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으면 반대로 한다
夜不臥而晝瞌睡(야부와이주갑수)-밤에는 잠 안 자고 낮에 깜빡깜빡 존다.
子不愛而愛孫(자부애이애손)-아들은 사랑하지 않고 손자만 사랑한다.
近事不記而記遠事(근사부기이기원사)-근래 일은 잊어 먹고 옛일만 생각난다.
哭無淚而笑有淚(곡무루이소유루)-울 때는 눈물이 안 나고 웃을 때 눈물 난다.
近不見而遠却見(근부견이원각견)-가까운 것은 안 보이고 먼 데 것이 보인다.
打却不疼不打却疼(타각부동부타각동)-맞으면 안 아프고, 안 맞으면 아프다.
面白却黑髮黑却白(면백각흑발흑각백)-흰 얼굴은 검어지고, 검던 머리는 희어진다.
如厠不能蹲作揖却蹲(여측부능준작읍각준)-대변 앉기 힘들고 인사할 때 무릎이 꺾어진다.
此老人之反也(차노인지반야)-이것이 노인이 반대로 하는 것이다
문해피사(文海披沙)
학생을 보니까 이사회가 아직 숨은 쉬고 있구나 !
미아리로 이사 후에 불편한 것 중 하나가 인라인 트랙이 중랑천(中浪川)
신이문(新里門) 전철역 부근에 있기 때문이다.
전철을 갈아타고 1시간 10분이 걸린다.
3일을 갔지만 트랙 바닥이 갈라지고 코너가 급해서 나같이 나이든 사람은 위험성이 있어 1시간 30분이 걸리는 신정동 트랙을 다시 찾았다.
전철을 갈아타는 역 계단이 왕복 800계단, 인라인 운동외도 계단 오르고 내리는
다리 근육운동에 에너지가 거의 소진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직까지는 전철, 버스 안에서 자리에 앉지 않기로 결심한 수행(修行) 계율(戒律)을 지키기 위해 전철 손잡이에 의지한 채 서서 원시불교 경전인
수타니파타에 나오는 시구(詩句)“무소(犀牛)의 뿔”을 읽는다.
“자식이나 아내에 대한 애착은 마치 가지가 무성한 대(竹)가 서로 엉켜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죽순(竹筍)이 다른 것에 달라붙지 않듯이 무소(犀牛)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2호선 문래역을 지날 무렵
“여기 앉으세요” !
눈앞에서 나는 소리에 책에서 눈을 떼고 보니 여고 교복을 입은 학생이었다.
“쌀에 뉘”처럼 듣기 귀한 참 오랜만에 자리를 양보하는 소리다.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감사합니다. 나는 당산역에서 내립니다 그대로 앉으세요
고마워요” 하였다.
거짓말이다.
미아사거리역까지 1시간을 더가야 한다.
그리고 거짓말이 탄로날가봐 자리를 옮기면서 마음속으로
“학생을 보니 이사회가 아직 숨을 쉬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부터인가 우리사회는 전철이나 버스 그 어느 곳에서도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아름다운 겸양(謙讓)의 미덕(美德)이 사라졌다.
초등학생 중학생 앞에 서 있어도 전혀 관심이 없다.
“저기 노인좌석 있는데 왜 내 앞에 서 있지?”
하는 느낌이 확연한 전철안 분위기다.
그동안 전철안 좌석 예절에는 “늙은 우리 꼰대(정동영 표현)”들의 책임이 있다.
노인좌석이 등장하기 전, 나이 많은 것이 무슨 큰 벼슬이나 되는 것처럼 노인에게
자리 양보 안한다고 “젊은 놈이 버릇이 있느니 없느니”하며 마치 자기 손자 나무라듯 하는 꼴볼견 늙은 것들을 심심찮게 보아왔다.
이런 여론 때문에 “거기 앉으면 빨리 죽는다”는 노인좌석이 생겼다고 본다.
실제로 애완견 보다 서열이 밀리고, 등급이 한 자리 숫자가 넘는 노인.
“여기 앉으세요”하는 소리의 여음(餘音)에 대한 감정을 이 글로 쓰는 것은,
유구한 역사 속에서 나라를 잃기도 하고 배고프고 못 배워서 받은 천대속에서도
오늘 이 시간까지 “인간(人間)”이란 이름표를 달고 버티게 한 것은 인륜(人倫) 도덕(道德)과 효경심(孝敬心)의 힘이었는데,
이 윤리(倫理)가 사라지는 것이 개탄스럽기 때문이다.
노인 대접을 바래서 하는 말이 아니다.
구석구석이 파렴치한(破廉恥漢)으로 가득한 사회
노령인구는 늘어나고 출산(出産)은 줄어들어 젊은 인구가 줄어들어 나타나는
희소가치(稀少價値)를 말하면서 “늙은 게 귀하냐 젊은게 귀하냐”를
따지는 것도 아니다.
설마, 학교에서 가정에서
“노인은 귀찮은 존재야 우리집 말티즈(Maltese)보다 못해”
라고 노골적으로 가르치겠는가?
그런데 악현선은(惡顯善隱)으로 “나쁜 것은 나타나고 선한 것은 숨어 버린”것처럼
우리사회는 노인을 귀찮게 여기는 풍조가 자연스럽게 만연(蔓延)되었다.
노인뿐만 아니고 인간의 존엄성이 사라졌다.
필자는 이런 사회 윤리 도덕의 변화(붕괴崩壞)의 원인을
“한강의 기적”이라 자랑하는 단기간의 물질성장속도에 짓밟힌 인간 가치의 실종이라 주장한다.
교육이나 종교등 조직이나 개인이 지향(志向)하는 사회의 모든 시스템과 스팩(spec)들의 목표는 오로지 돈돈돈----과 1등
리듬체조의 불모지(不毛地)에 선인장의 꽃을 피운 손연재의 올림픽 4등은
골프의 박인비 금메달 빛에 가려졌다.
돈과 1등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사회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되는 사회
이런 사회에 인간존중의 신뢰(信賴)와 인륜도덕,
노인에 대한 효경심(孝敬心)이 존재 하겠는가?
돈의 노예(奴隸) 좀비(Zombie)화 되어 가는 사회.
오늘 신문(2016년 9월 8일)에 하일성 전 야구 해설위원이 자살했다는 기사다.
기사 내용은 돈 때문이라 한다.
입신양명(立身揚名)으로 남들이 부러워할 최고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돈에 관련되어 자살하고 있다.
돈이 생명보다 귀하다 !
덜컥 혼자가 되니 내 이름으로 20평 아파트 하나 있는 것이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자식들이 불효자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아래의 신문기사가 대답해 준다.
2013년 3월 7일 조선일보 기사
통계청이 13세 이상 남녀 3만70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사회조사 결과
“부모의 노후 생계를 자녀가 돌봐야 한다”는 응답은 33.2%에 그쳤다
자식 10명중 6~7명은 부모의 노후를 책임 안 진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전부를 “경제가 나쁘다”에 이유를 두고 있다.
과연 경제 때문에 부모의 노후를 책임 안지는 것일까?
내가 부모의 자식일 때, GDP 70달러 시대 부모를 책임졌다.
GDP 28.000달러 시대의 내 자식들은 부모의 노후 생계를 책임 못 지겠다 한다.
정말 돈 때문일까?
우리는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교육을 받는다.
맹자(孟子)는 인간의 공경(恭敬)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食而弗愛 豕交之也(식이불애 시교지야)
먹여만 주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돼지를 키우는 것과 같다.
愛而不敬 獸畜之也(애이불경 수축지야)
사랑만 하고 공경(恭敬)하지 않는다면 짐승으로 대하는 것과 같다.
恭敬者 幣之未將者也(공경자 폐지미장자야)
공경(恭敬)은 물질적 거래가 있기 전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논어(論語) 제5편 공야장(公冶長) 25장에도
子曰 老者安之 朋友信之 少者懷之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노인(老人)들을 편안하게 하여 주고, 벗들에게는 신의를 지키며 연소자를 사랑하라.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은 공경할 “경(敬)”자 이 한 글자를 그 어떤 것 보다
중요시 여겨 평생에 가슴 속에 새기며 인생의 준칙으로 삼았다고 한다.
조선 영조때 문신(文臣)이며 시인인 심노숭(沈魯崇)은 그가 쓴
“자저실기(自著實紀)”에서
“사람이 늙으면 어쩔 수 없이 다섯 가지 형벌을 받게 된다”고 했다.
보이는 것이 뚜렷하지 않으니 목형(目刑)이요
단단한 것을 씹을 힘이 없으니 치형(齒刑)이요
다리에 걸어갈 힘이 없으니 각형(脚刑)이다
잘 들리지 않으니 이형(耳刑)이요,
그리고 발기가 안 되니 궁형(宮刑)이다.
라고 했다.
이렇게 사람이 늙으면 불쌍해진다.
노인 대접에 대하여 서양과 동양을 비교할 때에,
동양속의 한국은 삼강오륜(三綱五倫)과 효경(孝敬) 공경(恭敬)사상으로
노인을 귀하게 봉양해 왔다.
이에 비하여 서양에서는 노인을 어떻게 봉양했을까
영국사람 팻 테인이 쓰고 안병직이 번역한 “노년의 역사”에서
서양에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18세기에 생겼다고 한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노년은 “찬밥 노인”의 존재였다.
프랑스혁명 이후 원숙함과 존경, 20세기에서 각종 복지제도가 노인을 사람대접을
했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중세 유럽엔 “여물통과 삼베” 설화가 널리 퍼져있었다.
늙은 아버지를 보살피는 데 싫증이 난 아들이 식탁 대신 여물통으로,
침구도 거친 삼베로 바꿔버렸다.
손자가
“나도 아버지가 늙으면 쓸 테니 삼베 절반은 남겨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아버지가 할아버지(할머니)를 산속에 버리고 오자 아들이
“나중에 아버지 버릴 때 쓰게 그 지게 놔두라” 했다는
우리나라의 “고려장(高麗葬)” 설화와 판에 박은 듯 똑같은 구조다.
이 책에서
“나이만으로 존경받고 편하게 살았던 노년은 적어도 서양 역사엔 없다”는 이야기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근대사 교수가 쓴 글 “노년의 역사”에서도
18~19세기까지 노인은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다가 20세기 말에 가서야 노년은 겨우
한 단계 나아졌다고 했다.
1970년 “노년(La vieillesse)”이라는 책을 편집한 시몬 드 보부아르는 이렇게 썼다.
“노인도 정말 인간인가”?
미국 작가 앨버트 브룩스의 미래 소설 “2030년 그들의 전쟁”에서
노인을 노린 테러가 등장한다. 2030년 미국인 평균 수명이 100세를 넘기자 세대 갈등이 심해진다. 노인 복지 비용을 대느라 갈수록 세금을 많이 내야 하는 젊은이들이 일흔 넘은 노인의 투표권을 빼앗자고 주장한다.
버스에 탄 노인들이 사살되거나 요양원과 노인 아파트 단지에서 폭탄 테러가 터진다. 는 소설 내용이다.
2011년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박완서 작가가 쓴 단편소설
“황혼”의 주인공은 “늙은 여자”다.
며느리로 들어온 젊은 여자는 시어머니인 늙은 여자를 단 한 번도 “어머니”라 부르지 않는다.
친구들과 얘기할 때도 “늙은 여자”라는 호칭한다.
“늙은 여자는 웃으면서 일어나 앉아 거울을 본다.
거울 속의 여자는 울고 있었다. 엉엉 울고 있었다.
아무리 웃기려도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도 거울 속의 여자쯤은 자기 마음대로 될 수 있으려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올해 71세인 포크 1세대 가수 서유석이 작년(2015년)에 신곡을 내었다.
“너 늙어 봤냐, 나는 젊어 봤단다”이다.
가사는 이렇다
“마누라가 말리고 자식들이 뭐라해도 나는 할 거야.
컴퓨터를 배우고 인터넷을 할 거야.
서양말도 배우고 중국말도 배우고 아랍말도 배워서
이 넓은 세상 구경 떠나 볼 거야”
과히 늙은 몸부림이다.
2012년 12월 25일 조선일보 기사에서
노벨 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는 2007년 서울에서 이화여대 초빙교수로 살았다. 당시 예순일곱이던 그는
“서울 지하철이 노인에게 공짜라는 게 아주 마음에 든다”고 했다.
외국인이어서 경로 혜택은 못 받았지만 노인을 위하는 우리 사회가 부러웠던 모양이다.
“지하철에서 노인이 젊은이에게 이러쿵저러쿵 참견하는 풍경이 재미있다.
소설 소재로 삼을 만하다“고도 했다.
이 글을 읽으니 “아직은 우리 사회가 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노인좌석도 노령 연금도 “국민복지”라 해석하지 않고
노인을 위한 “공경(恭敬)”이라 말하고 싶다.
내일부터 열흘간 추석 귀성(歸省)이 시작된다.
보너스도 못 받고 주머니 사정은 나쁘지만 고향에 계신 늙으신 부모님
뵈옵는 것이 가장 큰 효성 아니겠는가
어제 저녁 가까이 있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 잠은 잘 주무시는지요?”
하면서 들렸다.
내가 말하기를
이번 추석 명절부터는 어머니도 안계니까
거추장스럽게 가족들 한복을 입지 말고 평상복을 입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까
아들이
아버지 무슨 말씀이세요?
어머니 안 계셔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1년에 세 번(설, 추석, 아버지 생신)은 한복을 입어야지요!
한다.
그래 고맙다
“쌀에 뉘”처럼 귀하지만
“여기 앉으세요” ! 라는 학생도 있고
추석 한복도 변함이 없다하니
내가 너무 과민한 탓일까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