음 말씀입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말씀과 즉시 맹인은 눈이 열려 다시 보게 되었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으며,
군중도 모두 화답하여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지요! 이래서 소복음서라 하는 오늘의 복음입니다.
오늘 제1독서 묵시록의 사도 요한은 주님을 만나 경책 말씀을 들으면서
역시 영혼의 눈이 활짝 열려 초발심의 열정과 자세를 회복했음이 분명합니다.
저 역시 얼마전 수도원에 부임하던 해 1988년, 32년전 40세 때,
써놨던 나무판의 한자 ‘침묵沈默’이란 글씨에 정신이 번쩍 든,
순간 눈이 활짝 열린듯한 체험이 생생합니다.
다음 사도 요한을 향한 주님 말씀 역시 우리 모두를 향합니다.
“너는 인내심이 있어서, 내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주님을 만나 눈이 열림으로 초발심의 열정과 자세를 회복한 사도 요한입니다.
한 두 번의 개안이, 회개가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과정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개안의 여정은 회개의 여정과 일치합니다.
오늘도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의 눈을 활짝 열어 주시어 당신을 뵙게 합니다.
개안의 여정, 회개의 여정에 매일 미사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의사 선생님께서 환자에게 검사를 통해서 암이 발견되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자신에게 암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환자는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놀랐습니다.
이렇게 커다란 병에 걸렸다는 사실에 절망감도 생겼습니다.
이 모습에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암에 쓰러질 건지, 아니면 이 암을 쓰러뜨릴 건지 생각할 시간은 딱 15초입니다.
딱 15초뿐이에요. ‘이럴 수가, 이럴 순 없어. 억울해.’라는 생각이 든다면,
흥분되고 화가 나고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며 ‘왜 나야?’라고 중얼거린다면,
이 암의 피해자가 한 사람 더 늘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환자분이 걸린 이 병에 대응해 뭔가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삶에서 가장 큰 도전일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조금이라도 떠오르게 된다면
이 병을 이겨낼 기회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딱 15초의 생각할 시간에 집중해 보시길 바랍니다.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미래가 결정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둘 다 가능성이 있다면, 긍정적인 생각으로 병을 이겨야 할 것입니다.
이런 긍정적인 생각이 최악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은 믿음을 불러옵니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주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는 곧바로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어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어떤 순간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굳은 믿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끈질기게 애원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치면서,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의 결과는 정말로 놀라운 경험을 가져다줍니다.
참된 빛이신 분께 즉시 시력을 받는 엄청난 인생 역전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보여 주는 그의 모습에 우리는 집중해야 합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주님을 따릅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함께 하느님께 감사 찬양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주님 제자의 삶을 따라야 합니다.
내 삶에서 가장 잘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인생 역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예리고의 눈먼 거지(바르티메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눈 먼 이가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길을 걸어가지 못하고, 그냥 “길가에 앉아”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른 이들의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쓰듯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39)
그는 그분이 지닌 메시아의 권능을 믿고 부르짖었습니다.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는
<이사야>(11,1) 예언서의 말씀을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가 가까이 오자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루카 18,41)
예수님께서는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그의 믿음을 유도하고 고백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물으십니다.
곧 당신께 대한 믿음을 묻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청원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곧 첫째는 믿음으로 청하는 일이요,
둘째는 자신이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청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진정 청해야 할 바를 청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는 말합니다.
‘진정 원해야 한 바가 무엇인지를 아는 이는 이미 성인이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는지 빤히 아시지만,
우리 자신이 그것을 알도록 우리의 진정한 원의를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께 대한 믿음을 보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당신께 대한 진정한 믿음으로 청하기를 원하십니다. 당신께 대한 신뢰와 의탁을 원하십니다.
거지 장님은 신뢰와 의탁으로 청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 18,41)
그런데 대체 무엇을 보아야, ‘다시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보다’(anablefo)라는 단어는
‘위를 쳐다보다’, ‘새로운 것을 보다’, ‘다시 보다’, ‘시력을 회복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이 눈을 뜨기 위해서는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쳐다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그분의 사랑을 알게 될 때, 비로소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결국, 그분의 ‘사랑을 보는 눈’이 다시 보는 눈이요 새로운 눈이요 영적인 눈인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눈을 치유 받는 것을 넘어서, 영혼의 눈을 뜨는 일입니다.
사실, 보지 못하는 것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눈을 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있는 것은 보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보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어둠 속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믿음’이 ‘다시 보게 하고 구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8,42)
그러니 이제는 보려고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태어나면서 물질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이제는 ‘믿음’을 통해서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떠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는 일이요,
지금 우리의 길을 동행하고 계시는 그분을 보는 일입니다.
이처럼, “다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빛의 세계로 나아감을 말해줍니다.
이제 그는 “길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동행하시는 주님을 “따라” 따라나서게 됩니다.
육적인 축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축복을 입어 온전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루카 18,41)
주님! 제가 보지 못함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을 감고 있고 있는 까닭입니다.
눈을 뜨지 않으려는 완고한 마음 때문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듯, 제 눈의 가림 막을 걷어 내소서!
완고함의 겉옷을 벗기시고, 깊이 새겨진 당신의 영혼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선사된 당신 사랑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벌어진 당신 구원을 보게 하소서.
제가 바라고 싶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해주고 싶은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한국에서 신부님이 한분 오셨습니다.
2월 달에 오셔야 하는데 코로나19의 영향으로 10월에 왔습니다.
앞으로 몇 년간 한인 성당에서 사목하셔야 합니다.
신부님을 보니 작년의 제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적응하는데 3달 정도 걸렸습니다.
먼저 거주자 등록증을 받아야 하고, 운전면허증을 취득해야 하고, 각종 보험을 들어야 합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는 말처럼 뉴욕에 오면 뉴욕의 방식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한국에서의 생활과 사목을 고수하려하면 답답할 것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을 것입니다.
한국보다는 느리지만 기다리면 거주자 등록증도, 운전면허증도 받을 수 있고,
각종 보험도 가입할 수 있습니다.
어두운 극장이 조금 있으면 눈에 익숙해지듯이 낯선 곳에서의 생활도
시간이 지나면 재미와 보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뉴욕의 가을을 만끽 할 수 있고, 센트럴 파크를 산책할 수 있고,
박물관을 방문하고, 뮤지컬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벗어나면 아름다운 공원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정을 나눌 수 있습니다.
신부님께서 건강한 모습으로 기쁘게 지내시기를 기대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기준에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무엇일까요?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같은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기도와 실천을 함께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리고의 소경은 예수님께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앞서가던 사람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고 외쳤습니다.
그의 간절함을 예수님께서는 받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보아라.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소경은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소경은 기도했고, 실천했습니다. 그의 신분과 능력을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기도했고, 실천했기에 구원받았습니다.
예전에 엘리베이터의 게시판에서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에는 소나무와 전나무가 더욱 푸르다.’
모든 것이 푸르른 여름에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시련의 때, 고난의 때에는 유독 그 푸르름이 돋보이는 나무가 있는 것처럼
주변을 보면 그렇게 자신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흐름에 따라서 흘러가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갈 줄 아는 용기와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흘러가는 삶은 살아지는 것이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것들을 받아들이고, 편안하게 살아도 결국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주님은 소경의 간절함을 보시고, 보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보아야 하는 것들은 빠르고 편하고, 쉬운 길만은 아닐 것입니다.
비록 느리고,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굳이 당신의 힘과 능력을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당신께서 세우신 질서와 법에 따라야 한다고 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선택과 결정을 전적으로 본인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 18, 41)
한상우 바오로 신부
거짓 자아는
거짓 허상에 묶여있다.
거짓 자아를
깨뜨리는 것이 치유이다.
자비의 주님께서는
다시 보게 하여 주신다.
제대로 보아야
제대로 주님께
돌아갈 수 있다.
우리에게서
치유가 필요한 부분이
어디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치유는 아픔에서 시작되고
믿음은 아픔으로 더욱 깊어진다.
아픔을 개방하는 것이
다시 보게 되는 첫걸음이다.
제대로
보지 못하기에
소중한 이 순간을
놓치며 사는 것이다.
소중한 삶에 눈 먼 이는
그 누구도 아닌 우리자신이다.
삶과 믿음
치유와 구원은 분리될 수 없다.
믿음을 향하는 것이
치유의 시작이다.
건강한 믿음은
제대로 보는 것이다.
삶은
제대로 보는 믿음을
배우는 것이다.
제대로 보아야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삶을
제대로 볼 수 있다면
제대로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제대로
사랑하는 것이
제대로
보는 것이다.
주님,
저가 제대로
보게 하여 주십시오.
세상을 거스르고 있어야 믿음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예르코에서 한 소경이 예수님께 치유를 받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왜 이 복음이 느닷없이 등장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복음 바로 앞에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세 번째 예고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인과 이방인에게 배척받고 조롱받고 채찍질과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결론은 이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 가운데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이 말씀의 뜻이 그들에게 감추어져 있어서, 말씀하신 것을 알아듣지 못하였던 것이다.”(루카 18,34)
왜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의 예고를 세 번씩이나 하셨는데도 그들은 알아들을 능력이 없었을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믿음으로 세상을 거슬러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세상을 거슬러 세상으로부터 죽게 만들고 그 죽음으로 참 행복으로 부활하게 합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겨보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도 알아들을 능력을 갖지 못합니다.
아는 것만이 보이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약 4년 전에, 저의 일반 대학 친구 중에 12살 딸이
갑자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겠다는 선언을 했다고 어쩌면 좋냐고 물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친구의 모든 월급은 딸의 학비를 위해 소진되어야 할 판이었습니다.
저는 유학은 대학에 들어가서 가도 되는 것 아니냐고 말했지만
결국 부모는 딸의 뜻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며칠 전 고등학생이 되어 쓴 『엄마, 우리 이제 떠나자』를 읽고 나니
보통 아이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어머니와 34개의 나라와 61개의 도시를 여행했던 기억을 책으로 낸 것입니다.
그리고 왜 유학을 떠날 결심을 했는지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정예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아이는 매우 어릴 때부터 영재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머리도 좋았고 어머니의 교육열도 한 몫 하였습니다.
교육열이 꽤 높은 곳 중의 하나인 목동에서 자란 예원이는 두 살부터 놀이학교를 시작으로,
다섯 살까지 어린이집을, 여섯 살에는 영어유치원을 다녔고
그것도 모자라 원어민으로부터 따로 영어 과외수업을 하였습니다.
영재 테스트를 받아 영재교육원에 다니며 수학, 바이올린, 미술, 체육 등
각종 사교육으로 바쁜 유치원 시기를 지내야 했습니다.
초등학교는 더 치열하게 살아야 했는데 겨우 8살이란 나이에
학교, 학원, 교회에서 모두 ‘잘하는 아이’, ‘칭찬받는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숨이 막히기 시작하였고
모두에게 사랑받아야 하는 ‘모범생’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과 강박감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모두를 경쟁자로 여겨야 하는 환경은 예원이를 지치게 하였습니다.
일정을 매일매일 짜주는 엄마는 더는 엄마로 보이지 않고 자신의 매니저로 보였습니다.
예원이가 힘겨워할 무렵, 어떤 이유에서인지 엄마도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이건 아닌데 ...’라는 말을 자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마 딸을 힘들게 만들어 자신의 만족스럽지 못한 면을 채우려는 모습을 스스로 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딸에게 그런 엄마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영재엄마라는 타이틀을 버리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엄마는 예원이를 ‘대안학교’로 옮겼고 모든 사교육을 그만 받아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초등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그리고 엄마는 ‘시간적 여유’가 생겼으니 함께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을 하였습니다.
티격태격하는 두 달 동안의 여행이었지만 둘은 그때 다시 엄마와 딸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딸이 엄마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엄마가 세상을 이긴 것과 마찬가지로 딸도 부모를 이겼습니다.
두 달 동안의 여행을 하고 나니 어떤 자신감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중학생이 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지금 당장 유학을 떠나고 싶다는 말을 꺼냅니다.
부모는 당황합니다. 예원이는 왜 유학을 하려고 하느냐는 부모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학교생활이 행복하지만 행복하지 않아!”
어쩌면 이것이 우리나라 영재의 비애일 수 있겠습니다.
누구보다 앞서 칭찬만 받지만 벗어날 수 없는 현실.
그러나 예원이는 엄마처럼 세상을 거스를 줄 알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남의 나라 땅에서 혼자 외로움을 견디며 3년을 지내고 난 후,
예원이는 지금까지 자신이 선택한 것 중
경쟁의 압박감을 벗어나기 위해 유학을 떠난 것이 가장 잘한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눈먼 이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자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습니다.
앞서가던 사람들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예수님께서 그제야 돌아보시며 그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수난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는
아직은 세상을 거스르고 싸울만한 믿음의 삶을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작게나마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전기도 안 들어오는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3시간씩이나 통학하고
정신과 약까지 먹으며 버텨서 성적이 많이 추락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서울 소재 대학에 들어간 것만도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을 느끼고 지금까지 열심히 달려오던 길을 돌아설 때
가족은 물론이요, 친구와 세상 사람들로부터 바보라는 눈초리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도 지금까지 제가 한 모든 결정 중 사제가 되기로 한 결정이 제일 잘했다는 것을 압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세상을 이기셨고 그렇게 부활하셨습니다.
저도 이 결정으로 작게나마 세상을 이겼고 참 행복을 찾았습니다.
믿음이 구원에 이를 정도가 되려면 이렇듯 세상을 이기는
십자가의 수난을 거쳐 부활의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행복을 막는 세상을 거스를 정도의 믿음을 가지도록 합시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세상을 이기는 수난을 거쳐야만 부활의 행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