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주 하느님,
주님의 권능으로 저희가 마음을 가다듬어
성자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자격을 갖추고
성자께서 베푸시는 천상 잔치에 들게 하소서.
제1독서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잔치를 베푸시고 그들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신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25,6-10ㄱ
그날 6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7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8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정녕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9 그날에 이렇게들 말하리라.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10 주님의 손이 이 산 위에 머무르신다.”
복음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고 빵을 많게 하셨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29-37
그때에 29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로 가셨다.
그리고 산에 오르시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30 그러자 많은 군중이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31 그리하여 말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32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33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4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시자,
그들이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36 그리고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3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하느님은 왜 자비로우실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전능하신 능력자 하느님으로 등장하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병자를 치유하시고 빵 일곱 개로 수많은 군중을 먹이십니다. 여기에 함께 등장하는 예수님의 특성은 자비입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우리는 여기서 능력과 자비가 무슨 관계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전능하심을 믿는다면 더는 하느님의 자비를 의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비롭지 못한 이유는 능력이 없어서이기 때문입니다.
SBS TV 동물농장, 애니멀봐에서 같은 날 태어난 풍산개 남매가 서로 밥 먹을 때만 싸우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평소에는 매우 친하지만, 밥만 나오면 유독 오빠 개는 자기 먹을 것은 먹지도 않으면서 동생 개가 밥을 먹지 못하고 뭅니다.
전문가들은 이것이 서열정리라고 합니다. 주인이 주는 음식을 통해 오빠는 동생의 서열을 확실히 정해주려는 것이었습니다. 본인이 밥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주인은 오빠 때문에 밥을 못 먹는 동생 개에게 몰래 밥을 줍니다. 자비롭습니다. 그러나 밥을 같이 얻어먹어야 하는 개들 사이에서는 자비로울 수 없습니다.
전문가들은 먼저 오빠 개에게서 뼈들을 빼앗아 없앱니다. 그리고 동생을 괴롭힐 때마다 자극적인 소리로 주의를 줍니다. 서열 1위는 인간임을 알려주고 본인들은 같은 수준임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언제라도 주인이 밥을 줄 테니 빼앗아먹을 필요가 없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더는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KBS 생생정보통(2013.11.14)에서 유튜브에 보면 퀵보드를 타는 곰이 나옵니다. 아기곰은 무리에서 따돌림을 당합니다. 아기곰은 곰보다는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네 발로 걷기보다는 두 발로 걷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사육사는 그에게 퀵보드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제작진은 곰돌이 새콤이와 인간 여자 꼬마 아이와 퀵보드 시합을 시켰습니다. 당연히 하루 종일 퀵보드를 타는 새콤이가 이겼습니다. 그러자 꼬마 여자아이는 웁니다.
‘동물에게 지다니.’
아이에겐 곰돌이가 경쟁상대입니다. 그래서 곰돌이에게 자비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곰돌이를 이길 수 있는 어른이 탔다면 어땠을까요? 곰돌이에게 지더라도 웃어넘길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곰돌이보다 능력이 더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토바이도 탈 수 있고 자동차도 몰 수 있습니다. 그러니 곰돌이에게 퀵보드 시합에 진다고 해서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
영화 ‘300’에 보면 페르시아 장군이 항상 “나는 관대하다!”라고 말합니다. 관대하기 위해서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약한 사람은 관대할 수 없습니다. 상대를 이겨서 나의 능력을 업그레이드할 생각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비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능력이 있다면 자비로울 수밖에 없음도 알게 됩니다. 자신은 관대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자신이 능력자라고 말하는 이유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당신은 자비롭다는 사실을 밝혀주십니다. 그렇다면 동시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정도로 능력이 있지 않으실까요? 그래서 신이 있다면 가장 자비로운 신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은 십자가에 매달려 있습니다.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자비로우실 수 있다면 동시에 전능하실 수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능력이 있는 자는 자비롭고, 자비로운 자는 능력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는 자비를 잃었습니다. 서로 상대의 탓을 하였습니다. 이는 스스로 자기 죄를 씻을 능력이 없음을 말해줍니다. 능력이 없는 자는 상대를 이용하여 그 부족한 능력을 채우려 합니다. 그래서 자비로울 수 없습니다. 능력과 자비는 동의어입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종합병원에 자기 분야에서 최고라고 불릴 정도로 훌륭한 의사 선생님 3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 명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서 얼굴도 보지 않고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이 세 명의 의사가 협력해서 수술해야 하는 중환자가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평상시의 안 좋은 관계가 이어져서 수술 중에 대화도 나누지 않고 얼굴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이 중환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무리 훌륭한 의사라도 불일치와 불화로 좋은 결과를 낼 수 없을 것입니다.
이탈리아 공산당 창설자인 그람시는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지난 20세기 동안 큰 노력을 해 왔지만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우리 공산주의자들 역시 그 일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그는 교회 내부에 분열을 일으키면 교회가 무너지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신앙인들 탓에 실패하고 만 것입니다.
지금도 일치하지 못하고 분열을 가져오려는 악의 세력은 분명히 있습니다. 이 세력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요? 하느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되는 것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하나이신 것처럼 우리 역시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생각을 똑같이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상대방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것을 틀렸다고 단정 짓지 말고, 나를 지지해 주지 않는다고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 어떤 모습도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 됨의 유일한 방법일 것입니다. 그래서 장점을 바라볼 때는 돋보기를 보듯이 크게 보고, 단점을 바라볼 때는 망원경을 거꾸로 보듯이 작게 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야 호숫가에 가셨을 때, 많은 군중이 모여왔습니다. 이 군중의 수는 남자만도 사천 명으로 나옵니다(마태 15,38). 그렇게 많은 사람이 며칠 동안 있었을까요? 자그마치 사흘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외딴 산에 사람들이 이렇게 모일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예수님 때문이지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또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들은 그곳에 모일 수 있었습니다. 이때 그들은 하나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서로 다른 의견이 없었을까요? 또 불평불만은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자기 뜻과 다른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만 있으면 되었으니까요.
일치하는 방법은 바로 예수님만 바라보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뜻을 따르면 그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가운데에서만 늘 다툼이 있고 분열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한 가지, 이런 일치 안에서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는 빵의 기적처럼 놀라운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에는 한 가지 법칙밖에 없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스탕달).
사진설명: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고 빵을 많게 하셨다.