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휴대전화 칩 제조회사 퀄컴은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계속 비디오를 보여준다. 회장 훈시 말씀이 담겨 있는 비디오가 아니다. 과거 퀄컴이 어떤 시도를 했고, 어떤 실패를 겪었는지 나열한 비디오다. 퀄컴의 사무실 벽에는 퀄컴이 했던 무수한 실험들에 대한 설명이 새겨져 있다.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시도들은 이렇게 기억되고 기념된다. 그리고 리더들도 퀄컴이 겪었던 최악의 실패 사례들을 계속 되풀이해서 말한다. 퀄컴이 이렇게 실패를 끈질기게 말하는 것은 앞으론 이러지 말자는 경고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러한 실패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퀄컴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더 많은 실험을 장려하기 위해서다. 퀄컴은 혁신이 있기 위해선 수많은 시도들이 있어야 함을 잘 아는 조직이다.
창의성은 블랙박스와 같다. 어떤 공식이나 매뉴얼이 없다. `국영수` 공부 방법은 이야기할 수 있지만 `예체능`을 잘하는 길은 설명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창의성은 노력의 투입에 비례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천부적 재능이나 행운이 창의성의 원천으로 곧잘 거론되곤 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혁신의 성공담에서 창의성의 원천을 찾지만 실패했다. 여기에 대해 실리콘밸리 기업들의 혁신 사례를 연구한 윌리엄 바넷 스탠퍼드대 교수는 매일경제 MBA팀과의 인터뷰에서 "창의성을 키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최대한 많은 시도를 해서 거기서 반짝이는 천재성을 찾는 것뿐이다"고 말했다.
바넷 교수는 한국경영학회와 SM엔터테인먼트 초청으로 지난달 방한했다. 끊임없이 반짝이는 콘텐츠를 생산해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는 SM엔터테인먼트에 창의성을 불어넣을 경영진단을 하기 위해서다. 그는 SM엔터테인먼트가 더 창조적인 회사가 되려면 "많은 창작물을 시장에 내놓고 바로 반응을 살펴라. 많은 시도를 내도록 조직의 문화와 구조, 직원들의 일상을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스티브 잡스는 "한 번의 홈런이 두 번의 2루타보다 낫다"고 했지만 2루타라도 계속 치려고 방망이를 휘둘러야 홈런도 있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대형기획사는 연습생들을 최대한 많이 훈련시키고 시장 상황을 예측해 데뷔를 시켜 실패 가능성을 줄이려 했다. 그러나 성공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나올 수 있으니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다양한 시도를 해야 히트작을 낼 수 있다는 것이 바넷 교수의 설명이다. 다음은 바넷 교수와의 일문일답.
-모든 부가가치의 원천으로 혁신과 창의성이 요구되고 있다. 그런데 혁신을 위해선 어떤 공식도 없기에 사람들은 답답해한다. 창의성을 키우기 위한 방식은 어떤 게 있나.
▶창의성과 바보스러움(foolishness)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바보스러운 실패가 많이 반복될수록 창의성이 등장할 가능성이 커진다. 바보스러움은 천재성이 치러야 할 대가다. 창의성은 계획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다. 그저 발견될 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처음 보기엔 바보 같고 말이 안되는 시도를 계속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창의성을 평가하는 기준은 평균 아웃풋(output)이 아니라 각각 다른 시도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가 되어야 한다. 평균(mean)이 아니라 분산(variance)이 창의성을 측정하는 지표다. 기존 사례를 거론하며 혁신을 위해선 이러이러한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는 결론은 쓸모가 없다. 난 그게 모두 소급적 합리화(retrospective rationalismㆍ사후 결과를 보고 끼워맞추기 식으로 원인을 설명하는 것)라고 생각한다.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가 그런 예다. 1990년대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선 잡스를 혁신을 가로막는 형편없는 리더의 대표적인 예로 가르쳤다. 괴팍한 성품에다 성과도 좋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애플이 잡스의 리더십하에 아이폰이란 창의적인 상품이 내놓자 잡스는 혁신을 이끈 리더의 대명사가 됐다.
-반짝이는 혁신과 바보스러움의 차이가 크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 누가 어떻게 그 둘을 분간하나. 이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선 어떻게 히트작을 만들어낼 건지에 관한 문제기도 하다.
▶시장의 반응을 들여다봐라. 조직 내부에서 직원들이 앞으로 이게 히트를 칠 건지 아닌지 분석하고 예측하는 데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다. 많은 시장조사를 통해 트렌드를 예측할 필요도 없다. 그냥 여러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해 많은 아티스트를 시장에 내놓으면 된다.
-문제는 시장의 반응을 보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점이다. 그때까지 투입해야 하는 비용도 많다.
▶소셜미디어의 발달로 시장의 반응이 어떤지 체크하는 데 과거보다 훨씬 시간과 비용이 적게 든다.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선 프로젝트팀 하나를 만들고 나서 즉각적으로 SNS를 통해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 시장의 반응이 뜨겁고 전염성이 강하다면 키워서 블록버스터로 만들면 된다. 미지근하다면 콘셉트를 수정하거나 아니면 아예 다른 시도를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장의 즉각적인 반응에 따라 콘텐츠의 성패를 판단해야 하나. 심지어 소비자조차도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를 수 있다.
▶좋은 지적이다. 크리에이티브한 콘텐츠는 지금 당장은 외면받을 수 있다. 소비자들이 거기에 익숙하지 않고 소위 말하는 `뜨는 타이밍`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1세대였던 냅스터다. 냅스터는 시장에서 별 인기를 누리지 못하고 법적 소송에만 휘말렸다. 스티브 잡스는 "사람들은 모두 음악을 소유하고 싶어한다. 냅스터처럼 음악을 렌트(스트리밍으로 잠시 듣는 것)하는 서비스는 구식이다"라고 폄하했다. 그의 말대로 음악파일을 다운로드받아 소유하는 아이튠스가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스포티파이(Spotify)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에 소비자들은 열광한다. 결국 당장 시장의 반응이 뜨겁지 않더라도 창작물을 바로 폐기할 필요는 없다. 그 시도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사람들이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출시해 볼 만하다.
-최대한 많은 실험을 하는 것이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소모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 아직 어린 걸그룹, 보이그룹이 먹히는 아이템인지 시험받고 사라지는 게 아닌가.
▶데뷔 후 시장에서 외면받는다고 해서 걸그룹의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특정 시점에서 시장가치가 없다고 해도 아티스트로서 그들의 재능은 남는다. 연습생들은 일단 소속사가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했다. 그들은 잘 훈련된 아티스트 후보군들이다. 그들은 이 음악도 실험해볼 수 있고 저 음악도 시도해볼 수 있다. 음악은 비록 대중들의 외면을 받을지는 몰라도 음악가는 남는다.
-한류 열풍이 불면서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성공작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키우는 콘텐츠가 비슷비슷한 아이돌 그룹이라는 점에선 한계라고 지적받고 있다.
▶비슷비슷한 콘셉트라는 게 크게 문제되나. 원래 음악이란, 예술이란 시류를 타기 때문에 특정 시점에선 비슷해 보일 수 있다. 1960년대는 비틀스가 대세였고 1976년엔 누구나 엘턴 존을 따라했다.1980년대는 모두가 마이클 잭슨이나 마돈나를 모방했다. 카피는 크리에이티브의 반대말이 아니다. 누구나 카피에서 시작해 창의적인 결과물을 낼 수 있다. 지금까지 보던 것과 전혀 다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음악을 만드는 것은 어렵다. 카피를 하되 자기 나름의 변용을 시도하는 것이 창의적인 예술작품을 내는 길이다. 뉴턴은 `내가 하는 일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학문뿐만 아니라 예술에도 적용된다. 이미 갖춰놓은 거대한 지식 위에서 자기만의 플러스 알파를 더하는 것이 창의성의 지름길이다.
-당신의 책 `붉은 여왕 경쟁(Red Queen Competition)`은 끝없는 경쟁에 직면해야 하는 기업의 운명을 다룬다. 시장에선 블루오션이란 존재하지 않고 혁신으로 조금 앞서가더라도 다른 기업들에 금방 따라잡힌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치열한 경쟁을 하는 기업이 한가롭게 `바보스러운 실험`을 시도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작은 스타트업보다 덩치가 큰 대기업이 혁신을 시도하기는 당연히 어렵다. 삼성이 스타트업처럼 시장에 이 제품도 내봤다가 아니다 싶으면 다른 제품도 내는 식의 시도를 계속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은 새로운 사업을 찾고 새로운 제품을 만들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나는 10년 후 삼성의 대표작이 갤럭시가 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갤럭시는 10년 후엔 없어질 것이다. 그럼 뭐가 삼성을 먹여살릴까. 그 답은 나도 모르고 삼성도 모른다. 해답은 삼성이 파괴적 혁신으로 스스로 찾아야 한다. 삼성이 할 일은 혁신을 만들 수 있는 문화와 시스템을 회사 안에 구축하는 일이다. 당장 더 잘 팔릴 만한 갤럭시폰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다.
-많은 실험은 필연적으로 실패를 예고한다. 그런데 그로 인해 얻는 사회적 낙인과 상처를 생각하면 기꺼이 실패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국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든 실패를 달가워하는 곳은 없다. 유일하게 실패를 그나마 인정하는 곳이 미국 실리콘밸리 지역이 아닌가 한다. 같은 나라 안에서도 미국 동부와 캘리포니아 지역의 위험기피 성향이 큰 차이가 나는 이유는 있다. 그건 바로 캘리포니아주에는 비경쟁조항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주는 기업이 영업비밀을 이유로 재직자의 이직을 막는 것이 쉽지 않다. 덕분에 이직이 자유롭고 평생직장의 개념도 희박하다. 이게 리스크를 무릅쓰고 실패를 수용하게 한다. 한 직장에 가족의 밥줄을 모두 걸고 있다면 실패할지도 모르는 프로젝트에 매달리고 싶지 않을 것이다.
-기껏 공을 들여 히트작을 내놓았는데 다른 회사로 가버리면 난감하지 않겠나.
▶한국에서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발달한 이유는 소속사가 거의 모든 리스크를 지고 있기 때문이다. 리스크를 감수하고 투자를 한 소속사들이 가수들의 자유로운 이동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SM엔터테인먼트가 혁신적이고 창조적이기만 하면 연습생들은 기꺼이 회사에 머물 것이다. 게다가 아티스트들의 자유로운 이동은 더욱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게 한다. 소속사들은 가수를 뺏길 수도 있지만 데리고 올 수도 있다. 지금까지 들였던 비용과 앞으로의 수익을 제대로 계산해서 가수들에게 청구하기만 하면 굳이 이직을 혐오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 정부의 개입 = 창의성 말살
예산배분 무기로 과학자·예술가에 `지시` 하려 들면 안돼 `클린` 국가로 유명한 싱가포르. 단정하고 엄격하기만 한 이 도시국가에도 한때 거리의 악사들은 많이 있었다. 이들은 자유로운 옷을 입고 자유로운 노래를 불러 생계를 유지하곤 했다. 정돈된 도시 미관을 해친다고 못마땅하게 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고 싶은 노래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들이 사라졌다. 엄격한 법집행으로 유명한 싱가포르 정부가 이들의 활동을 금지해서였을까? 오히려 그 반대다. 싱가포르 정부는 거리의 악사들을 통해 도시의 예술성을 고양하고 창의적인 싱가포르의 이미지를 전파시키고 싶어했다. 그리고 이들에게 예술 자금을 지원했다. 그러면서 복장을 규제하고 그들에게 정해진 노래를 부르게 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던 거리의 악사들은 그 지침을 따르느니 그냥 음악을 포기하겠다고 생각하고 거리에서 사라졌다.
윌리엄 바넷 스탠퍼드대 교수는 싱가포르의 일화를 들어 "창의성을 말살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은 정부가 예산을 미끼로 지침과 규율을 정하고 결과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창의력을 낳게 하는 다채로운 시도가 정부가 개입하는 순간 `바보스러움`으로 규정되고 퇴출되기 때문이다.
바넷 교수는 창의성 발현을 위해선 정부 개입이 최소한에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예산의 효율적 배분을 내세우며 예산을 나누는 우선순위를 정하고 이를 감독하려고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정부의 관료들은 창의성과 혁신을 발견할 심미안이 없다. 특히 예산을 무기로 과학자, 기업가, 예술가들에게 직접 지시하려고 하는 것은 창의성에 독이 된다.
바넷 교수는 "정부 지원이 성공적이라고 일컫는 미국의 자연과학 연구개발 투자만 봐도 정부는 돈을 줄 뿐이고 그 돈을 어떻게 배분하는지는 과학자들이 결정한다"며 "전문 지식이 없는 정부가 정치적 어젠더에 휘둘려 과학계의 요구를 무시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바넷 교수는 정부가 창의성을 위해 해야 할 일은 실패를 포용하는 문화를 키우는 것이라 강조했다. 그는 "창조경제를 위해 한국 정부가 노력하고 있다면 실패와 실험이 혁신을 위한 귀중한 자산이란 인식을 퍼트리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며 "예산 배분 권한을 무기로 창의성의 방향을 잡는 것보다 창의성이 존경받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한국도 실패와 리스크에 대한 두려움이 큰 국가다. 비슷한 정서를 가진 일본의 대기업들이 변화를 거부해 정체에 빠진 것을 반면교사 삼아 한국은 실패를 적극적으로 시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who he is…
윌리엄 바넷 교수는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리더십과 전략, 조직관리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그는 기업 간 경쟁과 산업이 어떻게 진화하는지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다. 현대자동차그룹을 비롯해 세계 유수의 기업경영 자문을 맡았다. 특히 기업들이 무한 경쟁을 통해 경험을 쌓고 발전하면서 더욱 첨예한 경쟁을 촉진한다는 `붉은 여왕 경쟁(Red Queen Competition)` 이론을 통해 이름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