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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객(食客)
예전에 세력이 있는 집에 얹혀서 문객(門客) 노릇을 하는 사람. 하는 일 없이 남의 집에 얹혀서 얻어먹고 지내는 사람. 권세가들에게 지식과 지혜를 팔아 먹고 지내는 사람을 말한다.
食 : 밥 식(食/0)
客 : 손 객(宀/6)
출전 : 사기(史記)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
오늘날 같은 지식사회에서 지식인은 보편적 계층이지만, 옛날에는 특정 계층이었다. 특히 그들은 춘추시대에 많이 나타나 혼란한 천하를 바로 잡고자 각자의 영역에서 이론을 개척하고 학문을 열었다. 그들은 나라를 바로 잡고 인간다운 세상을 여는 나름의 학문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상당수는 관료가 되어 군주에게 봉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세상이 혼란해져 질서와 관료체제가 무너졌다. 이에 따라 당시 지식인들은 일자리를 잃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없어 세력가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을 유세하였다. 그들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유랑하는 지식인 실업자들이었다.
그들 중에 상당수는 아예 은둔하여 가난한 학자의 길을 걷는 사람도 있고, 차라리 학문을 바탕으로 장사에 뛰어들어 큰 돈을 번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정치 관료의 길을 걷기를 바랐다. 그들은 나름의 정치적 식견과 이론을 바탕으로 정치적 유세를 하다가 운 좋으면 한 나라의 재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받아줄 군주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그들에게 군주를 만날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군주에게 발탁될 기회를 얻기 위해 각국 세력가들을 찾아가 그들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책사(策士) 노릇을 하였다. 이들을 식객(食客)이라 불렀다. 식객은 유랑하는 고등실업자 지식인으로 전국시대에서부터 그렇게 유래된 말이다.
전국시대를 주름잡았던 유명한 정치가였던 상앙, 장의, 범저 등도 모두 식객 출신이었다. 오늘날은 그 의미가 많이 바뀌었지만, 정치 교수라는 사람들, 정치에 줄 대는 지식인들 등도 식객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세력가들은 뛰어난 식객을 많이 거느릴수록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세력가들은 식객들에게서 지혜와 지략을 얻어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래서 전국시대에서부터 세력가들은 식객을 거느리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으며, 식객들은 세력이 강하고 덕망이 있는 정치가들 휘하로 들어가려고 노력하였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전국시대를 주름잡았던 전국 4공자인 제(齊)나라의 맹상군(孟嘗君)인 전문(田文), 조(趙)나라의 평원군인 조승(趙勝), 위(魏)나라의 신릉군(信陵君)인 무기(無忌), 초(楚)나라의 춘신군(春申君)인 황헐(黃歇) 등 세력가들은 수천 명이나 되는 식객을 거느리며 군주보다 강한 권세를 누렸다고 한다.
이러한 식객들은 평화 시에는 주인에게 책사 노릇을 하며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으나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험지로 달려가서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도 했다. 그들에게 의리와 명분은 매우 중요한 덕목이었지만 실제는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였다.
그들 상당수는 정치가의 세력에 따라 모이기도 하고 떠나기도 하면서 자신의 목숨과 가치를 유지하려 하였다. 그래서 세력이 강한 정치가의 휘하에는 식객이 넘쳐나고 세력이 약한 정치가의 휘하에는 식객이 적었으며 세력이 강한 정치가가 세력이 약해지면 떠나는 식객들도 많았다.
이를테면 맹상군이 재상의 자리에 있을 때는 수천 명이나 되던 식객들이 맹상군이 재상의 자리에서 쫓겨나자 하나도 남김없이 떠났다고 한다. 이것은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넘치지만, 막상 정승이 죽으니 사람 구경하기 어렵다'는 말과도 통한다. 식객들은 인품보다는 권력에 따라 움직이는 실리적인 경향이 강했다.
식객은 자신의 정치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인재를 영입하려는 자와 그들의 인재가 되려는 자들이 복잡하게 얽힌 현상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오늘날도 비슷하다. 전국시대의 제자백가들처럼 인재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오늘날은 지식인, 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은 학문이 분화되고 심화 되어 이들은 특정 영역에 전문성을 내세우며 세력 있는 정치가들에게 줄을 서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 지식인들이 정치에 줄을 서는 것은 옛날과 같이 자기의 정치적 이상이나 정책적 소신을 실현해보고자 하는 소망도 있지만, 그들 휘하에서 정치적 자리를 얻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기도 하다.
그뿐 아니다. 정치가들은 정치적 문제와 정치적 이익을 위한 지식과 지혜를 얻고자 역량있는 전문가 지식인들을 인재로 영입하고자 한다. 그런데 오늘날도 옛날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비전이 보이는 정치가와 정치 그룹에는 인재가 모이고 그렇지 못한 경우는 인재가 모이지 않는다. 그리고 정치적 영향력이 사라지면 인재도 떠난다. 얼마 전 각 정당에서 인재 영입을 중요한 화두로 내세우는 것도 그런 연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정치인과 지식인들과의 기묘한 공생관계의 역사는 참으로 길다.
오늘날은 정치에서도 분야마다 지식과 전문성이 고도로 요구되는 사회이다. 그래서 정치가 전문 지식인을 요구한다. 정치인도 분야별 전문적 지식을 가지려 노력하며 전문성 있는 지식인과 좋은 관계를 맺기를 원한다.
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전문성이 있는 정치가와 양식있는 전문 지식인과 관계가 좋은 정치가가 대중으로부터 신뢰를 받는다. 그래서 정치인과 지식인과는 옛날보다 더 강한 공생관계망을 형성하고 있으며 쌍방이 서로를 요청하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의 정당에서는 인재 영입을 위해 노력한다. 실력과 비전을 갖춘 정치적 인재를 영입하려고 하고 영역별로 전문성 있는 학자들을 영입하여 자문을 받고자 한다. 선거철이 되면 정당들이 인재 영입을 화두로 꺼내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이런 현상은 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무한 기술 경쟁 시대에 우수 인재를 많이 고용한 기업은 발전하고 그렇지 못한 기업은 발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인재들 또한 비전 있고 대우 좋은 기업엔 몰려들고 그렇지 않은 기업엔 몰려들지 않는다. 기업도 자문기구를 만들어 명망 있는 학자들을 영입한다. 그래서 정치인과 지식인, 정치 집단과 지식인, 기업과 지식인 등과 관계는 묘한 공생의 역학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 특징을 보면 첫째는 오늘날 지식인들도 전국시대의 식객처럼 정치 세력이 강한 정치인과 정치 집단에는 몰려들고 그것이 약화 되면 떠난다. 둘째, 오늘날 지식인들도 전국시대의 식객처럼 정치 세력의 휘하에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중요한 자리를 얻기를 희망하며 그것이 보일 때까지 협조하지만 그것이 보이지 않으면 떠난다. 셋째 오늘날 지식인들도 전국시대의 소신 있는 식객처럼 자기의 정치적 소신과 이상을 위해 참가하는 사람도 있으며 정치적 소신과 이상이 맞지 않으면 세력가를 떠나는 자존심 강한 지식인들도 많다.
이런 현상을 요즈음 정치 상황에 비추어 보자. 지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학자, 교수라 하는 사람들 상당수가 특정 후보 지지 선언을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다. 대중들은 교수나 학자들의 지적인 권위에 따라 후보와 정당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보와 해당 정당에서도 자기들의 취지에 부합하는 학자와 교수들을 자문 교수라는 명목으로 영입한다. 정치가와 정당은 지적 명망이 있고 참신한 사람을 영입하기를 바라며, 정치지망생과 학자들은 당선이 유력한 후보에게 많이 몰리고 당선이 불확실한 후보에게는 모이지 않는 경향은 예나 다름없다.
이런 현상은 지방 선거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당선이 유력한 후보의 주변에는 자문 교수도 많지만, 당선 가능성이 없는 후보의 주변에는 거의 없다. 그 중에는 과거의 식객들처럼 뭔가 이익이나 자리를 염두에 두는 사람도 많다. 전국시대의 식객처럼 오늘날도 세력에 따라 움직이는 지식인 교수들이 많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다. 이런 묘한 관계망에서 지식인의 속성을 읽어낼 수 있다. 그래서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지식인을 '지식 스파이'라고 한 것도 이와 관련이 되는 것 같다.
지금 전개되는 우리나라의 선거 상황을 보면서 옛날의 식객과 같은 교수, 학자들을 많다는 것을 느낀다. 그들은 자진하여 직능 대표, 자문 교수단을 형성하여 유력한 후보 혹은 정치적 지향이 맞는 후보를 찾아 지지 선언을 하고 정책을 조언한다. 전문 정치의 시대에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많다. 상당수의 그들에게서 정치적 철학이나 소신, 정문성이나 능력보다는 유세와 자리 탐욕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옛날 은둔하며 소신과 철학을 탐구하고 그것으로 세상을 밝히고자 하는 학자들처럼, 정작 전문성이 있는 지식인 교수들 상당수는 정치와는 별개로 학문 탐구와 학생 교육에 전념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정말 존경스럽다.
오늘날의 정치지향의 지식인들은 식객으로서의 옛날의 지식인과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식객으로서의 특성을 상당히 지니고 있다. 그 자체가 부정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오늘날의 정치지향의 지식인과 교수들이 정치적 소신과 철학보다는 정치인의 정치적 힘에 따라 움직이는 현상이 큰 것을 보면 참 아쉽다.
그리고 정치인들도 정치적 소신과 철학, 전문성이 분명한 지식인을 맞이하는 것보다 지지의 크기나 후원금의 액수 혹은 충성의 정도나 인맥 등에 더 의존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아쉽다.
옛날의 식객처럼 지식인이 정치인과 긴밀한 관계를 갖는 것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지식인이 어떤 정치인의 식객이 되려고 하는가의 문제이며 정치인과 정치 집단이 어떤 지식인을 식객으로 맞이하고자 하는가의 문제라는 말이다.
지식인이라는 학자와 교수들이 정치인의 식객이 되어 정치를 자문하고 자리를 구할 때 진정으로 소신과 철학을 가지고 옳은 일에 동의(YES)하고 그른 일에 반대(NO) 할 수 있는 악마의 대변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이 전문지식정치의 시대에 식객 지식인은 절대 필요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많아야 하고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양심과 소신, 철학을 지닌 식객 지식인은 적다는 점과 정치인과 식객 지식인의 비합리적 관계망이 많은 것 같아 아쉽다. 조선시대 지조의 표상인 선비들처럼 인격과 철학과 소신을 지닌 전문성 있는 식객 지식인이 넘치기를 기대해 본다.
맹상군(孟嘗君, ? ~ 기원전 279년)
맹상군(孟嘗君)은 중국 전국 시대의 정치가로서, 전국 시대의 사군자(戰國四君)의 한 사람이다. 성은 규(嬀), 씨(氏)는 전(田), 휘(諱)는 문(文)이며, 맹상군은 그의 시호이다. 종횡가의 세계관을 기조로 전국 칠웅 간에 외교가로 활약하였다. 진나라에서 제나라로 돌아갈 때 재치를 보여준 '계명구도'의 고사는 유명하다.
맹상군(孟嘗君) (1)
혁신을 이룩한 조무령왕(趙武靈王)도 치맛폭에 눈멀어 잘못된 양위를 하였으니...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스스로 주보(主父)라고 칭한 조무령왕은 진(秦)나라를 염탐하고 돌아온 후에도 천하 패업에 대한 야심을 버리지 않은 채 기마대 양성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천하 무적의 기마대로 키우리라!'
이때가 조무령왕(趙武靈王)으로서는 가장 절정기요, 신명나는 시절이었다. 이대로만 갔더라면 어쩌면 천하는 조(趙)나라에 의해 통일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적어도 진(秦)나라의 통일이 훨씬 더 늦어졌을 것이다.
얼핏 보기에 조무령왕(趙武靈王)은 완전무결한 듯했다. 그러나 그에게도 허점이 있었다. 좀더 상세히 말하면, 그는 감정의 기복이 몹시 심한 사람이었다. 기분내키는 대로 행동했다는 뜻이다. 꿈속에서 본 맹요(孟姚)를 현실에서 찾아 부인으로 맞이한 점이나, 맹요에게서 난 아들 공자 하(何)를 뒤늦게 세자로 책봉한 점들이 바로 그러한 증거였다.
이러한 돌출된 감정의 기복은 끝내 그의 생애를 비극으로 마감하게 했다. 그의 비극적인 종말은 이미 발 밑에서 싹트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세자였다가 폐위시킨 아들 공자 장(章)이 바로 그 씨앗이었다.
중산국(中山國)을 멸망시킨 이듬해인 BC 295년(조혜문왕 4년), 어느 날, 이제 막 열세 살이 된 조혜문왕(趙惠文王)이 조회를 열었다. 조혜문왕(趙惠文王)은 높은 곳에 마련된 왕좌에 우뚝 앉아 문무백관의 알현을 받았다. 그 자리에 안양군도 있었다. 안양군은 곧 폐세자 장(章)이다.
그때 안양군(安陽君)은 25세의 건장한 청년으로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유난히 몸집이 컸다. 정상적이라년 지금쯤 그가 왕좌에 앉아 있어야 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그 동생이 왕위에 올라 있지 않은가.
안양군(安陽君)은 다른 신하들처럼 나이어린 조혜문왕 앞으로 나가 무릎을 꿇고 공손히 절을 올렸다. 그 모습이 몹시 의기소침해 있었다. 그 광경을 옆에 앉아 있던 주보 조무령왕(趙武靈王)이 보았다. 순간 조무령왕의 가슴 한구석으로 에이는 듯한 아픔이 스쳐갔다. 태산만한 형이 주먹만한 동생에게 굽신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자신도 모르게 측은한 생각이 든 것이었다.
조회가 끝난 후 조무령왕(趙武靈王)은 재상 비의를 불러 물었다. "안양군의 처지가 몹시 안되었소. 나라를 둘로 나누어 안양군을 대(代)나라 왕으로 봉하려 할까 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떠하시오?"
비의(肥義)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후계에 관한 일이라면 주보께서는 이미 지난날 일을 잘못 처리하셨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왕과 신하의 신분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새삼스레 안양군(安陽君)에게 권한을 주신다면 공연히 나라만 어지러워질 것입니다. 한 나라에 어찌 왕이 셋일 수 있겠습니까?"
조무령왕(趙武靈王)은 마뜩치 않았는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내궁으로 들어갔다. 부인 맹요(孟姚)가 조무령왕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조회 때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조무령왕이 말했다. "오늘 조회 때 안양군(安陽郡)이 어린 동생에게 절 올리는 모습을 보니 매우 보기가 좋지 않더구려. 나라의 일부를 떼어 두 아들을 다 왕으로 삼을까 하는데, 부인 생각은 어떠하오?"
별안간 맹요(孟姚)가 싸늘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옛날 진(晉)나라는 익(翼)과 곡옥(曲沃)으로 갈라져 오랜 세월 동안 내전을 벌여왔습니다. 주보(主父)께서는 그 까닭을 아십니까? 바로 큰아들 구(仇)와 둘째 아들 성사(成師)에게 모두 도읍을 내려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조무령왕이 말했다. "주보(主父)께서는 이제 또 그러한 비극을 되풀이하려 하십니까? 나라를 동생에게 물려 주셨으면서 다시 큰아들 안양군에게 땅을 나누어 준다면 그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합니다. 차라리 우리 모자(母子)를 폐하여 시골에 내려가 조용히 살게 해주십시오."
그 이후로 조무령왕은 안양군을 대왕(代王)에 봉하려는 생각을 그만 두었다. 그런데 조무령왕과 맹요의 대화 내용이 내관들의 입을 통해 그만 안양군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안양군(安陽君)은 마음이 몹시 좋지 않았다. 보좌관인 전불례(田不禮)를 불러 이 일을 의논했다. "주보(主父)께서 나라를 쪼개어 나를 대왕에 봉하려 하다가 맹요(孟姚)의 반대에 부딪쳐 중지하셨다 하는구려. 내가 과연 이대로 가만히 있어야 할 것인가?"
전불례(田不禮)는 안양군이 세자로 있을 때부터 수행하며 자신의 앞날을 꿈꾸어 왔던 사람이었다. 이런 그에게 세자 장(章)의 폐위는 하나의 커다란 절망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안양군(安陽君)의 가슴속에 이 같은 불만이 도사리고 있을 줄이야. 어두운 빛을 띠고 있던 전불례의 얼굴이 별안간 밝아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속에 있던 말을 내뱉았다. "주보(主父)께서 두 아들을 모두 왕으로 삼겠다는 것은 공평한 마음이십니다. 이제 주보의 마음을 알았으니 군(君)께서는 어린 왕을 처치해 버리십시오. 성공만 하면 주보께서도 눈감아 주실 것입니다."
전불례의 열기가 안양군(安陽君)에게도 전해졌다. "그렇겠지? 그대는 일이 성사될 수 있도록 만반의 계책을 꾸미도록 하오. 성공하면 나는 장차 그대와 함께 이 나라를 다스리겠소."
이때부터 전불례(田不禮)는 비밀리에 군사를 모으기 시작했다.
맹상군(孟嘗君) (2)
하늘이 도우심인가. 얼마 후 안양군(安陽君)에게 놓칠 수 없는 기회가 찾아왔다.
조무령왕과 조혜문왕이 함께 사구(沙丘)로 유람을 나간 것이었다. 물론 안양군도 함께 했다. 사구(沙丘)는 지금의 하북성 광종현으로 옛날 은왕조 때 주왕(紂王)이 자주 놀러왔을 정도로 주변 경치과 아름다운 곳이다. 그 곳에는 주왕이 지었다는 이궁이 두 개 있었다. 두 이궁(離宮)은 약 10리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조무령왕(趙武靈王)과 조혜문왕(趙惠文王)은 각기 두 이궁에 거처했다. 그리고 안양군(安陽君)은 두 이궁의 중간쯤 되는 곳에 숙소를 배정받았다. 이것이 전불례(田不禮)의 눈에는 하늘이 내린 기회로 비쳤다. "지금 두 왕은 유람을 나왔기 때문에 많은 군사를 데리고 오지 않았습니다. 이야말로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입니다. 군(君)께서는 먼저 주보의 명이라 속이고 어린 왕을 이 곳으로 유인해 내십시오. 그러면 저는 중간에 군사를 매복해 기다리고 있다가 왕이 오는 대로 나가서 쳐죽이겠습니다. 그런 후에 주보(主父)를 받들어 모시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전불례의 속삼임에 안양군(安陽君)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묘책이오."
그날 밤이었다. 안양군(安陽君)은 심복 내관을 보내 조혜문왕(趙惠文王)이 거처하는 이궁으로 보내 말을 전하게 했다. '주보께서 별안간 병이 나셨습니다. 속히 가보십시오.'
그런데 조혜문왕의 주변에는 노련한 대신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었다. 특히 재상 비의(肥義)는 조혜문왕에게 간(諫)했다. "왕께서는 잠시 기다려 보십시오. 신이 먼저 주보께서 계시는 사구궁(沙丘宮)으로 가 자세한 정황을 알아보겠습니다. 신의 기별이 있기 전에는 절대로 행차하지 마십시오."
재상 비의(肥義)는 약간의 기마병을 거느리고 이궁을 떠났다. 그가 말을 타고 한창 밤길을 달리는데, 별안간 어둠 속에서 한 떼의 무장한 기마대가 나타났다. 미리 그 곳에 매복해 있던 전불례의 기마병이었다.
전불례(田不禮)는 전방에서 달려오는 사람이 조혜문왕인 줄로만 알았다. 다짜고짜 뛰어나가 철퇴로 말 위에 탄 사람을 후려쳤다. '퍽', 소리와 함게 말에 탄 사람은 땅바닥으로 떨어져 즉사했다. 나머지 호위 기병들도 모두 쳐죽였다. 전불례(田不禮)는 의기양양하게 호령했다. "횃불을 밝히고 시신을 확인해라!"
횃불이 밝혀지는 순간 전불례(田不禮)는 기겁했다. 뇌수를 흘리고 죽어 있는 사람은 조혜문왕이 아니라 늙은 재상 비의(肥義)였기 때문이었다. "이거 야단났구나. 비밀이 누설되었나 보다. 기왕 이렇게 된 바에야 할 수 없다. 날이 새기 전에 이궁(離宮)을 기습하여 어린 왕을 죽여야겠다."
전불례(田不禮)는 계획을 바꿔 안양군을 앞세운 채 조혜문왕(趙惠文王)이 거처하는 이궁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난데없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한 떼의 기마병이 습격해오자 조혜문왕(趙惠文王)은 기절할 듯 놀랐다. 이제 불과 열세 살.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오들오들 떨었다.
이때 조혜문왕의 곁에서 잔심부름하던 사람은 어릴적부터 그를 돌보아온 고신(高信)이라는 내관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궁중에서 생활해온 탓에 몹시 노련했다. 조혜문왕을 대신하여 침착하게 내관과 근위 병사들을 지휘했다.
먼저 그는 말 잘 타는 젊은 내관을 뽑아 지시했다. "너는 지체없이 도성으로 달려가 태부 이태와 공자 성(成)에게 반역이 일어났다고 알려라." 이어 대청으로 나가 외쳤다. "모든 군사는 당황하지 말고 담장 위로 올라가 활을 쏘라. 날이 새면 도성에서 토벌군이 올 것이다."
이궁(離宮)의 방비는 의외로 탄탄했다. 안양군(安陽君)과 전불례(田不禮)는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빗발처럼 쏟아지는 화살 때문에 좀처럼 담장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동쪽 하늘이 환하게 밝아왔다. 안양군(安陽君)은 초조감에 사로잡혔다. "누구를 막론하고 이궁 문을 부수는 자에게는 고을 하나를 상으로 내리리라."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병사들은 커다란 돌을 들어 이궁 문을 향해 던졌다. 궁문이 금방이라도 떨어져나갈 듯 흔들렸다. "무서워." 조혜문왕(趙惠文王)은 더욱 겁에 질렸다.
그때였다. 남쪽 들판 저편에서 누런 먼지가 일어나는 게 보였다. 그 먼지를 뚫고 한 떼의 기마대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사구(沙丘)에 변이 났다는 급보를 전해받은 한단성에 있던 태부 이태와 사마 공자 성(成)이 이끄는 기마대였다. "와 -!" "앗!" 엇갈리는 두 함성이 이궁 안팎에서 울려퍼졌다. 안에서 터져나온 함성은 조혜문왕(趙惠文王)을 지키는 근위군의 것이요, 밖에서 터진 소리는 안양군(安陽君)이 이끄는 반란군의 놀람에 찬 비명이었다.
한단(邯郸)에서 달려온 구원군은 성난 파도처럼 안양군의 군대를 몰아쳤다. 전투는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성공 직전에서 뜻밖의 기습을 받은 안양군(安陽君)은 노도처럼 덮쳐드는 한단군을 보고 절망에 사로잡혔다. 그는 쫓기며 전불례(田不禮)에게 물었다. "이제 돌아갈 곳마저 잃었구려. 장차 이 일을 어찌 수습하면 좋겠소?"
전불례도 실의에 젖어 대답했다. "하는 수 없습니다. 공자께선 속히 주보께로 가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십시오. 주보(主父)께선 반드시 공자를 보호해주실 것입니다. 그 사이 저는 저들을 막아 시간을 벌겠습니다."
안양군(安陽君)은 지체없이 주보를 향해 말을 몰았다. "아버님, 소자를 살려주십시오. 어쩌다 군사들 사이에 오해가 생겨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어린 왕이 지금 소자를 죽이려 합니다."
조무령왕(趙武靈王)은 무릎꿇고 애원하는 안양군의 모습을 보자 차마 그를 내칠 수가 없었다. "알겠다. 난리가 진정될 때까지 여기 숨어 있어라. 내가 왕에게 잘 말해주겠다."
맹상군(孟嘗君) (3)
안양군(安陽君)과 조무령왕(趙武靈王)의 허망함 죽음
조무령왕(趙武靈王)의 잘못된 선택으로 안양군(安陽君)은 어찌될꼬. 조무령왕의 앞날은?
그시각, 전불례(田不禮)는 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다시 한단(邯郸)에서 온 구원군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그는 도망쳐봐야 더 비참한 종말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무작정 돌격을 감행한 것이다. 죽음을 각오한 전불례(田不禮)의 반격에 이태(李兑)와 공자 성(成)은 주춤했다. 전투는 반나절이 더 계속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외로운 싸움을 벌이던 전불례(田不禮)는 공자 성(成)이 휘두른 칼에 맞고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반란군을 진압한 이태(李兑)와 공자 성(成)은 시체를 살피다가 안양군의 시체가 보이지 않음을 알고 의논했다. "죽지 않았다면 필시 주보께서 거처하는 이궁(離宮)으로 도망쳤을 것이오. 가서 안양군(安陽君)을 내어달라고 합시다."
이태(李兑)와 공자 성(成)은 그 즉시로 군사를 몰아 조무령왕이 머물고 있는 사구궁(沙丘宮)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조무령왕(趙武靈王) 앞으로 나가 아뢰었다. "이번 난리는 우발적인 것이 아닙니다. 안양군(安陽君)은 치밀한 계획하에 반역을 꾀한 것입니다. 바라건대 주보(主父)께서는 안양군을 내주시어 종묘사직을 안정시키십시오."
조무령왕(趙武靈王)은 두 눈을 부라리며 호통쳤다. "안양군은 이 곳에 오지 않았다. 그대들은 다른 곳에 가서 찾아보아라."
두 사람은 말했다. "이 곳으로 들어온 것을 보았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자의 정을 모르는 바 아니나,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는 사정(私情)을 끊으셔야 합니다. 안양군을 내주십시오."
조무령왕(趙武靈王)은 침묵했다. 한풀 기가 꺾인 기세였다. 그렇다고 안양군(安陽君)을 내줄 마음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말없이 일어나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이태(李兑)와 공자 성(成)은 조무령왕의 그러한 행동을 허락의 뜻으로 해석했다. 군사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이궁을 뒤져라!"
군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사구궁(沙丘宮)을 샅샅이 뒤졌다. 마침내 그들은 벽이 이중으로 된 밀실에 웅크리고 있는 안양군(安陽君)을 찾아냈다. 이태(李兑)는 칼을 뽑아 다짜고짜 안양군의 목을 후려쳤다. 사마 공자 성(成)이 놀라 물었다. "어찌하여 이렇듯 성급하게 죽이는 것이오?"
이태(李兑)가 말했다. "만일 주보께서 안양군(安陽君)을 내달라고 하면 우리는 그 명을 그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소. 그러면 우리는 그간 헛고생을 한 셈이 되고 마오. 차라리 복명하지 않고 이 자리에서 죽여 없애는 것이 낫소!" 그제야 공자 성(成)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들이 안양군의 목을 들고 뜰로 나오는데 궁실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울음소리였다. 두 사람은 눈을 마주쳤다. "주보(主父)께서 우시는가?" "그런 모양이오."
공자 성(成)의 얼굴에 난처한 표정이 떠올랐다. 미안한 마음이 든 것이다.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데 이태(李兑)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그를 불러세웠다. "잠깐!" "왜 그러시오?" 이태(李兑)가 말했다. "주보(主父)께서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안양군(安陽君)을 퍽 사랑했던 모양이오. 저렇듯 울기까지 하실 줄은 몰랐소. 만일 우리가 이대로 나가면 주보(主父)는 장차 우리를 문책할지 모르오. 기왕 일이 이렇게 된 것. 좀더 과감히 행동합시다. 더욱이 지금 왕은 나이가 어리니 그다지 염려할 것이 없지 않겠소?"
공자 성(成)이 말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소? 우리가 당하기 전에 먼저 주보(主父)에게 손을 쓰자는 것이오." 공자 성(成)은 한순간 멈칫했으나 이내 그것이 자신들을 위해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태(李兑)는 사구궁(沙丘宮)의 내관들과 시종들을 향해 외쳤다. "모든 수행원은 들어라. 왕명을 전하노니, 지금 당장 궁 밖으로 나가라. 그렇지 않고 꾸물거리는 자는 역적과 내통한 죄로 다스리리라!" 내관과 시종들은 영문도 모르고 앞다투어 궁 밖으로 뛰어나갔다.
조무령왕(趙武靈王)은 안양군을 잃은 슬픔에 한참을 흐느껴 울다가 문득 사위가 고요해진 것을 알았다. "게 아무도 없느냐?"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친히 일어나 궁실 밖으로 나왔다. 뜰은 텅 비어 있었다. 맨발로 뜰을 가로질러 대문 앞으로 갔다. 문을 밀었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시 세차게 밀었으나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그제야 그는 밖에서 궁문이 잠긴 것을 알았다. "이놈들!" 조무령왕(趙武靈王)은 분노에 찬 신음을 토했다. 그러나 어쩌랴. 굳게 닫힌 궁문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열리지 않았다.
닷새가 지났다. 조무령왕(趙武靈王)은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었다. 뜰 한구석에서 이제 갓 알에서 깨어난 참새 새끼들을 발견했다. 조무령왕의 커다란 손이 그 참새 새끼들을 움켜잡았다. 따스한 온기가 전해지는 그 작은 생명체를 그는 천천히 입 안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한 달을 살아갔다. 그래도 궁문은 열리지 않았다. 다시 두 달. 마침내 조무령왕은 비어 있는 참새 둥지 앞에서 쓰러졌다. 그러고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이태(李兑)와 공자 성(成)은 어린 조혜문왕을 데리고 한단성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사구궁 안에 가두어 놓은 조무령왕의 그 뒤 행적이 궁금했으나 감히 들어가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마도 굶어죽었을 게요." 그래도 그들은 사구(沙丘)로 가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석 달이 지나서야 그들은 사구로 내려가 자물쇠를 열고 이궁(離宮) 안으로 들어갔다. 궁안을 뒤질 필요도 없었다. 뜰 한 구석에 참새 둥지를 움켜쥔 채 죽어 쓰러져 있는 조무령왕의 시체를 발견했다. 살은 완전히 시들고 말라버려서 뼈에 가죽만 입혀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제야 안심한 이태(李兑)와 공자 성(成)은 조혜문왕과 조정에 조무령왕의 죽음을 알리고 사구에서 장사 지냈다.
조무령왕(趙武靈王)은 중국 최초로 호복기사(胡服騎射)를 창설하여 중원 패자를 노리던 전국시대 또 하나의 영웅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으로 잡은 것은 빈 참새 둥지. 그 둥지를 움켜쥔 채 죽어가며 그는 과연 무엇을 생각했을까? 조무령왕(趙武靈王)은 이렇듯 엉뚱하게 자신의 생을 마감했다.
그 뒤 이태(李兑)와 공자 성은 조혜문왕이 나이가 어린 점을 이용해 조나라의 정권을 장악했다. 공자 성(成)은 재상이 되고, 이태는 사구(司寇)가 되었다.
맹상군(孟嘗君) (4)
제(齊)나라 맹상군(孟嘗君) 의 처세 : 절대로 남에게 반감(反感)을 사지 마라.
조무령왕(趙武靈王)은 BC 295년에 죽었다. 진시황이 난세를 종식시키고 천하를 통일한 것은 BC 221년이다. 이제 천하통일까지는 74년이 남았다. 조무령왕(趙武靈王)이 비운의 생을 마감하던 무렵, 중원에는 한 샛별이 등장했다. 맹상군(孟嘗君)이다
맹상군은 제나라 국정에 관여하며 이미 비범한 소질을 엿보였다. '절대로 남에게 반감(反感)을 사지마라'는 어머니의 이러한 처세관을 배웠음인지 맹상군은 특히 손님 접대에 가장 많은 신경을 썼다.
그는 자신의 집을 찾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이렇게 물었다. '출신은 어디이며,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십니까?' 그러면 집안 일을 관리하는 가신장(家臣長)이 병풍 뒤에 숨었다가 그 내용을 장부에 적어둔다.
손님이 떠나가고 나면 맹상군(孟嘗君)은 곧바로 사람을 시켜 그 손님의 가족들에게 예물을 보냈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손님에 대한 접대가 이러한데 사람들이 그를 따르지 않을 리 없었다. 이 일을 두고 어떤 사람이 맹상군(孟嘗君)을 비하했다. '소나 개나 다 받아들여 장차 그들을 어디다 써먹을 것인가?' 이 소문을 듣고 맹상군이 중얼거렸다. "사람은 누구나 한 가지 취할 바는 있는 법이지."
측근 가신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렇다면 도둑에게도 취할 바가 있다는 말입니까?" 맹상군(孟嘗君)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도둑질도 재주가 아니냐?" 이런 소문이 퍼지면서 천하 각지에서는 더욱 그를 보기 위해 임치성으로 모여들었다.
어느새 그의 집에 머물며 식객(食客) 노릇을 하는 사람만도 3천 명이 넘게 되었다. 동시에 그의 명성은 일반 유협들에게 뿐만 아니라 각 나라 왕들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중원 최고의 강대국 임금인 진소양왕(秦昭襄王)도 맹상군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나의 대(代)에 천하 패업을 이루리라"고 일성을 토할 만큼 야심에 찬 왕이었다. 그런데 막상 행동으로 옮기려다 보니 벽에 부딪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중 가장 아쉬운 것이 자신을 도와 움직여줄 인물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런 중에 맹상군(孟嘗君)이 명성을 떨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눈을 빛낼 만큼 크게 관심을 보였다.
진소양왕(秦昭襄王)은 하루빨리 자신의 야망을 이룰 마음에 맹상군을 초빙해 승상으로 삼기로 결심했다. 그는 즉시 사자를 임치성으로 보내 맹상군(孟嘗君)을 초청했다. '부디 함양(咸陽)으로 오시어 함께 천하 대세를 의논해 봅시다.'
맹상군(孟嘗君)은 이러한 진소양왕의 초빙에 응해 함양으로 떠나려는 마음을 가졌다. 그런데 그의 가신과 문객들이 한결같이 반대했다. "진(秦)나라는 이리와 같은 나라입니다." 가면 해를 당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 반대의 이유였다. 그래도 맹상군(孟嘗君)은 가려고 했다.
그러자 그 무렵 다시 제나라로 돌아온 소진의 동생 소대(蘇代)가 또 만류했다. 그는 말로 먹고 사는 유세가답게 기묘한 은유를 들어 맹상군을 설득했다. "오늘 아침 제가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재미난 구경을 하였습니다. 나무로 만든 인형과 흙으로 빚은 인형이 서로 주고받는 말을 들은 것이지요."
그러고는 그 대화 내용을 들려주었다. 나무 인형이 흙인형에게 말했다. '하늘에서 비가 오면 그대는 곧 무너질 것이다.' 그러자 흙으로 만든 인형이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난 애초 흙에서 태어났으니 무너진들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대는 어떠한가. 비가 오면 그대는 떠내려가 장차 어디까지 갈 것인가를 알 수 없지 않은가?'
소대(蘇代)는 이어 말했다. "아시겠습니까? 설공(薛公, 맹상군)의 신세가 바로 나무 인형입니다. 진(秦)나라는 음흉하기가 어찌나 심한지 그 속을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초회왕의 죽음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만일 군께서 진(秦)나라로 가셨다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흙 인형의 비웃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소대의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맹상군(孟嘗君)은 진나라 행을 단념했다. 그러나 진소양왕도 상당히 집요했다. 그는 다시 경양군(逕陽君)을 사자로 보내어 이번에는 제민왕과 접촉했다. "나의 동생 경양군을 볼모로 잡히겠소. 그러니 부디 맹상군(孟嘗君)을 우리나라로 보내주시오."
이에 제민왕(齊湣王)은 맹상군을 불러 진나라에 다녀오기를 부탁했고, 맹상군은 결국 함양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맹상군(孟嘗君)은 임치성을 떠났다. 진나라 공자 경양군과 동행했다. 굳이 경양군을 인질로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맹상군의 간언을 받아들여 제민왕(齊湣王)은 그를 그냥 진소양왕에게로 돌려보내기로 한 것이었다.
함양으로 향하는 맹상군의 행렬은 거창했다. 그의 집에 머물러 있던 3천여 식객 중 1천여 명이 그를 수행하기를 원했다. 그 뒤를 따르는 수레도 1백 승(乘)이 넘었다.
맹상군(孟嘗君) (5)
맹상군(孟嘗君)의 위기탈출이 도적의 손에 달렸다
맹상군(孟嘗君)이 함양에 당도하자 진소양왕은 제후에 해당하는 예(禮)로써 그를 영접했다. "과인은 그대를 한 번 만나보는 것이 평생 소원이었는데, 오늘 이렇듯 만나게 되니 이 기쁨을 뭐라 형언할지 모르겠소."
그러고는 조정으로 나가 문무백관을 향해 선포했다. "과인은 오늘부터 맹상군(孟嘗君)을 우리나라 승상으로 삼아 나라 일을 맡길 것이오."
그런데 이 부분은 사서(史書)마다 약간씩 차이를 보여준다. 심지어는 같은 사기(史記)에서도 진본기(秦本紀)와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의 내용이 다르다. 진본기(秦本紀)에 의하면, 진소양왕은 맹상군을 승상으로 삼아 2년 가까이 국정을 맡기다가 뇌물 수수의 혐의를 두어 파면한 것으로 되어 있고,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에 의하면 승상으로 삼으려 했으나 조정 중신들의 반대에 부딪쳐 중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어느 것이 정확하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후자 쪽이 더 신빙성이 있지 않을까?
어쨌거나 진소양왕(秦昭襄王)은 맹상군을 극진히 대접했다. 이에 대한 답례로 맹상군은 '호백구(狐白裘)'라는 물건을 진소양왕에게 선물했다. 호백구(狐白裘)는 여우 겨드랑이 털 중 하얀 털만 모아 만든 가죽옷이다. 한 벌을 만드는 데 여우 1천 마리가 필요하다고 하는 그런 옷이다. 돈으로는 주고 살 수 없는, 천하에 둘도 없는 보물인 것이다.
진소양왕(秦昭襄王)은 호백구를 받고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그날 밤, 내궁으로 들어가 총애하는 후궁 연희(燕姬)에게 자랑했다. "이 세상에 이보다 더 귀한 옷은 없을 것이다." 그러고는 궁중 깊숙한 창고에 잘 보관하였다. 다음날부터 진소양왕(秦昭襄王)은 매일 맹상군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이 무렵, 진나라 대신 중에 누완(樓緩)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본래 조(趙)나라 사람이었다. 조무령왕이 호복기사를 창설하려 할 무렵 모든 사람이 반대할 때 유일하게 찬성한 바로 그 누완이었다. 그는 조무령왕이 세자 장(章)을 폐위시키고 공자 하(何)를 세자로 삼았을 때 조나라 앞날의 어지러움을 예감하고 진나라로 건너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진(秦)나라의 차기 승상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맹상군이 나타나 승상 자리에 오르려 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위기감을 느끼고 은밀히 진소양왕을 찾아가 말했다. "왕께서도 아시다시피 맹상군(孟嘗君)은 제나라의 왕족입니다. 그런 사람이 우리나라의 승상 자리에 오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는 모든 일을 처리할 때 제(齊)나라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 진(秦)나라를 생각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더욱이 맹상군은 비상한 사람입니다. 이번에 그를 수행한 문객들만도 1천여 명이 넘습니다. 그런 그가 정권을 잡으면 우리 진(秦)나라가 제(齊)나라의 속국이 될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입니다."
진소양왕(秦昭襄王)이 듣고 보니 그럴 듯했다. 진소양왕은 안색이 어두워지며 물었다. "내가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소. 잘 대접한 후 그냥 돌려보내면 되겠소?"
그러나 누완(樓緩)은 고개를 저었다. "맹상군(孟嘗君)은 우리 나라에 온 지 한 달이 넘었습니다. 그 사이 그 문객들이 우리 진(秦)나라의 실정을 소상히 조사해 두었을 겁니다. 그를 제(齊)나라로 돌려보내면 우리 진나라는 큰 손실을 당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자는 것이오?" "죽이는 것이 상책입니다."
진소양왕의 침묵을 확인한 누완(樓緩)은 그 즉시로 행동에 옮겼다. 그날 밤, 맹상군(孟嘗君)이 묵고 있는 공관에 군사들이 배치되었다. 출입도 일체 금지되었다. 맹상군은 그제야 자신에게 위험이 닥쳤음을 알고 안색이 돌변했다. '잘못하다간 이 곳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겠구나.'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한 얼굴을 떠올렸다. 함양으로 올 때 함께 동행했던 경양군이었다. 경양군(逕陽君)은 원래 인질로써 제나라에 갔었으나 맹상군이 굳이 볼모로 삼을 필요가 없다고 건의하여 다시 진(秦)나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경양군으로서는 맹상군에게 빚을 한 번 진 셈이다. '그라면 나를 도와줄 것이다.' 곧 공관에서 일하는 사람을 매수해 경양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진왕(秦王)이 나를 죽이려 하오. 임치에서의 일을 생각해서라도 나를 도와주시오."
경양군(逕陽君)은 경우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름대로 조사한 끝에 맹상군에게 위험이 닥쳤음을 확인했다. 그는 맹상군을 돕기로 결심하고 곧 공관으로 달려갔다. "군께서 살아서 제(齊)나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오? 나는 그저 그대가 시키는 대로 하겠소."
경양군(逕陽君)이 말했다. "우리 왕의 후궁 중에 연희(燕姬)라는 미인이 있습니다. 우리 왕은 그녀를 어찌나 총애하는지 연희의 말이라면 십중팔구(十中八九) 들어줍니다. 군께서 연희에게 귀중한 보물을 뇌물로 주고 잘 말해 보십시오" "연희(燕姬)가 승낙만 하면 그대는 죽음을 면하고 제(齊)나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맹상군(孟嘗君)은 백옥 두 쌍을 경양군에게 내주며 간곡히 청했다. "그대가 일이 잘 되도록 부디 주선해 주시오."
다음날 경양군(逕陽君)은 궁으로 들어가 연희에게 백옥 두 쌍을 바치며 맹상군 석방에 힘써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자 연희(燕姬)가 앞에 놓인 백옥을 밀치며 대답했다. "저는 원래 옥을 싫어합니다. 다만 원하는 것이 있다면, 1천 마리의 여우 겨드랑이 털로 만든 호백구뿐입니다. 호백구(狐白裘)만 구해주시면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왕을 설득해 보겠습니다."
경양군으로부터 연희의 말을 전해들은 맹상군(孟嘗君)은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 호백구(狐白裘)가 있긴 했었으나 이미 진왕에게 바쳤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꼬!"
그는 고심하다가 데리고 온 문객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물었다. "누가 호백구(狐白裘) 한 벌을 더 구할 수는 없겠소?" 그러나 천하에 한 벌뿐인 호백구를 어디 가서 구해온단 말인가. 문객들은 아무 대답도 못하고 서로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때였다. 가장 끝자리에 앉아 있던 사내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제가 군을 위해 호백구(狐白裘)를 구해오겠습니다." 맹상군(孟嘗君)의 얼굴이 별안간 밝아졌다. "그대는 어디 가서 호백구를 구해올 작정이오?" "공께서도 아시다시피 호백구(狐白裘)는 천하에 한 벌밖에 없습니다. 공께서 진왕에게 바친, 지금은 궁중 깊숙한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호백구가 바로 그것이지요."
사내가 말했다. "저의 직업은 원래 도둑질입니다. 물건을 훔치는 일이라면 천하에 저를 따라갈 사람이 없다고 자부합니다. 오늘밤 저는 창고에 있는 호백구(狐白裘)를 훔쳐내올까 합니다." 맹상군(孟嘗君)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대가 능히 호백구(狐白裘)만 훔쳐올 수 있다면 우리는 살아서 돌아갈 수 있소."
맹상군(孟嘗君) (6)
군더더기 식객(食客)인 도둑과 재주꾼이 맹상군(孟嘗君)을 탈출시키다.
그 날 밤이었다. 그 식객(食客)은 개의 탈바가지를 품속에 숨긴 채 궁중 안 창고 근처까지 잠입해 들어갔다. 요즘도 그러하지만 옛날에도 집안을 지키는 데는 주로 개를 이용했다. 진(秦)나라 궁실의 창고 앞에 창고지기와 함께 개 한마리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창고지기는 개를 믿은 탓인지 벽에 기대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직업이 도둑인 그 식객에게는 한가지 묘한 재주가 있었다. 다름아닌 개 흉내를 내는 일이었다. 그가 개 흉내를 내면 진짜 개도 속을 정도였다. 그 덕분에 그는 개들의 경비망을 뚫고 어디든지 들어갈 수 있었으며, 마침내는 천하 제일의 도둑임을 자부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구도(狗盜)'의 명수였다.
그는 품에서 개의 탈바가지를 꺼내 얼굴에 쓰고는 네 발로 창고 앞까지 다가갔다. 과연 창고를 지키는 개는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갑다는 듯 꼬리를 쳤다. 결국 그 사내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창고안에 있는 호백구(狐白裘)를 훔쳐내 맹상군에게 바칠 수 있었다. 맹상군의 기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컸다.
이튿날, 맹상군(孟嘗君)은 경양군을 불러 호백구를 내주었다. 경양군은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즉시 궁으로 들어가 연희에게 호백구를 바쳤다. 연희 역시 자기가 원하던 물건을 보자 뛸 듯이 기뻐했다.
그날부터 연희(燕姬)는 진소양왕에게 갖은 아양과 애교를 떨었다. 밤마다 진소양왕의 살과 뼈를 녹였다. 그런 후에 속삭였다. "듣자하니 왕께서 맹상군(孟嘗君)을 죽이려 하신다는데, 대체 누가 그런 어리석은 제안을 했습니까? 맹상군(孟嘗君)은 천하에 알려진 군자입니다. 만일 왕께서 맹상군을 죽인다면 천하의 모든 사람들은 왕을 손가락질할 뿐만 아니라 이후로는 그 어떤 어진 사람도 우리 진(秦)나라로 발길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왕께서는 어찌하여 스스로 천하 인재들을 멀리하는 행동을 하시려는 겁니까? 신첩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진소양왕(秦昭襄王)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그대 말이 옳구나." 날이 밝자 진소양왕은 근시(近侍)에게 명했다. "맹상군에게 수레와 봉전(封傳)을 내주고 제(齊)나라로 돌아가게 하라." 봉전이란 관문을 통과하는 통행증이다. 오늘날로 치면 여권(旅券)이다.
진소양왕(秦昭襄王)의 근시로부터 수레와 봉전을 받아낸 맹상군(孟嘗君)은 다시 수행원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이제 다행히 구도(狗盜)의 도움을 받아 호랑이 굴을 벗어나게 되었소. 그러나 우리가 제(齊)나라로 돌아가는 도중 진왕은 후회하고 우리 뒤를 쫓을 것이 분명하오. 이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 두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나지 못하오."
그러자 수행원 중 하나가 나서서 말했다. "문서나 편지를 위조하는 일이라면 아마도 저를 따라갈 사람이 없을 겁니다. 제가 봉전(封傳)에 적혀 있는 군의 이름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겠습니다."
이윽고 맹상군(孟嘗君) 일행은 제각기 수레에 올라타 공관을 떠났다. 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속력으로 수레를 몰았다. 몇 날 며칠을 달려 국경이자 마지막 관문인 함곡관(函谷關)에 당도한 것은 한밤중이었다. 날이 저물면 닫아걸고 이튿날 첫닭이 울어야 문을 여는 것이 관문의 규칙이었다.
굳게 닫힌 육중한 관문 앞에 선 맹상군(孟嘗君)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쯤 필시 진(秦)나라 군대가 열심히 우리 뒤를 쫓고 있을 것이다. 새벽까지 어찌 기다릴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멀리서 추격군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맹상군(孟嘗君)의 입술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별안간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맹상군(孟嘗君)은 귀를 기울였다. "꼬끼오...!" 틀림없이 닭 우는 소리였다. 벌써 새벽이 되었는가. 아니다. 분명 삼경(三更)이 조금 넘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닭 울음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꼬끼오...!"
맹상군(孟嘗君)은 자기 귀를 의심하면서 닭 울음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닭 울음소리는 바로 수행원들 속에서 일고 있질 않은가. 그랬다. 맹상군(孟嘗君)을 수행해온 식객 중에는 짐승의 성대 묘사에 능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 식객은 맹상군이 굳게 닫힌 관문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보고는 목을 길게 뽑아 닭 울음소리를 흉내내었던 것이다. 맹상군도, 그 외의 수행원도 모두 숨죽이고 그 사내를 지켜보았다.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
맹상군(孟嘗君) (7)
계명구도(鷄鳴狗盜)의 일화, 어떤 것이든 한 가지 재주에 뛰어나면 그것을 유용하게 써먹을 날이 온다.
마침내 식객(食客)의 닭 울음소리에 반응이 왔다. 관문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마을에서 진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닭 울음소리는 사방에서 시끄러울 정도로 들려왔다. 관문을 지키는 관리들이 눈을 비비며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새벽인가?" 그들은 관문 앞에 몰려 있는 맹상군(孟嘗君) 일행의 봉전을 확인하고 관문을 열어주었다. 물론 그 봉전(封傳)에 기입된 이름은 가명이었기 때문에 관리들은 그들이 맹상군 일행인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고맙소."
맹상군 일행은 함곡관(函谷關)을 나서자마자 다시 전속력을 내어 제(齊)나라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맹상군(孟嘗君)은 수레를 달리면서 '구도(狗盜)'의 식객과 '계명(鷄鳴)'의 식객을 불러 감사의 말을 올렸다. "내가 오늘 호랑이 굴 속에서 살아나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두 분선생의 덕분이오."
이 말을 들은 다른 식객들은 그동안 그들을 무시하고 깔보았던 점을 부끄러워하며 그 후로는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라도 모두 예(禮)로써 대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계명구도(鷄鳴狗盜)' 의 일화다.
'닭 울음소리를 내고 개 흉내를 내어 도둑질하다.' 어떤 것이든 한 가지 재주에 뛰어나면 그것을 유용하게 써먹을 날이 온다는 의미로 오늘날까지 자주 쓰이는 말이다. 사람을 무시하지 않고 찾아오는 사람을 잘 대접하면 언젠가는 큰 도움을 받는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한편, 누완(樓緩)은 뒤늦게 맹상군이 함양성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뿔사.' 그는 황급히 궁으로 달려가 진소양왕에게 아뢰었다. "신은 맹상군(孟嘗君)을 싫어하여 죽이자고 한 것이 아닙니다. 장차 진(秦)나라에 큰 해를 끼칠까 염려되어 죽이자고 한 것입니다. 왕께서는 무슨 마음으로 그를 살려 돌려 보내셨습니까?" 그 말을 들은 진소양왕(秦昭襄王)은 자신이 너무 성급했음을 깨달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군대를 보내 잡아오도록 하오."
그 무렵 진(秦)나라도 기마대를 양성하고 있었다. 누완(樓緩)은 즉시 기마 20기를 뽑아 맹상군을 뒤쫓아 잡아오게 했다. 추격군은 부리나케 함곡관(函谷關)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너무 늦었음인가. 가는 도중까지 그들은 맹상군 일행을 발견하지 못했다.
추격군 대장은 함곡관 관리를 붙잡고 명했다. "요 며칠 사이 관문을 통과한 사람들의 명단을 내어보아라!" 그러나 명부 어디에도 맹상군(孟嘗君)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아직 이곳을 지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추격군 대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다른 데로 빠지는 샛길도 없는데,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추격군은 일단 그 곳을 지키며 한나절을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러나 맹상군 일행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추격군 대장은 영문을 알 수 없어 다시 관문의 관리에게 맹상군(孟嘗君)의 용모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 대해 말해주고 나서 물었다. "이런 사람들이 이 곳을 지나가지 않았는가?" "그 사람들이라면 생각이 납니다. 오늘 새벽에 이 곳을 통과했습니다."
그제야 맹상군(孟嘗君)일행이 완전히 국경을 빠져나갔음을 안 추격군 대장은 함양으로 돌아가 사실대로 보고했다. 진소양왕(秦昭襄王)은 자신도 모르게 탄복했다. "그 사이 함곡관을 빠져나갔단 말이냐? 과연 맹상군(孟嘗君)은 신출귀몰의 재주를 지녔구나!"
몇 달이 지나 겨울이 되었다. 날씨가 추워지자 진소양왕(秦昭襄王)은 창고지기를 불러 명했다. "바람이 차갑구나. 호백구(狐白裘)를 내오너라!" 창고지기가 창고 안으로 들어가 호백구를 찾았다. 그러나 이미 연희의 손에 들어간 호백구(狐白裘)가 그 곳에 있을 리 없었다. "이상합니다. 호백구가 없어졌습니다." 진소양왕(秦昭襄王)은 노발대발했다. "천하에 하나밖에 없는 호백구를 어느 놈이 훔쳐갔단 말이냐!"
창고지기를 야단친 그는 분을 삭이며 내궁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연희(燕姬)가 호백구를 입고 있는 것이 아닌가. 놀라서 물었다. "너는 그것을 어디서 구했느냐?" "지난날 맹상군(孟嘗君)이 사람을 시켜 신첩에게 선사한 것입니다."
더럭 의심이 난 진소양왕(秦昭襄王)은 사람들을 불러 조사한 결과 맹상군의 식객 중 하나가 그 호백구(狐白裘)를 훔쳐 연희에게 재차 주었다는 내막을 알게 되었다. 그는 또 한 번 탄복을 금치 못했다. "허허, 맹상군의 문하에는 별별 재주를 가진 사람이 다 모였구나! 우리 진(秦)나라는 그를 따라가려면 멀었다."
맹상군(孟嘗君) (8)
맹상군(孟嘗君)과 평원군(平原君)의 비극적인 만남
맹상군이 이렇듯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을 무렵, 조(趙)나라에도 한 사람의 기린아(麒麟兒)가 등장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기린아란 재주와 지혜가 뛰어난 젊은이를 말한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평원군(平原君)'이라고 불렀다.
앞서도 얘기했듯이 얼마 전 비운의 생을 마감한 조무령왕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다. 그 중 유력한 공자는 폐세자가 된 안양군(安陽君)과, 뒤늦게 세자가 되어 왕위를 물려받은 조혜문왕(趙惠文王), 그리고 첩의 몸에서 태어난 공자 승(勝)이었다. 이 공자 승이 바로 평원군(平原君)이다.
평원군(平原君)이라는 호칭은 맹상군처럼 죽은 후에 붙은 시호가 아니다. 그는 성장하여 조혜문왕으로부터 평원(平原) 땅을 식읍으로 받았는데, 이 때문에 평원군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평원은 지금의 산동성 평원현 서남쪽 일대다.
평원군(平原君)은 어려서부터 어질고 현명하였으며, 특히 빈객들이 자기 집에 머물러 있는 것을 좋아했다. 열 다섯 살이 넘으면서부터는 아예 집을 개조하여 문객들이 머물 수 있도록 숙사(宿舍)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 이 소문이 퍼지면서 그의 집을 찾는 문객의 숫자가 차츰 늘어났다. 하지만 맹상군(孟嘗君)을 따라가려면 아직도 멀었다.
그런 중에 그의 명성이 천하에 알려지는 계기가 생겨났다. 평원군의 저택 안에 높고 커다란 누각 하나가 있었다. 평원군(平原君)이 가장 사랑하는 첩이 기거하는 누각이었다. 어느 날, 평원군의 애첩이 누각 높은 곳에 올라 밖을 내다보는데 이웃 민가에 살고 있는 절름발이가 물지게를 지고 절뚝거리며 걸어갔다. 그 모습이 애첩의 눈에는 몹시 우스꽝스럽게 비쳤던 모양이다. 그녀는 깔깔대고 웃으며 그 절름발이의 걷는 모습을 구경했다.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생각한 절름발이는 크게 분개하여 그 즉시로 평원군(平原君)을 찾아가 따졌다. "저는 공자께서 선비를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천하의 많은 선비들이 천릿길을 멀다 않고 공자의 문하로 모여드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 몸은 불행히도 허리와 다리에 병을 앓아 보시다시피 걷는데 상당히 불편합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제가 물을 긷는데 공자의 첩(妾)이 저를 내려다보며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제가 한낱 여자의 웃음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절름발이 사내의 거센 항변에 평원군(平原君)이 미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일은 참으로 잘못 되었소. 당신은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합니까?" "저는 저를 비웃은 여자의 목을 얻기를 원합니다."
평원군(平原君)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대답했다. "알았소. 그렇게 하리다." 절름발이는 평원군에게 절하고 저택에서 물러났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평원군(平原君)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저자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도다. 한 번 웃었다는 이유로 내 애첩(愛妾)을 죽이라고 하다니, 대관절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평원군(平原君)은 매달 한 번씩 자신의 저택에 머무는 문객의 명단을 살피곤 했다. 명부에 적힌 인원수를 헤아려 다음달에 필요한 물품과 양식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아울러 자신에 대한 인기를 알아보려는 마음이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매달 문객(門客)의 수가 늘었을 뿐 줄어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두 달, 석 달이 지나면서 문객의 수가 조금씩 줄더니 1년이 지났을 때는 어느새 예전의 반밖에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평원군(平原君)은 명부를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대관절 무슨 곡절인가?"
모든 문객(門客)을 대청으로 불러놓고 물었다. "나는 오늘날까지 여러분을 대우하면서 한 번도 예의를 잃은 적이 없다고 자부하오. 그런데 1년 사이 어째서 이렇게 많은 손님들이 나를 버리고 떠나가는 것이오? 여러분은 내가 모르는 과실이 있으면 말해주시오."
문객 중 한 사람이 일어나 대답했다. "간단합니다. 공자께서는 절름발이를 비웃은 애첩(愛妾)을 죽이겠다고 약속했으나 지금까지 아무런 처벌도 내리지 않고 계십니다. 이로 인해 선비들 사이에 '평원군(平原君)은 여색만을 좋아하고 선비는 천하게 여긴다'는 말이 나돌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뿔뿔이 떠나간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평원군(平原君)은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범했는가를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과연 내가 잘못했소." 그러고는 허리에 찬 칼을 풀어 시종에게 내주며 지시했다. "이 칼을 가지고 가서 누각의 여인을 목 베어라." 얼마 후 시종은 피가 흐르는 애첩의 머리를 쟁반에 받쳐들고 왔다.
평원군(平原君)은 그 머리를 가지고 직접 절름발이 사내의 집으로 가 그에게 내주며 정중히 사죄했다. 이때부터 평원군의 집에는 다시 문객(門客)들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이 소문이 사람들의 입을 통해 널리 퍼져 마침내는 천하에까지 평원군(平原君)의 명성이 떨쳐지게 되었다.
바로 이 무렵, 맹상군(孟嘗君)이 계명구도의 계책으로 함양성을 탈출하여 조나라의 한단성을 지나게 되었다. '맹상군(孟嘗君)이라면 천하에 으뜸가는 협사(俠士)다. 이런 기회에 그를 만나보지 않으면 언제 또 만나랴.'
평소 맹상군을 흠모하던 평원군(平原君)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친히 한단성 30리 밖으로 나가 맹상군 일행을 맞이했다. 맹상군(孟嘗君) 또한 평원군의 명성을 들은 터라 반가운 마음으로 그의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이것이 뜻하지 않은 참변을 낳았다.
조(趙)나라 사람들은 맹상군의 이름만 들었을 뿐 그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이에 인근 마을 사람들은 맹상군의 얼굴을 보기 위해 앞을 다투어 달려나와 수레를 에워쌌다. 원래 맹상군(孟嘗君)은 키가 작고 볼품이 없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기대감에 차서 달려나온 마을 사람들은 맹상군의 왜소한 모습을 보고 적잖이 실망했다.
자신들도 모르게 비웃는 말을 던졌다. "에게, 저 사람이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맹상군(孟嘗君)이란 말인가? 어찌 저리도 왜소하고 못났는가." "나는 풍체가 굉장한 사람일 줄 알았는데, 광대짓이나 하면 딱 어울릴 외모로구만. 평원군과 비교하면 보름달과 반딧불의 차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수군거리며 한바탕 웃었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했다. 맹상군(孟嘗君)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어지는 것을.
그 날 밤이었다. 맹상군(孟嘗君)이 묵고 있는 마을 거리에 수십 명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모두들 칼을 뽑아들고 있었다. 그들의 발걸음은 마을의 한 집 앞에 멈춰섰다. 대문을 두드렸다. 집 주인이 나오는 순간 칼날이 번쩍 빛을 발했다. 집 주인은 영문도 모른 채 피를 뿌리며 죽어갔다.
두 번째 집으로 갔다. 똑같은 살인이 그 집에서도 벌어졌다. 세 번째, 네 번째... 이렇게 그 사내들은 마을을 한바퀴 돌며 그 곳 사람들을 모조리 살해했다.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잔인하고 처참한 살인 행각이었다. 그 살인자들은 다름 아닌 맹상군(孟嘗君)을 수행하는 문객 중 칼을 잘 쓰는 검객들이었다. "감히 우리 주인을 모욕하다니!" 그랬다. 이것이 그들이 그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살해한 이유였다.
다음날 이 살인사건은 즉각 평원군에게 보고되었다. 평원군(平原君)의 문객들은 한결같이 분개했다. "용서할 수 없습니다. 당장에 군사를 내어 습격합시다." 그러나 평원군(平原君)은 모욕당한 맹상군의 분노를 이해한 탓일가. 아니면 맹상군 일행의 거침없는 행동에 기가 질려버렸음인가.
그는 끝내 아무말도 하지 않고 맹상군 일행이 떠나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전국사군(戰國 四君) 중 으뜸가는 맹상군(孟嘗君)과 그 뒤를 잇는 평원군(平原君)의 첫 만남은 이렇듯 무참한 비극으로 끝이 났다.
맹상군(孟嘗君) (9)
맹상군(孟嘗君)의 더욱 많아진 식객(食客)들... 풍환(馮驩)은 어떤 능력을 보여줄지?
맹상군, 제(齊)나라 재상에 오르다.
그랬다. 호랑이 굴이나 다름없는 진(秦)나라에서 무사히 탈출하여 임치성으로 돌아온 맹상군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제나라 재상 자리였다. 원래 제민왕(齊湣王)은 맹상군의 효용 가치를 알지 못했었다. 그런데 다른 나라, 특히 초강대국 진나라에서 맹상군(孟嘗君)을 탐내는 것을 보고는 그제야 맹상군을 빼앗겨서는 안 되겠다는 자각이 일었다. 그는 여느 때와 달리 반갑게 맹상군(孟嘗君)을 영접한 후 그 자리에서 재상의 인수를 내렸다.
'계명구도(鷄鳴狗盜)' 사건 이후 맹상군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그의 문하로 모여드는 유협(遊俠)의 숫자도 더욱 늘어갔다. 맹상군은 그런 그들을 일일이 대접하여 자신의 집에 머물게 했다.
식객, 3천 명에 달하다.
이 식객(食客)들을 다 수용하려면 집도 엄청나게 컸을 것이다. 맹상군(孟嘗君)은 많은 객사를 지었다. 그는 객사를 3등급으로 나누어 능력과 재주에 따라 식객들을 대우했다. 가장 아래인 3등급 객사를 '전사(傳舍)'라 했고, 2등급 객사는 '행사(幸舍)'라 했으며, 가장 고급인 1등급 객사는 '대사(代舍)'라 했다.
3등 객사인 '전사(傳舍)'의 뜻은 이러하다. '단순히 심부름이나 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의 방.' 소위 하객(下客)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이곳에 머물며 밥이나 얻어먹는 것으로 만족했다.
2등 객사인 '행사(幸舍)'의 뜻은 이러하다. '나름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머무는 방.' 주로 중객(中客)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이들은 고기 반찬은 먹었지만 출타할 때 수레를 제공받지 못했다.
1등 객사인 '대사(代舍)'의 뜻은 이러하다. '능히 맹상군을 대신하여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의 방.' 상객(上客)의 거처다. 식사 때면 고기반찬을 먹고, 외출할 때는 수레를 제공받았다. 그밖의 대우도 몹시 좋았다.
어느 날이었다. 몸집이 큰 한 나그네가 낡은 옷에 구멍난 짚신을 신고 맹상군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그는 맹상군 앞으로 안내되자 자기 소개를 했다. "저의 성은 풍(馮)이요, 이름은 환(驩)입니다."
맹상군(孟嘗君)은 언제나 그러하듯이 풍환이라는 사람에게도 공손히 읍하고 물었다. "선생께서는 먼 길을 오셨는데, 불초한 제게 무엇을 가르쳐주시렵니까?"
풍환(馮驩)이 대답했다. "저는 군(君)께 가르침을 드리러 온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군께서 귀천을 가리지 않고 선비를 좋아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가난한 몸을 의지하려고 왔을 뿐입니다."
맹상군(孟嘗君)은 다시 한 번 풍환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 객사장(客舍長)을 불러 지시했다. "이분을 전사(傳舍)로 안내해 드려라."
풍환(馮驩)은 아무 소리 없이 전사로 들어가 하객(下客) 대우를 받았다. 그런데 맹상군(孟嘗君)은 웬지 풍환이라는 사내가 마음에 걸렸다. 열흘쯤 지나서 객사장을 불러 물었다. "요즘 풍환(馮驩) 선생은 어찌 지내고 있는가?"
객사장(客舍長)이 대답했다. "풍(馮) 선생은 몸에 지닌 것이 칼 한 자루뿐인데, 그나마 손잡이도 떼풀로 얽어매었습니다. 그는 심심하면 그 칼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곤 합니다."
그러고는 그 노래를 들려주었다. '장검(長劍)이여 돌아가자. 밥을 먹으려 해도 생선 반찬이 없구나.' 맹상군(孟嘗君)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지시했다. "반찬이 못마땅한 모양이로구나. 그렇다면 한 등급 올려 행사(幸舍)로 옮겨주어라."
닷새가 지났다. 맹상군(孟嘗君)은 다시 객사장을 불러 물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 "여전히 칼자루를 두드리며 노래만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사가 조금 달라졌습니다." '장검(長劍)이여 돌아가자. 밖으로 나가려 해도 수레가 없구나.'
맹상군(孟嘗君)의 얼굴에 놀라는 빛이 떠올랐다. "풍환 선생은 상객 대우를 받고 싶은 모양이다. 어쨌든 예사롭지 않은 사람이니, 대사(代舍)로 옮겨 드려라."
그날부터 풍환(馮驩)은 1등급인 대사(代舍)로 옮겨 풍족한 생활을 누렸다. 외출할 때면 수레를 타고 다녔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히 노래 부르기를 중지하지 않았다. 저녁마다 뜰을 거닐며 칼을 두드리며 노래했다. '장검(長劍)이여 돌아가자. 나의 집이 없구나.'
그 노래를 객사장(客舍長)이 들었다. 그는 맹상군에게로 달려가 일러바치듯 노래 가사를 들려주었다. 맹상군(孟嘗君)은 은근히 화가 났다. 대관절 어디까지 바라는 것인가. 그는 성을 내며 말했다. "참으로 욕심 많은 사람이로구나. 더 이상 신경쓰지 말고 내버려 두어라."
이때부터 맹상군(孟嘗君)은 풍환에 대해 일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풍환(馮驩)은 변함없이 대사(代舍)에서 호의호식하며 편안한 생활을 누렸다. 그러나 맹상군의 언짢음을 눈치챘음인지 노래만은 부르지 않았다. 그렇게 1년의 세월이 흘렀다.
맹상군(孟嘗君)의 집에 머물며 밥을 축내는 사람은 3천여 명이었다. 그 식객들을 먹여 살리려면 어마어마한 양식이 필요했다. 그런데 식읍인 설(薛) 땅에서 거두어들이는 양식만으로는 부족한 식량을 채우기가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맹상군(孟嘗君)은 설 땅 백성들에게 돈을 빌려주어 그 이자로 모자라는 양식을 충당하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이자도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이래저래 맹상군(孟嘗君)의 집 살림살이는 어려워져갔다.
어느 날 객사 살림을 맡아보는 집사가 맹상군에게 아뢰었다. "곳간에 한 달 먹을 양식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맹상군(孟嘗君)은 근심이 되어 좌우 식객들에게 물었다. "누가 차용 문서를 가지고 가 밀린 이자를 거두어 오겠소?"
예나 지금이나 빌려준 곡식과 돈을 받아내는 일은 무척 어렵다. 자칫 잘못하면 원망만 들을 뿐이다. 더욱이 선비된 자로서 돈을 받으러 돌아다니는 것은 체면상 말이 아니다. 모두들 입을 다물고 눈치만 살폈다.
그때 객사장(客舍長)이 나서며 한 사람을 천거했다. "풍환(馮驩) 선생을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풍 선생은 대사(代舍)에 머물면서도 아무 하는 일이 없으니 이번 기회에 그를 보내 밀린 빚을 받아오게 하십시오."
다분히 골탕을 먹이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천거였다. 아마도 객사장(客舍長)은 잘난 체하며 대사에서 무위도식(無爲徒食) 하는 풍환이 몹시 고까웠던 모양이었다. 맹상군(孟嘗君)도 같은 생각이었음인가. 객사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풍환(馮驩)을 불러 부탁했다. "어려운 일인 줄 알지만 선생께서 책임지고 빌려간 곡식과 밀린 이자를 거두어 주시오."
이에 대해 풍환(馮驩)은 두말하지 않고 흔쾌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수레를 타고 설읍(薛邑)으로 내려간 풍환은 곧 백성들에게 통지하여 이자를 가져오게 하였다.
맹상군(孟嘗君) (10)
가난한 백성들의 차용증서를 불태우다
설읍(薛邑)은 호수(戶數)가 1만 호인 큰 고을이었다. 맹상군에게 돈을 빌려간 백성이 꽤 많았다. 그들은 통지를 받자 서둘러 돈을 마련해 풍환에게 갖다 바쳤다. 모두 10만 전의 이자가 걷혔다. 그러나 그것은 받아낼 총액수의 5분의 1도 안 되었다.
다음날, 풍환(馮驩)은 거두어들인 10만 전의 돈으로 술과 안주를 잔뜩 준비해놓고 거리에 널리 방문을 붙였다. '설공(薛公)으로부터 곡식을 빌려간 자나 돈을 꾸어간 자는 그 이자를 갚았건 못 갚았건 빠짐없이 차용 증서를 가지고 부중(府中)으로 오라.' 오후가 되자 많은 백성들이 차용 증서를 들고 설읍의 부중(府中)으로 몰려들었다. 그 수가 엄청나게 많았다.
먼저 풍환(馮驩)은 준비한 술과 음식을 대접한 후 차용 증서를 바치게 했다. 그런데 이때부터 풍환의 행동이 이상하게 변했다. 백성들이 가져온 차용 증서와 원장(原帳)을 대조하며 집안 형편을 낱낱이 묻고는 갚을 기일을 모두 연장해주는 것이었다. 빚진 백성들이 기뻐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이윽고 부중(府中) 뜰에는 가난해서 원금조차 갚을 수 없는 자들만 남았다. 그들은 큰 벌이나 받지 않을까 두려워 풍환에게 애걸했다. "대물림을 해서라도 갚을 터이니 이번 한 번만 봐주십시오."
풍환(馮驩)이 좌우의 읍리(邑吏)들을 돌아보며 명했다. "뜰에다 불을 피워라!" 불이 크게 피어오르자 풍환(馮驩)은 가난한 백성들에게서 받은 차용 증서를 한데 모아 불 속에 던져버렸다. 불은 기세좋게 타올랐다. 백성들의 얼굴에 놀라는 기색이 떠올랐다.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풍환(馮驩)이 높은 대 위에 올라가 뜰에 모여 있는 백성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맹상군께서 너희들에게 곡식과 돈을 꿔주신 것은 이자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난한 백성들을 돕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동안 이자를 받아갔는가? 이는 설공(薛公)께서 빈객들을 접대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맹상군(孟嘗君)은 특별히 이번에 설읍 백성들을 위하여 다소 살림이 넉넉한 사람에게는 기일을 연장해주고, 너무 가난해서 갚기 힘든 사람에게는 차용 증서를 불태우라 명하셨다. 너희들은 이러한 맹상군의 높으신 뜻과 은혜를 부디 잊지 마라. 이런 주인을 어찌 저버릴 수 있겠는가."
풍환의 말을 들은 설읍(薛邑) 백성들은 감격을 이기지 못하고 땅에 엎드려 큰 절을 올렸다. "맹상군(孟嘗君)이야말로 우리의 부모이십니다."
읍리(邑吏) 중 한 사람이 즉시 수레를 타고 임치로 달려가 맹상군에게 이 사실을 고해바쳤다. 맹상군(孟嘗君)은 불같이 노했다. "풍환이 어찌 제멋대로 차용 증서를 불태워버렸단 말인가. 당장 풍환을 소환하라."
며칠 후 풍환(馮驩)이 임치로 돌아왔다. 풍환을 본 맹상군(孟嘗君)은 일부러 태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먼 길을 갔다 오느라 수고가 많았소. 이자는 다 받아 왔소?"
풍환(馮驩) 또한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이자는 받아오지 않고 군(君)을 위해 큰 덕을 거두어 왔습니다."
이에 맹상군(孟嘗君)은 태도를 돌변하여 큰 소리로 꾸짖었다. "그대는 헛소리를 할 것인가! 그대도 알다시피 나는 거느리는 선비들만도 3천 명에 달하오. 설읍 백성들에게 돈을 빌려준 것도 바로 그 때문이오. 그런데 그대는 이번에 내려가서 그들의 차용 증서를 제멋대로 불태우고 빚을 탕감해주었으니, 대체 무엇으로써 3천여 명의 선비들을 먹여 살린단 말이오? 더욱이 거두어들인 10만 전마저 백성들이 먹을 술과 고기를 마련하는 데 썼다고 하니, 대관절 그대는 무슨 뜻에서 그런 짓을 했소?"
풍환(馮驩)은 여전히 표정을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군(君)을 위해 덕을 거두어 왔습니다. 제가 10만 전으로 술과 고기를 사 백성들에게 먹인 것은 그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기 위해서이며, 그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한 것은 그들의 살림 형편을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하여 형편이 좀 나은 사람에게는 기일을 연장해주었고,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는 증서를 불태움으로써 빚을 없애주었습니다. 군(君)께서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가난한 사람에게는 어차피 재촉해봐야 이자를 받을 수 없을 뿐더러 그들의 빚만 더 늘리게 할 뿐입니다. 그들은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줄곧 군(君)을 원망하다가 결국은 다른 나라로 도망칠 것입니다. 반대로 어차피 받아내지 못할 돈이라면 그 증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대나무 조각에 불과합니다. 그럴 바에는 빚을 없애줌으로써 그들의 근심을 덜어주어 군(君)에게 큰 은덕을 입었다고 여기게 하는 것이 낫질 않겠습니까? 설읍(薛邑)은 군의 선조께서 대대로 관리해온 고을입니다. 그들은 곧 군의 백성입니다.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영주의 임무입니다. 이제 군(君)께서는 금전적으로 손해를 입었지만, 백성을 널리 사랑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군(君)의 의로운 명성은 더욱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군을 위해 거두어온 덕(德)입니다. 이래도 군께서는 저를 꾸짖으시겠습니까?"
이때의 맹상군의 반응을 사기(史記)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맹상군(孟嘗君), 손뼉을 치며 풍환(馮驩)에게 감사하다.' 짧지만 맹상군의 머리를 스쳤을 그 무엇인가의 깨달음을 명확히 전달해주고 있다.
▶️ 食(밥 식/먹을 식, 먹이 사, 사람 이름 이)은 ❶회의문자로 饣(식)은 동자(同字)이다. 사람(人)이 살아가기 위해 좋아하며(良) 즐겨먹는 음식물로 밥을 뜻한다. 사람에게 먹이는 것, 먹을 것, 먹게 하다는 飼(사)였는데 그 뜻에도 食(식)을 썼다. 부수로서는 그 글자가 음식물 먹는데 관계가 있음을 나타낸다. ❷상형문자로 食자는 '밥'이나 '음식', '먹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食자는 음식을 담는 식기를 그린 것이다. 갑골문에 나온 食자를 보면 음식을 담는 식기와 뚜껑이 함께 그려져 있었다. 食자는 이렇게 음식을 담는 그릇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밥'이나 '음식', '먹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食자가 부수로 쓰일 때도 대부분이 '음식'이나 먹는 동작과 관련된 뜻을 전달하게 된다. 참고로 食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모양이 바뀌어 飠자나 饣자로 표기된다. 그래서 食(식)은 ①밥 ②음식 ③제사 ④벌이 ⑤생활 ⑥생계 ⑦먹다 ⑧먹이다 ⑨현혹케하다 ⑩지우다 그리고 ⓐ먹이, 밥(사) ⓑ기르다(사) ⓒ먹이다(사) ⓓ양육하다(사) ⓔ사람의 이름(이)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음식을 청해 먹은 값으로 치르는 돈을 식대(食代), 부엌에서 쓰는 칼을 식도(食刀), 여러 가지 음식을 먹는 일을 식사(食事), 한 집안에서 같이 살면서 끼니를 함께 먹는 사람을 식구(食口), 음식점이나 식당에서 먹을 음식과 바꾸는 표를 식권(食券), 밥을 먹기 전을 식전(食前), 식사를 마친 뒤를 식후(食後), 음식을 담아 먹는 그릇을 식기(食器), 음식만을 먹는 방 또는 간단한 음식을 파는 집을 식당(食堂), 뜻밖에 놀라 겁을 먹음을 식겁(食怯), 음식에 대하여 싫어하고 좋아하는 성미를 식성(食性), 음식(飮食)을 만드는 재료를 식료(食料), 남의 집에 고용되어 부엌일을 맡아 하는 여자를 식모(食母), 음식(飮食)을 먹고 싶어하는 욕심을 식욕(食慾), 한번 입 밖으로 냈던 말을 다시 입속에 넣는다는 뜻으로 앞서 한 말을 번복하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을 식언(食言), 각종 식품을 파는 가게를 식품점(食品店), 음식을 먹은 뒤에 몸이 느른하고 정신이 피곤하며 자꾸 졸음이 오는 증세를 식곤증(食困症),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는 뜻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데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식이위천(食以爲天), 식량으로 옥을 먹고 계수나무로 밥을 짓는다는 뜻으로 물가가 비싸 생활이 어려움을 이르는 말을 식옥취계(食玉炊桂), 생선을 먹을 때에 한쪽만 먹고, 다른 쪽은 남겨둔다는 뜻으로 민력을 여축하는 일을 이르는 말을 식어무반(食魚無反), 근심 걱정 따위로 음식 맛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식불감미(食不甘味), 집게손가락이 움직인다는 말로 음식이나 사물에 대한 욕심 또는 야심을 품는다는 뜻을 이르는 말을 식지동(食指動), 먹을 것은 적고 할 일은 많음이라는 뜻으로 수고는 많이 하나 얻는 것이 적음을 일컫는 말을 식소사번(食少事煩), 사방 열 자의 상에 잘 차린 음식이란 뜻으로 호화롭게 많이 차린 음식을 이르는 말을 식전방장(食前方丈), 식량이 떨어져 기운이 다함을 일컫는 말을 식갈역진(食竭力盡), 음식을 잘 차려 먹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식불이미(食不二味), 맛있는 고기만 먹고 지내면서 누리는 부귀를 일컫는 말을 식육부귀(食肉富貴), 식객이 삼천 명이라는 뜻으로 함께 하는 사람이 대단히 많음을 이르는 말을 식객삼천(食客三千), 나라의 녹을 받아먹음을 일컫는 말을 식국지록(食國之祿), 나라의 녹봉을 받는 신하를 일컫는 말을 식록지신(食祿之臣), 소라도 삼킬 정도의 기개라는 뜻으로 어려서부터 기개가 뛰어남을 이르는 말을 식우지기(食牛之氣) 등에 쓰인다.
▶️ 客(객)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갓머리(宀; 집, 집 안)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各(각, 객)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各(각, 객)은 거리까지 '이르다', '붙들어 두다'의 뜻이고, 갓머리(宀)部는 각처에서 집으로 온 '사람'이라는 뜻이다. 합(合)하여 '손님'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客자는 '손님'이나 '나그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客자는 宀(집 면)자와 各(각각 각)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各자는 입구로 발이 들어오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렇게 입구로 발이 들어오는 모습을 그린 各자에 宀자가 결합한 客자는 '손님이 방문하고 있다'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손님이란 우리 집에 잠시 머물렀다 떠나는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客자에는 '손님'이라는 뜻 외에도 '나그네'나 '지나간 때', '의탁하다'라는 뜻이 파생되어 있다. 그래서 客(객)은 찾아가거나 찾아온 사람으로 '나그네'나 '손님'을 말한다. 또는 일부 명사 앞에 붙어서 ‘주장이 아닌', '쓸데없는’의 뜻을 나타내는 말과 어떤 명사 뒤에 붙어서 어떤 사람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나그네 려(旅), 손 빈(賓),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임금 주(主), 임금 제(帝), 임금 왕(王)이다. 용례로는 보통 회원과는 달리 빈객으로 우대하는 사람을 객원(客員), 손님의 자리를 객석(客席), 손님을 거처하게 하거나 응접하는 방을 객실(客室), 객지에서의 죽음을 객사(客死), 쓸데없는 객쩍은 말을 객설(客說), 나그네 길을 객로(客路), 여객 열차를 객차(客車), 타향에서 거주함을 객거(客居), 길가는 손이 음식을 사 먹거나 자는 주점을 객점(客店), 물건을 항상 사러 오는 손님을 고객(顧客), 차나 배나 비행기 등의 탈것을 타는 손님을 승객(乘客), 영화나 연극 등의 무대 공연을 구경하는 사람을 관객(觀客), 검술에 조예가 뛰어난 사람을 검객(劍客), 반갑고 귀한 손님을 가객(佳客), 몰래 사람을 찔러 죽이는 사람을 자객(刺客), 술에 취한 사람을 취객(醉客),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묵객(墨客), 의협심이 있는 남자를 협객(俠客), 손이 도리어 주인 행세를 한다는 뜻으로 주객이 전도됨을 이르는 말 또는 사물의 대소나 경중이나 전후을 뒤바꿈을 이르는 말을 객반위주(客反爲主), 손님을 맞이하여 반갑게 대접함을 일컫는 말을 객인환대(客人歡待), 객지에 있는 보배로운 보물이라는 뜻으로 편지 쓸 때에 객지에 있는 상대자를 높여 쓰는 말을 객중보체(客中寶體), 객창에 비치는 쓸쓸하게 보이는 등불이란 뜻으로 외로운 나그네의 신세를 이르는 말을 객창한등(客窓寒燈), 식객이 삼천 명이라는 뜻으로 함께 하는 사람이 대단히 많음을 이르는 말을 식객삼천(食客三千), 남에게 매여 있는 사람은 주도적인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을 당해 내지 못하는 형세를 일컫는 말을 주객지세(主客之勢), 지나가는 길손과 같이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 또는 세상은 여관과 같고 인생은 나그네와 같다는 말을 역려과객(逆旅過客), 자객과 간사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마음이 몹시 독하거나 모진 사람을 이르는 말을 자객간인(刺客奸人), 주인은 손님처럼 손님은 주인처럼 행동을 바꾸어 한다는 것으로 입장이 뒤바뀐 것을 이르는 말을 주객전도(主客顚倒), 오가는 사람 즉 자주 오가는 수많은 사람을 이르는 말을 내인거객(來人去客), 자객과 간사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마음이 몹시 독하거나 모진 사람을 이르는 말을 자객간인(刺客奸人)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