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선 친척 집은 식사 후 과일을 먹는다" 조선족들의 남한 체험기 듣고 최종 탈북 결심. 이민복(대북풍선단장)
<탈북을 최종 결심하게 만든 조선족의 남조선 이야기> 목숨을 비롯한 모든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탈북은 심중에 심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 누구는 어쩔 수 없이 또는 누구의 추동으로 탈북한다. 나의 경우는 지능적인 탈북이라고 해야 할까. 일전에 말한 것처럼 유일한 외부 소식인 남한 삐라를 보고 탈북 결심을 하였다. 하지만 남조선은 헐벗고 굶주리고 폭압적이라는 선전에 세뇌된 상태를 완전히 벗어나지 않으면 행동할 수 없었다. 따라서 가려는 목적지인 남조선을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북한 내에서 자료를 통해서 알아 볼 수밖에 없었다. 북한 내의 남조선 자료란 모두 악선전 자료밖에 없다. 그것이라도 자료는 자료이기에 문헌적으로 달리 선택할 방법이 없다. 북한 내에서 남한에 대한 전문 자료는 <남조선 문제> 월간 잡지이다. 남조선은 월급은 15만 원이며 전세계 최악으로서 미국의 11분 1, 일본의 8분 1, 대만의 5분 1밖에 안 된다고 한다. 아무튼 월급 15만 원의 가치를 알기 위해 다른 악선전인 인플레 자료에서 1달러당 가치를 알아 보았다. 인플레가 날개를 달고 치솟아 1 달러 당 남한 돈 700원이라고 한다. 이것으로 15만 원 월급에 나누어보니 214달러 이상! 숨이 막히도록 깜짝 놀랐다. 북한의 월급 가치는 1달러인데 비해 214 배나 되기 때문이다. - 남한 사회의 자유성은 바로 1년 전 제 13차 세계 청년 학생 평양 축전에 왔던 <통일의 꽃 임수경>을 통해 확인하였었다. 저렇게 반정부 활동을 하고도 죽지 않고 감옥에서 투쟁한다니 북한 실정으로 보면 말이 안 될 만큼 느슨한 정치 제도인 것이다. 결정적인 인식을 준 것은 차후 북한 기자단이 임수경 집에 뛰어들어갔을 때이다. 냉장고가 가정집에 있고 또 그 안에서 임의로 간식을 꺼내는 생활수준도 놀라웠지만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무조건 척결됐어야 할 <반동 에무나이> 가정이 건재한 것이었다. 이런 것들을 보면 남북 간의 접촉은 그것이 반 남한 성격이라도 전면 허용(개방)하는 것이 이득이라는 현실을 벌써 30여 년 전에 보여주었다. 이렇게 북한 내에서 남한을 알아보았지만 그래도 불안하였다. 그래서 남한에 갔다 온 이들을 만나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북한 사람이 남한에 갔다 온 이들은 직파 간첩 외에는 없을 뿐더러 이들을 만난다는 것은 어림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해마다 수만 명이 남한을 갔다 온 이들이 북한에 존재한다. 이들이 바로 북한을 방문하는 조선족들이었다. 이들을 만나기는 식은 죽 먹기이다. 시장에 가면 흔히 만날 수 있었다. 북한사람들 입장에서 개혁개방된 중국은 천국처럼 보였다. 이들에게 남조선이 어떤가고 물으니 하나 같이 그런다. 이들은 외국 국적자로서 말조심도 하지 않고 <남조선은 우리보다 30년 이상 앞서 있어요. 에무나이들은 그곳에 시집 못 가서 안달이고, 남자들은 노무자로 돈벌이 가려고 줄을 서 있어요.> 하지만 북한을 방문한 이들의 소리는 대부분 간접 증언이었다. 남조선 방문 조선족들은 입국을 불허한 북한의 조치의 결과이다. 그래서 몰래 중국에 넘어가 남조선 갔다온 조선족을 만나 확인하여 보기로 하였다. 중국 길림성 장백현 장백시 내의 장마당에서 탐문해보니 물건을 파는 조선족 아주머니를 찾아냈다. 그는 <한국 남해도> 친척 방문을 갔다 왔다고 한다. 남조선 친척 집은 식사 후 과일을 먹는다고 한다. 그야 부자집이 아닌가고 반박하니 농민이라고 한다. 조선족 아주머니는 당시 인기 있던 중국 약을 팔아 돈벌이에만 어두워 있었다. 체류 만료 기일에 이르자 친척이 조상 묘에 예를 치르자고 권유한다. 마지 못해 따라 갔는데 집과 그리 멀지 않지만 수풀이 우거져서 무서워 혼났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남조선은 산천이 황폐화되지 않았음을 직감하였다. 이 직감보다 감동은 민속 전통과 예의가 살아 있다는 것이다. 남해도에서 육지로 놀려갔다가 망신당한 이야기를 한다. 코를 푼 휴지를 차창 밖으로 휙 던졌다. 그런데 남한 친척이 조용히 차를 세우고 그것을 주워 휴지통에 넣는다. 너무 창피해서 혼났다고 한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깊은 감동을 받았다. 깡패가 득실댄다는 남조선에 저런 분도 있다는 것이 그렇게 신선하게 느껴졌다. 저는 그때 확고히 최종 결심했다. 남조선으로 가자! 속으로 한 결심을 읽기나 한 듯 그 조선족 여인은 당시 중국 위해와 인천 사이 여객선 뱃길이 또 생겼다며 어께를 들석이며 좋아하였다. 장백현 시내에 갔었던 그때는 1990년 9월이었다. 탈북은 1990년 11월이었다. 북한에서부터 탈북이 전무할 때의 이러한 선견은 이런 거듭된 탐구와 확인 끝에 이루어졌다. 이렇게 만든 시발점은 남조선 삐라였음을 재삼 강조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