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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17일 화요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제1독서 : 묵시 3,1-6.14-22
복 음 : 루카 19,1-10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2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3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4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5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6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7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8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죄인에서 성인으로의 참 아름다운 구원의 삶
-환대와 회개, 자기인식-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참 다양한 가톨릭 교회의 참 보물인 성인성녀들입니다.
어제 우리는 중세기 독일의 가장 위대한 신비가인
분도회 수녀 성녀 대 제르투르다 기념미사를 봉헌했고,
오늘은 이어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세상적 눈으로 보면 참 파란만장한 불우한 환경 속에서 고작 24세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주님을 만나 참 구원의 삶을 살았던 성녀 엘리사벳입니다.
무려 성녀의 3배 나이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 저를 더욱 분발케 합니다.
신심이 깊었던 성녀는 어려서부터 참회와 고행 생활을 하며 많은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었으며
남편인 루트비히4세가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여 전염병으로 사망하자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가입하여
기도생활과 자선활동에 전념하던 중 스물 넷의 이른 나이에 선종했습니다.
성녀 엘리사벳은 독일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성인으로,
또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이자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습니다.
선종 다음해 성녀의 영성 지도 신부였던 콘라트는 자신이 쓴 편지에서
성녀의 영적 풍요로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이 여인만큼 관상에 깊이 젖어 들어간 이를 일찍이 본적이 없다.
수사들과 수녀들이 여러 번 목격했듯이 그녀가 기도의 은밀함에서 나올 때 그 얼굴은 광채로 빛나
그 눈에서 태양 같은 광선과 같은 빛이 쏟아져 나온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기도 중에 주님과 일치함으로 지옥 같은 현실에서도 천국을 살았던 신비가 성녀 엘리사벳이었습니다.
선종 후 성녀의 무덤에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면서 시성 절차가 빠르게 시작되다
선종 4년 후인 1235년 5월28일 성령강림대축일에 이탈리아 페루자에서
엘리사벳은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성대히 성인품에 올려졌습니다.
오늘 아름다운 본기도가 성녀의 삶을 요약합니다.
“하느님, 복된 성녀 엘리사벳에게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공경하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섬기게 하소서.”
성인성녀들을 통해 누구나 각자 삶의 자리에서
성인이 되라 불림 받고 있는 성소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성인들의 특징 중 주목되는 것이 깨어 있음과 회개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주옥같은 말씀은 그대로 우리를 향한 회개의 충고처럼 들립니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
깨어 있어라. 회개하여라. 네가 깨어나지 않으면 내가 도둑처럼 가겠다.
승리하는 사람은 흰옷을 입을 것이다.
나는 생명의 책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않을 것이고
내 아버지와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깨어 회개한 성인들에게 입혀지는 승리의 흰옷이 우리에게 입혀지는 미사시간이자
우리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적혀 있음을 확인하는 미사시간입니다.
이어 주님은 회개의 촉구와 더불어 가난한 존재의 인간 실상을 깨달아 알라 하십니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니 깨어 있다가 주님의 환대에 응답함이 우선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환대를 통해 회개와 더불어 참 자기를 깨달아 발견하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우리를 환대하시고 우리 또한 주님을 환대함으로
주님과 사랑의 일치 중에 회개와 더불어 치유가 이뤄지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오늘 복음도 어제에 이어 참 아름답습니다.
자캐오의 주님과의 만남이 참 운명적입니다.
자캐오가, 우리가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무엇보다 주님과의 만남이 일생일대 최고의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환대에 응답과 더불어 회개함으로 완전히 눈이 활짝 열린 자캐오입니다.
동족들에게 멸시받던 세관장이자 부자였던 자캐오의 진면목을 한눈에 알아 챈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차별과 혐오, 편견을 넘어 자캐오의 순수한 마음을 통찰, 직시하십니다.
참으로 자캐오의 진심을 알아 본 사람은 예수님 한 분뿐이었습니다.
회개한 성인은 있어도 부패한 성인은 없습니다.
주님의 환대에 응답해 주님을 만남으로 회개하여 성인이 된
자캐오의 주님과 만남이 참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싶은 갈망에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가 있는 눈물겨운 작은 키의 자캐오 모습과
자캐오를 올려다보는 예수님의 모습이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같이 눈에 선합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를 향한 말씀 같습니다.
주님의 사랑의 눈길은 곳곳을 향하며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습니다.
‘아, 주님께서 나를 보셨다!’, 자캐오의 놀라운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환대한 자캐오처럼 우리 역시 주님을 기쁘게 환대하는 미사시간입니다.
아니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의 환대를 고대하십니다.
묵시록의 말씀이 그대로 깨어 있던 자캐오를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그대로 미사를 통해 실현되는 구원의 사건입니다. 늘 우리의 환대를 고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자캐오 처럼 주님을 참으로 환대할 때 놀라운 회개의 기적이 발생합니다.
회개와 더불어 자캐오의 눈은 활짝 열렸고 탐욕의 무지로부터 해방되어
참 나를 찾았으니 바로 이것이 구원입니다.
자캐오의 회개에 따른 사랑 실천의 고백과 기쁨에 환호하는 주님의 말씀이 참 감동적입니다.
마침내 죄인 자캐오가 주님을 만남으로 성인이 되는 순간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만나 회개함으로 성인이 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아마 주님과 이 만남의 추억은 자캐오의 평생 삶에 마르지 않는 구원의 샘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사랑의 환대에 자발적 회개의 실천으로 응답한
자캐오에게 지체 없이 구원을 선언하십니다.
주님은 자캐오는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바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아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는 말씀 오늘 하루 마음에 담고
구원의 성인이 되어 사시기 바랍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떤 학생을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었습니다.
이 학생은 전에 제 강의를 들었는데 너무나 감명 깊었다고 말하더군요.
특히 신학교 들어가서 본 첫 시험에서 낙제 점수를 맞아
성소에 대해 고민을 했다는 말에 인상적이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진짜로 진로를 바꾸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처음 공부하는 철학과 신학이 저에게 전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학년 때부터 이렇게 공부하기 힘든데,
이 힘든 것을 자그마치 7년을 더 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했었습니다.
이렇게 힘들었던 순간을 말했을 뿐인데, 이 순간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될 수 있었나 봅니다.
성공의 순간을 듣는 것보다 고통을 이겨내는 순간을 듣는 것이
더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심리학자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겪고 싶지 않은 고통과 시련의 순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이 순간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어떤 것도 부정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어떤 시간도 쓸모없이 만들지 않으십니다.
세관장이면서 부자였던 자캐오와 예수님의 만남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사실 이 둘의 만남을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캐오의 집에 가는 것을 보고는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하고 투덜거렸습니다.
실제로 세리는 창녀와 더불어 완전히 타락한 죄인의 본보기였습니다.
이 죄인을 만나는 것도 엄청난 시간 낭비를 한 것인데,
그의 집에까지 들어간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쓸모없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캐오는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님을 알려줍니다.
세관장이라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가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세상의 모든 어리석은 죄를 안고 있는 땅 위로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재산을 하느님을 위해 내어놓습니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의 모든 재산을 내어놓은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모습을 쓸모없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재산은 그의 구원을 위해 쓰이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 걸림돌이 될 그의 재산이 오히려 영원한 생명을 얻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어떤 시간도 쓸모없지 않습니다.
특히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 주님의 뜻을 따르는 시간은
내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기에 가장 의미 있습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자캐오 이야기로,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이 인간을 찾아나서는 거대한 역사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앞 장면>(1-4절)이 자캐오가 예수님을 찾는 이야기라면,
<뒤 장면>(5-10절)은 예수님이 자캐오를 찾는 이야기입니다.
<앞 장면>에서 자캐오는 ‘키 작은 세관장이고 부자’였지만,
동포의 조롱과 멸시를 받아야 했고, 매국노의 혐오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키가 작다’는 말은 그가 외면적으로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그처럼 초라했고 ‘작은 자’였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그래서 깊은 자괴심과 열등감으로 황폐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예수님을 보려고 애쓰는 사람이었고
예수님을 보려고 앞질러 달려가 무화과나무 위에까지 올라간 사람이었습니다.
<뒤 장면>에서 자캐오는 ‘아브라함의 자손’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예수님 역시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사람의 아들’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벌어집니다.
아니, 나무 위에 걸린 죄인에게서 드러납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에서 드러납니다.
그것은 십자가 아래의 백인대장의 고백에서처럼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
참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아셨는지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이곳에서, 마치 서로 만나기로 약속한 이를 알고 부르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곳이 당신께서 자캐오를 불러내신 약속 장소였습니다.
십자 나무 위가 바로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장소요,
자캐오가 누구인지를 일깨워주는 장소였습니다. 그 장소로 부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의 이름을 알고 계시고, 그의 아픈 마음도 이미 다 헤아려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당신이 그를 약속 장소로 이끄시고 당신이 그 약속장소로 찾아오셨습니다.
마치, “내가 당신을 찾았다면, 그것은 당신께서 저를 먼저 찾으셨기 때문입니다.”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10)
그렇습니다. 나무 위에서 얼른 내려와야 합니다.
나무에 달리는 그 자리는 예수님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 사람이 하늘로 올라갈 필요가 없는 까닭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땅으로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 용서하고 구원하시러 오신 까닭입니다.
이제 용서를 입은 자캐오는 땅으로 내려와 엎드렸다가 ‘일어서서’(부활하여!) 말합니다.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18) 그리하여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19)고 선언됩니다.
오늘 우리가 그러하면, 우리 집에도 구원이 내릴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루카 19,5)
주님!
당신은 저를 훤히 아십니다.
교만과 탐욕의 나무 위에 올라 허영과 가식으로 몸을 가리고
죄 속에 웅크리고 있는 저를 훤히 아십니다.
그릇된 저의 모든 행실을 아시고, 손가락질 당하고 배척받는 아픔도 아시고
죄인인 채로 당신을 보고 싶어 하는 이 가련함도 훤히 아십니다.
바득바득 기어 올라간 교만과 허영에서
얼른 내려와 당신 발아래 엎드리게 하소서.
당신 사랑 앞에 부복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In Time(2011년 작)'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시간이 힘이고, 시간이 돈이 되는 사회의 이야기입니다.
많은 시간을 가진 사람은 시간으로 원하는 것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없는 사람은 시간을 얻기 위해서 일해야 하고, 시간이 다하면 죽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시간을 나누어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착한 사마리아사람과 같습니다.
주체할 수 없이 많은 시간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치와 향락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위선과 허영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과 같습니다.
코로나19는 시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예전과는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은 ‘뉴 노멀(New Normal)'이라고 부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 마스크 착용, 손 씻기, 재택근무, 비대면 회의가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교회도, 사회도 새로운 일상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친교와 나눔의 신앙에서 영성과 침묵의 신앙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비대면의 사회에서 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배려와 도움의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시간의 의미를 생각하였습니다.
시간은 3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모두에게 주어지는 물리적인 시간이 있습니다.
하루 24시간, 1주일은 168시간, 1달은 720시간, 1년은 8,760시간입니다.
이런 시간은 숫자에 불과합니다.
우주의 역사, 지구의 역사, 생명의 역사는 이 숫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의미의 시간입니다.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내일 보자고 하면 하루살이는 이해 못합니다.
하루살이는 내일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개구리가 메뚜기에게 내년에 보자고 하면 메뚜기는 이해 못합니다.
내년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가치의 시간입니다. 인생은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과 같다고 표현합니다.
천년도 주님 앞에는 지나간 어제와 같다고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 ‘깨어 있어라.’라고 하시는 것은
물리적인 시간, 의미의 시간을 넘어서 우리가 가치의 시간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치의 시간’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넘어 부활의 영광에로 나가는 시간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
네가 깨어나지 않으면 내가 도둑처럼 가겠다.
너는 내가 어느 때에 너에게 갈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물리적인 시간을 넘어 의미와 가치의 시간을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로 가야할지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방법을 찾았다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과정을 ‘회개’라고 말합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마음으로 오신다고 이야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온 의미를 모르고 흘러가는 시간에 몸을 맡기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주님께서 문 앞에 계셔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살아있다고 하지만 의미와 가치의 시간에서는 죽어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자캐오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자캐오는 회개하였고, 새로운 시간을 살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자캐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내 것’이라는 패러다임을
‘하느님의 것’이라는 패러다임으로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그럴 때 부유한 것보다 가난한 것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건강한 것 보다 아픈 것도 은총으로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삶의 중심에 ‘하느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고 믿는다면 우리를 가로막는 많은 벽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외롭지만 우주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지구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 나라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루카 19, 6)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삶의 신비 삶의 해답은
올라가는 것이 아닌
내려오는 회개에 있다.
내려오는 것이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이는
소통이며 존중이다.
내려오고 내려놓는 것이
기쁜 회개이다.
살아있는 오늘은
내려온 이들의 몫이다.
내려오는 기쁨이
예수님을 만나는
만남의 기쁨이다.
이 만남으로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뜨겁게 깨닫는다.
사랑은 만나기 위해
내려오는 것이다.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을
만나는 기쁨이 바로 오늘이다.
오늘이
사랑이며 회개이다.
예수님의 참된 사랑이
두려움과 열등감
교만을 치유한다.
욕심을 낮추면
오늘은
빛나는 잔치이며 사랑이 된다.
내려오는 것이 나누는 것이며
서로를 살리는 오늘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오늘이다.
오늘과 하느님 사랑은
구분될 수 없다.
부여잡고 있던 그것마저
내려놓고 내려오는 기쁨이
바로 회개이며 오늘의 복음이다.
복음은 살아있는 회개이며
깨어나는 오늘의 기쁨이다.
내려오기에 아름답고
내려놓기에 기쁘다.
세상이 만만해 보여야 믿음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세관장 자캐오의 회개’입니다. 자캐오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다고 나옵니다.
이는 그에게는 세상이 거인이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부자였기 때문에 돈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그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 머무시고 그가 예수님을 받아들이자
그렇게 크게 보이던 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왜 느닷없이 아브라함이 나올까요? 아브라함은 믿음의 성조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성조가 된 것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하란을 떠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란을 떠난다는 것과 모리야 산에서 자기 아들 이사악을 바친다는 것과는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믿음은 세상의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줍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들어오면 세상 것들은 힘을 잃기 때문입니다.
크리스틴은 서른 살에 이혼한 여성입니다.
미국에서는 더 살아갈 힘이 없어서 남아메리카로 이주를 했습니다.
살아갈 길이 막막하여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인근 시골 카페에서 일하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게 멋져 보였습니다.
그런데 카페 사장이 크리스틴의 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기 시작하면서
사정은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성희롱이 시작된 것입니다.
어떤 때는 “당신은 가슴 때문에 팁을 많이 받는 거예요”라고 말하기도 하였고,
이와 같은 성희롱은 날이 갈수록 짙어지고 횟수도 늘어났습니다.
그 사장은 두 딸아이를 둔 유부남이었습니다.
모멸감을 느꼈지만, 크리스틴은 외국인인 데다 살길도 막막하여 사장에게 저항할 수 없었습니다.
크리스틴은 그나마 소속감을 느끼는 그 카페에서 버려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사장이 하는 성희롱 발언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습니다.
그러면 사정이 좋아질 줄 알았지만, 날이 갈수록 참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그 남자는 크리스틴을 부를 때 아예 이름 대신 속된 단어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여자도 있고 남자도 있는 친한 친구들 모임에 사장은
크리스틴을 초대하였고 수치스러운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내가 너무 작아지고 상처받은 느낌이라서 이 일을 계속할 수 없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뒤로도 그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너무 창피스러워 이런 일을 친구들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거인의 손에 잡혀 있는 아기 공주였던 것입니다.
그런 그녀도 친구의 소개로 에이미 커디의 TED 강연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두 손을 허리춤에 대고 어깨와 가슴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런 원더우먼의 자세로 2분 넘게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을을 향해 걸어가는데, 어쩐지 자신이 점점 커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강한 자신이 느껴졌습니다.
카페에 도착했을 때 자신이 강력한 존재라는 느낌에 사로잡혔습니다.
자신을 지금까지 그렇게 크게 느낀 적은 없었습니다.
사장에게 빼앗겼던 자신의 모든 힘을 되찾은 느낌이었습니다.
크리스틴은 사장에게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유를 묻는 사장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도 당신이 지금까지 한 짓이 잘못된 거라는 걸 잘 알잖아요.
당신도 사랑하는 딸이 둘이나 있으니,
당신이 내게 한 짓을 다른 사람이 당신 딸에게 하는 걸 원치 않겠죠?”
그리고 이런 일 때문에 그가 운영하는 카페를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아
앞으로는 더 나은 인간이 되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작아지며 말했습니다.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미안합니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크리스틴은 자신이 강해졌음을 넘어서서 자비로워지기까지 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에게 동정심을 느끼며 자신 안에 어떤 신성한 존재가 있는 것도 느껴졌습니다.
20여 분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그녀는 자비롭고 단호한 마음으로 카페를 떠났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에이미 커디를 만나 울면서 이런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출처: 『자존감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에이미 커디, 알에이치케이]
내가 세상을 이길 때 내 안에 신성한 존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 힘만으로는 세상을 그렇게 만만하게 대할 수는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돈만 알던 자캐오는 세상의 난쟁이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남을 속여먹은 것이 있다면 4배로 갚아주겠다는 말을 할 때,
그는 거인처럼 커졌고 자신 안에 머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보고 하란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큰 두려움입니다.
우리의 하란은 이 세상입니다. 돈과 명예와 쾌락과 애정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거인이 되어 우리에게 두려움의 오랏줄로 옭아매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의 그리스도께서는 이것들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이것들을 떠날 수 있을 때 진정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심을 확신하게 됩니다.
세상 것이 작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그것’(It)은 어린이들의 죄책감으로
두려움을 일으켜 그들을 지배하는 광대 귀신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아이들이 더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여길 때
그 괴물의 크기는 점점 작아지고 나중에는 손바닥만 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 믿음이 들어올 때 우리를 옭아매고 있던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렇게 느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시는 말씀도 듣게 됩니다.
믿음이 없으면 세상이 나의 거인이 되고, 믿음이 있으면 내가 세상에서 거인이 됩니다.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 하느님의 정원
이 알로이시아 수녀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복음의 시작에 나오는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제 머릿속에는 벌써 틀이 생겼습니다.
'아... 세리구나.... 사람들에게 미움 받던 세리...'
이 시각으로 자캐오를 바라보니
저도 모르게 앞에서 예수님을 보려고 애쓰는 자캐오를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어떤 모습을 보셨을까?' 라는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거리를 지나가시던 길에 그냥 앞만 보고 지나가지 않으시고
이리저리 두루 살펴보시며 길을 걷다가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쓰는 자캐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는 키가 작았기 때문에 애를 써도 예수님의 완전한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캐오는 그런 자신의 상황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른 이들을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외적인 신분을 보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그의 갈망,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자캐오라는 한 인물을 가지고 바라보는 예수님과 나의 다른 시선...
'차별'이라는 틀이 선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다가가려는 사람에게 방해의 틀이 되고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는 것을 바라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오늘 하루도 예수님께 겸손되이 청해봐야겠습니다.
"예수님, 저의 마음이 당신 마음과 같게 하시고, 저의 시선이 당신의 시선과 같게 하소서."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